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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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울릉도의 택시는 전부가 4륜구동의 승합차량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이 가파른 오르막이고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들도 많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 안평전까지 가면서도
울릉도의 풍경, 바다위로 피어오르는 태양 빛,
그 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세며
어느 것 하나 내 눈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다.



울릉도는 섬이라 산세는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은 그야말로 완전히 빗나갔다.
주봉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한참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한동안 산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했더니 벌써 안평전에 다다랐다.
성인봉 쉼터라고 쓰여 있는 바로 이 곳이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의 초입이다.



성인봉 오르는 길,
초입에 몇몇 채 소박한 집들이 늘어 서 있을 뿐
안평전의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마지막 소담한 농가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물을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입산에 들어간다.



저 멀리 바닷가 위로 떠오른 햇살이 아직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성인봉 얕은 산봉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풍경 하나 하나가 내 안에 자연 성품을 일깨우며
감미로운 뉴에이지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대지 위로 연주되는 듯
내 온 몸이 마음이 이 법계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연주를 하지 않아도 연주되는 음악이 있다.
때때로 이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호올로 느낄 때
하늘에서 대지에서 산과 바다에서
온 존재를 하나되게 만드는 음악이 연주되곤 한다.

산길을 걷는 내내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발걸음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도,
앙상한 가지 끝에서 돌아감을 순수히 기다리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시린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며 간간이 들려오는 꿩 소리도,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간지럽혀 오는 파도 소리도,
또 산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 소리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 하나 법계의 노랫소리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진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무위의 소리들이
그대로 진리인 양, 사자후인 양
흡사 가릉빈가의 연주처럼 성성하고도 적적한 감미로움을 자아낸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산 아래는 아직 가을의 잔영이 남아있다.



육지에서는 벌써 단풍 구경 끝난 지가 오랜데
신기하게도 산 아래는 생의 마감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막바지 단풍들이
아쉬운대로 두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오르는 길에 나무로 만든 투박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계단들이 인상적이다.



여느 국립공원 산 같으면
인위적인 가공 계단들을 반듯 반듯하게 세워 놓거나,
또 어떤 곳은 철로 만든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산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흙과 낙엽 소리 대신에
철철거리는 철계단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도 있었을 터인데
이 곳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그 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것도 반듯하게 잘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엉성하게 모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다.



이렇듯 계단 하나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법.

산을 오르며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 버텨오다
인연이 다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꺾이고 쓰러진 고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런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크기 맞게 잘라
이렇게 계단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없는 정겨움과 고향 같은 풋풋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산 중턱 곳곳까지도 고사리류와



섬바디,



섬노루귀 등이



초록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이 추위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늦가을 겨울 초입의 날씨에 단풍에 초록의 식물들까지
참 대견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무들은 가지 끝에 남은 단풍 한 떨기조차 다 떨구어 냈고
초록의 식물들도 사라진 채
한겨울을 초록으로 끝까지 나는 조릿대만 나무 아래 녹빛 흔적을 남겼다.



산 아래에서부터 중턱, 정상까지 오르며
조금씩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턱을 넘어서니 하늘빛도 더욱 푸르고
잎을 다 떨구어 낸 나무들도 훨씬 홀가분하고 호젓하게 서 있다.



그렇다보니 건너편 산도,



나뭇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도 그대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없는 산 길,
침묵만이 내 벗이 되어주는 이 길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왜 이리도 설레게 만드는지.

대자연의 길벗들이,
이 숲의 나무와 바람, 흙과 풀들, 하늘과 청량한 내음들이
모두 내가 걷는 길을 축복해 주고 밝혀주는 것만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나와의 인연을
그토록 기다리며 마중하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한 숲의 도반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고 있다.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곳!
난 이런 문득 스치는 낯선 자연의 인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인연이자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주는
이 대자연 법계의 소식들이 짠하게 내 품을 감싸주고 있다.

오랜 도반들, 내 삶의 길벗들! 안녕!
산과도 나무와도 바람과도 인사를 건낸다.
모든 숲의 생명들이 속 뜰의 예민한 감성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공평하고 평등한 존재와 존재가
민감하게 서로를 살려주며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느릿 느릿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7시 50분 즈음에 안평전에서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는 걸로 봐서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울창한 마가목 나무 원시림이
또 한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계곡과 능선 사잇길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오르면서 원시림이 펼쳐지고 조금을 더 걸어올라가니
발 아래 울릉도 도동항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시 울창한 숲 터널을 걷는다.
계곡 쪽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니 비로소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이 산위로, 바다 위로, 도동항 마을 위로, 숲 길 위로
자신의 따스한 햇살을 한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새벽 일출 때부터 지금 즈음까지의 햇살이
하루 중 가장 가볍고 상냥하며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정직하고 곧게 내려쬐며 대지를 덥히다가
또 다시 늦은 오후부터 일몰 직전까지는
아침보다 좀 더 짙고 차분하며 따뜻한 느낌으로 대지를 품에 안는다.

햇살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렇듯
새벽과 아침 오후와 저녁 때가 예민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더라도 그 차이점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햇살이 제각기 독자적이고 완전한 자기의 삶을 대지 위로 꽃피워낸다.

햇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제각기 독창적이고 완전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음으로써
그 안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고스란히 세상에 표현해 낸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완성과 지복의 행복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울릉도도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이렇듯 법계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곳이 그러고 있듯이
이 울릉도도 머지 않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섬 전체를 집어 삼킬 지 모르겠지만
그랬을 때는 더 이상 울릉도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 것이다.

쭉쭉 뻗은 빌딩숲이나 대형 콘도며 호텔들,
인공의 잔디가 광범위하게 깔린 골프장이며,
산을 뚫고 길을 내거나
저 성인봉 정상에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이 무위의 섬 울릉도에 문명의 이기와 인위적인 것들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울릉도는 더 이상 울릉도만의 성품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것들이야 어디든 다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애써 울릉도까지 들어와서 또 봐야 할 것이 무언가.
하기야 이 울릉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전 세계가 이미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인해
저마다의 온전한 독자성과 독창적인 본성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곳은
죄다 똑같은 유럽식 호텔에, 똑같은 조경에, 똑같은 아스팔트 길이며
무엇 하나 그 나라만의 그 고장만의 독창적인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생명의 기운을 떨어뜨리며
그 고장만의,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진리 성품을 사장시키고 말 뿐이다.

