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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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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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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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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외로움과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고독과 마주한다는 것은,

한 편 바깥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와 관심을 다 놓아버리고
혼자서 걷는다는 말도 되지만,

또 한 편 그 내적인 의미는
내적인 고독, 내적인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 고정관념, 편견, 판단을 비롯한
수없이 많은 것들이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혼자서 가만히 있는다고
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예요.
다 혼자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머릿 속에서 온갖 생각과 기억들이 춤을 춘다면
그 사람은 결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과거로부터 온 생각과 기억 판단들과
함께 있는 것이지요.

혼자 있는다는 것은,
내면적으로 완전히 침묵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적으로 침묵한다는 말은
과거로부터 배워왔거나 익혀왔거나 들어왔던
수많은 기억, 판단, 편견, 이미지, 사상, 고정관념, 생각들을
온전히 비워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생각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들입니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복잡한 것들에
얽매여 있다면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말 없는 것이 침묵이 아니예요.
내적인 침묵이 참된 침묵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 내지 말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 이데올로기도 따르지 말고,
누군가에게 혹은 어디에선가 배워온 것을 쫒지 말고,
지금 이 순간
고요 속의 즉각적인 통찰만을 따르면 됩니다.
온전히 내가 되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만들어진 나, 교육되어진 나, 훈습되어진 나일 뿐
지금 이대로의 텅 빈 나가 되지 못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까지 가져오지 마세요.
그랬을 때 우리는 온전히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배운 것, 익혀온 것을 바탕으로
지금을 판단하지 말고
아무런 판단이나 기억도 일으키지 말고
오직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완전한 내적 침묵 속을
거닐음도 없이 거닐고 있음입니다.
그것만이
내 안의 온갖 기억들을 비워낼 수 있는 길입니다.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지 말고,
깨달음을 찾아 나서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이미 또다른 색안경이며 기억, 앎을 만드는 것일 뿐이고,
또다시 '교육되어진 나'를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내 안에는 너무 많은 생각, 사상, 기억, 앎들이 있어요.
그로인해 우리는 침묵하지 못합니다.
그로인해 속 뜰의 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어요.

참나를 찾기 위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스승을 찾아 나서고,
또다른 성전을 찾아 나선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또다른 사상을 배우고자 하는 것일 뿐이고,
내 안에 또다른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합니다.

불교는 쌓는 공부가 아니라 비우는 공부입니다.
다만 방편으로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가르칠 뿐이예요.
그동안 제가 한 말이
'비우기 위해 쌓는 것'을 말했다면
지금 제가 하는 말은
'비움'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온전한 비움을 위해
내적인 완전한 침묵을 위해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없이,
아무런 판단도 없이,
과거를 떠올리거나 미래를 계획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마음 모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무런 판단 분별 없이
'알아차림'만이 있을 수 있다면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나도 없고 알아차려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관하는 나가 없는 이유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산물이기 때문이고,
그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진 판단 분별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관할 때 '관하는 나'도 없고, '관하여지는 대상'도 없습니다.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생각이며 느낌을 있는 그대로 관하되,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말고,
다만 관하면서 그것과 하나되어 흐르기만 하세요.

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궁극의 수행이며,
수행 아닌 수행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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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노포동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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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진정한 수행자는
마음 하나 가지고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얻을 수 있습니다.

일체를 놓고 있기에
일체가 마음 일으킨 그 순간
이미 내 것으로 화하여 줍니다.
일체가 내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진정 모든 것을 버린 자만이
도리어 세상을 움켜 쥘 수 있습니다.

은사스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는 마음 한 번 일으켜 법계를 움직이느니라."
"법계는 그 수행자를 위해 움직이니 법계의 주인이 되거라."

은사스님은 지금 인도와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약 10 여 곳에 큰 불사를 진행중이십니다.
참으로 밝으신 불사를 하십니다.

인도의 부처님 4대성지에 한국 사찰을 짓고 계시며
신라, 백제, 고구려, 가야의 처음 불교가 전래된 곳에
가람을 다시금 일으키고 계십니다.

그곳에서부터 불교의 씨앗을 뿌리면
이제 그 열매로 불법은 전 세계로 회향될 것이라
굳게 믿고 계십니다.
그 또한 스님의 은사스님께서 부촉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걱정부터 앞섭니다.
저 또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려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 하나 얼마나 큰 원력이 필요한 불사인지 모릅니다.

우리 상좌스님들은
정주영 회장도 하지 못할 일이라고
하나같이 회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꿈같은 그 불사는
여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법하게 마음만 내면
돈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절로 절로 저절로 되어지게 되어 있다고
스승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법당에 왔을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려 해도 찻잔이 없었고
화장실, 부엌, 보일러 설치도 안 되 있었습니다.
춥고 작은 법당 한 켠에 머물면서
마음 내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게 그 날부터
마음 일으킨대로 하나 둘씩 어딘가에서
필요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기밥솥을 생각하면 누군가가 전기밥솥을 가져다 주셨고
추워 따뜻한 온열기가 필요하면
마음 일으킨데로 온열기가 생기곤 했습니다.

그러길 한 두 달...
이제 없는 것이 없을 만큼 구족한 법당이 되었습니다.
부엌과 화장실, 보일러 공사도 한 달만에
원만하게 회향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마음 일으킨데로
법계 어디에선가 나도 모르는 인연이 생기게 되고
인연따라 원하는 것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능숙한 화가와도 같다고 하신
부처님의 거룩하신 말씀이 현실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곤 두어달 뒤
법당에 예산이 바닥이 났습니다.
주위에선 그렇게 위문을 많이 하고
남들 많이 퍼주면 법당 재정 금방 바닥난다고
진작부터 걱정하던 터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작은 장병들의 도량이라
신도님도 별로 없고
들어올 수입이란 신도회비 45.000원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럴때마다 살짝 웃으며
오히려 베풀수록 더 많이 생길 것이며...
수행자는 수행과 기도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걱정할 일이 없음을 일일이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반신반의 하였지만,
이미 한마음 일으킴에 얼마나 큰 법계의 힘이
움직이는 것인지에 대한
명명백백한 믿음이 있던 터였기에
마음은 언제나 젊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회향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 즈음에 저도 모르는 한 포교사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회사가 잘 안되어 창업을 하시려는 중에
베풀지 않았기에 회사가 잘 안 된다 생각하시고는 복 짓는 마음으로
원만히 베풀 수 있는 인연을 찾고자 3일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 포교사님 기도 회향날 저의 기도 회향과 인연이 닿게 된 것입니다.
포교사님과 저의 기도가 법계를 울리고
서로의 한마음을 움직여
이렇게 좋은 인연을 가져다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도 포교사님은 늘상 위문품을 보내주시고
함께 100일기도를 어느정도 회향하던
지난 부처님 오신날 드디어 포교사님의 원력이 녹아든
새로운 벤쳐기업 명함을 받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내 명함인 듯
그렇게 가슴 뿌듯할 수 없었습니다.

