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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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11강-

사성제와 십이연기(2)

 

 

1) 무명(無明)

 

말 그대로, ‘밝음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입니다. 지혜가 밝음이라면 밝음이 없는 상태인 어둠은 바로 ‘무지하여 어리석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연기의 진리를 모르기에 실재하지 않는[無我] 일시적[無常]인 존재에 대해 실재한다고 상을 짓고,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제법의 일시적인 형체를 ‘나다’, ‘너다’ 라고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상태가 바로 무명입니다.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은 번뇌를 낳는 근본 원인이며, 이로 인해 갖은 악업을 짓고, 그로 인해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행(行)

 

이상과 같은 근본무명으로 인해, 그것을 연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 하려는 작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행은,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업(業)이라고도 합니다. 업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날이 우리가 하는 생각, 말, 행위 하나 하나가 모두 그저 흘러가서 없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형성하는 힘이 되어 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에 업(業) 사상을 결합하여, 삼세양중인과설을 제시하고,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습니다. 업감연기설에 의해서 보면,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에 어리석은 마음[無明]으로 인해 행(行)을 지어, 그 행위, 업력에 의해 이번 생에 윤회를 하여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3) 식(識)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습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여섯 가지 식(識)이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제각각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을 느끼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 행위(行)로 인해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인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즉, 전에 보고[眼], 먹고[舌], 냄새 맡았던[鼻] 행이 아직도 잠재의식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 그 음식을 보면 예전에 보았던 것에 대해 인식(眼識)하며, 냄새 맡았던 식[鼻識], 먹어보고 느낀 식[舌識]을 떠올려, 식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의 해석으로 살펴봅시다. 앞에서 과거세의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행위에 의해 개체(個體), 즉 우리의 몸이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식별’, ‘인식’이라고 해석됩니다. 몸이 형성되자 우리는 무의식적인 습(習)으로 그곳에 ‘나다’ 하는 아상(我相)을 짓고, 따라서 ‘나다’ 라는 생각으로 인해 거기에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업감연기의 설에서 보면, 인간이 이 생에서 몸을 받자마자 그 업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몸에 여섯 가지 기관[六根]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각각의 식별[六識]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식의 여섯 가지 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의 육근(六根)과,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六境)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십이연기의 네 번째인 명색[육경]과 다섯 번째의 육입[육근]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 명색, 육입은 따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 항목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가 아닌 동시적인 것입니다.

 

4) 명색(名色)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인식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명색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육경 중 정신적인 것이라 함은, 여섯 번째 의식의 대상인 법경(法境)을 말하는 것인데, 의식의 대상인 정신적인 생각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명색을 오온이라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는, 오히려 오온보다는 육경을 명색으로 정의하는 것이 세 번째 식(識)과 다섯 번째 육입(六入)과 연관지어 설명할 때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앞의 장에서 일체의 구성을 십팔계로 살펴보았습니다. 앞의 식, 명색, 육입은 바로 이 십팔계(十八界)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체의 구성요소인 십팔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주관인 감관[육근 = 육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육경 = 명색],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6) 촉(觸)

 

육입을 연하여 촉이 있게 되는데, 이 촉(觸)은 ‘접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촉은, 여섯 감각 기관인 안이비설신의의 육근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이 만나는 것이지만, 단순히 육입이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접촉으로 인해 육식이 일어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식, 명색, 육입이 서로 화합하는 작용을 바로 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성유경』에서는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 요소가 모여서 촉(触)을 만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삼화성촉(三和成觸)이라고 합니다.

 

7) 수(受)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달리 말해 ‘느낌’을 말합니다. 식, 명색, 육입이 서로 만나게[觸] 되면, 그 다음으로 느낌[受]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첫째는, 고수(苦受)라고 하여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괴로운 느낌이고, 둘째로, 낙수(樂受)라고 하여 즐거운 느낌을 말하며, 셋째로,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그런 느낌을 말합니다.