대자연은 항상 진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살려지고 있다.
법신 부처님의 숨결대로,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의 선택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연스레 자신만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키고
대자연의 진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서 살려지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시름 시름 앓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숲 터널을 따라 계속해서 오르니 어느새 인가
가을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완연한 겨울로 옮겨왔다.



발 아래는 지난 주엔가 왔다는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길 섶에 있고
때때로 마가목 빠알간 열매들만이 흑백의 명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성인봉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가니
발 아래로 어제 가 보려다 못 갔던 봉래폭포 쪽 계곡과
저동항의 풍경이 창창하게 펼쳐진다.



햇살이 많이 비치는 곳에는 눈이 거쳤는데
초록의 연한 이끼들이 햇살을 받아 곁의 눈을 녹여가며
겨울을 날 생명수로 흡수하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안평전과 도동 대원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성인봉 오르기 전 만나는 곳, 삼거리 쉼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성인봉 정상.



바람은 차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울릉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만 돌리면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올라오는 쪽 하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화창했는데
성인봉에 올라 반대쪽을 보니 하나 둘씩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성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리분지와
그 너머의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구름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구름이 오며 가며
나리 분지의 신비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참을 성인봉 위에 앉아 울릉도 중심에 서서
이 울릉의 법계를 다만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어르신께서 성인봉의 산기운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며
꼭 정상에 오르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라고 했던
당부가 생각났다.
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당신께서도
불경 공부를 꾀나 많이 하셨고 요즘도 집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수행을 퍽이나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르신의 말씀도 말씀이려니와
이 생경한 신비감에 저절로 기도심이 북받쳐 올랐다.
“이 법계 두루 두루에 대자연 법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이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지 못하고 여전히 아만과 욕심,
이기에 물든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빛 찬연히 비추기를,
기아와 가난, 전쟁에 깊은 상처를 받고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께
본래 청정, 본래 원만 구족의 대 적멸이 깃들길,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깨어있음의 연꽃 한 송이 피어오르길,
깨달음을 향한 적멸의 발원 이 생을 넘기지 않길,
성인봉 산신님께, 울릉도 이 대자연 법신불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에 간절한 마음 모아 기도드렸다.”


둘째날, 성인봉에서 나리분지까지(성인봉출발, 10:00)

아이젠을 하지 않아 그런지
나리분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퍽이나 미끄럽다.



초록과 흰 눈, 그리고 나무와 하늘색의 조화가
마치 하늘 예술가가 내려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내 안의 특별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성인수에서
성인봉의 정기어린 시원한 생명의 감로수를
대자연 벗들에게 한 잔 대접받고 났더니 더없는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는데
‘이곳이 성인봉 원시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칠 법한
그런 창연한 숲과 오랜 고목들을 만났다.



약 500여 년 된 섬피나무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 한 곳에서 살아내며
500번이나 반복되었을 계절의 변화와 생멸을
온몸으로 버텨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0번의 봄에 꽃을 피웠을 것이고,
또 500번의 여름을 짙은 초록으로 물들였을 것이며,
500번의 가을에 단풍을 만들어 잎을 떨구고
지난한 500번의 겨울을 시린 침묵에 잠겨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잎은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다시 제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 가
또 다시 자신의 뿌리를 가지를 잎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윤회의 작업은 500여 년 동안 끊임없었을 터다.
겉모양을 바꾸며 몇 번이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서
저렇듯 육중하게 세월의 역사를 한 몸에 담아
지금의 원시림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도
그 존재 안에는 무시무종의 윤회와 숯한 업연이 담겨 있고
전 우주적인 소식을 내제하고 있으며
그 피어남을 위해 온 우주가 기꺼이 도왔을 터다.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하찮게 보이는 곤충 하나조차
전 우주 법계의 거룩한 신성이 불성이 담겨 있는 숭고한 존재다.
하물며 사람이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든,
가난에 찌들어 괴로운 사람이든,
하물며 큰 죄를 지은 죄수라 할지라도
어찌 그 존재가 하찮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이 담기고 역사가 담긴,
지난 세기를 묵묵하게 살아 낸 원시림 숲의 정령들과
나무와 대지에 깃든 생명신들,
대자연의 천사들과 청량한 선신들
어떻게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인연 도반들께, 이웃들께
이렇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외를 보냈다.

원시림 숲 속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저 아래 계곡이 크게 몸살을 앓고
살저름을 떼어내는 듯한 아픈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이 거대한 원시림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여여하고 법에 맞다.
여법한 일들, 꼭 필요한 일들만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자연을, 이 우주 법계를 바라보는
가장 큰 ‘보는 관점’,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왜 이렇게 훼손되고 있을까.
왜 태풍은 매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전 역사적인 복잡한 인과가 인다라망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어쨌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태풍 또한 이 세상에, 이 곳에
꼭 필요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여여하게 이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 더 많은 태풍이, 폭우가, 지진이, 해일이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릴 지 모른다.
지금까지 있어 온 기상이변들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거대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대자연 존재계의 본질에서 보내는 지구를 위한 자비로운 힌트일 지 모른다.

여전히 신은,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 혹은 힌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공업(共業)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짓다보면
인과의 결과 이 지구는 결국 그 당사자인 인간들을 훼손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공평한 인과응보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면들은
바로 그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개발지상주의에 빠져 전 지구를 파헤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강력한 힌트를 존재계의 본질에서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아채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욕심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그 힌트를 무시하고 있다.

