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이틀전 새벽예불을 보고 절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분이 맨발에  주저앉아 절망을 남편에게 마구 쏫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며 만감이교차  올 것이 와나보구나 하는 직감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두번 보았습니다 .
한번은 절 문전을 기웃대며 바라보기만 다가가서 법당을 들어가 보시라니까  쓸쓸한 웃음만...
두번째는 남편께서  언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오더군요.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시라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남편이 어찌 해야 할찌 기로에 서있는 모습 에 
점점 죽음의 늪에서 포기 하는 상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절을 가면  무언가 위안을 받기에  그럼에도 절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애처로움,,,,

그분들의 모습에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 건강함에 감사.
나의기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기를 발원했습니다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함께하길  이틀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오늘 새벽예불을 보고 산 모퉁이를 내려오는데 만났습니다
차 앉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상태로 컵라면을 들고
한젓가락 입에 넣는 힘없는 애처로운 모습 살기위해  먹어야 한다는 그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나도 모르고 흘렀습니다.
과감히 도와드리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받아냈습니다

내일은 그분을 만나  병마와 싸우는 부인을 힘이 되어주고자 방문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는길에  한 번이라도 
법당의 부처님을 뵙게 해 주고 싶습니다
스님 ,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소 긴장이 됩니다
어떤 자세로 대하여야  하며 혹여   저로 인해 상처않받고
마음편히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수있게 할 수있을까요?


[답변]

예...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주셨네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힘겨운 분들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나오고, 함께 가슴 아프고,

그럴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첫마음은 누구나

'돕고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 투명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일어남을

외면하지 말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아주 잘 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돕고싶은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아상에서 기인하는 생각, 판단, 분별, 과거를 개입시키기 때문에

얼른 저질러 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법우님처럼 그렇게 탁 저질러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우리 마음은

또 다시 아상에 기인한 생각, 분별들이

끊임없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생활 속의 수행을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활 선원이요, 선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한 일일까?

너무 성급한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도움을 순수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오히려 저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하면서 끊임없이 분별이 올라올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분별들을 잘 지켜보면서,

놓아가는 것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이고 명상이며 선인 것입니다.

 

그런 분별들은 잘 지켜보고,

탁 내려놓으세요.

내려 놓는 것이 잘 안 되면,

내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아, 이런 마음이, 이런 생각이 또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저질러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텅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근원적인 마음이

더 깊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온갖 생각으로 계획을 짜는 것 보다

더 지혜롭단 말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턱 맡겨 버리세요.

생각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

시어머니와 13년 동안 잘 지내다가 최근에 관계가 너무 안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너무나 화가 나서 말도 하기 싫고 얼굴 보기도 싫으시다며 식사도 제가 출근후에 혼자서 따로 하십니다. 밥도 먹기 힘들고 잠도 잘 못자고 직장에서도 일을 하기가 힘드네요.

 마음에서 문제가 완전히 풀리고 나면 현상 세계는 발맞추어 함께 따라 풀려집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마음이 투영되어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보세요. 내 안에 어떤 원인이, 혹은 어떤 생각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고.

그러나 도대체 어머님과 왜 이렇게 틀어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들어가세요.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고, 나 때문에 벌어진 문제라고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겨운 바깥 경계를 만나게 한 내 내면의 무언가에 대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 앞에 섰을 때 매 순간 깨어있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그러나 어머님을 향한 참회와 자비의 마음으로 그 앞에서 깨어있게 되면 법우님의 깨어있음의 힘이 어머님의 마음을 녹일 것이고, 법우님의 마음 또한 평화롭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어머님 때문에 일도 잘 안 잡히고, 불편한 그 마음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자신과의 약속을 매번 어깁니다. 특히 새벽기도 해야지 하는 결심만 할 뿐 제대로 실천을 못 합니다. 왜 저는 매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기만 할까요. 이젠 저에게 화가 납니다.