저 또한 포교사님 회향 공덕의 하나로
사이버포교에 세운 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마음속에 늘상 품고있던 노트북을 선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처럼...
그렇게 그렇게 되어지고 있었습니다.
절로 절로 저절로 부처님 일은 되어짐을 알았습니다.

법당에 위문품으로 쓰던 초코파이가 떨어져
고민할 성 싶으면 영락없이 어디선가 위문품이 들어오곤 했습니다.
늘상 마음속에서 일으킨 한마음의 결과는
그렇게 그렇게 도량을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번은 법당 창건주이신 거사님께서
병으로 심하게 앓고 계시느라
불과 다섯 발자국도 걷지 못하셨었는데
부처님 오신날 꼭 법당에 오시고 싶으시다는
한마음을 내시고 염주를 붙잡고는 그렇게 기도를 하셨답니다.

법당에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모두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오신날
그렇게 건강하고 밝으신 모습으로
법당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렇듯 세상 모든 일은
오직 이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본래 원만구족되어 있는 법계이기에
올바로 일으킨 한마음은
충분히 법계를 울릴 수 있습니다.

원만구족한 법계의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쓰는 방법만
올바로 안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려는 아상(我相)
나만 잘 되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임을 모를 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내 안에서 일으킨 청정한 한마음은
세계를 울리고 법계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청정한 한마음이란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과 이기심이 없어진
순수한 부처님 참생명의 한마음입니다.
세상 모두를 향해 회향하고자 하는
이타(利他)의 한마음입니다.

그 밝은 한마음이 일으킨 마음...
그 한마음으로 행한 기도는
진정 세계를 울리고 법계를 움직이는 법입니다.

이 법계의 도리를 믿고 알고 나면
세상은 더 이상 괴로운 곳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뜻대로 사는 삶...
바로 수행자의 여법하고 당당한 삶입니다.



Posted by 법상




[보물 제833호 기림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으며 삼존부처님은 현재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으로 부처와 중생 무명과 지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온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 참생명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부처님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이 성성히 깨어 있는 깨침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금 이곳 현실까지 불러들여
집착하고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괴로움으로
지금 현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재, 바로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를 살 수도, 미래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의 마음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이는 마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완벽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이 말하길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싸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을 올바로 가질 것을 경책하는 말입니다.
바로 현재를 올바로 사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배고플 때 오직 먹기만하고,
졸리면 온전히 자기만할 수 있다면 참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위에 충실히 온전히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온전히 밥 먹는 것에 집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고플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밥먹으며 딴 생각하고 딴 짓하고
밥 먹는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겉 모습은 똑같이 밥을 먹고 있더라도
이렇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나는 것입니다.

틱냩한 스님은 말씀하시길
"설거지를 위한 설거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설거지를 할 때에 오직 설거지만 할 수 있다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기 싫고 짜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수행하기 싫고, 절하기 싫고, 남편 뒷바라지 하기 싫고...
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빨리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나고 싫고 빨리 끝내려는 마음만 앞서게 됩니다.

이렇게 청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다만 깨끗하다는 결과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얼마나 깨끗할까요.
그러나 청소를 위해 청소를 한 수행자는
그 행위 속에 수행의 힘까지 남게 됩니다.

청소를 하며 마음을 집중하고 청소하는 그 마음에 온 힘을 기울였기에
청소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방하착 한 것이 됩니다.
빨리 하고 나서 쉬어야지 하는 게으른 마음이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대학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에 충실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대학합격이라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면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일을 할 때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퇴근할 시간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일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봉급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우리는 돈은 벌 수 있을지언정 진정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그 자체를 위해 절하는 그 순간, 염불하는 그 순간이
그때 그때 목표가 되어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수행해서 성불해야지 라든가
빨리 수행해서 복많이 짓고 편한 삶을 살고 집안이 편안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수행하고 절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른 시일안에 수행의 결과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을 때 개종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잘되면 내탓
못되면 부처님 탓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남편 뒤 바라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때에도
오직 그때 그때 내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그 뒷바라지 자체에 충실할 일입니다.

뒷바라지 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남편이 승진을 못할 때, 자식이 대학에 떨어질 때,
자신에게 잘 못해줄 때 괴로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데 하는 상(相)이 있으면
자식이나 남편이 내게 서운하게 대할 때면 괴로워집니다.
오직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부처님 시봉하듯이 현실, 현실을 충실히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처럼 모시며 시봉하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집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집에서 남편을 대할 때, 자식, 부모님을 대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시봉한다는 마음으로 현실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크나큰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상 하나 하나,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책 읽는 것,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 부모님 모시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
회사에서 일하는 것, 친구들과 모여 술마시러 가고 노래방가서 놀고 즐기는
그 속에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때 그때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상의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인 것입니다.

절에서 애써서 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행하는 삶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현실에 충실하는 그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한 다는 것은 완벽하게 현실을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현실을 올바로 집중한다는 것은
항상 현실의 마음과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방하착(放下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올바로 관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착(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에 얽매이면
우리는 이미 그 실체가 없는 괴로움에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리며 한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고 방하착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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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모든 것은 오고 간다.
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간다.
그것이 진리의 모습이다.

그러니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올 때는 오도록
갈 때는 가도록
그대로 놔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모든 온 것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잠시 왔다가 잠시 머물러
가야할 때 갈 것이다.

생각도
잠시 왔다가 가고,
인생도
잠시 왔다가 가고,
돈도
잠시 왔다가 가고,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행복도,
성공도,
실패도,
나라는 존재 또한
그렇게 잠시 왔다가 갈 것이다.

모든 것은
올 때가 되면 왔다가
갈 때가 되면 간다.

