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나절,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름은 너무도 높고,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은 아름답고,

바다색은 너무도 짙고,

고개 들어 산을 바라보면 희끗희끗 눈덮인 산맥이 성스럽고,

그 청명한 하늘 위로 자유로이 갈매기 떼들이 떼지어 날고 있습니다.

 

아, 이 곳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여행이며 만행이고,

모든 걸음 걸음이 히말라야이며,

매 순간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입니다.

 

시선 가는 곳마다

영적이고

고요하며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빈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집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구나!

매일 매일 흙냄새 맡으며 걷고

바닷바람과 포구를 거닐으며

저 고요한 산맥을 벗삼아 살고 있구나!

 

 

 

 

휴가나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쉼, 설렘, 떠남, 평안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의미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휴가나 여행은

어떤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잠시의 멈춤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걷고

길 위의 모든 존재에 눈빛을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보내며

묵연히 걷기만 할 때

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눈덮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 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나는 지금 어느덧

히말라야 깊은 산 위를 걷게 됩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고 시린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는 어느덧

2,500년 전 붓다의 영산회상 한 켠에 앉아있는

그 성스러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있곤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이거나

생존경쟁의 장이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인도의 시골마을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우리의 삶이

그렇듯

고요하고 신선한

쉼이었고, 여행이었으며, 휴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혀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길 가에 앙상하게 피어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책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잠시 보고 읽는 것을 멈추고

호흡의 들고 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행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잠깐 TV를 끄고

그저 텅빈 빈 벽을 주시하며

내면의 아주 작고 여린 움직임을 관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중에,

하루 일과 중에,

익숙하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 잠깐

단 10초라도 좋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아주 낯선 시선으로

전혀 텅 빈 시선으로

속 뜰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멈춤’의 순간

위대한 신의 사랑과 축복이 깃들고,

붓다와 모든 성인의 깨어있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애써 한 시간, 두 시간 이상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절이나 선방에 찾아 가서

가부좌 트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잠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참선을, 명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을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애써 이름짓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그저 텅 빈 순수 그 자체이고,

깨어남이며,

모든 선각자들의 방법이었으며,

붓다의 방식입니다.

 

잠깐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휴가가 되고,

잠깐 숲으로 난 길을 걸을 때

그 순간이 곧 여행이 되고,

잠깐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지켜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명상이 되며,

잠깐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깨어남이 되고,

잠깐 내 앞의, 옆의 동료며 가족들을

편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때

그 때가 바로 사랑이 되고,

이렇게 잠깐 잠깐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볼 때

우리는 지금 이 자리가 완전한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명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수행은 근기가 높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너무 멀리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간다는 것에 너무 거창한 환상을 덧칠하지 마십시오.

 

본래 수행, 명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피나게 노력하고 애쓴 끝에

소수의 사람만이 경쟁에서 승리해 쟁취해 내는

그런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그간의 편견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고서는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 편견을 놓으십시오.

백일 기도, 천일 정진, 동안거, 선방, 철야정진...

이 모든 거대한 편견들이 수행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또한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어려운 길만이 가장 옳은 길이거나,

유일한 길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일상에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자주 자주 멈춤과 바라봄의 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쉽습니다.

아주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야말로

완전하고도 충만하고 꽉 찬

더 이상 얻어야 할 또 다른 힘을 필요치 않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래 있던

힘과 지혜와 사랑을

없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아주 작은 ‘멈춤’과 ‘봄’을 통해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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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행복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가득 채웠을 때 오는 행복과
또 하나는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이 그것입니다.

욕망을 가득 채워야 행복한데
그냥 욕망 그 자체를 놓아버리면
더이상 채울 것이 없으니
그대로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전자의 행복은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고
잠깐 동안의 평온을 가져다 주며,
유한하기에 헛헛한 행복이지만,

후자의 행복은
아무것도 바랄 것 없이
그대로 평화로운
무한하고 고요한 행복입니다.

모든 성자들이
'마음을 비워라'
'그 마음을 놓아라'
하는 이유는
바로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이
지고한 참된 행복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에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충족되었을 때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되고 싶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가만히 마음을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놈이
지금 이 자리에서 비워야 할 것들입니다.

비운다는 것은
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걸리지 않음, 집착하지 않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고,
결과에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음을 말입니다.

