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법계통화분
법계를 모두 교화하다


法界通化分 第十九
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 甚多 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 得福德多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법계통화란 법계를 모두 교화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법계를 다 교화하고자 하면 수많은 재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법계 즉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수 있는 칠보가 있어야 그것을 널리 보시함으로써 법계의 모든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것이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재물이 있어야 하고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널리 베풀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을 내었더라도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명절 때나 되어 불우이웃들에게 돈이나 물질적인 것들을 준비해 베풀어 주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곤 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고, 언론에도 공개해야 하고,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자 애를 쓴다. 물론 그러한 것 또한 유위의 복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진정 법계를 교화할 수 있는 무위의 공덕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이 칠보로써 보시를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가 될 수 있는가에 있다. 아상을 가지고 보시를 하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유위복은 될 수 있을 지언정 무위의 복은 되지 못하지만, 상을 여읜 무위의 보시를 한다면 쌀 한 톨을 가지고도 법계를 전부 교화하고도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에서는 참으로 법계를 모두 교화하고자 한다면 무위의 보시, 상을 여읜 무위의 행이 되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는가 하는 부처님의 질문에 수보리는 그렇다고 답변한다. 사람들이 자신이 번 월급을 가지고도 남을 위해 다만 얼마씩이라도 보시를 한다면 그것이 큰 공덕이 될 것인데, 하물며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얼마 전에 한 거사님께서 당신은 매월 월급을 받아서 매달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데 쓰신다고 하면서 그렇게 매달 보시를 하기 전보다 이렇게 매달 보시를 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하고 기쁘다고 하셨다.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렇듯 보시하는 마음 그 자체가 순수하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가. 자신의 재산 늘리기에만 여념이 없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려는 마음을 낼 수 조차 없을 만큼 자신의 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에 비한다면 이 얼마나 밝은 일이고 복덕이 되는 일인가. 아마도 그 사람은 큰 복덕을 받을 것이다. 베푼 것은 분명히 법계에 저축이 되었다가 내게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게나마 매달 베풀면서도 우리 마음은 얼마나 부자가 된 듯 기쁜가. 풍요로운가.

그러나 베푼 것에 대해 내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면서 상을 낸다면 그 때는 그 공덕은 입을 벌려 얘기하면 할수록 사라지고 만다. 완전한 무위로써, 그 어떤 상도 내지 않는 무주상으로 보시를 했다면 그 작은 돈이 법계에 고스란히 저축도 되고 이자까지 저축이 될 것이지만 입을 벌려 이야기 함으로써 벌써 그 복은 유위로 전락하고 만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보시하지 않은 것 보다는 보시하는 것이 큰 복덕이 된다. 그러니 다만 얼마씩 보시를 하는것도 이렇게 큰 복덕이 될진대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얼마나 큰 복덕이 되겠는가.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 모든 굶주린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리고도 남을 칠보로써 보시를 한다면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계에서는 이 순간에도 하루에 3만 5천 명의 어린 아이들이 기아로 죽어간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질병으로 기아로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 전체를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그 모든 생명을 다 살리고 먹이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이 어찌 작은 복덕이라 하겠는가. 수보리는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부처님의 답변도 그러하다. 그 인연으로 매우 많은 복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은 그렇게 답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복덕이란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은 많은 복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말해 복덕이란 복덕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복덕일 따름이란 말이다. 즉 복덕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따라 꿈처럼 환영처럼 신기루처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꿈속에서야 복덕을 많이 짓고 받는 것이 있겠지만 그것이 다 꿈일 뿐이지 꿈을 깨고 보면 복덕이라는 것도 짓고 받는 다는 것도 모두 텅 빈 것이 아니겠는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 그러나 그 복덕을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겨 그 복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된 복덕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많은 복덕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수보리도 여래도 그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는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내가 보시했다’는 상이 있다면, 그러한 유위의 보시, 유주상의 보시는 결코 많은 복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덕이 진실로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참으로 많은 복을 얻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많은 복을 지었다’라는 상에 빠져 있거나, ‘내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웠다’는 상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많은 복이 아니다. 유위의 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운 그 복이 무위가 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으며, 법계를 다 교화하고도 남는 복이 된다. 그랬을 때 그 복은 한량이 없다. 매우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듯 많은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 이유는 그 복이 진실로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복이 함이 없는 복이며, 무위의 복이고, 그 양을 셀 수 없기 때문에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로 많은 것은 ‘얼마만큼’ 많다고 표현될 수 없다. 얼마만큼 많다고 했을 때는 벌써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가정되어 있는 상태다. 그러니 정말 많은 것은 표현될 수 없다. 정말 많은 것은 어떤 틀이 없다. 어떤 틀을 정해 놓는 것은 유위요, 틀 없이 자유로운 것이 무위다. 그래서 정말 많은 복덕이 되기 위해서는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라야 한다. 어떤 틀도 없는 것이라야 한다.