대자연이 보내는 자비로운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상이변이며 대형 태풍들이 불어닥칠 때
그 힌트를 알아채고 곧장 본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대자연을 훼손시키지 말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이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대지의 생명이 둘이 아니란 자각으로써
조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만족하며,
욕심을 줄이고 집착을 버리며,
대자연의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몸살을 동체대비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려 어리석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태풍으로 계곡이 무너졌다고
콘크리트로 계곡을 반듯하게 바를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전국의 모든 하천들은 예전의 생명하천이 아니다.
모두가 반듯반듯하게 콘크리트 등으로 인위적으로 쌓아 놓아
작은 하천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죽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든 하천은 깨끗해졌다.
흙도 별로 없고,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그 안에 깃든 하천 생명들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죽은 물이 흐르기만 하는 기능성 정비 하천이 되어 버렸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그런 하천 풍경을 보며 개발되어 좋다고 말한다.
너도 나도 우리 동네 하천도
그렇게 포크레인과 거대 자본으로 개량해 주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죽은 하천을 바란다.
그것을 깨끗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개발과 발전의 이기이며 축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인위적인 정비 하천을 보며 물도 맑아졌고
물길도 구불구불하던 것이 잘 펴졌으니
이만하면 환경 정비가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자연 하천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온전하다.
그래야만 사람도 살고 그 물에 물고기도 작은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모든 개발 정책은 최우선에 생명을 두어야 한다.
하찮게 보이는 생명이 살아나야 인간 생명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곳 성인봉 아래 나리분지 가기 전의 무너져 가는 계곡도
그걸 살리겠다고 지금 곳곳에 포크레인과 대형 장비들이 들어 와
계곡에 새로 튼튼한 인위적인 벽을 쌓는 현대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반듯하게 쌓아 올린 인공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니
더 깔끔해 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언가 산과 나무와 계곡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진리에 걸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비와 정화를 스스로 해 낼 것이다.
인간의 해석과 장비를 들이대니 그것이 병인 것 처럼 보이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만히 놔두었을 때,
자연의 일은 자연 스스로에게 맡겨 두었을 때
자연은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의 현실이 애초부터 사람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되다보니
한 번 사람 손이 간 것들은 이제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에 길들여 져 복구가 되어야지만 되도록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한 곳들도 있지만,
그런 곳이라도 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그 방법이 전면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병이 없다.
자연 속에 깃든 모든 존재는 병으로 앓지 않는다.
유독 인간들만이 병으로 고생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들만이 인간의 병을 닮은 온갖 병들로 고생한다.

자연이 병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게 병이 아니다.
변화의 한 모습일 뿐.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겉모습도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인간이 보기에 병들어 보이는 것도
가만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치유된다.

저 성인봉 아래 하천을 정비하겠다는 모습만 보더라도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리어 흉측하게 바꿔 놓았다.
한 번 인위가 개입되면 그 때부터는
작은 상처에도 인간이 개입되야 하고, 온갖 기술과 장비,
돈과 인위적인 노력이 따라 들어와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어리석은 일들이 점차 우리 주위에는 늘어가고 있다.

이 늦가을, 하천 정비 공사장 곁에는
6, 7월에 피는 섬바디 하얀 꽃이 계절 감각을 잃고 피어올라 있다.

더 아래 나리분지 가까이에는 또 하나
한창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꽃도 유독 한 나무에서만
빠알간 생명의 숨결을 틔워올리고 있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울릉도 전통 가옥이라는 투막집 몇 채가 보이고



나리분지 쪽에는 너와집도 몇 채 보인다.



요즘 흙이나 통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에 대해 관심이 가던 터라
유심히 관찰하며 투막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울릉도의 자연에서 나온 흙과 나무 그리고 볕집들이
조화롭고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역시 옛 사람들의 자연스런 지혜는
인위적이기 보다는 무위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선지자의 그것이다.
옛 것을 보라.
어느 것 하나 파괴되거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고,
또 실제로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은 그런 옛 것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기도 하고
또 옛 것과 새 것을 잘 공유시킨 의식주 물품들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유행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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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 |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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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투명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푸르른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이제 본격적으로 설산의 초대를 받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다시한번 추스르며
삼보일배를 올리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조붓한 발걸음을 옮긴다.

탐세쿠, 캉테가(kangtega) 영봉들이 연이어 마중을 나오고
설산의 빙하가 녹아 흘렀을 남빛 계곡물이 길벗이 되어 흐르며,
이 믿기 힘든 풍경 위로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계곡마을이 펼쳐진다.

아! 이것은 한 폭의 그림,
어찌 이 속에 애살스럽고 어루꾀는 천박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겠는가.
그를 애워싸고 있는 둘레 환경은
곧 자기의 분신처럼 업의 투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 사기꾼이 많다면
그것은 곧 내 마음에 사기의 업이 있는 것이고,
내 주변에 나를 돕는 이들이 많다면
나의 마음 한 켠에 이타심이 춤추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상황도,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환경도
사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외적으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내 앞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천국일 수도 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

똑같은 조건, 똑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이는 지옥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바뀌면서 세상 자체가
그 어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개벽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이 바뀜을 의미한다.

똑같은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면 독이 우유로 바뀌고 불행스럽던 현실이 행복으로 바뀐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주변 환경은 그 속의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그 주변 환경을 바꾼다.
모든 것은 상의상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곳은 그 풍경도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풍경 덕분에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그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소식!

큰 산이 큰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반대로 큰 사람이 그 산을 위대한 산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큰 산, 명산, 명당 자리에서 위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산에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그 산이 거꾸로 성스러워지는 것.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쿰부 계곡 자락에
어찌 마구잡이로 시류에 휩쓸린 사람들이 깃들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와중에도 희말라야의 성스러운 품어줌과 길들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에고와 아집의 길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세상 어디에나 돌연변이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가지는 또 다른 역설이요,
어쩌면 그 또한 꼭 필요한 더 깊은 차원의 다양성이고
삶이라는 연극을 위한 필수적인 신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밴커(Bankar)와 몬조(Monjo) 마을을 연이어 지난다.



마을을 정확히 관통하는 마을길을 따라 걷자니
아기자기한 집들과 지붕 위에 흩날리는 룽다,
그리고 집집마다 작은 돌담을 쌓아올려 밭농사를 짓는 모습들이
새삼스런 진풍경으로 다가온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배추잎사귀며
흡사 상추나 쑥갓을 같은 소담한 초록빛 채소들이
어쩌면 저렇게 싱그러울 수 있는지,
저 평범한 채소들조차 이 희말라야 대자연의 품 속에서
그 기운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저들에게서 마구마구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나른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집 앞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지나치는 여행자들을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밥을 짓는 것인지
집집마다 하얀 연기를 뿜어올리며
여행자의 가슴에 고향의 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머얼리 하얀 구름 테를 두른 캉테가가 올려다 보이는
몬조 마을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림 같은 마을 풍경들이 계속된다.