마음 비우기의 참 큰 매력은
비우고서 했을 때
그 때 정말 큰 성취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룬 성취는
이미 나를 들뜨게 하지 않는 평온한 성취입니다.
또한 설령 성취하지 못하였더라도
내 마음 비웠기에
아무런 괴로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채우는 행복
비우는 행복

자!
어떤 행복을 만드시겠어요?






그 어떤 경계가 닥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세요.
인정하지 못할 때, 받아들이지 못할 때
괴로움은 옵니다.

경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경계에 대한 분별을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생깁니다.
경계를 두 가지 극단의 분별로 몰아갑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있고 없고를 분별하기 전에
음식 그 자체로써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정했을 때 음식 은 그저 음식일 뿐입니다.
맛있는 음식이거나 맛없는 음식이 아닙니다.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면
음식이란 대상에 대해 맛 이 있고 없고 등의
온갖 분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며
그 분별은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맛이 없 다는 것은
이 음식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받아들인 다는 것은
인연따라 온 음식을 분별없이 그냥 먹는다는 말입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있기 때문 입니다.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어질 때
우리는 일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 다.

인정하지 못할 때
분별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은 시작되지만,
일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마음 은 대상에 상관없이 평온해 지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실체는 ‘인정하지 못함’입니다.
인정하는 순간 괴로움은 사라집니 다.

대장부 수행자는
다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건 받아들이고 저건 못 받아들인다면
그건 졸부의 못난 마음입니 다.

수행자는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경계라도
다 받아들이고 다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일이 바로 녹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과 편해지려는 마음입니다.

아상 은 끊임없이
내 몸뚱이 편해지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동의 근본은 편해지려는 마음입니 다.

사실 모든 행동은
편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편해지려고 하는 것이고,
사람을 만나 는 일, 무언가를 추구하는 일에서
사랑하는 일이며 잠을 자는 일 조차
편해지기 위한 일들입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바 로 이 편해지려는 마음을 닦는 것입니다.
편해지려는 그 하나의 목적으로 일을 하고자 하고
편해지지 않는 일들은 하지 않으려 고 애를 씁니다.

하기 싫은 일이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편하지 않게 하는 일들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우리 마음 은 편치 않습니다.
수행이 편해지려는 마음을 닦는 것이라 할 때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수행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수행은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행하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의 마음이란
‘절대 하기 싫은 것 하 지 않는’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고
우리 몸 편하게 하는 일만 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 은 온갖 번뇌에 휩싸여
내 안의 맑음과는 자꾸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게을러서 일찍 일어나기 싫고,
아침에 일어나 108 배 하기 싫고,
화를 내는 상대방을 따뜻하게 품어주기 싫고,
맛없는 음식은 먹기 싫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기 싫고,
그야말로 하기 싫은 일은 하기 싫은 것입니다.

생활 수행자라고 한다면
그런 하기 싫은 일을 찾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긴 해야겠는데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행이 몸뚱이 편 하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편한 수행을 찾는 것은
수행과 멀어지는 일이기만 합니다.

옛 스님들은 수 행의 어려움을
‘도를 구할 때 뼈를 부수어 골수를 뽑아내듯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꾸 쉽게 쉽게만 하려는 우 리 몸뚱이 착심을
잘 지적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수행이 잘 되는 날 수행 잘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며 그리 큰 공덕이 되지 못하지만,
수행 하기 싫고 수행이 안 된다 싶을 때
그 때 ‘싫은 마음’ 조복 받고 정진하는 것이
그것 이 참된 수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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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 가는 일만 연습해 왔습니다.
보다 빨리, 보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일에만 익숙합니다.

나아가는 일만이 나를 살찌우는 일이 며,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성공하게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이 너무 빨라졌습니 다.
너무 급해졌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무언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지는 것처럼 느껴집니 다.

한 순간도 ‘멈춤을 위한 멈춤’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하기야 어쩔 수 없이 멈추게 되었을 때 조차
가만히 온전히 멈춰 서 있지 못하고
무엇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니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가르침은 세상과 거꾸로 가는 법이 라 하셨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고
이제 멈추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수행이란 멈춤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잡으려 하고, 나아가려 하는 일에서
놓아버리고 멈추는 일로 바꾸는 일이 수행입니다.