텅 빈 허공은 허공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허공의 실체는 찾아볼 수 없다. 허공은 허공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허공이라는 것이 실제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떤 실체를 찾아볼 수 있고 눈으로 그 크기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을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허공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공을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복덕도 이와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실로 복덕이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복덕이라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많은지 적은지를 판가름해 볼 수 있다면 그것을 가지고 많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즉 유위의 복덕은, 아상에 갇힌 복덕은,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것은 유위로써 많을 뿐이다. 즉 더 큰 복덕 아래에서는 작은 복덕일 뿐이다. 그러나 무위의 복덕, 아상을 완전히 소멸한 복덕은 그 크기를 젤 수 없기 때문에 참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유위의 복덕으로는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더라도 많고 적음을 나누어 놓은 가운데 그 중 많은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많음이지만, 무위의 복덕은 많고 적음도 사라진, 복덕이 있고 없음도 사라진 절대적인 많음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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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의법출생분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 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 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 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 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법출생’이라는 이 분에서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경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상을 타파하는 이 경전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승함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수승함이다. ‘일체 모든 상의 타파’를 밝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 즉 불법이라고 하는 그 상 마저도 타파되어야 할 또 다른 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것이 불법이며, 금강경의 가르침이고,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상 또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듯 불법조차 모두 타파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 보기 앞서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말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할 뿐더러, 사찰을 지을 때에도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도량을 건축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요즈음의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있는 결과와도 불교의 우주관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서 있고 그 수미산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 이 칠산팔해(七山八海)의 가장 변방의 산이 철위산(鐵圍山)이고 철위산으로 둘러싸인 팔해의 마지막 바다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는데, 이곳이 북구로주(北俱盧洲), 남섬부주(南贍部洲), 동승신주(東勝身洲), 서우화주(西牛貨洲)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이 네 곳의 대륙의 지표면에 인간과 축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남쪽의 섬부주로 이 곳이 가장 살기 어렵고 박복한 곳이라고 한다.

한편 수직적으로 보면 인간과 축생이 사는 그 아래쪽 철위산의 밑바닥에 지옥과 아귀의 세계가 차례로 있으며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 사천왕천은 네 개의 천상으로 이를 다스리는 네 명의 천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그리고 사천왕천에서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는 33천이라 불리우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이 곳의 천주(天主)가 제석천(帝釋天)이다. 또한 천상계는 아니지만 공중에 아수라(阿修羅)가 있는데 이들은 항상 분노와 진심이 많아 인접해 있는 제석천의 천병(天兵)들에게 계속해서 싸움을 건다. 항상 지면서도 업이 그러하기 때문에 늘 전쟁을 일삼아 아수라가 사는 곳은 늘 정신이 없고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이 야마천(夜魔天)이고, 그 위에 차례로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이상의 여섯 개의 천상을 욕계육천(欲界六天)이라고 한다. 욕계란 식욕․수면욕․색욕과 같은 온갖 욕망으로 뒤덮인 세계를 말한다. 이 욕계의 하늘이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라 욕계 육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앞서 말했듯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이 살고 있다. 욕계 육천 위로는 색계(色界)의 18천이 있고, 다시 그 위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이 있다. 색계란 욕계에서와 같은 온갖 욕망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살아 있을 때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4가지 선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곳이며, 무색계란 욕망은 물론이고 물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4무색선정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수미산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28개의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계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수미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을 일 소천세계라 하며, 이 소천세계 1,000개를 모은 것이 중천세계, 또 이 중천세계를 1,000개 모은 세계가 바로 ‘대천세계’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 중천, 대천이라는 세 종류의 하늘세계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고 불리운다. 즉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로 그야말로 무량수 무량광 한량없는 크기의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칠보(七寶)는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보물로써 『아미타경』에서는 금, 은, 유리(다이아몬드), 파려(적백의 수정), 자거(백색의 산호), 적주(붉은색 진주), 마노(짙은녹색의 보옥)를 들고 있고, 『법화경』에서는 여기에 파려와 적주를 빼고 대신에 진주와 매괴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배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 가장 진귀한 보배인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묻는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유를 함께 말씀드리고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깊은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저 많다고 하지 않고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있다. 수보리는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그저 많다고 한다면 그 답변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는 ‘복덕은 복덕이 아니므로 복덕이다’고 하고 있다.