오고 감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저 내 존재 위를 스쳐
오고 가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행복이 온다고
잡으려 애쓰지도 말고
행복이 간다고
붙잡으려 애쓰지도 말라.

불행이 온다고
괴로워 할 것도 없고
불행이 간다고
즐거워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이
올 때는 오도록 두고,
갈 때는 가도록 놔 두라.

그리고 지켜보라.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가는지.

어떻게 와서 존재를 스치우는지,
스치면서 어떤 찌꺼기며 흔적을 만들어내는지,
그리고 갈 때는 무엇을 남기고 가는지
진중함과 고요한 알아차림으로 지켜보기만 하라.

그것이 공부요 수행의 전부다.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오고 감을 두려워 말고 다만 지켜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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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흘려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거나 미래에 대한 온갖 망상들이 우리의 마음을
크게 흔들고 있음을 자주 명상하곤 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면서 슬퍼하거나 후회를 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헛된 상상을 함으로써
그 생각의 늪에 빠져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과거나 미래로 흐르는
온갖 망상들을 다시 되돌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로 내려놓는 것이
수행의 첫 걸음이란 것을 잘 알지 못하는 듯 합니다.

물론 현재의 마음이야 언급할 필요가 없이
그대로 관찰하고 내려놓는 작업이 필요함은 물론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의 가르침 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고정된 바가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흐를 뿐입니다.
흐르는 시간에 마음을 고정시키려니
그것이 마음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틱냩한 스님의 [삶에서 깨어나기]란 책에 보면
'설거지를 위해서 설거지를 하는 것'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즉
설거지가 다른 것
예를 들면 밥을 먹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혹은 다른 나의 볼일을 위하여
빨리 끝내야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등의
생각들을 지양하여
설거지가 곳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거지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상에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설거지하는 그 순간 마음을 집중하며 관하여
그 순간에 다른 생각에
끄달리지 않는 깨어있음을 연습하는 수행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서
귀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하나의 행위가 바로
부처님의 나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 같아도
그 일은 우리의 수행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모든 일상의 행위 하나하나에
충실한다는 의미이며
시간시간을 목적으로 충실히 살아간다는
즉, 현실을 온전히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현실에 온전히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현실에 충실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도
그 행위에 우리의 전력을 기울여
집중하고 관찰하며 깨어있으려 노력할 때
그 모든 행위는 신구의 삼업으로 짓는 업장이 아니라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이며
이것이 바로 생활수행이 되어 버립니다.

옛 조사스님들께서는
배고플 때 밥먹고, 졸릴 때 자고,
배 아플 때 뒷간 가는
그런 일상 속에 깨달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의미가 바로 어떤 순간에도
철저히 깨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배고플 때 밥만 먹지를 못합니다.
밥을 먹으며 항상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느라 분주합니다.

언제나 과거로 미래로 마음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마음은 중심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나 미래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직 '현재'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현재를 살아가기보다
과거를 살고 미래를 살기 쉽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마음을 빼았겨
자신을 얽어매고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잘못은
부처님 전에 지극한 '참회'와 함께
모두 비워버리세요.
죄란 본래 없습니다.
마음 속에 가지고 있음이 죄인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부처님 전에 지극한 '서원'을 세우는 것으로
집착을 놓아 버리세요.
앞날에 대한 근심 걱정은
'참 나' 비로자나 법신의
생명력을 굳게 믿고
원을 세우는 그 속에 모두 던져 버리세요.

그리고 마음은 자유가 되셔야 합니다.

현실에 머물러 있으란 말이 아닙니다.
머물 현재도 없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그 순간은 이미 지나간 과거입니다.

오직...
모두를 던져버리세요.
부처님 참생명을 의지하며...
모두 놓아버리세요.

모든 분별심을 놓고는
가만히 '관(觀)' 하시길 바랍니다.
'지켜봄'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이것이 현재심을 다스리는 수행입니다.
현실에 온전히 깨어있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입니다.
집착하지 않음입니다.
무집착의 근본 수행이 바로
방하착(放下着)-놓음-이며
'지켜봄(觀)'인 것입니다.

오직
나에게 주어진 삶은
바/ 로/ 지/ 금/
지금입니다.

지금
모든 것을
놓아버리소서...
그리고
마음은 가만히
'지켜봄'에 머무르면 됩니다.

Posted by 법상

삶은 왜 괴로울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감당 하면서 살고 있고, 어쩌면 그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 같은 것들과 전쟁을 하다시피 투쟁하고 싸우면서 그것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을 어찌 보면 좀 허비하고 있고 낭비하고 있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 안에서 만들어 놓은 수많은 고통, 괴로움 그런 것들과의 한바탕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것, 고되고 힘들고 두려운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요.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고통 받지 않고 삶에 대해 두렵지 않고 그냥 문제없이 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과연 내가 고통 받지 않고 살고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조차 ‘내가 내안에서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내면서 그것과 싸우며 살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왜 고통을 받게 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에서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하면‘내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만드는가! 우리들은 삶을 살면서 ‘내 앞에 그 어떤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아주 굳게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삶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힘든 게 있으면 안 된다, 고통이 있으면 안 된다, 내 삶에는 항상 좋은 일이 벌어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누구나 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봐 나를 욕할까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항상 걱정이 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사람이 뒤에서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남들의 어떤 판단 평가, 뒷말 이런데 항상 조마조마 하면서 사는 우리 마음이 어찌 보면 너무나도 약하고 여립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경계에도 크게 휘청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가 내 욕하는 말 한 마디 듣고 나면 몇날 며칠을 붙잡고서 괴로워하고, 자꾸 떠오르고 떠오르면서 오래도록 괴로워 한단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버림받으면 어쩌지’, ‘이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어쩌지’, ‘친구들 사이에서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입니다. 아주 쉽게 생각해서 어떤 사람이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그냥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무언가 얼굴 표정이 찜찜했어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한말 때문에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느라고 그 말 한마디 내뱉은 것 가지고 몇날 며칠을 근심 걱정에 시달립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에이 이미 지나갔는데 괜찮겠지’, ‘아니야 그래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다른사람에게 내 욕하고 다니면 어쩌지?’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말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잘됐느냐 잘못됐느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끄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고민을 애써 만드느라 괴롭고, 상대방에게 끝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괴롭고, 좋게 보이고 싶고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는 근심 걱정을 굴리며 덩치를 키우고 산다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며 살아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나를 좋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 다 나를 좋아하는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정작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죠. 당연한 겁니다.