 수행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해야겠다 싶으면 알람을 켜 놓고 일어나면 되고, 만약 도저히 못 일어나겠었다면 조금 더 노력해 보거나 아니면 그냥 자면 됩니다. 단순하게 사세요. 그냥 잤다고 해서 알람이 울렸는데 그냥 잤다는 그 단순한 상황에, '내가 졌다'고 하는 상을 만들어 놓고, 연이어 두번째 세번재 화살을 맞느라고 '나는 끈기가 부족하다'거나,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라거나 하고 연이어 생각으로 전투를 이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그것이 중생이고, 생각을 놓아가면서 단순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해 보는데까지 해 보세요. 다만 정 못하겠다 한다면 왜 새벽만을 고집해요. 낮에 하면 되고, 저녁때도 하면 됩니다. 새벽이라는 어떤 때에 어떤 실체적인 '수행 잘 하는 때'라는 고정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닦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수행과의 투쟁에서 승자가 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세요.


어디에서 보니 '남에게서 보는 것은 내안에도 있다'는 말이 있데요. 모든 경계가 나의 과보로서 온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업의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런 경계를 내안에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바깥 경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내 안에 비춰져서 내 안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우리는 인식하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바깥 경계를 인식하는게 아니라 내 안에 비춰진 경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지만 우린 그 경계를 가지고 좋다고 나쁘다고 분별하잖아요. 그 자체가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내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외부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면의 거름망, 내면의 색안경으로 걸러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남이 한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그게 좋으니 나쁘니 판단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이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나 행동 자체는 아무런 분별도 없어요. 그래서 동일한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어떤 이에게는 나쁜 행위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우리는 키가 작다고 욕을 하는군! 괘씸한 녀석! 너는 나보다 더 못생겨놓고! 정말 내가 그렇게 못 생겼나? 아이 짜증나! 수술을 해 볼까! 저 녀석 손좀 봐 줄까 하면서 온갖 생각, 분별, 시비, 판단 등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겠지만, 부처님께 누가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부처님은 그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말로써 키가 작으니 작다고 했구나, 저 사람 기준(색안경)으로 내가 못생겨 보였구나 하고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는 그것으로 끝이란 말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때요? 어떤 경계든 우리는 그 경계가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경계를 부처님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차별, 분별, 성냄 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Posted by 법상





언제나 어느 때나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고,
아무런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서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혹은 어떤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이나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고,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이며, 몸이 나이고,
내 느낌이나, 내 생각, 내 견해, 내 욕구가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모든 문제며 근심 걱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가 있고, 근심 걱정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내 성격이나, 몸이나,
느낌이나, 생각이나,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그런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하며
꽁꽁 묶여 꼼짝달싹 못 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내가 누구냐고 했을 때
나의 성격을 내세우곤 하지만,
성격이 어찌 결정적인 나일 수 있겠는가.
성격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가 살아 온 환경 속에서,
또 나의 경험 속에서 인연 따라 만들어 진 것일 뿐이다.
만약 다른 경험과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나의 성격은 달라졌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또 언제라도 지금의 내 성격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 성격은 변화에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성격은 현재진행형이며 종착역에 이를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을 선택해 그것이 ‘나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 그것을 나로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인가.
이 몸 또한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어제의 내 몸과 내일의 내 몸은 전혀 다른 몸일 수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이 발견해 낸 진리이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있는 느낌들이 나인가.
느낌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한다.
어떤 특정한 경험 속에서 느낌이 규정되어지기도 하고,
똑같은 조건 속에서도 느낌은 달라질 수 있다.

욕구도, 생각도, 집착도, 관념이나 견해들도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는 것일 뿐이지,
그것들이 나일 수는 없다.

인연 따라 욕구도 집착도 생겨나고,
인연 따라 온갖 생각이나 관념, 견해들도
끊임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제 있던 욕구가 사라지고 오늘은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기도 한다.
어제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관념들도
새로운 어떤 조건에 의해 완전히 깨지면서
전혀 새로운 관념과 신념에 의해 무장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조건 따라, 상황 따라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거기에 어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다.
굳게 믿으면서 거기에 죽고 살며, 거기에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들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들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성격 때문에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다만 성격에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이다.
성격과 나는 동일인이 아니다.