이쯤에서,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무명과 행이 과거세의 두 가지 원인이 되었음을 말했는데, 그러면, 그 과거세의 두 가지 인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세의 결과로, 식, 명색, 육입, 촉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세에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해 업[行]을 지었고, 그로 인해 현세에 인간의 감각기관이 생기고[六入], 그에 따른 대상이 생기며[名色], 그 두 가지가 만나 인식작용[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작용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네 가지는 현재세의 결과라고 합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따져 본다면, 식(識)이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명색(名色)은 아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심신(心身)이 점차로 발육하기는 해도 아직 오관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이고, 육입(六入)은 심신이 완전해서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가 모두 갖추진 상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촉(觸)은 어린 아기가 출생한 후 외계에 접촉함을 말한다고 합니다. 생후 두세 살까지는, 육근으로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현생을 살아가며, 죽기 전까지는 항상 식, 명색, 육입, 촉의 작용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므로, 위에서의 동시적이란 설명과 함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8) 애(愛)

 

수(受)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합니다. 애(愛)란,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즐거움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는 욕심이므로 욕망, 갈애(渴愛)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착심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증오심도 애(愛)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욕심의 욕망, 빛깔의 욕망, 빛깔이 없는 욕망”라고 하여 세 가지의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첫째는, 욕심의 욕망[욕계(欲界)의 욕망]으로,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욕심을 다 충족시키려는 것이고, 둘째로, 빛깔의 욕망[색계(色界)의 욕망]이란 물질을 한없이 갖고 싶고, 이성을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취착(取着)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셋째로, 빛깔이 없는 욕망[무색계(無色界)의 욕망]이란 물질도 갖고 싶지 않고, 이성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로,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대해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입니다.

 

9) 취(取)

 

애(愛)를 연하여 취(取)가 일어나는데, 이는 취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욕망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취착(取着)’이라고 하여, 취하여 집착하는, 올바르지 못한 집착을 말합니다. 앞의 욕망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심을 말합니다. 즉,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각 작용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아상(我相)이 극대화되는 것이지요.

취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취(欲取)로서, 다섯 가지 욕망, 즉,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여 갖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로 인해,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소유욕의 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견취(見取)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얽매여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 자기 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고 취하려는 욕망입니다. 이로 인해, ‘내가 옳다’ 라는 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계금취(戒禁取)로,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청정하고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따르려는 것으로서, 올바른 계율을 범하려고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몸뚱이에 대한 착으로 인해 몸뚱이를 편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어취(我語取)로, 내 견해, 내 말만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아상을 이르는 것이지요.

 

10) 유(有)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습니다. 유(有)라는 말은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되는 것으로, 이 또한 ‘업(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착하여 취하려 하므로 그에 따른 행위, 즉 업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지분에서 나온 행(行)도 업이라고 했으니,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행은 그 원인이 무명으로,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근본적이고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이 유(有)는 애(愛)와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은 태초에 처음 무명으로 인한 한 생각이 일으킨 근본 업(業)이며, 유(有)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편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에서는, 앞의 세 가지 애(愛), 취(取), 유(有)가 현재생의 세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결과로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생(生), 노사(老死)를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살아가면서 애착하고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업(有)을 낳고, 그 업력으로 인해 다음 생(生)을 받게 되며, 자연히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1) 생(生)

 

유(有)에 연하여 생(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유를 업이라고 했으니 그 업력에 의하여 생(生)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앞에서 고(苦)를 설명할 때 노병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생에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이처럼 생이 바로 노병사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12) 노사(老死)

 

생이 있으므로, 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인생이 괴로움임을 여실히 보시고, 그 원인을 하나 하나 살펴보신 것입니다. 그 결과 궁극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 근본무명으로 인해 한 생각 잘못 일으킨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끊으려면 밝은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명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모두가 생로병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분 중에서 괴로움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애(愛), 취(取), 유(有)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의 종류는 108 가지나 된다고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임을 올바로 일러주는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의 교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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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10강-

사성제와 십이연기(1)

 

 