 

 

부처님을 청부살인해?

 

부처님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다 좋아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이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별수단을 다 썼어요. 부처님을 죽이려는 자객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실제 자객이 칼을 가지고 찾아간 적도 있었고, 막 지나가는 협곡 같은데서 큰 바위덩어리를 던지거나 성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짓밟게 한 데바닷다 같은 사람도 있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큰돈을 주어서 젊고 예쁜 여자 분을 시켜서 돈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도록 밤만 되면 부처님 처소 쪽으로 가고 아침이 되면 나오는 모습을 보여라 하고 그것을 열 달 동안 하되 애기를 가진 것처럼 배를 점점 불려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여자가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거든요. 열 달쯤 되었을 때 법회 날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쳤더니 어떤 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서는 ‘당신이 어떻게 깨달은 부처라고 할 수 있느냐. 배속에 있는 당신의 아들조차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하는 것이냐’ 라고 하면서 부처님의 아기가 이 뱃속에 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웠던 말입니다. 그렇더니 경전에는 천신들이 시켜서 쥐가 배속에 있는 박의 줄을 끊어서 탈로가 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예요. 그것이 탈로가 났는데도 몇 년 있다가 동일한 범죄를 또 저지릅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이 싫어서 어떻해서 든지 부처님의 거대한 교세와 인기와 신자들의 존경심 이런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또 한 여인을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여인에게 시켜놓고는 이번에는 그 방법이 안 되겠다 싶어서 열 달 후에 자객을 시켜서 죽인 후에 부처님 처소 근처에 묻어버립니다. 그래서 여인이 없어지자 그 여인이 열 달 동안 부처님 처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부처님이 애기를 낳을 때가 되니 사람을 시켜서 죽인 것 같다 이렇게 외도들이 소문을 내고 다닌 거예요. 그래서 외도들이 소문을 막 내고 사람들을 시켜서 여기 저기 찾다가 그 여인 묻은 곳을 찾아서는 모든 죄를 부처님께 덮어씌웁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여인을 죽었던 자객이 너무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실은 누구누구가 시켜서 이렇게 했다 해서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죠.

그것처럼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부처님일지라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란다는 것도 우리의 욕심이지요.

 

 

괴로움의 이유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나를 욕하기 때문이거든요. 누군가 한 사람이 나를 욕하기 때문에 괴롭단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지구상에 수십억 인구가 되는데 그 엄청난 인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 때문에 괴롭고 죽을 지경입니다. 어떤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다 그것이 왜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가 돼야 합니까. 누가 나에 대해서 평가절하 했다, 욕을 했다, 미워했다 그것 때문에 왜 미칠 것 같은 그런 이유가 되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긴가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누구에게도 상처 받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욕 얻어먹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삶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항상 매여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내 생각이 무조건 맞다 맞다 하면서 다 들어줄 수 있겠어요.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엄청 큰 착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사는 거예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노후가, 부유한 노후가, 아무 문제없는 노후가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삶이 얼마나 황당하고 과하며 무지몽매하고 터무니없습니까. 너무 과한 바람 속에 산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삶 속에서 바라고 있는 것이 너무 터무니 없단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 없이 문제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세상이 문제이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대고 불평불만을 하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다가 너무 내 마음대로 내식대로 너무 높은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내 기준대로만, 내 생각대로만, 내 마음대로만 따라 줄 수 있겠어요.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간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있고 그러다보니까 거꾸로 내 내면에 문제가 있어서 세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모르고 세상만을 탓합니다. 세상과 싸우려듭니다. 내안에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든단 말이에요.

 

 

문제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모든 문제는 내면의 문제인데 이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외부를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꿈으로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인생에 있어 하는 일이 대부분 무엇인가 하면요, 내 내면적인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 내면적인 문제를 바꾸는 방법으로 자기 내면을 바꾸는 것을 택하지 않고 거꾸로 외부적인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외부세계를 바꿈으로써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나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매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문제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도록 세상을 통제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문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속에 외로움이나 고독감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바로 이성 친구가 없는 것을 탓합니다. 즉 무언가 마음에 외로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하면 이 외로움을 없애줄 세상의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외로움이라는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내 밖의 대상을 찾아요. 외로움이라는 것은 내 내면의 문제 아닙니까. 내면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줄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 말입니다. 끊임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던가, 좋은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이성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도 나에게 외로움을 충족 시켜주지 못 한다, 처음에 사랑했을 때는 외로움이 그칠 것 같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 사람도 아니다, 그럼 바로 바로 쳐버리고 다른 여자를 또 사귄단 말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내 바깥에 있는 대상에서 내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을 만남으로서 그 외로움을 극복했다 이렇게 착각 하는 거예요. 함께 있다고 해서 근원적인 외로움을 없앨 수 있습니까? 누군가 함께 있다고 해서 인간 본연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본연적인 외로움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서글픈 이야기죠.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아주 좋은 공부의 재료가 되어주고 우리가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는 때때로 사람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바깥에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고 나를 사랑해주어 그 외로움을 없앨 수 있는 그런 대상을 찾아 헤메는 방법이 근원적인 답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일 년, 이 년, 삼 년 지나다보면 그 다음에는 무상하게 휙 휙 없어지는 거예요. 그 마음은 내면의 문제이거든요. 바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을 아무리 바꾸어 봐야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한 지 몇 년, 혹은 몇 십 년 되어서 바람을 피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기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다 내적인 문제를 외부를 바꿈으로써 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내면의 결핍감, 불만족, 어떤 그 가난한 마음, 뭐랄까 거지같은 마음, 무언가 모를 부족감 같은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끊임없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봉을 이천, 삼천을 받다가 거기서 만족을 못 하고 오천만원, 일억을 벌어도 거기에 만족을 못 하잖아요. 그런 만족은 마음의 문제이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만족감 그것이 충족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충족될 수가 없어요. 우리 삶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이라는 결핍감은 내면의 문제이지 외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차를 사고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고통은, 그 결핍감은 더욱 더 강렬해지죠. 더욱 더 엄청난 욕망으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게 만들죠.