그것을 내가 풀려고 애쓰지 말라.
그것은 내 문제가 아니니 상관하지 말고, 개의치 말라.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 두되 다만 있는 그대로 살펴 보고 관찰하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들을 내가 풀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성격이 만들어 낸 문제를 내가 다 풀 수는 없다.
하나의 문제를 풀었더라도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고,
그렇게 하다가는 끊임없이 성격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뒤치다꺼리는 일로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생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이 한 생이 아깝지 않은가.
나에게는 나 자신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고 나 자신을 찾는 일이고,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 밖에 없다.

인격이 만들어 내는 문제,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 등
그 모든 다른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
그것이 바로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요,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은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를 보자.
몸이 만들어 내는 문제에 일일이 다 관여하면서
몸에게 휘둘릴 필요도 없다.
몸도 성격과 마찬가지로 내가 아니다.
다만 몸이 움직이며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내가 할 일은 다만 관찰하고 주시하는 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몸에 감기 몸살이 왔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육체와 이 세상 사이의
어떤 법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그것은 흡사 때때로 폭풍우가 몰아치고, 태풍이 오는 것 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몸이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병적인 현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서부터 몸에 문제가 생겼다고 안달하고
괴로워하며 내 마음까지 괴롭히곤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다만 멀리 아주 멀리 떨어져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다만 주목하고 주시하면 된다.
감기 몸살이 아주 멀리서 일어나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이라 생각하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감기 몸살과 나 자신 사이에
객관적인 넓은 공간, 먼 거리를 만들라.
혹은 감기 몸살이 다만 영화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이 되어 지켜보라.

다른 나와 동일시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다.
욕구가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고,
집착이나 관념이 생겨날지라도
그것과 나 사이에 먼 공간을 만들어 지켜보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어떤 현상을 다만 지켜보듯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장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관객처럼 내 삶의 연극을 다만 지켜보라.

내 삶의 모든 문제는
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내가 근심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그 모든 일들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아주 멀리에서 나와 상관 없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흥미롭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주시하기만 하면 된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내 몸, 내 성격, 내 느낌, 내 생각, 내 관념, 내 욕구...
이 모든 것들에 ‘내’라는 ‘나’라는 수식을 빼라.
그들이 만들어 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그 모든 문제며 근심걱정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만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님을 기억하라.

흥미로운 영화를 보듯
내 삶의 연극을 지켜보라.



[사진 : 범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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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이 미워요


[문]

결혼생활 십육 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티격태격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너무 한심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제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별 게 아닙니다. 그냥 햇살 좋은 날 봄볕도 같이 느끼고 싶고, 대청소도 같이 하고 싶고,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남편은 집보다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무조건 남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남편을 탓해야 하나요? 아니면 마음공부 재료로 삼아서 더욱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하나요? 나름대로 생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아직 행복해지는 건 잘 모르겠네요.


[답]

수행자는 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냥 놓아버리세요. 어찌 보면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어려운 길, 더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에서는 그 길이 더 밝은 길이지만, 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안 보이는 어둠을 닦아야 하는 길이다 보니 그만큼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수행했는데 왜 행복이 찾아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바로 욕심인 줄 알고 그것 또한 놓아버려 보세요.

        수행하고 마음공부 하니까 오히려 더 힘이 들지만, 그 이면에 마음이 평온해 지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 열심히 하려고 삼천 배를 해 보면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마음까지 괴롭던가요? 몸뚱이가 좀 힘들어 그렇지, 절 하면서 괴롭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도리입니다. 삼천 배 할 때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삼천 배를 마치고 나면 몸뚱이 착심이 많이 떨어져 나가지 않던가요. 그 전에는 백팔 배만 하려고 해도 힘들었는데 삼천 배를 하고 나니까, 백팔 배 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백팔 배 하기 싫은 업이 그만큼 떨어져서 이제 백팔 배 쯤은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업장소멸이지 어디 엄청난 데서 업장소멸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남편이 밖으로만 나돌지 말고 나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그냥 내 마음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만들어 놓고 나 스스로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우선 놓아보세요. 어떻게 그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하지 마시고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자식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세요. 본래 원만 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이라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그러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내 안에서 남편이 내가 생각하는데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고정 짓고 있으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가장 빨리 상대를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고정관념이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정된 관념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 식대로 맞추려고 하면 나만 힘이 듭니다. 주말에도 놀아주지 않고 밖에만 나가려드는 남편에게 짜증부리고 화내던 마음을 돌이켜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대인관계가 좋은 남편이라고 한번 칭찬해보면 어떨까요.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요 마음공부의 열린 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남편이 따라 변하게 됩니다. 내가 평온해지면 오히려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하는 아내에게 발맞추어 남편도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해야 남편이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방하착 해보세요. 더욱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어머니와 아버지의 불화는 점점 깊어가고, 그 와중에 형제 중 하나가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의 갈등을 바라보는 것도 괴롭고, 형제가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데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답답한 마음뿐입니다. 부모님 연세를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성격을 바꾸기는 힘들 것으로 같은데 그렇다고 이혼을 권유할 수도 없고… 온 가족이 정말 괴롭습니다.