멈춘다고 해서 도태되는 것 이 아닙니다.
멈추어 선 그 자리에도
우리가 원하는 행복의 가능성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멈추어 선 그 자리에
일체 만법이 다 녹아 있습니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며,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가운데 시방을 머금고 있으며,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 속에 무량겁이 다 녹아 있고,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한 그 순간의 한마음이 정각을 이룬다 하였습니다.

나아가야만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선 이 자리에서
지금 여기가 바로 온전한 ‘성취’ 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깨달음의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잠시 멈추고
고개들어 하늘을 바라 보세요.
바쁜 일은 없습니다.





방에 청소해야 할 양이 많다고,
언제 이걸 다 치우나 하고 걱정하지 마 세요.
결과에 마음이 미리 가 있으면 안됩니다.

다 치운 후에 깨끗해질 것을 생각하고 청소하면
깨끗해 져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청소를 하면서도 계속 벅차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냥...
순간 온전히 하나 하나 치우기만 하 는 것입니다.

이 순간 떨어진 장난감을
온전히 책상 위에 올려 놓는데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직 그 순간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널부러진 이불을 개고,
온전히 집중하여 휴지를 들고 휴지통에 집어 넣습니다.

온전히 순간 순간의 행에 집중할 뿐입니다.
결과에 마음이 머물지 말고, 오직 순간 순간 ‘할 뿐’입니다.
휴지를 드는 순 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이후에 깨끗해지기 위한 수단이 되어선 안됩니다.

집중하면서 청소를 하면
아무 리 양이 많더라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마음에 깨끗해 져야 하는데 하는
결과에 대한 마음이 놓여지기 때문입니다.

바라 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마음은 이미 바라는 바의 성취에 가 있지만,
바라는 바가 놓여지면 오직 순간 순간 이 최선일 뿐입니다.

단지 휴지를 들어 휴지통에 놓을 뿐...
떨어진 책들을 주울 뿐이고, 책장에 꽃을 뿐...
오직 매 순 간 순간이 온전한 목적이며 깨달음의 순간인 것입니다.
순간 순간 온전한 행이 되는 것이고,
온전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그냥 필요 한 것 말고
‘정말’ 필요한 것들 말입니다.
없으면 안 되는 것들 말입니다.

큰 집, 큰 차, 좋은 옷, 좋은 음식인가요?
그렇지 않 습니다.

차는 없어 도 살 수 있으며,
옷이 없어 도 살 수는 있습니다.
집이 없어 도 당장에 죽을 일은 아닌 것입니다.

정말 필요 한 것은
공기이고 물이며 대지이고 태양입니다.
공기가 없 으면 우리는 금방 죽게 될 것이며,
물도 태양 도 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환 경 오염이 극심해 오존층이 뚫려,
어쩔 수 없 이 공기를 돈 주고 사야 하는 때가 온다면
과연 값을 얼마로 해야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비 싼 값을 부르더라도 못 사서 안달일 것입니다.
돈은 없어 도 되지만 공기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 각해 보면
정말 필요 한 것들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 주고 살 필요도 없는 것들이지요.
우리가 돈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며 행복,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아무 리 많이 주더라도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아주 작은 행복이며 아주 사소한 것들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속에
정말 필요 한 것들은 다 들어 있습니다.
돈이 없어 도 우리는 이미 다 누리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말 필요 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사소한 것들에 더 많이 마음을 두고 삽니다.

어떠 어떠 하게 되었을 때,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그 때를 행 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가 장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정말 필 요한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
지금 이 순 간
행복의 모 든 조건은 이미 다 갖추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모습 그대로’
우린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Posted by 법상




외로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는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더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고개를 치켜들고 찾 아와
혼자있음의 고요를 방해합니다.

외로움은
가진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없 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린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움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혼자 있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느낌이 없다면
우린 쉽게 혼자 있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랬다면
아마 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었을 지 모릅니다.

외로움이란 느낌 때문에
우 린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자꾸 밖으로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혼자 있으면
도대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TV를 켜든가,
비디오를 빌려 보던가,
사람들 많은 곳을 방황하던가,
아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그런 일들 때문에
오랜만에 맑게 텅 비어지려던 내면은
다시 금 물들어 꽉 채워지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 그 속으로 들어가
온전히 느껴보고 하나 될 때,
우린 조금씩
내면의 참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늘상 밖으로 치닫는 사람은
내면이 헛헛하지만,
혼자 있음 을 즐기는 수행자는
맑은 향기가 충만합니다.