 



몬조 마을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르살레를 조금 못 미쳐
퍼밋과 팀스를 체크하는 조르살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팀스(TIMS, 트레커 정보운영 시스템)는
카투만두에서 미리 준비 해 와야 하고
퍼밋(Permit, 입장허가서)은 이 곳에서 직접 발급을 받을 수 있다.
잠시 팀스와 퍼밋을 체크하고 숨을 돌린 뒤에 곧장 조르살레로 향한다.



이른 점심을 조르살래의 빛이 잘 드는 식당에서 가볍게 먹고
오후의 여유를 즐긴다.
부서지는 햇살이 온 세상을, 순례자의 얼굴을,
한 포기 이름 모를 풀을 향해 축복을 내린다.
이 투명한 여유와 평화로움을 시끌시끌한 식당 앞 뜨락에서 가만히 누려본다.

지텐이 너무 이른 식사라 조금 더 가다가 점심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앞으로는 남체까지 전혀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이 없다고 하더니
역시 점심 이후에는 그동안의 나지막한 계곡이 완만함을 뛰어올라
폭포 같은 거친 가파름으로 바뀌더니
인간의 길 또한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고 있다.

 



호흡에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한 숨 한 숨 지켜보는 걸음걸이로 오르막을 오른다.

이 높은 계곡 중턱에 아찔한 출렁다리 위로
사람도 건너고 야크도 건너고 룽다와 산골 시린 바람도 함께 건넌다.

 



그 오금이 저려오는 절벽 위 출렁다리를 중간 쯤 걸어갔나 싶은데
저 쪽 반대편 끝에서 야크의 육중한 행렬이 이어지는게 아닌가.
이 비좁은 흔들다리 위에서 야크와 마주치는 운명이라니.
다리 위로 펄럭이는 룽다가 점점 거세진다.



계곡의 바람치고는 너무 거칠다.
아슬아슬 다리를 건넜는데 이번엔 이쪽 야크 떼와
조금 더 규모가 큰 저쪽 야크떼가
내 바로 앞에서 비좁은 길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싶어
그 가파른 산자락을 숨도 안 쉬고 아슬이 야크떼를 피해 뛰어오른다.

 






그리고 이윽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발 한 발만을 숨과 함께 내딛다 보니
어느덧 남체의 그림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이얀 설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하게 부채꼴을 이루며
마치 야외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쿰부지역 제일의 마을이자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의 전초기지,
바로 남체바자다.

마을의 입구에는 티벳과 가까운 마을임을 알려주듯
티벳불교의 스투파와 스투파 주위를 감싸며 휘날리는 룽다와 타르초가
여행자를 반기듯 맞아 준다.

가려고 했던 시설 좋고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다던 유명한 롯지는
오전에 이미 꽉 차고,
조금 허름하고 오래되었지만
지텐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롯지가 있어 그리로 방을 정한다.

이 산중에서 하룻밤 싱글룸이 200루피,
지텐 친구라고 특별히 할인하여 150루피에 얻었다.
약 2,000원 남짓하는 돈이니 시설은 허름하지만 가격대비 재법 만족스럽다.
이렇게 거의 모든 롯지가 방값은 200~300루피를 오르내리지만
한 끼 밥값도 똑같이 200~300루피를 심심치 않게 넘어선다.
그도 그럴 것이 방에는 침대 하나 달랑, 희미한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난방이며 전기 충전시설, 화장실이나 욕조는 꿈도 꾸지 마시라.

물론 500~600루피를 생각한다면
몇몇 고급 롯지에서 묵으며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마음껏 전기 충전도 하며 호화롭게 묵을 수도 있다.
하기야 그래 봐야 우리 돈으로 7,000~8,000원 정도의 돈이지만
이 곳 네팔에서는 손을 덜덜 떨며 쓰기 어려운 돈에 속하다 보니
길 위의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의 큰 돈이 되고 있다.

작은 방에 짐을 풀어 놓고 잠시 남체바자의 시내를 돌아본다.
이 산중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마을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법 큰 마을이다.
어떻게 이 많은 건물들과 상점들과 다양한 물건들을 도로도 없는 곳에서
그것도 3440고지나 되는 고산 마을에 이렇게 지어다 날랐을까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길 없는 곳에, 그것도 걸어서 이틀을 꼬박 걸어 와야 하는,
그것도 루클라에 공항이 없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이삼일을 달려 와야 루클라에 도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체바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주로 트레킹 관련 장비를 팔거나 대여해 주는 상점들이 많고,
여행자들이 많다 보니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들도 제법 있다.
제과점이나 빵집,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에, 인터넷방,
국제전화가 가능한 인터넷 전화방, 책방, 편의점 같은 마트도 있고,
여행자들에게 현지의 티벳 전통 물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나 옷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점과 마트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잠시 마을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남체바자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건물들이 주로 롯지며 게스트하우스인데,
현대식으로 또 유럽풍으로 아름답게 지어 놓은,
그것도 최근에 지었을 법한 최신식 건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색색의 롯지들이 선명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풍경은 사실은 매우 낯선 풍경이어야 하는데
내 눈에는 낯설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아주 친숙하고도 설레는 친근한 마을풍경으로 다가온다.




 



산그림자가 일찌감치 슬금슬금 기어오더니 금방 마을을 뒤덮는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얕은 집 지붕 위로 야크똥과 함께
바로 그 곁에서 무슨 야채인지 나물인지를 말리는 풍경이 한눈에 잡힌다.
먹거리 바로 옆에 야크똥을 함께 말리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만
인도와 네팔을 한두달 다니다 온 나로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진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어둠이 완전히 내린 작은 시내 상점들이
모두들 흐릿한 불빛을 켜 놓고 막바지 여행객들을 호객하며
여전히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여행자들도 모처럼 큰 마을의 시내구경에
흥미로운 눈빛으로 거닐며
이런 저런 필요한 것들을 구입도 하고, 산책도 하고,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들을 빌리기도 하는 듯 밤풍경이 제법 활기차다.