아마도 이런 경우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깔려 있기 쉽습니다. ‘부모님과 형제는 온통 문제 덩어리야. 나는 잘 하는데 부모님과 형제들이 성격도 나쁘고 지혜롭지 못하니 이들과 함께 살기 너무 힘들어’ ‘부모님 성격만 변하면 가족이 다 행복해질텐데’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이 모든 문제를 ‘부모님 탓’ ‘형제 탓’으로 돌리면서 나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별 문제가 없고, 내가 어떻게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 부모님이 바뀌어야 풀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불교에서 '모든 것은 내 문제다'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그 상황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님과 형제의 문제로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러한 가족 속에서 태어나 살게 된 나에게도 똑같은 공유된 잘못이 있거나, 공유하고 있는 공업(共業)이 있는 것입니다. 더 큰 의미의 인과와 윤회의 틀에서 본다면 그런 가족 사이에 내가 태어나게 된 것 자체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업(業)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내가 그 가족들과 분명 풀어야 할 업이 있다거나, 가족들의 좋지 않은 모습들이 나의 또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라는 인연은 고스란히 내 업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내가 그들에 대해 미워하는 부분은 사실 내 안에도 있습니다. 아니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내 삶에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고통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내면이 밖으로 투영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내 업의 생생한 비춤이기에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상대방의 잘못이고, 상대방을 바꾸고 싶지만, 그것이 내 생각대로 잘 되지 않을 때는 다시금 되돌아 '나'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대를 바꿀 수 있다면 물론 좋겠지요. 그러나 어지간해서는 상대방들이 잘 바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뀌지 않는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기 보다 가장 쉽고 직접적인 나 자신을 붙잡고 문제를 해결 해 나가는 편이 더 빠르고 근원적입니다. 어차피 그 상황이 상대방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와 연결되어 있는 내 안의 문제이기도 하다면 문제 해결 방법은 두 가지가 아니겠어요?

하나는 상대를 바꾸는 것이고 하나는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너무 어려울뿐더러 전자 보다는 후자 쪽이 훨씬 더 근원적이고 그 영향력이 깊습니다. 상대를 바꾸는 것이 더 빠를 것 같고, 더 직접적일 것 같지만, 나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며 그 어떤 무리수도 두지 않는 조화로운 방법입니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고집불통인가, 내 부모님은 왜 안 바뀌려고 하는가하고 답답해하겠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바꾸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바로 보십시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내가 변해야 세상도 변합니다. 똑같은 세상일지라도 마음이 바뀌면 세상은 다르게 보입니다. 물론 그 뿐 아니라, 내가 바뀌면 상대가 바뀌고 가족이 바뀌며 사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다.

        내가 맑아지면 그 맑은 향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이 법계(法界)를 향기로 물들여 우리 주변까지 함께 밝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내 업이 완전히 맑고 청정해 졌다면 유유상종으로 내가 윤회를 할 때도 내 업에 상응하는 인연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문제 있는 부모를 만났다는 생각은 다시 말하면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소식입니다. 내 안에 문제가 외적인 환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먼저 나 자신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자매를 바꾸려고 애쓰고, 바뀌지 않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더욱 더 맑아지고 밝아지지 못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냉철하게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조금씩 바뀌어 가면 가족 또한 조금씩 바뀌어 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더욱 더 향기로워져야겠다는 발원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중에서




Posted by 법상





남편은 십 년 동안 제게 말 못할 짐을 안겨주었고 저 혼자 그걸 다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성격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으니 삶에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이 미워 싸울 때마다 힘으로 안 되니까 마구 욕을 해댑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마음을 돌리고 대화해 보려고 해도 아무 말 없이 훌쩍 나갔다 며칠 만에 불쑥 집에 들어오곤 합니다. 이래도 그냥 저 혼자만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요?