보통 우리들 마음의 바람이 소박하잖아요. ‘뭐 나는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느정도 연봉만 되면 좋겠다’ 그렇듯 소박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발생되는 순간 우리의 소박함은 없어지고 맙니다. 또 다른 목적 또 다른 욕망 또 다음 것에 대한 욕망을 시작하고야 말지요. 이 세상을 다 소유하더라도, 세계 1등 가는 부자가 되더라도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이것이 내적인 문제이지 어찌 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내적인 문제인데, 바깥의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끊임 없이 바깥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돈이 없어 괴롭고, 친구가 없어 괴롭고, 성공하지 못해 괴롭다, 이것은 전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외적인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부족함을 채워줄 외적인 어떤 대상이나 물질이 필요할까요? 아니겠지요. 항상 가득 차 있고, 항상 원만 구족하신 분입니다.

 

 

중심을 잡고 삶 위에 서라

 

엊그제 어떤 도반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스승님으로 존경하는 스님이 계신다는데 그 스님을 보면 항상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당신이 보았을 때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 같데요. 무언가 삶에 낙이 없어 보인답니다. 늘 법회하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산책하고 아니면 방안에 혼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 한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혼자 앉아있고 좌선을 하고 또 기도 시간되면 기도하고 법회 시간되면 법회 하고 그 외에 시간에는 취미 활동 이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신도님이 오시면 신도님과 이야기 나누다가 또 없으면 들어가 앉아있고 그냥 방 안에만 앉아 있는데요. 그래서 이 스님이 생각 할 때는 저 스님은 어찌 삶을 재미없게 심심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오랫동안 그 스님을 살펴보았더니만 이 스님은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야지만 행복한 스님이 아닌 거예요. 그냥 항상 혼자 있어도 충만한 것입니다. 돈과 함께 있지 않아도, 무언가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지 않아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 노닥거릴 일이 없어도, 무슨 재미있는 건수를 찾지 않아도, 그 어떤 것 없이 혼자 독방에 앉아 있더라도 아무런 외로움이 없는 자기중심이 딱 서 있는 분인 거예요. 자기 내면의 중심이 딱 서있게 되면 바깥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방안에 딱 들어서 있는 것이지 바깥을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면의 이 공허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어떤 재미난 일이 되었든, 명예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었든, 그런 것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저 홀로 있더라도 가득 차있기 때문에,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스님 같겠지만 정말 얼마만큼 중심이 서있는 분이신지, 그 자리가 얼마나 굳고 깊은 자리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삶이 고되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실패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이게 바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엄청난 이상적인 것을 꿈꾸고 있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 그것을 문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까 회사에서 했던 말이 혹시 실수 한 건 아닐까? 그 때 그 말을 괜히 했나?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너무 내 자랑만 했나? 너무 남 욕만 했나? 너무 속보이는 말이었나?’ 말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그건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실수한 것 같다, 끈임 없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서 우리를 괴롭게 한단 말이예요. 그 말 한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는단 말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아 멘단 말입니다.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 딱 박혀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리 삶에서 흐르지 못한 채 문제가 되어, 정체가 되어, 괴로운 무언가가 되어 꽉 막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괴로움 없는 삶을 사는 방법

 

그런데 아주 다행스러운 소식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꽉 막힌 삶을 대번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실패적인 삶을 살지 않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걱정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일이 잘 될까 못 될까 두려워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성패에 따라 내 진급 문제가 달린 아주 중요한 회사의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조차 초조한 마음, 걱정스런 마음을 붙들고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회사의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여유로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맑게 비어있으면, 어떤 하나에 붙박혀 있어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한다’ 하고 고집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삶에 즐거운 일만,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야 됩니까? 그렇지 않지요.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 내가 원하는 삶이 펼쳐져야 성공한 삶이라고 고정지어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사업에 성공하지 않더라도,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아주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겨우 겨우 끼니를 이어가면서 한 달에 몇 십만 원 정도 가지고 그냥 아이들 키워가면서도 즐겁게 삶을 누리며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어요. 고층빌딩을 소유하고, 아주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그 아파트 값이 몇 년 안에 두 배 세배 뛰고 그런 삶을 살지 않더라도, 승승장구하며 제때 제때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삶이 성공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성공적인 삶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겉으로는 성공한 삶으로도 실패한 삶으로도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한 사람 투성이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이 소유 할수록 오히려 실패한 삶일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긴 하죠.

나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삶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뒤에서 욕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진급을 못 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뒤에서 해코지 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거기에 막 신경증에 걸려 예민해져서 하나하나에 마음 쓰고 괴로워하며, 누구 하나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나쁜 말 한 마디 한다고 그것 때문에 몇날 며칠 지옥세계에 빠져서 살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인연 따라 펼쳐지는 삶으로부터 나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생각 생각 가지고 분별심을 가지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그 일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포용하란 말입니다.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생각과 바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온갖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그런 바램들을 긍정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허무맹랑한 바람들에 우리가 왜 다 응해야 합니까. 그것을 맞추기 위해 내 인생 전부를 걸고 그냥 전쟁을 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고통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 그런 삶을 당장에 청산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 내 기분대로 내 생각대로 만사가 돌아가야 된다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렇다고 이 내부의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고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구나 그러니까 내부의 문제를 고치면 되는구나 해서 나 자신을 탓하고 내면의 문제를 탓하고 고치려고 애쓰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받아드리고 허용하되 거기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내부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 바람, 욕망, 번뇌 등의 속삭임을 귀담아 듣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야 그때 너 잘못 한거 아니야’ 하고 끈임 없이 올라오는 생각 생각들을, 그 불평불만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뒤에 떨어져서 그 생각이나 고통이나 분별이나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들, 문제라고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벌려 놓은 삶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지켜보면 삶이 너무나도 생기발랄해집니다. 어떤 고통도 고통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해 온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는 거예요. 가만보면 우리는 작은 것 하나 가지고 예민하게, 어찌 보면 우리가 아주 신경박약증세를 보이고 있죠.

남들이 말하는 것에 몇날 며칠을 구속돼서 끄달리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산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붙박여서 몇날 며칠을 아파하고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 생각들에 힘을 보태줄 필요가 없습니다. 힘을 실어주면 안 되요.

