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만 나도는 남편이 미워요


[문]

결혼생활 십육 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티격태격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너무 한심하고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제가 남편에게 바라는 건 별 게 아닙니다. 그냥 햇살 좋은 날 봄볕도 같이 느끼고 싶고, 대청소도 같이 하고 싶고, 같이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남편은 집보다는 밖에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무조건 남편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남편을 탓해야 하나요? 아니면 마음공부 재료로 삼아서 더욱 더 열심히 정진해야 하나요? 나름대로 생활 수행을 하고 있는데 아직 행복해지는 건 잘 모르겠네요.


[답]

수행자는 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그냥 놓아버리세요. 어찌 보면 수행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어려운 길, 더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근본에서는 그 길이 더 밝은 길이지만, 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안 보이는 어둠을 닦아야 하는 길이다 보니 그만큼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수행했는데 왜 행복이 찾아오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바로 욕심인 줄 알고 그것 또한 놓아버려 보세요.

        수행하고 마음공부 하니까 오히려 더 힘이 들지만, 그 이면에 마음이 평온해 지는 면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 열심히 하려고 삼천 배를 해 보면 참 힘이 듭니다. 그런데 마음까지 괴롭던가요? 몸뚱이가 좀 힘들어 그렇지, 절 하면서 괴롭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은 도리입니다. 삼천 배 할 때는 힘이 들고 어렵지만 삼천 배를 마치고 나면 몸뚱이 착심이 많이 떨어져 나가지 않던가요. 그 전에는 백팔 배만 하려고 해도 힘들었는데 삼천 배를 하고 나니까, 백팔 배 쯤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백팔 배 하기 싫은 업이 그만큼 떨어져서 이제 백팔 배 쯤은 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게 업장소멸이지 어디 엄청난 데서 업장소멸을 찾을 것도 없습니다.

        남편이 밖으로만 나돌지 말고 나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내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그냥 내 마음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만들어 놓고 나 스스로 걸려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우선 놓아보세요. 어떻게 그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하지 마시고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자식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도록 하세요. 본래 원만 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조선시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이라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그러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내 안에서 남편이 내가 생각하는데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고정 짓고 있으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내가 바뀌는 것이 가장 빨리 상대를 바꿀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고정관념이 이미 굳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고정된 관념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꾸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 식대로 맞추려고 하면 나만 힘이 듭니다. 주말에도 놀아주지 않고 밖에만 나가려드는 남편에게 짜증부리고 화내던 마음을 돌이켜 이해하려고 애를 써보십시오. 대인관계가 좋은 남편이라고 한번 칭찬해보면 어떨까요.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습니다.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요 마음공부의 열린 장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남편이 따라 변하게 됩니다. 내가 평온해지면 오히려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하는 아내에게 발맞추어 남편도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변해야 남편이 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방하착 해보세요. 더욱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남편은 십 년 동안 제게 말 못할 짐을 안겨주었고 저 혼자 그걸 다 감당하며 살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의 성격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으니 삶에 희망이 보이질 않습니다. 저는 그런 남편이 미워 싸울 때마다 힘으로 안 되니까 마구 욕을 해댑니다. 아무리 좋은 쪽으로 마음을 돌리고 대화해 보려고 해도 아무 말 없이 훌쩍 나갔다 며칠 만에 불쑥 집에 들어오곤 합니다. 이래도 그냥 저 혼자만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지요?

 

어떤 분이 질문하면서 저한테 그러시더군요. ‘그것도 업이니까 그냥 다 받아들이고 녹여야 한다는 말일랑 절대로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이지요.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지더군요. 왜냐하면 그 말은 벌써 '나' 자신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고, 스스로를 바꿀 용기도 지혜도 마음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업(業)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아무리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싶어도 잘 되지를 않는 겁니다. 자기 안에 딱 버티고 있는 고정된 관념들이 타파되지 않으니까 도무지 바뀌지 않는 겁니다.