혼자 있어도
당당하고 초연합니다.

무언가 함께 할 때 당당한 것,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한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홀 로 있을 때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혀 줄 것입 니다.

외로움 속에서
혼자 있음! 그 속에서
우린 가장 순수해 질 수 있습니다.

혼자인 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참나에게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 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잡아함경]의 말씀입니다.
불법 을 믿을 것이지
스님을,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사람 이 변할 때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됩니다.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법을 믿고 부처님 을 믿으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과 부처님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파계를 하고,
원효스님이 속세로 돌아가고,
법 정스님이 대사찰을 소유하고,
원성스님이 결혼을 하고,
법상스님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은
한 치 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 공부는
한 치의 흔 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부처님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사람을 등불로 삼아선 안 될 일입 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둔한 범부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 은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쳐도
그것 때문에 공연히 근심을 더하지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 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고
그 모두를 버릴 줄 알아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울 뿐이다.

[잡아함경]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이 없다거나
늘 여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물 러 휘둘리지만,
지혜로운 수행자는
즉한 순간 관하여 깨어있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며
바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경계에 닦쳐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은 같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느냐
빨리 놓아버리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관하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빨리 놓아버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 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 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 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 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 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 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 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 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 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 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 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 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 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 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Posted by 법상
홀로 있다는 것은 외로움이나 고독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외로움이나 고독이란 느낌이 우리의 속 뜰을 더 생생하게 비춰 주고 우리 존재의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와 깊이를 가져다준다.

혼자 있다는 것은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한없이 충만한 것이다. 쉽게 생각해 보면 헛헛하고 외로워 보일지 모르지만 텅 빈 가운데 성성하게 깨어있는 속 뜰은 마구잡이로 채워 넣는 소유의 정신에 비할 바가 아니다. 홀로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함께 할 수 있고, 작은 나의 허울을 벗고 전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몸뚱이만 그저 덩그러니 혼자 있다고 해서 다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혼자 있으려면 번거로운 우리의 소유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잔뜩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많으면 우린 호젓하게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물로부터 소유를 당하며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휘둘리고 있는 소유란 물질적인 것들이 물론 포함되지만 돈, 명예, 권력, 지위, 배경, 학벌, 등등의 것들까지를 말하는데, 참으로 혼자 있는 법을 배우면 이런 것들이 있건 없건, 높건 낮건 우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자 존재하면서도 충만할 수 있는 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적인 것들이 많이 채워져야 충만하고 행복하다고 여긴다. 돈이며 명예 권력 지위 학벌이며 온갖 소유물들이 넘쳐나야 행복하지,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나 홀로 덩그러니 남으면 내 존재의 뿌리를 잃어버린 것 마냥 외로워하고 괴로워한다.

또한 이러한 소유물로부터 자유로워 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온전한 홀로 있음을 실천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가장 중요한 홀로 있음의 실천 요소가 남았다. 그것은 바로 정신의 홀로 있음이다.

아무리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살더라도, 온갖 소유의 울타리로부터 자유롭게 살더라도, 우리 머릿속이 온갖 번뇌와 탐진치 삼독심으로 또 잡다한 지식 같은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면 우린 참으로 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듯, 우리 정신 또한 온갖 번뇌며 숯 한 생각들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 머릿속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그 때 우린 참으로 몸도 마음도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번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래도 우린 누구나 이따금씩이라도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우린 당당해 질 수 있고, 내 안에서 충만하게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주변 상황이나 조건의 좋고 나쁨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그저 나 혼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이 숲도 봄이 되니 한겨울 외로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홀로 우뚝 서 있던 나무들이 이제 다시금 여행을 떠나려고 재잘거리고 있다. 겨우내 나홀로 이 추위를 맞이했던 이 나무들은 잘 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고 났을 때 또다시 함께 존재하는 풍성한 시간이 오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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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보성 녹차밭]

방하착 방하착 하였 더니 묻습니다.
‘다 놓으면 다 해결됩니까’
‘놓는다고 다 된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놓으면 된다 된다 다 된다’
저는 그렇게 말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속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되는 것과
‘참’으로 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분간하기 어렵 습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에서야
편하고 쉽고 이기심이 충족되는 쪽으로 일이 흐르면
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참으로 되는 것이란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거짓나의 생활에 익숙해 있기에
거짓나의 마음이 충족되고, 거짓나가 행복하면 그만입니 다.
그러나 거짓나의 충족과 참나의 충족,
거짓나의 되는 것과 참나의 되는 것은,
어쩌면 때로는 상반되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 다.