 

 

아상에 밥 주지 마라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생각을 또 다른 생각으로 플러스 플러스 시키지마라 하는 말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모두 아집(我執), 아상(我相)의 범주라고 볼 수 있는데요. 즉, 내생각 내견해는 아집이고 아상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일뿐이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삶, 내가 바라는 삶 거기에 끊임없이 끄달려가고 생각이 붙박여 있으면 그 생각은 더욱 더 에너지를 받아서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를들어 ‘저 사람이 너를 뒤에서 욕하더라’ 하고 한 마디를 들었어요. 그러면 그냥 욕했구나 하고 탁 흘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욕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우리 삶에서 백년 팔십년 칠십년 되는 삶에서 이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뒤에서 욕했어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어요. 더구나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이니 100% 분명한 사실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뒤에서 욕한다더라’ 하는 그 한마디에 온갖 밥을 줍니다. 에너지를 보태요. 어떻게 밥을 주느냐하면 생각으로써 ‘야! 저 때도 나를 미워했고 이 때도 나를 미워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괴심한 녀석이네’, ‘어쩌면 이 사람이 그 사람에게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욕하고 다닐지도 몰라’, ‘어쩌면 이 사람이 나를 아주 음모를 꾸며가지고 우리 회사에서 매장 당하게 할지도 몰라’, ‘어쩌면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려 들지도 몰라’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에너지를 키워요.

그냥 단순히 욕 한마디를 넘겨 버리면 되는데 그 생각 하나에 온갖 에너지를 개입시킴으로서 밥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덩치가 너무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립니다. 그렇게 생각 생각으로 밤새도록 그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 다음날 그 사람을 딱 만났는데 말 한마디를 걸어 옵니다. ‘야! 너 요즘에 잘하는 것 같더라’ 하고 좋은 얘기를 했어요.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에서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저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앞에서는 저러지만 뒤에서 뒤통수를 치려고 저려는 걸 꺼야’ 무언가 칭찬을 하는 말도 나쁘게 들린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커피 한 잔 타주면서 ‘이거 한 잔 먹고 해’ 하면, ‘야! 네가 먼저 먹어봐’, 혹시 독을 탓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벌어졌어요. 그런데 거기에 분별하고 온갖 생각 생각들이 밥을 주지 않는다면 그 생각은 거기서 딱 끊어지고 맙니다. 붙잡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그냥 거기에서 끝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펼쳐지는 흥미로운 경험이 됩니다. 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문제로 생각 할 필요가 없지요. 문제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실어 주면 실어 줄수록 우리는 나중에 가면 남들이 보았을 때 좀 미친 사람처럼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어떤 한 가지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한 사람이다, 꼭 정신병자 같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밥을 주니까 생긴 거지 그 사람은 원래부터 정신병자가 아니였어요.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아버지가 농사를 짓다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엄청난 돈이 생겨서 자식이 싸워가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고, 아내가 로또 당첨되어 남편과 싸우고 이혼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애초부터 나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 생각에 온갖 밥을 주다보니까 그것이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에 밥을 주게 되면 엄청난 욕망 집착 이런 것으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그것이 이제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상의 덩어리가, 생각의 덩어리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게 돼서 그때부터는 내 삶이 그 방향으로 흘러들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실은 우리가 크고 작게 이런 일을 벌이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 거죠. 이런 아찔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아상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돼요.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어떤 문제가 생겨났어요. 불평스런 일이 생겨났습니다. 불평불만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순간 그날 모든 것을 딱 풀어버리는 겁니다. 질질 끌고 가면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말지요.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라’ ‘응당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지라

 

어떤 불평거리가 생겼을 때 ‘불평거리가 생겼구나’ 하고 거기에 응해 줄 수는 있겠죠. 어떻게 할까 하고 대응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 마음이 머물러서 그 불평스런 마음에 점점 더 살을 붙이고 몸뚱이를 키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화가 나고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으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 안의 온갖 생각 생각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되고 그렇게 지켜보다보면 내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내 생각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많이 거기에 밥을 줌으로 해서 생각의 몸뚱이를 키우는지를 여실히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실히 보게 되면 덩치가 커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보게 되면 생각이 덩치를 키우지 않고 저절로 관찰 한다는 것이, 본다는 것이 그 문제를 녹여주게 되고 없애주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를 양산해내는 것은 바로 아상이라는 놈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켜보는 자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을 지켜보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나로 살지 않고 겉껍데기로 살잖아요. 생각을 가지고 온갖 분별하니까 껍데기인 나로 사는 겁니다. 그 분별과 해석과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 껍데기의 나가 아닌 본연의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는 자, 주시하는 자, 온갖 문제를 만들어낼 때 그 문제를 지켜보는 자, 화가 올라올 때 그 화를 지켜보는 자, 그렇게 주시하는 자가 되었을 때 주시하는 자가 바로 본연의 참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켜보는 자가 되었을 때 어떤 공덕이 있겠어요?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업장을 소멸시켜주신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내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을 녹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녹여주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니까 이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겠죠. 그런데 부처님이 누구냐?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지켜보는 것이 바로 나의 본체이고 당체입니다. 그래서 ‘관찰하라’, ‘깨어있으라’, ‘어떤 놈이 관하고 있는가 그것을 돌이켜보아라’, ‘보는 놈을 돌이켜 보아라’ 하는 얘기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다 라는 것, 주시 한다는 것, 분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본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순간순간 부처로 만들어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우리가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부처가 되는 문제이지, 내가 지금 부처로 사느냐 중생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이지, 지금은 중생이지만 나중에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 하는 그 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 되는 공부가 아니라 부처로 사는 공부

 