 

어떤 분이 질문하면서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그것도 업이니까 그냥 다 받아들이고 녹여야 한다는 말일랑 절대로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지더군요. 왜냐하면 그 말은 벌써 '나' 자신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고, 스스로를 바꿀 용기도 지혜도 마음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업(業)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아무리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싶어도 잘 되지를 않는 겁니다. 자기 안에 딱 버티고 있는 고정된 관념들이 타파되지 않으니까 도무지 바뀌지 않는 겁니다.

수행은 먼저 '나' 자신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을 바꾸려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상대라는 존재는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곳은, 완전히 내 마음의 투영이고, 내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남편이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계속해서 욕을 하고 화를 낸다면 그것은 업이 똑같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면 도무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크고 무거운 업을 자꾸만 짓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절대 온전한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남편이 잘했고 보살님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변해야 상대도 변한다'는 이 지극히 원칙적인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요. 왜 어렵습니까. 그게 업을 녹이는 과정이라 어렵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의 본질은 본래 어디에 의지하지 않고도 내 스스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중심 잡힌 존재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근원의 그 어떤 힘이 내 안에 담겨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려 하지 않고 내 바깥 경계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한단 말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그 마음을 놓아보세요. 왜 나라는 자주적인 존재가 남편에 휘둘려 남편이 변해야지만 나도 행복한 종속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남편 상관 없이도, 주변 환경 상관 없이도 나 혼자서 당당하게 내 삶 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 성격도 바꾸어야 하고, 툭 하면 집나갔다가 들어오는 것도 바꾸어야 하고, 이래저래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만 힘들어 집니다. 그 모든 남편에 대한 바람이나 기대를 완전히 포기해 보세요. 그 기대를 놓아버리면 먼저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바꾸지 못했는데 그걸 아직까지도 바꾸지 못한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바꾸기는 어렵고 힘들어요. 그러나 내가 바뀌기는 덜 어렵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바꾸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입니다. 내가 바뀌면 남편도 저절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내면세계의 영적 수준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 내가 사는 세계이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남편이라는 업은 내 업식을 고스란히 본떠서 투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내 수준과, 내 업과 똑같은 가족을, 남편을 만날 수밖에 없도록 이 세상은 만들어 져 있어요. 그러니 돌려 말하면 나 자신을 평화롭게 변화시키면 내 주변이 저절로 평화에 물들 수밖에 없고, 내 안이 투쟁과 다툼으로 시끄러우면 내 주변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보살님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어요. 남편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 남편이 나에게 짐을 안겨 주었다는 생각,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 이제 그 모든 생각을 돌이켜 놓아버리고 문제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그 모든 문제는 바로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거운 짐을 받아야 하는 업이 없다면 남편이 나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 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그 어떤 요소가 저런 남편을 만나게 했으며, 내 안의 그 어떤 업이 남편과의 불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돌이켜 내 안으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문제의 화살을 나 자신으로 돌리고 나면 문제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나부터 완전히 거듭나야 겠다’ ‘나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겠다’ ‘나부터 완전한 자비와 사랑으로 변해야 겠다’ 그렇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마음가짐만 그렇게 한다고 현실이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함께 하세요. 백 일 기도를 하시되, 바람을 가지고 하지는 마세요. 백 일 후에는 달라지겠지 하는 마음도 놓아버리고 다만 이 기도의 길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며 평화에 이르는 길이고 업을 녹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백 일 후에도 안 되면 그 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백 일 기도를 하시면 됩니다. 될 때 까지 하면 됩니다. 사람에 따라 백 일 기도만 해도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마음가짐과 간절함에 따라,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백 일 기도의 반만 해도 삶이 바뀌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업의 무게가 너무 무겁거나, 간절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백 일 기도를 몇 번이고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될 때까지 하십시오. 기도의 끝을 바라면서 하지 말고 그저 기도를 하기만 하세요.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은 모든 부처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업이 녹는 것은 아직도 멀었으니 너무 힘들다, 언제나 끝날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은 지혜로운 성인들이 걸어 온 밝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환희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끝은 없습니다. 기도의 시작, 수행의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그저 시작한 그 마음이 깨달음의 마음이며 업장이 다 소멸된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예 기도 수행을 시작하면서 내 업장이 다 녹았다고 여기고 다 녹는다고 굳게 믿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저도 수많은 법우님들도 많은 큰스님들도 계속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도 그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길입니까. 그 길을 어깨 나란히 하고 함께 걸을 수 있음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중에서...