거짓나의 입장에서는 안 되는 일이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본래 마음자리의 입장에서는 되는 일일 수도 있는 노릇입니 다.

된다는 말은 본래로 간다는 말입니다.
본래로 간다는 말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참주인공,
본래 마음 자리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마음자리, 참주인공 자리는
아무것도 잡을 것 없는 지고의 맑음과 고요함
텅 비어 오히려 충만한 모습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 속에
일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나’ 라고 내세울 것 없는 무아 속에
‘전체로서의 나’, 진아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마음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붙잡으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집착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없는 노력을 기울입니 다.
끊임없이 붙잡으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 다.

하나되는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되고 안되고도 없고, 잘나고 못나고, 잡고 놓음도 없는 자리입 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나툰 것입니 다.
우리 모두의 본래 고향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 추구하며 살아가는 궁극의 본향인 것입니 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자리를 바로 깨쳐야 합니 다.
그래야 모든 것이 본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습니 다.

그렇다면 마음자리를 깨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은 무엇이든 ‘잡는’ 마음이 며,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가 텅 빈 잡음 이전의 자리입니 다.
그러니 잡으며(집착) 살고, 잡음으로써 행복을 느끼며, 또한 잡아서 괴로운
그 일체의 잡음 즉, 집착심을 모두 텅 비우고 놓아버려
잡음이전의 본래 텅 빈 마음자리를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바로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 다.

그것을 ‘방하착’이라 이릅니다.
방하착, 놓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쉴 수 있습니 다.
잡아서 버겁고 무거운 마음을 놓음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습니 다.
진정 놓았을 때 우리 마음은 본래로 가는 것입니 다.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본래자리와 하나되었을 때
일체 모든 삶의 의문이 ‘참’의 가르침으로 풀립니 다.
도저히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던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 다.
금방 죽을 것 같이 느껴지던 병의 고통이 며,
돈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경제력에 대한 집착이 며,
사람에 대한 집착,
명예, 지위, 권력, 학력, 배경, 대학, 이 성...
이 모든 집착들을 놓아버림으로써
본래 자리에서 나오는 확연한 해답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 다.

놓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됨이 며,
‘나’를 잡고 사는 아상의 굴레를 벗고 부처님 생명으로 산다 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성 부처님’으로 사는 것입니 다.

괴로운 것도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요,
즐거운 것도 부처님이 즐거운 것이며,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철학, 이성, 지 식...
이 모든 것을 가지는 주체 또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 사사로운 내 욕심으로 가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 다.
일체 모든 것을 부처님께 돌려 놓으면 그만입니 다.
돌려 놓고 나면 본래 가야할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가게 됩니 다.

본래 있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기준에서 되고 안되며, 잘되고 잘못되는 것이 아닌
본래 마음자리에서 무분별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되는 쪽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되는 듯 보여도 걱정할 것 없 고,
되어지더라도 호들갑 떨 것 없습니다.
놓고 가면 그냥 그냥 살려지는 것입니다.
여여하게 함이 없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 놓고 살아야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 다 부처님 일이니 상관할 바가 아닙니 다.
다 놓고 살아야 본래마음이 사는 것입니 다.

어두운 중생마음으로 붙잡고 사니 힘이 듭니 다.
본래 마음자리로 살아 법계를 호령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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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대흥사 연못]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로우신가요?
이미 지나간 잘못되어진 일로 마음고생 하고 있진 않는가요?
앞으로 있을 막중한 일과 스트레스로 인해 답답하진 않으신가요?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
'일'로 시작하여 '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일' 속에서 행복을 찾고 또한 괴로움을 느끼게도 됩니다.
일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적성에 맞는 일인지,
돈 벌이가 괜찮은 일인지, 일하는 환경이 좋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지,
일이 잘 풀리는지, 할 일이 많은지, 일이 힘든지 재미있는지...
온통 우리의 삶은 일, 일, 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노는 것 조차 '노는 일'이 되니 말입니다.