 

 

 

 

 

 

 

 

 

다시 롯지로 돌아오니 롯지 식당이 여행자들로 꽉 차 만원을 이룬다.
그야말로 한 명 끼어 앉을 자리가 없다.
이럴 때는 지텐의 친구가 경영하는 롯지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텐의 친구인 20대 초반의 롯지 사장이
지텐 친구면 자신에게도 친구라며 의외로 후한 대접을 해 준다.

자신의 안방을 내어주면서
그곳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카메라 밧데리 충전비용이 한 시간에 200루피인데
모든 밧데리와 핸드폰, 전기기구를 몇 시간이든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특별 대접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내 작은 침낭을 보더니
두툼한 이불을 두 개나 가져다 주면서 따뜻하게 자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 작은 관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맙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뛰어든다.




Posted by 법상
지리산
주소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922-8
설명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며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산악형 국립공원
상세보기

그날 밤
많은 비가 내렸다.
쏟아지는 비소리,
또 빗방울이 숲 위로 내려 앉는 소리가
다소 거칠어 몇 번을 잠에서 깨어났다.

하기야 산사에서 살다보면
이따금 한밤 중 잠에서 깰 때가 있다.

주로 늦은 녘 울려오는 둔탁한 전화 소리이거나
아기 울음 소리 비슷한 도둑고양이 소리인데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똑같이 잠에서 깨더라도
혹 그로 인해 잠을 조금 설치더라도
기분 좋게 두 눈 뜨고 일어나
잠시나마 맑은 정신으로 앉아 있을 때가 있다.

바로 그날 새벽녘처럼
조금 거칠더라도 시원스런 빗소리가
이 청청한 산사를 맑게 씻어내리는 바로 이런 때.
한밤중 빗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면
내 안의 뜨락에도 맑은 비가 내리는 듯 하다.



한 밤 중
비 소리에 잠을 깨고
일어나 앉아 보셨는지...
그 웅숭깊은 도량의 한밤중 맑은 정취를 느껴보셨는지.



특히나 그날 밤에는 활짝 열어 둔 빗소리가
얼마나 청청하였던지 밤새 몇 번을 잠에서 깨어났는지 모른다.
이렇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쏟아붓는 비는 참 오랜만이다.

그치지 않고 몇 날을 계속해서 퍼 붓다 보니
처음엔 그리도 좋고 낭만적이던 빗줄기가
조금씩 찝찝함과 습한 여운을 주며
뽀송뽀송한 빨래 감촉이 그리울 때 즈음...
길을 나섰다.

한참 장마비가
온산하 대지를 흠뻑 적시울 그 때,
따뜻한 햇살을 그리다 그리다
한생각 돌이켜 보니
이 극성스럽고 그치지 않는 빗줄기 조차
정진하는 도반처럼 포근하게 느껴져
그래 이렇게 되었으니 한바탕 하나되어 춤이라도 춰 보자 싶어
쏟아지는 빗줄기를 길벗삼아 걸망을 꾸렸다.

사실은 작년 가을 지리산에 오를 때
비오는 지리산을 가슴 깊이 그리워 했던 그 인연이
이제사 마음 속에서 꽃망울을 틔우게 했던 것일 게다.

갑작스런 길 나섬이다 보니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
되려 그런 무성의가 이번 만행엔 알싸한 스릴이랄까,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턱 내맡기고 저지를 수 있도록,
그저 마음 내키는대로 거닐을 수 있도록
내 여행을 자유롭게 해 주었다.

별 생각 없이
빗 속에 내려진 결정이었고,
빗줄기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당연히 산을 택했고, 지리산으로 발길이 옮겨져갔다.

역시나 탁 저지를 땐
물 흐르듯 다 되어지지만은 않는 법.
하기야 방하착 하고 턱 놓아버렸을 때
턱 놓으니까 다 되겠지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건 법계가 아직 내 속의 작은 번뇌를 보지 못함이 아니겠는가.

철도 파업 기간이라고 해서
지리산으로 가는 기차가 발이 묶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툴툴거리는 버스를 타고
아래로 아래로 남원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화엄사 아랫동네까지 발길이 머물러졌다.

도착하니 벌써 날이 어둡다.
눅눅한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새벽 빗길을 여유있게 걸으리란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눈은 감고 있는데
마음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있다.
하기야 이 설레는 마음에 잠이 오겠는가.

또하나, 방에 들어오고부터
기다렸다는 듯 더 세게 몰아치는 빗줄기의 기세가
영 예사롭지 않은 것이
이 밤
길 떠날 한 외로운 여행자의 가슴을 후벼판다.

아. 이런 밤
이렇게 가슴 깊은 곳까지
울울적적 창연한 여울이 넘쳐날 때면
난 외로운 시인이 되고 고독한 명상가가 된다.
상상해 보라.
어느 누구인들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겠는가.

아마도 밤새 비가 내렸나 보다.
이 새벽, 창밖으로 들어오는 논밭의 풍경이며
그 위로 지리산의 위용이
마을까지 내려온 하이얀 비구름 안개와 어우러져
한 폭의 청청한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화엄사 계곡도 이만하면 꾀나 불었을테고
정상과 능선 쪽에는 바람까지 거칠게 불어올거고,
행여나 나처럼 반쯤 정신나간 빗속의 입산자들도
공원관리사무소 사람들 안내를 받아
다시금 내려오고 있을 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씩 잣아지는 빗줄기를 핑계삼아
화엄사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내 행세를 보고는
지나가던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서서는
“오늘 산행은 안 됩니다. 화엄사 가 봐야 못 올라가요”

화엄사로 오르려던 일정에 약간의 차질은 생겼지만
뭐 애초부터 어떻게 하겠다고 구체적으로 계획 한 바가 없던 터라
실망할 것도 없고, 답답할 것도 없이
왠지 모르게 저 산속을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 하나에 기대어 6시 성삼재행 버스를 기다렸다.

물론 버스는 왔다.
어지간 해서는 버스는 올라간다는
어젯밤 민박집 보살님 말씀을 귀담아 들은 것이 맞아떨어진 것.
버스 기사님께서
“성삼재까지, 그리고 걸어서 노고단산장까지는 가도
그 이상 종주는 불가능할겁니다.”
하시는 말씀이 오히려 왠지모를 희망을 품게 했다.