이 논법은 금강경에서 전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논리 전개법이다.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은 논리를 초월해서 지혜로써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논법이다. 어리석은 이에게 있어서 이 논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법이야말로 금강경의 ‘완전한 상의 타파’를 그나마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완전한 진리를 표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성립될 것 같지 않은 논법이 진리를 표현하는 금강경의 논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는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씀으로써 앞의 복덕과 뒤의 복덕성의 차별을 두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쓰여지는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금강경 논법을 조금 벗어나 있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의 해석은 ‘세존이시여, 선서시여, 그 선남자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공덕의 무더기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현장역,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 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구마라집의 의역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혜거스님의 강설에서 이해되었듯이 유위법으로써의 복덕과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즉,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은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많고 적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란 분명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는 금강경의 본래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앞서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의 해석에서처럼 ‘그렇게 보시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를 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은 유위법으로 보았을 때 공덕이지만, 무위법으로 보았을 때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상 자체도 타파되어야 한다. 앞서 4분에서 이해되었던 것 처럼, 보시를 하지만 상에 얽매여 보시를 하지 않았을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았지만 ‘이것이 공덕의 무더기다’라고 스스로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의 무더기라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덕이다라고 상을 짓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공덕의 비유를 드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 무량함을 말하고 계신다. 그 무량한 이유는 무주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상에 머물러 보시하고, ‘보시했으니 이것은 공덕이 될 것이다’라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많은 보시를 했으면서도 ‘공덕은 공덕이 아니다’라고 바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은 많은 공덕이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물질로써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덕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이처럼 복덕이 많은 것이니 물질적으로 많이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보시도 무주상이 되었을 때는 이처럼 큰 공덕을 성취할진데, 하물며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사구게란 앞의 제5분에 나왔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게송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 보니 네 글귀의 시적인 게송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사구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 반드시 네 구절로 된 경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지정해서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 경전 가운데 가르침을 잘 함축하고 있는 어느 한 구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제5분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구마라집 번역에서나 사구게로 딱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네 구절로 딱 떨어지지는 않는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무언인가. 앞서 언급한 칠보 보시의 비유는 그처럼 많은 물질적 보시를 하더라도 공덕이 무량할진데, 정말 소중한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보시보다는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할까. 그 답변이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법보시가 수승하고 공덕이 많은 이유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의 법을 얻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보시를 많이 행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정신까지 부유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시 중의 으뜸 가는 보시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니라 가르침의 보시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가르침의 보시 중에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하여 법상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타파해 주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아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나며, 상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깨달으신 분들이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상을 다 타파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역에서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만 맺음이 되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그 뒤에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현장역에서는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길, 모든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고 했고,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수보리여, 불법들이라는 것은 불법들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나니, 그래서 말해지기를 불법들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뒷 구절이 나와 있어야 비로소 아상타파를 위한, 공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금강경의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이 장의 맺음에서 왜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 다시말해 불법 속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흡사 이 말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불법만이 진리이며, 이 법만이 부처님을 나오게 한다고 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상을 타파하라는 불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불법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법 속에서 모든 부처가 나왔으며, 이 불법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 이 불법만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불법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 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법도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불교도 이름이고, 부처도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스승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상의 타파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 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어디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의 종교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다.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건 간에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종교인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았다 보니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 불교일 뿐,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이다. 그렇기에 진리이고, 그렇기에 일체 모든 존재의, 일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이며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상세계의 종교는 오직 ‘불교’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천상세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보고 있거나, 불교라는 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오해가 있는데는 불자들의 잘못이 크다. 불자들 스스로 ‘불교’를 틀에 가두고 그 틀 속에 많은 신자를 끌어 모으기에만 바빴고, 불법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어떤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했을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이름 하여 ‘불교’라고 이름 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의 불자, 수행자들은 간간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왜 불교신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자가 많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떤 하나의 ‘종교’로 가두어 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많이 포섭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의 신자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이고 생명이며 우주법계 그 자체다. 심지어 소나 돼지나 강아지조차 우리의 신도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구름과 바람과 하늘이 다 우리의 신도이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 원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신자이다. 그들이 우리의 신자이며, 우리가 그들의 신자이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서 그렇지, 이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대로 진리의 신자이며, 진리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도반들일 뿐이다.