이런 속에서
일이 잘 될 때는 '행복'을 느끼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괴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의 홍수 속에서
울고 웃고를 연신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듯 일을 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서 시작하여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디서 일을 할 것인지,
언제 일을 할 것인지, 왜 일을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수행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여 한번 돌이켜 보지도 않던 문제
즉 '누가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일을 하다니 당연히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가 누구입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일에 괴로움과 즐거움, 시비와 분별, 잘하고 못함 등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 '나'가 붙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한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일' 이라고 하는 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하면
자동적으로 일의 결과에 대한 시비가 생겨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왜 일을 하는지에 따라,
또한 누구와 하는지, 좋아서 하는지, 적성에 맞는지...
등등의 인연관계에 따라 숯한 시비와 분별이 생겨나게 됩니다.

밝은 수행자라면 그 어떤 일에도
'나'가 없어야 합니다.
나 없는 내가 함이 없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말은 나를 쑥 빼놓고
일체의 모든 일을 부처님께로 되돌려 놓고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안 된다고 괴로워 할 것도 없고
잘 된다고 행복에 겨워 호들갑 떨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부처님이 일을 한단 말인가.'
'기복으로 흐르는 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기에서 부처님이란
우리들 내면 속의 본래자리, 참나, 주인공을 말함이며,
일체 법계에 편만하신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통이 바로
'내가 한다'는 아상입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게 되면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칭찬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못했을 때의 열등감, 보다 잘 했을 때 우월감에서
남을 얕보는 마음, 나 잘났다고 하는 거만함,
못하면 괴로운 마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의 답답한 마음...
등등 수없이 많은 분별심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큰 일이 터져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이 되면
우왕좌왕 괴롭다 괴롭다를 연발하며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하는 일'이 되기 때문 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나의 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일을 함에
'내 일' 이 아닌 '부처님 일'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거짓 나의 일'이 아닌
참나의 본래자리에서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본래로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마음자리, 본 래자리에서 나온 일입니다.
주인공이라 해도 좋고, 한마음, 불성, 참나, 여래장, 참생명...
이름이야 뭐라해도 좋지만 그 한자리에서 나온 일임은 분명한 일입니 다.
주인도 없고, 내것 네것의 분별도 없고,
그저 텅 비어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왔건만
우리들이 내것이라고 분별하고 잡으려 하고
내 일로 붙잡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 니다.

그러니 본래 나온 자리, 그 근원으로 다시 돌이켜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온갖 시비분별과 갖은 숱한 일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에 또다시 내가 하게 되면 도리어 또 다른 업식만 더하는 꼴이 되고 맙 니다.

'나'만 쑥 빠지고 없어지면 됩니다.
나만 죽어버리면 됩니다.
더럽혀진 거울을 닦으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저절로 드러나듯,
탐진치에 물든 '나'를 비워버리고 나면
저절로 본래자리 참성품이 밝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부처님 일로 돌려놓고 나면 저절로 부처님 일, 불사(佛事)가 되는 것입니 다.

'불교 수행을 한다', '내가 수행자다' 하지 만
정말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정작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부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온전히 놓는 일 말입니다.

부처님께로 돌이켜 놓고 나면
이제부터 일체의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할 것도 없고, 좋아 날 뛸 것도 없습니다.
잘 되는 것도 부처님 일, 못 되는 것도 부처님 일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의 참생명 주인공은 이렇듯 어디에도 걸 림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밝은 주인공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써의 삶을 접고 부처님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 다.

'턱 놓고는 진짜 부처님 일로 되어졌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에서 돌이켜 놓았다 하면 이미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자꾸 생겨나는 의심이 되려 한생각 돌이킨 부처님 마음을 주저앉게 만듭니 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바치고 온전히 공양을 올리는 일,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억겁동안 중생마음을 닦고 닦아 언젠가 부처 마음 될 날을 기다리자니
얼마나 더디고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이 몸 그대로, 이 마음 그대로
이 자리에서 놓고 나면 그대로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한생각 돌이키면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을 녹이기 위해 나를 비우고
대신에 밝은 참생명 부처님 본래자리로 일체를 던져버리자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부처 되려고 닦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되어있는 부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부입니다.
부처님 되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부처님임을 믿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