수행은 먼저 '나' 자신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고 나 자신을 바꾸려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상대라는 존재는 그리고 이 세상이라는 곳은, 완전히 내 마음의 투영이고, 내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남편이 내 마음에 안 든다고 계속해서 욕을 하고 화를 낸다면 그것은 업이 똑같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면 도무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편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크고 무거운 업을 자꾸만 짓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건 절대 온전한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남편이 잘했고 보살님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변해야 상대도 변한다'는 이 지극히 원칙적인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어렵지요. 왜 어렵습니까. 그게 업을 녹이는 과정이라 어렵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의 본질은 본래 어디에 의지하지 않고도 내 스스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중심 잡힌 존재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고 깊은 근원의 그 어떤 힘이 내 안에 담겨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려 하지 않고 내 바깥 경계에서만 행복을 찾으려 한단 말입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그 마음을 놓아보세요. 왜 나라는 자주적인 존재가 남편에 휘둘려 남편이 변해야지만 나도 행복한 종속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까? 남편 상관 없이도, 주변 환경 상관 없이도 나 혼자서 당당하게 내 삶 위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 성격도 바꾸어야 하고, 툭 하면 집나갔다가 들어오는 것도 바꾸어야 하고, 이래저래 남편에게 바라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만 힘들어 집니다. 그 모든 남편에 대한 바람이나 기대를 완전히 포기해 보세요. 그 기대를 놓아버리면 먼저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바꾸지 못했는데 그걸 아직까지도 바꾸지 못한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바꾸기는 어렵고 힘들어요. 그러나 내가 바뀌기는 덜 어렵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바꾸는 것보다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 더 직접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입니다. 내가 바뀌면 남편도 저절로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내면세계의 영적 수준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 내가 사는 세계이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가족이나 남편이라는 업은 내 업식을 고스란히 본떠서 투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내 수준과, 내 업과 똑같은 가족을, 남편을 만날 수밖에 없도록 이 세상은 만들어 져 있어요. 그러니 돌려 말하면 나 자신을 평화롭게 변화시키면 내 주변이 저절로 평화에 물들 수밖에 없고, 내 안이 투쟁과 다툼으로 시끄러우면 내 주변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보살님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어요. 남편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 남편이 나에게 짐을 안겨 주었다는 생각, 남편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 이제 그 모든 생각을 돌이켜 놓아버리고 문제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은 그 모든 문제는 바로 ‘내 책임’이라는 사실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내 안에 무거운 짐을 받아야 하는 업이 없다면 남편이 나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 줄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그 어떤 요소가 저런 남편을 만나게 했으며, 내 안의 그 어떤 업이 남편과의 불화를 가져오게 되었는지를 돌이켜 내 안으로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문제의 화살을 나 자신으로 돌리고 나면 문제는 풀리기 시작합니다.

‘나부터 완전히 거듭나야 겠다’ ‘나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야 겠다’ ‘나부터 완전한 자비와 사랑으로 변해야 겠다’ 그렇게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마음가짐만 그렇게 한다고 현실이 쉽게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함께 하세요. 백 일 기도를 하시되, 바람을 가지고 하지는 마세요. 백 일 후에는 달라지겠지 하는 마음도 놓아버리고 다만 이 기도의 길이 진실에 이르는 길이며 평화에 이르는 길이고 업을 녹이는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백 일 후에도 안 되면 그 때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백 일 기도를 하시면 됩니다. 될 때 까지 하면 됩니다. 사람에 따라 백 일 기도만 해도 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또 마음가짐과 간절함에 따라, 또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백 일 기도의 반만 해도 삶이 바뀌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업의 무게가 너무 무겁거나, 간절하고 진실 된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백 일 기도를 몇 번이고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될 때까지 하십시오. 기도의 끝을 바라면서 하지 말고 그저 기도를 하기만 하세요.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은 모든 부처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업이 녹는 것은 아직도 멀었으니 너무 힘들다, 언제나 끝날까 하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은 지혜로운 성인들이 걸어 온 밝은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에 환희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모든 사람들에게 끝은 없습니다. 기도의 시작, 수행의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그저 시작한 그 마음이 깨달음의 마음이며 업장이 다 소멸된 마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예 기도 수행을 시작하면서 내 업장이 다 녹았다고 여기고 다 녹는다고 굳게 믿고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저도 수많은 법우님들도 많은 큰스님들도 계속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법우님도 그 길에 동참하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길입니까. 그 길을 어깨 나란히 하고 함께 걸을 수 있음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 누가 들어주나요] 중에서...





Posted by 법상




[1]

결혼생활 16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싸웁니다. 남편은 집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 남편을 어쩌면 좋지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편이 밖에 나가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안을 봐야지 밖을 봐선 안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지요. 본래 원만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놓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업장소멸의 기회요 마음공부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16년 동안이나 거사님은 변함없이 밖으로 나돌았고, 보살님은 마음 아파하며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셨으니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 고리는 보살님께서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좀 더 가정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그 마음도 놓아버리는 방하착의 수행 속에서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툭 하고 놓아보세요.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2]

아내는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불만을 늘어놓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내의 뜻을 거부하면 불화가 생기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 모든 것이 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해보지만 이렇게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이 모든 것이 내 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려 해 본다고 하셨는데, 과연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과연 아무리 괴로운 삶이라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풀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말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와 상대를, 또 나와 상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한 수용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 진실로 용서해 주고, 그 또한 내 문제이며,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변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3]

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내 문제를, 내 업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행으로 풀어갈 수 있겠는지요?