이렇게 툭 터진 마당에 왜 억지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교신자와 타종교 신자로 나누어 놓고 불교신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라는 틀을 깨야 한다. ‘불법’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그 틀만 깨면 아무런 장애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일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불교신자라는 틀이 없으니 타종교신자라는 틀이 있을 것도 없고, 불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니 일체 모두가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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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정신희유분
바른 믿음은 드물다.

正信希有分 第六
須菩提 白佛言 世尊 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聞是章句 乃至一念 生淨信者 須菩提 如來 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着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着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정신희유’란 ‘올바른 믿음은 희유하다’는 뜻으로써, 이 분은 앞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말세의 중생들이 바른 믿음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수보리의 의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앞의 제5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 이 세상에 무릇 모양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그러한 사실, 즉 상이 상이 아니라는 진실을 바로 보면 곧 여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가르침은 그동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며,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며, 몸으로 감촉되고, 뜻으로 헤아려 지는 모양 있는 대상들에 얽매여 살아 온 보통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몸뚱이를 비롯한 온갖 모양에 의지해 살아가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코자 하고, 더 많은 지식들을 쌓고자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는 것도 허망한 허상일 뿐이고, 내가 소유코자 하는 물질이며, 배우고자 하는 공부며 가치관까지 일체 모든 상이 다 텅 비어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방식이 더 많은 상을 짓고, 상을 지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등 상에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그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상을 타파하라고 설법을 하시니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당황스런 가르침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수보리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비교적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 어렵고 깊은 깨달음이었기에 수보리는 문득 의심이 드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야 근기가 수승하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니 어렵더라도 잘 믿고 의지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만약에 정법이 쇠퇴할 미래세인 말세의 중생들이 더구나 부처님도 안 계실 때에 이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과연 잘 믿고 따르며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보리의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과 중생구제의 대서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에는 등장하지 않는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라는 번역을 넣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 역에서는 나타나는 것으로 이 곳에서는 이 문자이 들어가야 문맥이 더욱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넣어 보았다. 물론 구마라집 번역에도 다음 경문을 보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가 지나더라도 분명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러한 사구게 법문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잠깐 ‘후 오백세’를 살펴보면,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을 비롯한 한문본에서도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으나,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스님께서 해석하신 바를 따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500년 뒤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한 부처님의 법이 전파된 뒤부터 1주기를 500년씩으로 하여 총 5주기, 즉 2,500년 동안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는 설이다.
제1기는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정법이 가장 밝게 서 있는 때를 말하며, 제2기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로, 1기 때처럼 즉각 깨달음을 얻는 이는 매우 드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시기다. 제3기는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인 경전을 읽고 외우며 부지런히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많지만 선정을 닦고 참된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의 법력이 많이 감소되는 시기를 말하며, 제4기는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로써, 선정을 닦는 사람은 물론이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배우려는 사람들조차 줄어드는 시대로 이 때에는 공부나 수행은 없고 오직 사찰과 탑을 세워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기복불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5기는 말기로써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로, 불법이 거의 쇠퇴하여 복을 바라며 절을 짓는 등의 불사까지도 사라지고 오히려 절의 재산을 갖고 싸우고 다투며,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며 분열하는 시기다. 여기에서 말한 후 오백세란 이런 다섯가지 시기 가운데 뒤에 있는 오백세, 즉 제5기 말기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의 3가지 구분법으로, 정법시대는 부처님 멸도 후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여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시기이며, 상법시대는 그 다음의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이고, 말법시대는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가운데 말법시대를 후 오백세라고 한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금강경이 나온 시기를 고려했을 때 정법시대가 끝난 뒤의 상법시대가 후 오백세에 가장 적합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정법, 상법, 말법시대 구분을 이처럼 일괄 500년으로 하지 않고 경전이나 논서 혹은 해석한 스님들에 따라서 500년에서 1,000년까지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다. 다시 말해 후오백세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람들이 경전공부도 뒤로하고, 수행도 하지 않으며, 나날이 부패와 분열만이 있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법을 공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수보리의 질문, 이러한 후 오백세가 되면 정법이 쇠퇴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분열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 때에도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며 실천하여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으며, 앞의 사구게인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하는 등의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으며,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란 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인 삼학(三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모든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핵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를 지키고, 최상의 복인 깨달음을 실천하는 선정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깨달아 요달하여 지혜를 이루는 이 세 가지가 삼학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고(戒) 최상의 복을 닦으며(定)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김으로써 참된 지혜(慧)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으로써 후오백세의 말법시대에도 삼학을 닦는 청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부처님께서는 멸도 한 지 후 오백세가 되도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정혜를 닦으며 정법을 수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을까. 그 답변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꾸준히 남아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이다. 