Posted by 법상




[1]

결혼생활 16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싸웁니다. 남편은 집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 남편을 어쩌면 좋지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편이 밖에 나가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안을 봐야지 밖을 봐선 안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지요. 본래 원만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놓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업장소멸의 기회요 마음공부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16년 동안이나 거사님은 변함없이 밖으로 나돌았고, 보살님은 마음 아파하며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셨으니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 고리는 보살님께서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좀 더 가정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그 마음도 놓아버리는 방하착의 수행 속에서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툭 하고 놓아보세요.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2]

아내는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불만을 늘어놓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내의 뜻을 거부하면 불화가 생기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 모든 것이 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해보지만 이렇게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이 모든 것이 내 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려 해 본다고 하셨는데, 과연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과연 아무리 괴로운 삶이라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풀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말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와 상대를, 또 나와 상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한 수용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 진실로 용서해 주고, 그 또한 내 문제이며,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변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3]

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내 문제를, 내 업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행으로 풀어갈 수 있겠는지요?

 

수행이라고 하셨는데요, 진정한 받아들임은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관(觀) 수행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혹 억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망과 화를 억눌러 놓고 있는 것이기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잠재워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관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힘들지만 다만 분별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절로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불만을 늘어놓을 때 내 안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라는 삶의 수행은 곧장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잘못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해, 또 아내에 대해 판단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나 불만투성이의 말들도 다만 어떤 공간 너머의 객관적인 관찰대상일 뿐 싫은 것, 나쁜 것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관수행은 그 상황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해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는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통찰의 관수행 속에서 근원적인 열쇠가 저절로 거사님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관수행은 언제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답변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월간 불광] 09년 1월호 '법상스님께 묻습니다' 중에서

Posted by 법상




죽기 전까지 매일 108배 수행은 꼭 해야겠다는 원을 세우고 절 수행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며 절을 하는데요, 입은 염불을 하는데 마음은 따로 노는 것 같습니다. 진지한 절이 안 되는 것 같고 집중도 안 되고, 하고 나면 뭔가 허전하고 성취감이나 수행을 통한 환희심 같은것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원이 간절하지 못해 그런가요?

 

그냥 절을 할 뿐입니다. 절 하는데 이유를 달지 말고 하세요. 절하고 나면 어떠해야 한다고 하는, 절 수행을 하면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 그냥 다 놓아버리고 ‘오직 절 할 뿐’ 이 되도록 하세요. 절 수행은 어떠해야 한다고 하는 마음속에서의 막연한 기대감을 놓아버리세요. 절 수행을 하고 나면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 마음도 놓으세요.

절 하면서 집중이 안 되느니, 마음이 따로 논다느니, 절하는 것이 진지하지 않는다느니, 뭔가 허전하고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느니, 원이 간절하지 못해서 그렇다느니 하는 등의 그런 마음들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그렇게 온갖 올라오는 생각과 분별심들에 얽매이지 말고 다만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을 관하고 분명히 살펴보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관하는 데는 그저 관할 뿐이지, 좋고 싫은, 잘되고 안 되는 그런 분별이 붙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절 할 뿐 절 수행을 통해 무언가를 얻으려 하지 마세요. 얻고자 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얻고자 함이 없을 때 얻음도 없이 무량한 공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절 수행 하세요. 몸은 열심히 절 하고, 마음은 그대로 두시면 됩니다.