 

수행이라고 하셨는데요, 진정한 받아들임은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관(觀) 수행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혹 억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망과 화를 억눌러 놓고 있는 것이기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잠재워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관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힘들지만 다만 분별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절로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불만을 늘어놓을 때 내 안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라는 삶의 수행은 곧장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잘못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해, 또 아내에 대해 판단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나 불만투성이의 말들도 다만 어떤 공간 너머의 객관적인 관찰대상일 뿐 싫은 것, 나쁜 것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관수행은 그 상황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해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는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통찰의 관수행 속에서 근원적인 열쇠가 저절로 거사님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관수행은 언제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답변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월간 불광] 09년 1월호 '법상스님께 묻습니다' 중에서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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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생활 16년째인데 아직도 남편과 싸웁니다. 남편은 집보다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는 이 마음을 도무지 놓을 길이 없습니다. 이 남편을 어쩌면 좋지요?

 

남편에게 바라는 마음들을 그냥 다 놓아보세요. 그래야 내가 자유로워집니다. 지금 문제의 핵심은 남편이 밖에 나가 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안을 봐야지 밖을 봐선 안 됩니다. 남편을 통해서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그냥 나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어야지요. 본래 원만구족한 존재인데 왜 혼자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없겠습니까. 가족보다 친구들을 더 좋아하는 남편,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그 마음부터 우선 놓아 보십시오. 놓고 나면 잘못된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을 바꾸려고 하는 내 마음도 함께 놓여지게 됩니다. 그렇게 놓고 나야 남편도 바뀔 수 있는 것이지, 남편이 내가 원하는대로 바뀌어야 한다고 고집하면 바꾸기 더 어려워집니다.

사실 모든 문제나 고통스런 상황은 결코 외부에 있지 않아요. 남편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어떤 문제가 남편의 반응이라는 방식으로 튀어나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만난 것이 어떤 인연과 이유를 가지고 온 것인지, 그런 남편을 만남으로써 나의 어떤 부분이 정화되고 변화되어 가는지를 우리는 온전히 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경계는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돕고 있으며, 지금 이 상황은 고통이 아니라 업장소멸의 기회요 마음공부의 장이라는 점입니다.

16년 동안이나 거사님은 변함없이 밖으로 나돌았고, 보살님은 마음 아파하며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려 하셨으니 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제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때입니다. 그 고리는 보살님께서 남편을 탓하고 구속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좀 더 가정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그 마음도 놓아버리는 방하착의 수행 속에서 풀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툭 하고 놓아보세요.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2]

아내는 너무 많은 것을 제게 요구합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불만을 늘어놓고 잔소리를 해댑니다. 아내의 뜻을 거부하면 불화가 생기고,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물과 기름처럼 겉돕니다. 이 모든 것이 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려 해보지만 이렇게 포기한 채 살아가는 것이 옳은 일인지요?

 

이 모든 것이 내 업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려 해 본다고 하셨는데, 과연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이 과연 아무리 괴로운 삶이라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포기하고 좌절하고 풀죽어 있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렇게 소극적인 말이 아닙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나와 상대를, 또 나와 상대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을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을 완전한 수용하고, 상대방의 못마땅한 행동에 대해서 진실로 용서해 주고, 그 또한 내 문제이며, 내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네가 변해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것일 뿐이지요.

 

[3]

내 문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면 그 내 문제를, 내 업을 도대체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상황을 수행으로 풀어갈 수 있겠는지요?

 

수행이라고 하셨는데요, 진정한 받아들임은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관(觀) 수행이 정확히 그것입니다. 아내가 잔소리를 하고 불만을 늘어놓을 때 그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혹 억지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원망과 화를 억눌러 놓고 있는 것이기에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잠재워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억지로 받아들이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을 관하고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려고 애쓰면 힘들지만 다만 분별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저절로 깊은 곳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불만을 늘어놓을 때 내 안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이라는 삶의 수행은 곧장 실천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아내의 잘못과 불만을 있는 그대로 관함으로써 그 상황에 대해, 또 아내에 대해 판단을 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내의 잔소리나 불만투성이의 말들도 다만 어떤 공간 너머의 객관적인 관찰대상일 뿐 싫은 것, 나쁜 것이라는 분별이 사라집니다. 이처럼 관수행은 그 상황에 휘둘리거나 얽매이지 않고 그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해 줌으로써, 그 상황을 보는 지혜롭고도 자비로운 통찰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이제 새로운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통찰의 관수행 속에서 근원적인 열쇠가 저절로 거사님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 관수행은 언제나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삶의 답변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