그 이유는 인연법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인연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佛]과 지은 인연,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수행하면서 지은 인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수많은 선지식[僧]과 지은 인연은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선한 인연의 뿌리, 즉 선근을 심되 과거 전생 또 그 전생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부처님과 그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수많은 부처님과 불법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까지도 불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생에 선근을 심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마음으로 선근을 심어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잘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아무리 험한 말법 시대가 오더라도 정법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 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상에 태어나 직접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고,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라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이 시대라고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란 몸으로써 나투신 화신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된 부처님이란 법신을 의미한다. 법신이란 진리의 몸으로써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써 진리이고 부처님의 몸이란 말이다. 이러한 법신을 바로 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나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겉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의 부처님, 또 일체 삼라만상 속에 깃든 부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부처님은 법신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가까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친견할 수 있고, 선근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을 부처님과 인연 짓듯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체 모든 업연이 선하고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만, 그 업을 짓는 주체인 몸과 말과 뜻이 맑고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 세상과의 인연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 당체인 법신과 인연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단순한 모습으로써, 화신으로써만 보면 안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실망감이 크겠는가.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을 짓지 못함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겠는가.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신으로써의 부처님과 많은 인연을 짓고, 선근을 맺어야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도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야하고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 놓치지 말고 좋은 인연을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선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이다. 일체 삼라만상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진리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밝은 눈, 정견의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내 이웃과의 인연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고, 나무 한 그루와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며, 대자연과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이 그대로 부처님과 맺는 선근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부처님과의 선근공덕은 지을 수 있다. 사실 진리를 ‘불교’ 속에 한정짓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불교가 아니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저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을 이름 지어 ‘법’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부처님을 올바로 따르고 수행하는 이를 ‘승’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며, 그러한 불법승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 자체에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진리는 있으며, 또한 부처도 있고, 참된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깨닫고 보니 그 내용이 불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이다. 일체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다만 불가에서는 그것을 편의상 이름지어 ‘불교’라고 한 것 뿐이지, ‘불교’라는데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만이 진리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틀에 갇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금강경 전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이다.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며 바람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첩첩 쌓인 푸른 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 하늘 흰 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 생명의 노랫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하는 말씀은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라 하여 ‘산하 대지가 그대로 진리의 빛이다, 즉 부처님 생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은 흘러가는 구름에게 설법을 듣고, 계절따라 변해가는 숲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다. 대자연은 늘 그렇듯 똑같이 우리 앞에 있지만, 어떤 이에게 그 대자연은 진리의 나툼이며, 부처님 법신의 표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천상의 뜰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별다른 감응도 주지 못하고, 그저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터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업장만 늘리는 곳이지만, 지혜로운 이에게 대자연은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공덕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선근 공덕의 장이라는 말이다. 따로 부처님이 출현하신 세계에서만, 혹은 절에 가서만, 스님들을 뵙고 법을 들었을 때만, 경전을 볼 때만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확연히 알고 우리의 모든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번뇌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비우고, 텅 빈 마음으로,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렇듯 모든 삶 그 자체를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삶으로 산 사람은 이러한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내 안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 혹은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문득 경전을 보고 내가 깨달은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났을 때 그 때의 환희심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경전의 글귀 하나만을 듣고도 분명 한 생각에 바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수많은 생을 부처님과의 인연을 지어왔고, 경전 공부를 하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그 부처님과 지은 마음공부의 공덕과 선근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신도님들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알려주려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떤 신도님들은 한 두번만 경전의 가르침을 말씀해 드려도 바로 이해하며 신심을 내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부처님과의 선근을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다. 똑같은 설법을 하더라도 곧바로 발심하고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바로 선근의 유무에 있다. 선근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설법에, 경전의 단 한 구절에도 발심하여 정진하지만, 선근이 아직 충분하게 맺어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더라도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아무런 깨달음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들어도 잘 모르겠거나, 설법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수행해야겠다는 대신심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법을 듣고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근 공덕이 인연을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 올 수 있다. 