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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3.13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2. 2008.01.10 오온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舍利子)


 사리자는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의 설법을 듣는 사람으로, 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리자는 오온이 모두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관자재보살이 법을 설하고 있는 광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사리불(舍利弗)이라고도 하며, 범어로 사리푸트라(Sariputra)라고 하는데, 취자(鷲子)라고 번역합니다. 음을 그대로 옮기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혜제일의 제자입니다. 최근 출판된 자이나 교의 옛 전승(傳承)인 『이시바샤임』이란 책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사리불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자이나 교를 비롯한 다른 교단에서는 사리불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만큼 사리불은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지혜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처럼 교단에서 지혜가 가장 출중한 사리불이 반야심경에 등장하여 관자재보살로부터 반야 지혜에 대한 법문을 듣는 것은, 반야심경의 반야지혜야말로 사리불의 지혜보다 더 큰 대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제부터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의 본격적인 법문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 ‘조견오온개공’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의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하다는 무상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논리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화엄의 ‘사법계(四法界)’를 잠시 빌린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과 연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계, 책상, 혹은 내 사랑하는 연인 등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 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과 연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연생이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바로 공이라는 것은, 시계가 공(空)이고, 책상이 공이고, 애인이 공이라는 것이기에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다르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젠가는 공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색이란 우리의 사량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에서는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며,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법계(理法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 ‘이사무애법계’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 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텐데, 다시한번 ‘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다음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논리는 공간적인 무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앞에서 설명하였으며, 강한 긍정의 논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물질적 존재인 색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지없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논리처럼 시간적으로 미래에는 공일 것이라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공간에서의 공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앞에서 공이란 것은 연기하는 것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라는 것을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은 무아를 의미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이 곧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즉 시계, 책상, 사람 등의 물질적 존재인 색은, 미래에 인연이 다하여 흩어질 것이기에 공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모습이 공이라는 논리인 것입니다.

 시계라고 했을 때, 이 시계는 시계침, 플라스틱 케이스, 나사, 건전지 등이 인연화합으로 모여 만들어진 물질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부품들 하나 하나를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계 케이스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도 없고, 시계침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고 없는 것이며, 시계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부속품들이 모여 인과 연이 맞는 부품들끼리 짜 맞추어 졌을 때, 비로소 시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다른 모든 부품들을 잘 결합시켜 시계라는 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기라는 법칙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공의 성질, 연기의 성질, 무자성의 성질이 바탕되어야만 비로소 시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시계가 성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공의 바탕 위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의 사법계(四法界)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사무애법계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공[理法界]과 공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한 것처럼, 색[事法界]과 색도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하다는 논리입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긍정의 논리이며, ‘이 우주가 서로 걸림 없는 무애’라는 법계의 본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가 좀더 발전되어 화엄에서는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논리까지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색즉시공’의 논리를 말하고 나서 다시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은, 앞의 그것과 같이, ‘색이 곧 공’이라고 부정한 데서 한 걸음 나아가 ‘공은 바로 색’이라는 대긍정을 통해 절대 긍정의 논리를 펴기 위함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상의 논리에서는 색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 오면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공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수, 상, 행, 식 모두를 앞의 논리에서 색에 대비할 수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수불이공(受不二空) 공불이수, 수즉시공(受卽是空) 공즉시수

상불이공(想不二空) 공불이상, 상즉시공(想卽是空) 공즉시상

행불이공(行不二空) 공불이행, 행즉시공(行卽是空) 공즉시행

식불이공(識不二空) 공불이식, 식즉시공(識卽是空) 공즉시식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오온, 즉 일체제법인 물질, 정신적 존재는 모두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또한 일체제법과 다르지 않으며, 일체제법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일체제법이라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일체제법은 시간적으로 제행무상이며, 공간적으로 제법무아이고, 그렇기에 연기적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연기법의 시간적 해석이 바로 제행무상이고, 공간적 이해가 바로 제법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승의 반야 공 사상이 바로 연기의 사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제법은 연기하는 존재로서, 모두가 공이며, 무자성이고, 무분별, 무아, 중도라는 중관(中觀) 사상도 이 반야경의 공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질인 색에서 보았을 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정신인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곧 공이라는 말입니다. 이상 수상행식이 공한 논리에 대해서는 앞서 ''오온개공''에서 ''오온''을 설명할 때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수행행식이 ''불이공''이고 ''즉시공''인 연유는 앞의 ''색''과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5월 18일 보냄.