 

말을 많이 했다 싶은 날은 그냥 자신에게 짜증이 납니다. 핸드폰 화면에도 ‘묵언’이라 적어 놓고 많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생활 속의 바른 묵언 수행인지, 또 그 방법도 알고 싶습니다.

 

말을 아끼는 사람은 그만큼 밖으로 빼앗기는 말의 기운을 돌이켜 내면으로 살찌울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은 밖으로 치닫는 연습이며, 묵언은 안으로 치닫는 공부입니다. 묵언 수행만으로도 우린 내면 관찰의 힘을 한껏 높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말만 없다고 묵언이 아니라 말 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과 번뇌, 망상, 분별들을 쉬는 것이야말로 참된 묵언이라고 할 것입니다. 생각을 과거로 미래로 오락가락하지 않고, 이리저리 복잡한 생각으로 어지럽히지 않으며,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순간에 존재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묵언입니다. 또한 참된 묵언이란 말 뿐 아니라, 몸과 뜻까지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을 함께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도 될 수 있다면 움직임을 많이 줄이고 허덕이지 않아야 하고, 쓸데없이 이리저리로 돌아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묵언은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복이 쌓이고 공덕이 됩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의 묵언은 무조건 침묵을 지키는데에만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공허한 말, 삿된 말, 거친 말 등을 줄일 것이지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까지 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요. 허언을 놓으라는 말이지 진언 까지도 놓아버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나’라는 아상을 높이고자 하는 말이 많습니다. 아상의 말은 주로 ‘나를 드러내는 말’이거나, ‘상대를 낮추는 말’이기 쉽습니다. 입을 관하고, 묵언하면 바로 그 아상의 토대가 되는 말들이 줄어들고, 내면은 고요해집니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부처인데도 불구하고 꼭 수행정진을 해야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본래의 면목에서 본다면 아무 노력도 필요 없으며, 수행이란 것도 다 방편일 뿐입니다. 이미 그대로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그게 선지식의 할 일입니다. 그러면 왜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면서 자꾸 수행 하라고 하느냐? 그건 중생이 괴로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래면목에서 본다면 괴로워하고 있는 그것이 다 환영이고 신기루며 꿈과 같은 거짓일 뿐입니다. 즉 환상 속에서 환상에 빠져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 환상을 뛰쳐나오도록 이끌어 줄 뿐인 것입니다. 환상에 빠져 있을 때는 환상으로 병을 치료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아무 문제없는 평등하고 중립적인 세상을 대상으로 끊임없이 생각과 차별, 분별과 망상을 일으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낸 문제 속에 스스로 빠져 괴로워하고 있다 보니, 그것이 본래 아무 일 없던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 방편이라는 환상의 약을 쓰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고요하고 적적하게 가만히 있는데 내가 그 가만있는 세상에게 시비를 거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이고, 그 어리석음에서 고통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고통을 만들었고, 거기에 빠져 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그 환상을 깨주기 위해 환상의 약 즉 방편이라는 수행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불이며 독송이며 좌선이며 화두며 끊임없이 닦으라고 하고, 그러한 방편 수행을 통해 부처를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월간불광] 3월호 '법상스님께 묻습니다'에서




Posted by 법상

저는 잡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항상 두 가지 길을 놓고 걱정하니 늘 마음이 괴롭고 안정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지워내고 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하고 왜 그런 생각이 올라오는지,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는지 다시 이런 생각에 집착을 하게 되니 오히려 불필요한 생각이 더 많이 들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잡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 생각들에 끊임없이 휘둘리며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과 잡념을 없애려 노력을 하지요. 그러나 지금 법우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방법들 모두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 방법들은 모두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잡생각을 없애고 비우기 위해 또 다시 생각을 가지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저 생각으로 바꾸는 것으로는 그 올라오는 잡념 자체를 비울 수 없습니다. 앞에 질문에서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관찰)’한다고 하셨는데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왜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지' '어떻게 긍정적으로 돌릴 수 있는지' 하고 또 다시 생각을 굴리게 되니 그 생각에 집착을 하게 되고 오히려 더 많은 불필요한 생각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 하는 데에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그것만이 이 생각으로 저 생각을 대치시키는 그런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아 줍니다. 관하는 것은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은 무념(無念)이요, 무심(無心)입니다. 생각으로 관한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생각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일 뿐입니다.