또 하나,
나같은 이상한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는데
왠지 모를 위안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 마음을 바라보면서
저 산을 나홀로 고독하게 걸으리란 그 마음이
어쩌면 그 이면에 일정부분 두려움과
또 면면에 누군가 산친구가 있겠지 하는 기대를 품고 있었음을
훤히 보게 해 주는 계기가 되면서
이번 산행의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풀풀거리면서 버스기사 아저씨의 능숙한 솜씨로
곡예를 하듯 비바람 속을 뚫고 잠시 후 성삼재에 다다랐다.
맨 먼저 훌륭한 준비로
아무리 거친 빗길이라도 문제 없을 것처럼 보이는,
덩치만큼이나 큰 등산가방을 둘러 메고
30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분께서 버스를 내렸다.

그 뒤로 어설픈 바지 반팔셔츠 준비 덜 된 등산가방에
아래에서 아침에 구입한 1,000원짜리 하얀색 일회용 우비를 쓰고
내가 뒤따라 내렸고,

내 뒤에는 20대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대학생들 3명이서 역시나 청바지 차람에 체크무늬 남방에
비가 금새 세어들어갈 듯 한 운동화를 신고는
정말 이 산을 종주할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준비성은 없지만
그 젊은 패기와 열정이 감격스러운 젊은 친구들이 따라 내렸다.

버스를 내리자마자
성삼재 주차장에 거칠게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잠시 스쳐지나간 생각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나. 돌아가야 되는거 아닌가’...

3팀이 버스에서 내렸지만
이 산하의 웅장함과 오늘 상황의 비장함 때문이었는지
아무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흔한 산길 인사말도 주고 받지 않은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리는 즉시 고개를 푹 떨구고 그냥 걷기만 한다.

노고단 산장에 다다랐더니
어젯밤 이 곳 산장에서 발이 묶인 사람들이
아침밥을 지어 먹고 있었는데
조금 쉬고 있자니 모두들 내려가자는 분위기...

그러거나 말거나
일단 길을 틀어막고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위안을 받고 재빨리 발길을 재촉했다.
조금 더 있다가는 아주 걸을 수 없을지 몰랐기 때문.

드디어 본격적인 빗속의 산행이 시작되는 것.
빗속에 산길을 걷는다.



어젯밤부터 기다려 왔던 바로 이 순간...
그러나 현실은 그 낭만과 설렘이란 단어와는
사뭇 차이가 나게 마련.
그러더라도 일단 저지른 것
분별이 올라올 때 그냥 놓아버리고 걷기만 했다.

막연한 분별심이 잣아지기 시작한 것은
노고단을 지나 한 30여분 정도를 걸었을 무렵.
임걸령 지역을 지날 때
내 마음 안에서 맑은 청정수가 흘러
지친 몸과 마음을 씻어주는 듯,
산하의 맑은 기운이 나를 감싸주는 듯 했다.



그 때부터
비바람도 간간이 멈춰서고
지리산의 위용을 한껏 뽐내며
그렇게 거기 서 있음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이 거대한 지리의 품 속에
나 홀로 비를 벗삼아 산길을 걷는다...
상상만 하더라도 이 얼마나 외롭고 무섭고 또 설레는 일인가.

외롭고 무섭다는 말은 내게 있어 참 좋은 말이다.
물론 그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외롭다, 무섭다는 단어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우린 어떤 단어에 공통적인 관념을 주입시켜 놓고
천편일률적으로 엇비슷한 해석을 해 버리는데
똑같은 단어라도 절대 같은 단어가 될 수는 없는 법.

사람마다 그 단어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고,
또 상황 마다 그 의미는 전혀 새롭게 다가올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참 좋은 단어가
어떤 사람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단어가 될 수도 있다.

내게 있어 ‘외롭다’는 단어는
벗어나고 싶다거나, 우울하다거나 하는 그런 ‘싫은’ 느낌의 말이 아닌,
내면의 뜰을 호올로 거닐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모처럼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며,
그 안에는 ‘고독’ ‘좌절’ ‘우울’ 보다는
당당함과 자유로움 또 평화로운 깨어있음이 내포되어 있는 말이기도 하고,
우뚝 선 내 삶의 주인공으로 걷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무섭다’라는 말 또한
‘두렵고 겁난다’는 의미 보다는
그 이면에 대자연의 경외감과
그 속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그런 내식대로의 말풀이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산 길.
한참을 걸어도 그 흔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 하나 찾기가 쉽지 않은
오직 바람과 비, 나무와 풀, 새들과 자연이
내 길에 벗이 되어 주는 이 외롭고 무서운 산길을 걷는다.



한참을 걷다 보니
그러면 그렇지 저 쪽 산 귀퉁이에
이 빗길을 감행한 또다른 벗들이 서 있다.
버스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내 시야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무슨 동화의 마법사 내지는
헤리포터에나 나올 법한 큼직한 자주색 비옷을 입고는
묵묵히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 참 듬직하다 싶었는데
연하천 산장에서 점심 즈음에 만나 보니
아버지와 아들 딸 참 다정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이다.



점심 즈음에 연하천 산장에 다다랐는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언제 비가 오기나 했었냐는 듯
잠시 꿈이라고 꾸고 있는 듯
하늘은 더없이 높고 푸르렀으며
햇살은 쨍~ 소리를 내면서 이 산하를 찬연하게 비추고 있다.

지리산의 날씨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곤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변덕이 심할 줄이야.



사람도 이 자연의 일부분이다 보니
화창한 날씨에 맞춰 내 마음도 화창하게 개어왔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그 마법사 가족과 함께 점심으로 라면을 삶았다.

마침 연하천 산장지기 거사님께서 함께 점심을 드시며
맛있는 반찬들도 꺼내 나누어 주시고
이런 저런 산에 사는 얘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산에 살다 보니 저 아래 내려가면
일주일을 못 버티겠노라고 그러시는데
대번에 맞장구를 치면서 깊은 공감을 하면서
이런 곳에 홀홀 외로이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고동을 친다.



산에 올라 약초를 케신다고 하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없어서 특별히 내 놓으신다며
약초 다린 차를 주전자로 한 통 꺼내 주시며
흐뭇한 표정으로 조금은 노곤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이신다.
그 모습 속에서 산사람의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산에는 꽃이피네’
한 권 가지고 온 법정스님 책을 건내드렸더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 어린애 같은 천진한 웃음이란...