대충 대충 법문을 듣고 공부를 했더라도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더라도 모르는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신심이 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꾸준히 닦아 나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깊은 업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게 되면 한순간 불꽃이 타올라 뜨거운 신심으로 피어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수행이나 기도에 힘이 붙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욕심을 비우고, 집착과 번뇌를 비우고 텅 빈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시작이며, 도량을 찾아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찾아 법을 들으며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는 이 모든 일이 또한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겠더라도 퇴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공부인연을 맺으면 언젠가는 밝게 깨달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근을 맺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날이 분명 다가 올 것이다.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선근(善根)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해석하는데 큰 불편은 없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착한 법을 심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꾸살라인데, 이는 꾸사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로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 등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이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선지식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집중하는 정념(正念)의 수행, 관(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마음집중’이란 팔정도(八正道)의 정념이며, 근본불교 핵심 수행법을 망라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사념처(四念處)에 해당되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핵심 중에도 핵심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집중’인 사념처를 닦으면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며, 모든 악견을 없애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혜쌍수의 혜, 지관겸수의 관 수행이며, 요즘 남방불교에서 잘 알려진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인 ‘위빠싸나’가 바로 이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정신희유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선근, 선법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뒤에 23분 정심행선분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게송을 보자.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처님과 선근을 얼마나 심고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는 것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그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부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거나 알고 계시지 않는 것은 없다.
보통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에도, 108배를 하면서도, 하나 하나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꼬박 꼬박 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고, 절을 하는 내내 ‘남편은 진급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일일이 수많은 부탁을 드리곤 한다. 그래야지만 부처님께서 이 기도의 의미를 아시고 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 바라는 것들을 되새기느라 바쁘다. 한참을 말씀드렸다가도 조금 있다 보면 또 하나 생각나고, 집에 가다가도 또 하나 생각나고, 한참 후에 ‘아차 그것 하나 말씀 못 드렸구나’ 싶은 것도 생기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우리들의 인연과 업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바램도, 우리의 발원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미세한 분별심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왜 그런가.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자성부처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별이며 바람들을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 공양올리고 바치고 비울 것이지 그것을 애써 다시금 되새기며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번거로운 일이고, 오히려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온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람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람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有漏福)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無漏福)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이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 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한 글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이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다. 아상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며, 그러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고,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결국에 ‘아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이 끊어졌다는 것은 ‘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말은 다시 복을 짓고 받는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이며, 그랬을 때 ‘전체의 복’이 곧 ‘나의 복’이 되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루의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고 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인 사구게 글귀, 즉 법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내었는데 내가 청정한 믿음을 내어 무량한 복을 얻게 된 원인인 ‘법’에 대해서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으로 인해 청정한 믿음을 내었으니 자칫 법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상이 없다는 말은 자칫 법이 아니라는 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는 상에 머물러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있으면 진리가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에 집착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치우친 생각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큰 갈등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는가. 많은 종교에서는 그 종교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진리에의 집착’ 즉 ‘법이라는 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라는 집착’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있다.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천주교에도, 알라신에게도,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에게도, 저 숲 속의 동물 식물에게도 진리는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할 때다. 특히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 깊은 ‘배타주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경향이 90%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30%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원주의’로써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배우고 협력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님도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성직자 활동을 하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직의 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 변선환 박사 같은 분은 유럽이나 미국 신학계에서 공부하면서, 지각있는 서양신학자 사이에 ‘기독교만’이라는 배타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를 선창하다가 신학교 학장직은 물론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변’을 맞으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에, 종교에 집착하는 일인가. 참된 종교요 진리라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진리라는 종교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어찌 어떤 특정 종교 안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에서처럼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전이나 부처나 신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툭 트여 자유로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성경을 미진하나마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만 그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성경만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담겨있는 깊은 뜻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진리의 숨결을 담고 있다고 본다. 