불교 공부는 부처가 되는 공부가 아니라 순간순간 부처로 사는 공부입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했잖아요. 어떤 것이 내안의 부처냐? 지켜보는 자, 그것이 내안의 부처다 이 말입니다. 생각이 내안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차라리 직관을 의지하라 그러잖아요. 영감 같은 내안에 깊은 곳에 있는 직관 같은 것 그것은 생각보다 더 차원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과 다투는 대신, 삶과 투쟁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대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를 주시하고 있을 때 삶이 어떻게 바뀌겠어요. 삶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름에 휴가를 가고 싶잖아요.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서 여름이 딱 되면 삼박사일 사박오일 휴가를 내서 휴가를 가잖아요. 매일 매일 일 년 휴가를 기다리잖아요. ‘야! 올 여름 휴가 때가 언제 오겠나’ 하고 매일 매일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매일 매일의 삶이 휴가가 될 수 있습니다. 휴가 가는 날로서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을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주중에는 매일 주말을 기다리지만 주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주말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야!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 하지만 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고서도 정작은 집에 가서 쉬지 않죠. TV 켜놓고 누워서 TV 보고 있잖아요. 머릿속은 온갖 생각과 계획들로 가득 채워둔 채 말입니다. 그건 쉬는 것이 아니죠. 엄청난 문제를 머릿속에서 양산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혀 거꾸로 가는 거죠.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황됩니다. 그것이 쉬는 것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요. 다시말해 휴가 때나 주말을 그렇게 기다려 놓고도 우리의 습관이 막상 주말이나 휴가가 다가오면 ‘쉬는 일’을 하면서 마음을 또 힘겹게 만들어 냅니다. 쉬는 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푹 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히 푹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더라도 쉬는 법을 모른단 말입니다. 쉬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살면서 우리는 한 번도 참되게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참된 휴식을 취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매일 매일이 아주 흥미롭고도 생기로운 휴가가 되고, 주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상대방과의 사귐 그 자체를 즐겨야지, 내 필요에 의해서 친구를 사귄다거나, 저 사람을 사귀면 도움이 되겠지 하는 식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과 사귐이 즐거운 거예요. 이익이 될지 안 될지는 생각이 하는 거예요. 생각은 항상 그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따집니다. 그게 바로 생각의 전공분야예요. 그런데 우리 본질이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다만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교제를 할 때 교제를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묵묵히 분별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그리 되었을 때는 설사 늘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킬지언정 나에게는 문제를 안 일으키게 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사기 치는 사람에게 사기 치지 자기 친구에게 사기 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란 놈은 편견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냐 하면은요, ‘이 사람은 전과가 있으니까 나에게도 사기를 칠거야’, ‘나에게도 나쁜 짓을 할 거야’ 이런 편견을 가지고 대화를 하거든요. 끊임없이 그 사람의 과거를 끌어들이고, 기억하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상상하고, 분별하면서 무수한 생각의 다발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상대방이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나에게 친구가 아니에요. 그때부터는 사기 칠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활짝 열고 온전히 받아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과거를 놓아버린 채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고 주시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때에도 여전히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생각을 놓아버리면, 그 사람이 사기를 쳤다든가 그 사람이 나쁜 놈이라든가 하는 그런 생각을 질질 끌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 투명한 존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럼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아주 흥미롭고도 즐거운 사귐이 됩니다. 이처럼 무분별의 지켜봄이 관계의 토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상대방도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되고, 나아가 상대방이 그 때부터 근원적으로 변하게 되고, 감동스러운 삶을 살아나가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근원적인 삶의 변화가 찾아온단 말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이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으로서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게 되면 그냥 하루하루 일하는 그자체가 즐거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주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어때요. 밤을 세며 일하더라도 즐겁고 피곤한 줄을 모르잖아요. 또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밤새도록 어디 여행을 갔다 와도 지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직장생활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직장생활을 즐기려는 생각을 못 하고 직장생활 그것을 온갖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있는 거예요. 직장생활이 왜 문제가 됩니까. 빨리 퇴근하고 싶은 곳, 직장이 왜 이런 곳입니까? 직장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정말 우리가 꿈꾸는 것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멀쩡한, 또 고마운 이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찌 생각해 보면 완전히 잘못된, 정신병자 같은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얼마나 결혼하고 싶어 합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났을 때, 아이를 낳고 났을 때 그렇게 생각하던 것 처럼 행복하기만 한가요? 씩 웃으시는 분들 계시죠. 자식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다가도 자식이 생겼을 때 막상 키우기 어렵다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아름다운 일도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수행의 재료가 됩니다. 내 공부의 재료가 되고 어떤 아름다운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깨달음을 향해 가기 위한 아주 아름다운 재료가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내부적인 문제이지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름다운 외부세계나 환경도 모두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양산해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악조건이나 역경일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외부를 바꾸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겠습니까? 어떻게 사시겠어요? 그것은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분별없이, 생각에 휘둘림 없이 다만 삶의 모든 것이 내 존재위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가도록 내버려 두면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존재 위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채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말고,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거기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영화 한 편을 보는 마음으로 내 삶의 연극을 흥미롭게 지켜보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분들은 관하고 사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살면 너무 삶이 게을러지고 나태해 지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시하고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 순간순간 아주 온 존재를 바쳐서 일을 하고 주어진 몫을 해 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한 상태에서 모든 일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라도 된 것처럼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 불교에서 집착을 버린다고 하니까 그냥 대충 대충 사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직장의 일에 나의 온 존재를 투영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깨어있음에 담긴 우주적 힘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히 깨어있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힘이 붙는다는 점입니다. 깨어있는 순간, 내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 상대방과 교제를 나눌 때 혹은 상대방과 일을 추진할 때, 어떤 글을 쓸 때, 무언가 일을 하나 할 때, 내가 온전히 그 일을 주시하고 일을 하게 된다면 아주 그 일에 성스러운 에너지가 붙게 됩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잡스러운 에너지가 사라지고 내 더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더 깊은 불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붙기 때문에 그 일의 흐름이 아름답게 바뀌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고도 법계의 흐름과 일치를 이루는 우주적인 힘으로써 그 일이 저절로 진행되게 됩니다.

도반 스님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법당 주지스님들이 군종병을 뽑아 함께 살잖아요. 그런데 어느 부대에 아주 문제를 많이 친 문제아랄까, 관심사병이 있었단 말입니다. 아주 사고만 치고 전과도 있고 가만히 놔두면 자살 할 것 같고, 너무 장병들을 괴롭히고 부대에서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장병이 있었는데 이 스님이 상담을 해 본 뒤에 그럼 내가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법당에 데리고 와서 그 장병 법우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 아이가 과거 부대에서 어떻게 했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사귀어 주는 겁니다. 처음에 그 장병을 데려와서 같이 살겠노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요, ‘법사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법사님이라도 얘가 하도 교묘한 아이라 무슨짓을 할 지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법사님에게도 무슨짓을 하고 사기를 칠 놈이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스님에게 했던 결정적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을 같이 살다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왜 이런 나쁜 짓을 하지는 진심으로 나를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조금 멀리 하려는 것을 감지 했을 정도라는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얼마나 부담스러워하고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스스로 느끼면서 이 친구의 좌절감은 거의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나를 살펴줄수 있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 한 거지요. 그런데 이 주지법사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내가 바라볼 때 문제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내게 와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투명하게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나에게 와서 맑고 아름답고 투명하게 좋은 인연이 됩니다. 모든 것은 내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사귀는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친구를 사귀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바깥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을 내가 불평이 있을 때 불만이 있을 때 무언가 고통이 있을 때 그때를 아주 생기로운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내 마음공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아차!’하고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연루된 자가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는 자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욕을 했고, 내 안에서 욱 하고 화가 올라왔단 말입니다. 이 상황에 맞받아쳐 욕을 하고 싸움을 걸 것이 아니라, 이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내안의 화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욕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도 지켜보고. 힘든 일을 할 때, 힘든 훈련을 할 때 힘들다는 생각에 함몰 되어 버리면 그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 세 번째 화살을 맞는다 이래요. 그 일 자체가 힘들 것 보다는 내가 생각으로 그 일을 더 크고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을 할 때, 한 발자국 떨어져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지켜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힘든 일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천팔십 배, 삼천 배를 할 때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마음도 고통스럽습니까? 절을 할 때는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거든요. 몸은 힘들 지언정 마음은 뿌듯합니다.