배도 든든해 졌겠다,
예상 외로 햇살도 쨍 하고 비추어 주겠다,
더없이 행복한 마음으로
오후의 걸음 걸음을 시작한다.

난 이런 때가 참 좋다.
이렇게 걷고 있으면 그냥 걷고 있을 뿐
다른 그 무엇도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다.

걸으면서 저 아랫동네 사람 사는 이야깃거리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고
이미 지나버린 어제나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
머릿속을 어지럽힐 필요도 없이
그냥 지금 이 순간 걷기만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러면서
아무리 보아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
이 대자연 식구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걷는 길이 더없이 평화롭다.



산을 걷다 보면
그냥 머릿속을 또 마음속을 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애써 지금 이 순간을 관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마음의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대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좀 더 순수해지고, 좀 더 맑아지고
좀 더 근원적인 지혜에 눈뜰 수 있으며,
좀 더 평화롭고 자유로운 속 뜰을 거닐을 수 있다.

대자연 이 법계의 모습이야말로
아무런 시비 분별도 없이
오직 법계의 흐름에 턱 맡기며
온 자연 법칙의 인과에 턱 맡기며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산을 찾는 이유는
어쩌면 그 대자연의 맑은 심성과 하나되고자 하는,
이 법계에 턱 맡기고 자유로와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 너무 얽매여 온 인위적인 것으로 부터,
자연을 거스르는 것으로 부터,
콘크리트, 철근의 숲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이 자연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리라.



제발 이 자연 만은
그냥 그렇게 놓아둘 수 있었음 좋겠다.
사람의 손길로,
사람들의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그러지 않았음 좋겠다.

처음 지리산을 찾겠다고 했을 때 산 사람들이 했던 말.
지리산 보려면 하루라도 빨리 가야지
한 몇 년 더 지나면 지리산의 모습을 보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지금도 예전 지리산의 모습은 많이 사라지고
온통 사람들의 어리석은 손길로 많이 파손되고 있는 중이라고 했었다.

산이야 늘 그렇게 거기에 있을 터인데
지리산을 볼 수 없을지 모른다니...
그런데 직접 지리산을 몇 번 와 보니 얼른 이해가 간다.

당장에 작년 가을 왔을 때 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하고
눈에 뜨일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작년에는 오르기 어렵고 험하던 곳을
바위 사이를 억지로 올랐던
그래서 오히려 바위 한 번 만져보고
흙 한 번 더 만져보고 밟아보고 그렇게 좋았던 기억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곳들이 언제 공사를 해 놓았는지
철근으로 나무로 계단을 만들어 놓고
계단을 고정시키려고 흙을 파헤치고
또 그 큰 바위에 못질을 하고...

또 지난 해에 오래되었던 계단을
새로 고친다고 더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 놓아
눈살을 찌뿌리는 일이
이 지리산 전체에서 자행되고 있다.



물론 이런 일은 지리산에서 뿐 아니라
온 국토가 그렇고, 온 산이 그렇고
국립공원이란 곳은 죄다 그렇게 버려놓고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야
개발을 하고, 발전을 시킨다고 할 것이고,
이렇게 해 놓아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겠지만,
산을 찾는 사람들이
편한 것, 쉬운 것, 인위적인 것을 원해 산을 찾겠는가.

산을 찾는 사람들은
인위적인 것에 질려서 산을 찾는 것이고,
콘크리트만 밟고 살다가
흙한 번 밟아 보겠다고 산을 찾을 것이고,
개발과 발전에 질려서
야생스런 자연 속에 안기고 싶어 하는 것일 터인데...

모르긴 해도
몇 년이 지나고 나면
지리산을 오르기 한결 수월해 질 것 같다.
조금만 걷기 어려운 곳은
죄다 계단이며 오르기 쉽도록 사람들이 다 파헤쳐놓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좀 더 많이 찾아오라고...

그러다 보면 저렇게 산을 두 동강 내어
만들어 놓은 노고단 아스팔트 바보길도 몇 개 더 낼 것이고,
노고단이며 천왕봉까지 가만히 앉아 갈 수 있도록
케이블카도 만든다고 할 것이고,
산에 올라도 흙을 밟아 보기는커녕
철근이나 콘크리트를 더 많이 밟게 될 지도 모른다.

하기야 얼마전 기사에 따르면
지리산 온천지구에서부터 성삼재까지 오르는
케이블카 설치하는 계획으로 떠들썩 했었으니
그 날이 머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자연을 다 파괴해 버리면
우리가 결국에 어디로 갈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지구환경이 너무 많이 오염되어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제2의 지구를 찾는다고 한다.
개발이란 명목아래 지구를 다 오염시켜 놓고서
이제 우주를 오염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우리 사람들의 지식이라는 것이,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한심하고 당황스럽다는 것을
아직까지도 순진한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산다.

이 즈음에서 그만 해야지...
기분 좋게 지리산 얘기 하다가 잠시 흥분했다.

산을 걷다가 높은 봉우리를 만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제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한참을 넋놓고 앉아 있곤 한다.
그럴 때가 참 행복하고 차분하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구름 그림자가 이 웅장한 산위로
드문 드문 떠가고,
그 뒤쪽으로 저멀리 오늘 하룻밤을 묵을
벽소령 산장이 보인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다.
저 척박한 바위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저 높은 곳의 소나무들은
그 양분을 어디에서 받기에
저렇게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인지...



햇살이 비추다 보니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신기하게도
간간이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벽소령에 도착하고 나니
해가 가물 가물 저물어 간다.
저녁 공양을 짓고
밥은 다음날 아침에 먹을 요량으로
조금 태워 누룽지를 만들어 두었다.



산장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차분하고 조촐한 밤.
산이 이렇게 조용하니 고즈넉한 것이 참 좋다.

빨리 잠들 수 없는 마음에
밤 늦도록 산장이 바라다 보이는 언덕 한 켠에서
별을 보고 산을 보고 숨결을 느끼며 앉아 있다.