실제 많은 스님들께서 성경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해 놓고 있으며, 또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불경에 대한, 금강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 정도까지만 해 두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 번역인데, 현장 역이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좀더 살펴보자.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에서는 상이다 상이 아니다 하는 그런 관념 또한 치우침이기 때문에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상도 없고, 법상도 없으며, 법상이 아님도 없고, 또한 상 그 자체도 없고, 상 아님도 없다고 함으로써 일체 모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 모든 집착과 모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고요와 텅 빈 적멸이 있을 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 티끌도 남김이 없어야 하고, 마지막 한 가지의 ‘상’ 또한 다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법상도 비법상도 상도 비상도, ‘어떤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면 다시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이 진리의 글귀를 듣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결국에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법상도 또 다른 아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상은 일체 모든 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도 함께 완전히 소멸될 것이지만, 만약 그 어떤 미세한 상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것은 그대로 아상이 생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집착을 한다고 했을 때, 집착을 하는 주체가 바로 ‘나’다. 집착이 생겼다 하면 그것은 벌써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상에 집착해 있는 것이며, 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도 일체도 모두 공한 마당에, ‘진리다’라고 붙잡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공하고 진리도 함께 공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일체 모든 ‘집착’은 다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진리도 놓아버렸을 때 진리이지 잡고 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도 놓아버려야 하고, 가르침도, 복도, 지혜도, 선정도, 깨달음도, 일체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이러한 표현까지도 나아가 일체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뗏목 같은 것이기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비유는 아함경에 나온 비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기슭에 서 계셨는데 강에서 한 젊은이가 뗏목을 어깨에 이고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더니 “이 뗏목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 뗏목은 내게 고마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불법을 뗏목에 비유하였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내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내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생로병사의 고해바다를 잘 건넜거든 내 가르침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환(幻)이다’라는데 치우친 사람에게는 본래마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치유해 주셨고, ‘마음이 실체다’라고 치우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마음의 공한 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써 치유를 해 주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해 주신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것이 진리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법도 놓아버려야 하며, 법 아닌 것들 또한 놓아버려야 비로소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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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18.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한 번 악행을 하고 나면 그 악행은 업습(業習)으로 자리잡는다. 업이 되어 언젠가 갚음인 보(報)를 가져오지만, 보를 가져 오기 이전에 습(習)으로 먼저 자리잡으면서 나를 따라다닌다. 한 번 악행을 하면 그것은 악한 습, 악한 습관의 흔적을 남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 번 할 때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이 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지 않는가. 악행이 바로 그렇다. 악행의 습은 또 다른 악행을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습관적으로 악행을 범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습관들어진 악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어느 때인가 그 갚음인 결과만 남기면 좋겠지만 이 악행은 결과를 남기기 이전에 우리 몸과 마음에 습으로 베이고 스며드는 것이다.

데바닷다의 반역사건은 부처님의 생애에서도 눈여겨 볼 아주 유명한 대목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세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악인의 전형이다. 데바닷다는 마가다국의 태자인 아자타삿투를 부추겨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하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렇게 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이제 불교의 승가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세 번 해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자객을 보내어 살해를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자객은 부처님께 감화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두 번째는 영취산에서 지나가는 부처님께 바위를 굴림으로써 부처님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세 번째로 코끼리에서 술을 먹여 부처님께 돌진케 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부처님의 앞에 이르자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이뿐 아니라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더욱 훌륭한 스승임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님의 계율보다 훨씬 강화된 다섯 가지 계율을 제시한다. 비구는 숲에서만 생활하며, 신도의 공양 초청해 응해서도 안 되고, 쓰레기로 버려진 천으로만 가사를 만들어 입어야 하고, 나무뿌리나 무덤 사이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며, 생선이나 고기는 전적으로 못 먹도록 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제시하였지만, 부처님은 이에 반대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데바닷다는 자신의 강화된 계율에 찬동하는 몇몇 젊은 비구를 이끌고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들 또한 사리불과 목건련의 교화에 다시 승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를 안 데바닷다는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뒤늦게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께로 향했으나 결국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길가 연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설법하셨다.

이에 반해 재산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수마나는 부모님께 배운대로 스님들께 정성스럽게 탁발 공양을 올려 드리면서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틈나는 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데, 결국 수마나도 결혼도 못 한 채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수마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사대 오온에 마음을 잘 집중시킴으로써 죽음 직전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을 지녔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설법하셨다.

악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을 살면서 온통 악행으로 인한 업습에 이끌려 계속해서 악업을 짓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안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업에 따라 고통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선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에도 즐겁고 죽음 직전에도 평화로우며 죽은 뒤에도 항상 즐거운 곳에 난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의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한 번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의 악행은 연이어 악행을 불러오지만, 초심의 선행은 연이어 계속되는 선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될 지라도 그것이 악행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선행이라면 반드시 저질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와 복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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