내가 무언가 뿌듯한 일을 해서 이일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서 축구를 할 때 힘들어 죽겠습니까? 뭐 기합을 받는다 이럴 때 힘들어 죽겠지 축구할 때 힘든 일이 없죠. 몸은 힘든데 마음은 더 즐겁습니다. 거기다가 골이라도 하나 넣으면 아무리 힘들게 뛰어도 힘들지 않거든요. 괴로운 일 자체, 괴로운 현상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괴롭다는 생각으로 온갖 밥을 주고 그것이 더욱 더 큰 괴로움으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괴로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양극단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우리는 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휴가 같은 삶, 주말 같은 삶, 달콤한 낮잠과도 같은 삶,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연인과도 같은 그런 관계, 매 순간 순간이 투명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삶을 즐기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겁니다.

삶과 투쟁하지 않고 삶의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흘러왔다 흘러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한 발자국 떨어져 내 중심에서 모든 삶을 그냥 가만히 투명하게 지켜보게 되고, 그랬을 때 내가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내 중심에 딱 뿌리내린 삶을 살게 됩니다. 중심을 잡고 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화에 정신을 빼앗기고, 누가 밉다고 거기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모든 일이 생길 때 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에너지를 소진하는 삶이 아니라 내 중심에 딱 자리 잡고 앉아서, 내 깊은 뿌리에 자리 잡고 앉아서 내 안에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인연따라 일어나는 삶을 거부하지 않고 내버려 둔 채 허용하고 수용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중심이 딱 잡힌 장부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격장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더라도 나는 중심에 머물러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외부의 경계에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는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아니라 중심에 딱 뿌리 내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바라보면서 거기 휘둘리지 않고 걸림 없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사실 아주 즐겁고 생기롭게 누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고통 받고 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살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살지 말고 다만 본성에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내가 공연히 문제를 만들지 말고 애써 만들지만 않으면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드리실지 모르겠으나 이것을 한 번 듣고 넘기지 마시고 내 안에 딱 주시하는 중심을 두고 내 존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지켜보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생생하게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스스로 체험해야 되요. 그럼 이 수행이라는 것이, 나라는 본연의 중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깨어납시다.


Posted by 법상
이 책 참 좋아요 -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법상 스님 l 도솔
| 인터넷 보도팀 이경주 (여여심)
| 2006-06-07
한 때, 우리나라에 10억 열풍이 분 적이 있었다. 또 재벌들은 죄 값을 돈으로 치르기도 하는 것 같다. 몇 천억을 출자하는 방식으로 면죄부를 받기도 하고, 돈 많으면 일단 대접받는 시대이다. 천진하기만할 것 같은 어린아이들도 아파트 평수로 친구를 나누는 세상이니 부자가 아니면 참 많이 불편한 세상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부자가 아니기에 부자의 편리함을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그런 필자에게 다가온 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가르침이 되었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굳이 문학적으로 구분해 보자면 수필이다. 부처님 말씀을 바탕으로 한 법상스님의 생각을 물 흐르듯이 서술하였는데 비록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떤 스님일지 상상하게 한다. 법상스님은 <마음공부 이야기><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생활 속에서 마음 닦기>와 2005년 올해의 불서로 선정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등을 저술한 스님이다. 현재 군승(軍僧)으로 경기도 고양의 호국사 주지로 있으며, 주로 인터넷이나 신문 등에 기재하여 글로써 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총 4 장으로 이루어진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1장 가난한 부자, 2장 이 순간을 즐기는 부자, 3장 마음의 부자, 4장 자연을 가진 부자로 이루어져 있다. 법상 스님은 서두에 “아무리 벌어도 많이 축적해도 만족할 수 없다. 여전히 가난하고 부족하다. 그런 착각이 이 세상을 한없이 부족한 곳으로 만들어 놓았고, 풍요롭던 이 땅을 결핍과 굶주림과 전쟁과 기아로 얼룩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토로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과 이기, 어리석음에도 우주는 우리를 한없는 사람으로 자비로 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는 충분히 누리면서도 욕심으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더욱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 잘 살아보려는 마음으로 비롯한 욕심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법상스님이 제시한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한 15가지 생활수행법”을 소개한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라. 관(觀)하라.
  4.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하지 말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11. 자연의 먹을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참 쉬운 듯 어려운 수행법이다. 법상 스님은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강조한다. ‘기다림’이란 현실에 대한 불만족의 또 다른 표현으로 지금에 최선을 다하면 각자의 복덕에 맡게 잘 살게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
 
법상 스님의 특별한 부분은 다른 종교의 경전, 예를 들면 성경이나 이슬람 경전 등을 읽으라고 말한다. 우리 종교의 좋은 점만을 강조한 나머지 타종교를 배척하는 모습은 진정한 불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불자임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각 종교를 만난 것은 개인의 인연과 복에 따라 만난 것인데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 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의 간단한 소개이다. 이 책의 가장 기본은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즉,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좀 더 현대적인 문장으로 서술한 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지금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자를 부러워하고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내는 이들에게 부자보다는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부드러운 필체로 법상 스님은 속삭인다. 이 책을 통해, 그 가르침이 들리는지 들리지 않는지 내 마음의 여유 또한 점검해 볼 수 있다.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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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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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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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도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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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