Posted by 법상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 대하여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온개공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오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근본불교에서의 오온무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의 ‘蘊(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류법입니다. 특별히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온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색온(色蘊)

 색이란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색은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지(地)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뼈, 손톱, 머리카락, 살 등 딱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 겁을 윤회한 이 땅의 이 모든 자연, 흙, 나무, 등이 모두 과거, 또 그전 과거에는 나의 몸이었을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몸 또한 백 년 내지 이백 년 후면 다시 처음 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 지(地)는 일체세간의 지가 인연을 만나 우리의 몸을 잠시 이루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 앞에 떨어진 흙 한 줌, 나무 한 토막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몸을 이루는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육신에 집착합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몸은 그렇게 아끼며 집착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고 잘 가꾸지 않는 것이 우리네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색(色)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몸뚱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대지 위에 있는 나무, 돌, 광석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습니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 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한 것, 항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2)수온(受蘊)

 수란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 감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입니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근(眼根)[눈-모양]으로 색을 바라볼 때, 예컨대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징그러운 해골을 보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싫다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근(耳根)[귀-소리]으로 무언가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던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냄새], 설근(舌根)[혀-맛], 신근(身根)[몸-접촉], 의근(意根)[뜻-생각]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비근[코]으로 나쁜 냄새를 맡고 나서도 잠시 후,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다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이 들다가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며 순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온의 세 가지 감정도, 색온(色蘊)의 그것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해 가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의 감정이 무상한 것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거짓임을 안다면, 좋고 나쁜 감정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마음을 꽁꽁 묶어 두고 괴로워하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한없이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회피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수행자의 바른 행이라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경계에 처했을 때, ‘이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관(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 또한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입니다.


(3)상온(想蘊)

 상은 개념,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하여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 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보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름지어 놓은 것을 되살리어 기억 속에 개념지어 놓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머리를 깎고, 회색 먹물 옷을 입은 분은 스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요?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이름들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한글을 만들 때, 하늘, 나무, 스님, 꽃, 집, 절, 아버지,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이름 붙인 것 뿐이란 말입니다.

 이렇듯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4)행온(行蘊)

 행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이나 욕구 등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 행위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총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몸으로, 입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의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온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선한 행위, 악한 행위 - 여기에서 선하다, 악하다는 판단은 상온에 해당한다 -를 하며, 그러한 선, 악이라는 판단에 따라 윤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업을 짓게 하는 것이 바로 행온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은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에 기초한 선악이라는 개념작용 등에 의지하여 생기게 마련입니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긴다고 했는데, 상온에 대한 무명, 다시 말해 ‘항상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온 또한 무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기반인 상온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5)식온(識蘊)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및 그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직접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상온의 작용이고, 식온은 다만 대상을 상이 생겨나기 전(前) 단계까지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의(注意) 작용정도라 하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눈앞에 책 한 권이 있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이야기 했던 각각의 다섯 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고 할 때 무언가가 들어왔음을 아는 것이 바로 ‘식온’이며, 전의 기억, 사탕이라는 것에 대한 이전의 표상작용에 의해, ‘아하! 사탕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고, 달고 맛있다는,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이 바로 ‘수온’의 작용이고, 맛있으므로 빨아먹는 행위, 그리고 더 먹고 싶어서 다른 사탕을 찾는 행위, 다른 사탕을 찾아 먹는 행위 등이 바로 ‘행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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