 

부적에 관해 여쭙습니다. 부적을 방편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 것은 불교 교리에도 맞는 것이 아닌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적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은 적절하지 못한 길이라 생각됩니다.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종이 쪼가리 하나에 우리 마음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내 안에 어마 어마한 보석이 숨어 있는데, 그깟 종이 한 장에 의지를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일이 잘 될 것 같다가 부적을 분실했다고 금방 마음이 불안해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우리가 왜 부적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외부적인 어떤 것에 나약하게 마음을 의지하고 거기에 내 중심을 빼앗겨야 합니까? 물론 말씀하신대로, 부적을 몸에 지님으로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과 '왠지 모를 든든함'이 생기고, 그 때문에 실제 삶에서 조금 더 긍정적이 된다거나, 힘을 낼 수 있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유한하고 본질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불교에서는 불교에 조차 전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진리 자체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하는데, 까짓 부적에 집착한다는 것이야 말이 되겠어요? 심리적인 플라시보 효과 때문에 부적이라는 방편을 쓰고자 한다면, 차라리 무상한 부적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믿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의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불성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이름이고, 방편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딘가에 의지를 하려면 세 가지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귀의의 대상인 '삼보'인 것입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다보니 모든 것이 어긋나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옆에서 계속 잔소리만 하시고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싸우게 됩니다. 제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것도 아닌데 잔소리만 하시니, 저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주변의 상황들도 함께 아파지곤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분명히 보면, 사실은 아프다는 그 사실보다 아프면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그 한 생각이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가져 오곤 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주로 내 안의 어떤 상처나 업장이나 병의 씨앗들을 풀어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즉 나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경계이기 쉽습니다. 즉 몸이 아프다는 상황이 꼭 '나쁜' 상황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돕기 위한 좋은 상황일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몸이 아프면 그 상황을 '나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해석함으로써 그 상황을 더욱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도 다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갈등이 아니라 내 안의 갈등입니다. 내 안의 갈등을 풀어주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공부요 수행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현상들과 느낌들과 생각들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약만 약이 아니라 정좌하고 앉아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약입니다. 이 약은 당장에 효과를 보지는 못할지라도 근원적인 병의 원인을 없애줄 수 있는 뛰어난 의사입니다. 나 자신만이 내 병을 고칠 수 있어요. 원인 제공자가 그 원인을 없앨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법우님 안에 얼마나 큰 힘과 지혜가 있는지 직접 내맡기고 시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월간불광 법상스님께 묻습니다 09년 2월호]에서

Posted by 법상

[1]

결혼생활 16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싸웁니다. 남편은 집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 남편을 어쩌면 좋지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편이 밖에 나가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안을 봐야지 밖을 봐선 안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지요. 본래 원만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놓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업장소멸의 기회요 마음공부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16년 동안이나 거사님은 변함없이 밖으로 나돌았고, 보살님은 마음 아파하며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셨으니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 고리는 보살님께서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좀 더 가정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그 마음도 놓아버리는 방하착의 수행 속에서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툭 하고 놓아보세요.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2]

아내는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불만을 늘어놓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내의 뜻을 거부하면 불화가 생기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 모든 것이 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해보지만 이렇게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이 모든 것이 내 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려 해 본다고 하셨는데, 과연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과연 아무리 괴로운 삶이라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풀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말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와 상대를, 또 나와 상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한 수용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 진실로 용서해 주고, 그 또한 내 문제이며,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변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3]

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내 문제를, 내 업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행으로 풀어갈 수 있겠는지요?

 

수행이라고 하셨는데요, 진정한 받아들임은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관(觀) 수행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혹 억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망과 화를 억눌러 놓고 있는 것이기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잠재워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관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힘들지만 다만 분별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절로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불만을 늘어놓을 때 내 안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라는 삶의 수행은 곧장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잘못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해, 또 아내에 대해 판단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나 불만투성이의 말들도 다만 어떤 공간 너머의 객관적인 관찰대상일 뿐 싫은 것, 나쁜 것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관수행은 그 상황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해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는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통찰의 관수행 속에서 근원적인 열쇠가 저절로 거사님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관수행은 언제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답변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