부정의 논리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앞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오온과 십이처, 그리고 십팔계를 부정하여 공 사상을 천명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반야심경에서의, 부정을 통해 공을 드러내는 논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일체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고, 이어 현상계의 법칙인 연기법을 통해 현상계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차례로 섭렵하는 내용인 십이연기를 부정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의 모든 교설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인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리의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계의 올바른 중도적 관찰[조견]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은 모두가 현상계, 일체, 제법, 현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앞에서 ‘조견’을 설명할 때 살펴본 바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현상계 일체제법의 법칙[연기]과 속성[삼법인], 존재방식[업과 윤회], 그리고 이 모든 교설의 총설인 사성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 현상계, 일체, 제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그러한 구조로 이루어진 현상계에 대한 여타의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우선적으로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먼저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모든 교설에 대해 각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 사성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이연기를 먼저 다룬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원인의 진리인 집성제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연기를 알아야 하기에 우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일체의 구조에 대한 관찰을 하고, 십이연기의 교설을 통해 기초 작업이 끝나면 본론격인 진리, 즉 사성제에 대한 부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부정을 통한 참 진리의 드러냄에 대하여 살펴보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염두에 두고 지나갈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반야심경에 나온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교설로의 진정한 회귀를 위하여 방편상 부정의 논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십이연기, 사성제가 부정되는 반야심경의 경구를 살펴보기에 앞서,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십이연기, 사성제의 이치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성제와 십이연기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시키고, 그 실천법에 대하여 설해놓은 교설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다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온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다 네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이다.

 

“마라가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이웃들은 급히 의사를 불러 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쏜 자는 누구일까?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일까? 또 그 활은 어떤 모양일까?’

이런 것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라가야, 그는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마라가야,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인생의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야 한다.

마라가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설한 것은 설한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왜 나는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처음으로 설하신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입니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를 실천적으로 제조직한 교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부터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교설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고성제 - 괴로움에 대한 진리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 현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가만히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 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 라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제치고라도, 죽음의 고통을 봅시다. 우리는 마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나의 주위에서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실히 느끼기가 힘듭니다.

내 부모님, 자식, 친구, 친지의 죽음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당연히 괴로움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정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한부 인생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한가지 절대불변의 현실만을 관찰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은 죽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것,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나다’ 하는 상에서 오는 것, 즉, 오온이 치성한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에 대해서는 이미 ‘도일체고액’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2) 집성제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십이연기의 유전문)

 

앞에서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보아야 한다는 당연한 순서입니다.

앞에서, 괴로움이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모이고 쌓여 일어나기에, 한 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보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로 말미암는 것임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 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합니다.

집(集)이라는 말은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모여서 일어난다’ 는 뜻으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 하나 고찰해 본 것입니다.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으로 인해서 노병사의 괴로움이 생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병사라는 근본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씩 고찰해 들어가 보니 결국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깨달은 바를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문을 관하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관한다고 하여 순관(順觀)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란 사성제의 고성제에 대한 원인을 살펴본 교설로써 고성제에 대한 원인인 집성제를 살펴보는데 사용된 교설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 바로 사성제의 집성제의 바탕이 되는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의 해석 방법은, 근본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있으며, 부파불교로 오면 이러한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에 업과 윤회 사상을 대입하여 해석한 삼세양중인과의 업감연기를 통한 해석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을 경전을 토대로 하여 살펴보고, 그 뒤에 부파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경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그때, 세존은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한 번 가부좌를 하신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그러던 중, 초저녁에 연기를, 일어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처가 있고, 육처로 말미암아 촉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수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명부터 노병사에 이르기까지의 십이연기의 유전문, 즉 순관을 구체적으로 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법상



[현재 한국에 하나밖에 안 남아 있는 목조탑, 국보 55호 법주사 팔상전, 법당 내부에 부처님의 일대기인 팔상성도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전체 높이는 상륜까지 65미터로 현존하는 한국 탑파중 가장 높은 것이지요. 어느 절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절에 갈 때는 오후 5시 쯤 느즈막이 가도 좋습니다. 도량을 참배하다가 보면 저녁예불의 장엄한 모습을 잘 볼 수 있지요. 특히 요즘같이 낮이 긴 여름에는... ]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 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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