늦은 밤.
싸늘한 날씨에 오랫동안 앉아
저만치에서 별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
30대 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맙고 행복하고 좋은 일이다.

요즈음 난 혼자만의 행복에 잠겨 산다.
수행하는 기쁨, 차 마시는 기쁨,
그리고 이 대자연과 벗하는 기쁨.
이 행복을 함께 나눌 벗이 있다면
난 참 더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별을 보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분도 참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산이 좋고, 산공기가 좋고, 숲이 좋아서
병이 난 사람이다.

얼마나 좋았으면
2박 3일이면 충분할 산을
한 10일 가까이 머물면서 쉬엄 쉬엄 산을 느낀다.

나도 느끼는 것이지만
하루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 하고
몇 일 씩 산길을 걷는 것은 그 느낌이 많이 다르다.

하루 올라갔다 내려오려면
오르는 순간 벌써 올라가면 내려와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르지만
몇 일씩 산과 함께 있을 요량이라면
벌써 산과만 함께 있지
여타 다른 생각들이나 잡념들은 벌써 저만치 피해가기 때문.

그것도 모자라 산장에 들어가 잠자기 아쉬워서
항상 바깥에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잠이 드는 사람이다.

어젯밤에는 비오는 이 산에서
큰 바위 아래 작은 틈,
비를 겨우 피할 수 있을 만한 곳에서 잠을 잤고,
오늘도 남들 다 산장 들어가 있을 때
저 혼자 그 옆 숲 속에서 잠에 들 예정이다.

노고단에서 또 반야봉에서
또 저 천왕봉 바위 위에서 별을 보며
잠이 들었던 얘기들은
두고 두고 내 가슴에 아련한 향기를 피어오르게 했다.

저 원주민들 얘기가 떠올랐다.
서양 사람들이 원주민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더니
원주민들은 방안에서 잠을 안 자고
다 밖에 나와 하늘을 별을 바라보며 잠을 잤더라고 하던...

싸늘한 밤공기가
성성하게 깨어있는 수행자의 향기처럼 느껴진다.
맑고 청정하며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잠이 들기 어려울 정도의 알맞은 싸늘한 밤기운...

또다시 새벽이다.
아침을 든든하게 해 먹고는 천천히 발길을 내딛는다.

새벽 숲길이
아침 햇살을 받아 더없이 신비롭다.
극락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흡사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일 수 있을까.



좋은 길을 보면 참 기분이 좋다.
길이라는 것은
참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내가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좋은 길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중에도 아침 햇살을 듬뿍 머금고 있는 새벽숲길과
하루 해를 마감하며 뉘엿뉘엿 흩어지는
석양 빛을 뒤로 하는 오후의 숲길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한다.

떠오르는 아침 해와
지는 저녁 노을을
느긋한 마음으로, 차분한 마음으로
매일 매일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그림에 취할 수 있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되고자 희망한다.



아침 해와 저녁 해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참 여유로울 것이고,
또 소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난 그 사람에게서 하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법우님이
바람에도 제 나름의 독특한 향기가 있고,
아침 이슬이나 안개 또 저 노을에도 향기가 있고,
아침에도 또 저녁에도 향기가 있으며,
저마다의 모든 존재며 순간에 그 향기를 맡게 된다고 하시던데,
정말 그런 것 같다.

하늘이고 바람이고 구름이고,
또 새벽과 아침, 나른한 오후며 석양에도
또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게서도
저마다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때때로 사람에게서 하늘 향기를 맡고,
바람과 구름의 또 새벽이며 석양의 향기를 맡게 될 때
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숨결 속에 포근하게 안기고 있음을 느낀다.



차분하고 느긋한 걸음으로
세석에서 점심 공양을 챙겨 먹고서는
어김없이 촛대봉에 올라 한참을 앉아 있다.



한 두세시간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수없이 많은 모습의 지리산을 느낄 수 있다.

난 특히 지리산에 오르면
이 곳 세석평전의 촛대봉을 좋아한다.
이 곳에만 오면 한 몇 시간이고 그렇게 앉아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대자연의 경이로운 압도하는 순간의 사진이
내 가슴 속에 콱 박혀 있다가 솔솔 풀려 나오고 있다.

세석의 그 아기자기한 아름다움하며
잠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튀어나오듯 마주하게 되는
연하봉,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의 도도한 멈춤이
내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키면서 압도하고 있다.



그럴 때 난 감각을 잃는다.
그리고 그 순간 보여지는 것과 하나가 된다.
우린 이럴 때
법신(法身)을 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대자연 속에 또 내 안에 내재하고 있는
법신 부처님의 평화롭고 경이로운 숨결을 느끼는 것.

오후가 되면서부터
조금씩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한다.
맑은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덮치지 않나,
어디에선가 싸늘하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지 않나,
허하고 가슴 한켠이 싸하게 외로운 그런 날씨.

변덕쟁이 지리산의 날씨를
단 두어시간 안에 다 보여주는 듯 하다.
저 발아래로 세석평전이 드넓게 펼쳐지다가
어느샌가 채 1분도 안 되어서 구름이 다가와
내 주위를 한껏 감싸기도 한다.







자연의 변화가 이러하니
내 마음의 변화도 자연을 따라간다.

두어시간 앉아 있을 동안
이 앞길을 지나 천왕봉쪽으로 간 사람이
한손으로 꼽을 정도도 되지 않았으니
이렇게 조용한 지리산을 보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한참 후에 연화봉을 지나 장터목 산장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아무래도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항상 붐비는 산장 장터목에
대여섯 사람만 휑한마음 얼굴에 써 가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무언가 이상한 조짐을 눈치 채고 산장지기님께 여쭈었더니
오늘 밤부터 심한 비가 온다고
내일 새벽이면 산행이 통제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폭풍전야라고나 할까
금새라도 비가 쏟아질 것도 같고,
바람따라 오고 가던 구름들도 금새 내려앉을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몇 일 산에 묵을 요량으로 이렇게 있다고 하니...

내일 저녁 저 아랫마을 우리 밝은도량에서
일꺼리 하나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내려가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어 보인다.
6시가 넘어서 산장을 출발해 하산.

산을 좋아하는 사람,
숲을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며
꽃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없이 그리운 날.

그런 날에
옛 길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글을 마친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