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카페] 법구경 핵심경구(4) - 소원이 아닌 발원, 훈습하는 공부 http://m.cafe.daum.net/truenature/MwGi/138?svc=cafeapp&sns=etc
Posted by 법상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골고 루 세상을 적셔 주듯,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의 비도(法雨)
온누 리에 공평무사하게 내립니다.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우를
우주 법계의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법 신 부처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충만한 성령이나 영성 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우주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말이야 무어라고 해도 상관없 지요.
그것에 인격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하느님, 부처님이라 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아무런 분별도 없고, 시공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저 그냥 충만하게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순 간' 과거 현재 미래가 고스란히 있는 것입니다.
공간이 라는 개념 또한
사실은 나와 너, 자연과 우주 이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법계 의 에너지도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지,
과거나 미래 혹은 다른 장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법 신 부처님의 힘이며, 성령의 강림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만 온전하게 빛을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 금 이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즉 온전히 지금 이 순간 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결정이나 고 민이나 분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 속에서
자성부처님이 그 삶을 진리로 이 끌어 갈 것이고,
가장 온전한 길로 안내할 것입니 다.

미래의 결정 때문에 고민할 일 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의 문제이며,
과거의 일들 때문에 걸 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걸리는 일인 것입니다.
오직 지 금 여기에서 집중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모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모 든 법계의 힘이며 에너지가 전부 주어집니다.
그럴 때 정 확히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필요한 것이 진리에 걸맞게 나 투어 지는 것입니다.


원할 것도, 바랄 것도 없고
오직 깨어있 으면 법계에서 다 알아서 해 나갑니다.
오직 지금을 살아가면서
나머 지 것들은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할 뿐
다른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 다.
[법구경]의 말씀에서 처럼
오직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 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참되게 굳은 관찰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法句經)]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 니다.
이 순간 깨어있을 때
우주는 나에게 무량한 힘 을 보태어 줍니다.
이 힘은 유위의 힘이 아닌 무위의 함 이 없는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문제라도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의 근본은
바로 법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법계의, 이 우 주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롭다고 혼자라 고 느끼는 순간에 조차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 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우주 법계로부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가져다 쓴다는 말도 모 자랍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온전한 지금 여기에서의 나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의 나는 그대로 법계와 하나가 됩니 다.

그랬을 때
좋고 나쁘고도 없고,
긍정 부정도 없는
무분별의 함이 없는 행이 이어지 며,
고스란히 진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 다.

아무런 분별이 없는 진리의 삶 이기 때문에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도 없고,
과보를 받거나 현실 을 만들어 낼 것도 없이
순간 순간이 그대로 진여의 나툼 일 뿐인 것입니다.

이 순간에는 앞뒤가 딱 떨어 져
과거며 미래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업을 짓는 일도, 업보를 받는 일도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행하는 나'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이,
오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고 가는 것이며,
놓았다는 생각 조차 다 놓고 가는 것 입니다.

바로 그 때
법신 보신 화신 이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 다.
그야말로 법대로, 여법(如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신명을 다 하고, 마음을 다해 살아가십시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것을 하고 있느 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 ]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 다.  
내 삶 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 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 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 로 오늘 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Posted by 법상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상세보기







생긴건 달라도
마음만은
밝은 빛을 꿈꾸는 도반이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화합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게 되 면
모든 재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라던 [숫타니파타]의 말씀처럼
우린 함께 밝은 한줄기 빛을 기다리는
영원한 도반
영민한 동반자입니다.

도반과 함께 맞이하는
설레는 새벽처럼

도반과 함께
어둠을 깨치고
깨달음의 밝은 빛을 보려합니다.

누구든 먼 저 깨달으면
그 깨침을 나누기로 한
그 옛날 밝은 수행 도반의 그것처럼

우리도...
그런 밝은 도반입니다.

도반의
구도의 길에
아침 햇살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가올
깨침의 밝은 빛처럼
그렇게 우 리 앞을 환히 비춰줍니다.




그냥...
바라볼 일입니다.

바라보면...
급한 마음 여유로 와 지고,
복잡한 마음이 고요해 지고,
산란한 마음은 평온해 집니다.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깊은 휴식을 가집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긴장에서 자유로워 집니다.

쉽게 성내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지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여유로와 집니다.

부드럽고 정갈 한 마음을 갖게 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긍정하게 되며,
겸손하여 하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 으며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고,
자기 중심 잡힌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판단에서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바른 견해(정견)을 만들어 줍니다.

바라볼 때
비로소 잊고 있었던
인생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바 라보는 순간이
깨어있는 순간이고,
열반의 순간이 됩니다.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
깨달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보기 수행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며
궁극에 밝은 깨달음을 가져 다 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은 미움의 뿌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집요송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 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사랑하는 방법은
집착을 두지 않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집착하 여 잡아두는데 있지 않고,
놓아주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만나거나 헤어지거 나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전재로 한 사랑이 아닌,
미움의 뿌리로서의 사랑이 아닌,
맑은 사랑을 하자는 겁니 다.

물론 밉다는 마음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사랑과 미움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도 괜찮 고,
미워하는 사람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일상이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하는 것입 니다.
턱 놓고 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도리가 나옵니다.

...

얼마전 김제동이 금강경이라고 인용하면서
위의 구절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사실은 법집요송경, 그리고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또 하나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이것 또한 금강경이 아니라
숫타니파타라는 오래된 불교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 니다.

하루에 얼마를
깨어있는 시간으로 사는가!
알아차리고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처음엔 알아 차림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냥 휘둘려 살아온
동안의 삶이 습으로 눌러 앉았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를 돌아보세요.
내 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관(觀)'이란 단어를 몇 개 만들어,
눈 가는 곳마다 붙여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눈이 머무는 잠깐의 동안 만큼은
깨어있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다른 모든 분별이며
일어나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순간 집 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되겠지만,
연습이 안 된 초보 수행자라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 보는 것입 니다.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알아차림이 끊어지겠지만,
고개를 들면
또다시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
바라보기 수행,
마음 집중의 수행,
깨어있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분명
조금씩 달라지는 나 를 볼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봉화 축서사]

24.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의 이름은 빛나고 축복과 존경은 늘어갈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탐하고, 자신에게 축복과 존경이 늘어가기를 원하고 있는가. 우린 누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하고, 축복스런 일들이 내게 많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노력하고 애를 쓰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 우리는 더 나를 드러내야 하고,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높은 지위나 권력, 그리고 부와 명성은 그대로 우리를 실질적으로 높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준다고 착각하고 있다. 높은 자리가 곧 높은 인격과 높은 존경과 높은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어떤 높은 자리가 그 사람을 높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명성이 그 사람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고, 많은 부귀영화가 그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재산과 명성과 부와 권력을 쥐게 되면 그로인해 우리 마음은 더 많은 욕심과 우월감과 자기가 잘났다는 아상(我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리고 그런 아상과 아집은 결국 내면의 정신적인 타락을 가져온다.

핵심은 외부적인 것에 있지 않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나 자신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많은 욕구를 채우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드높여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겉모습은 그럴싸해 보인다. 남들도 나를 칭찬하며, 나에게 잘 보이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점점 더 나라는 존재는 타인들과는 다른 월등한 높은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짜 자신의 본 모습과 겉에 드러난 모습 사이의 거리감이 생겨나고, 그 간격만큼 정신은 중심을 못 잡은 채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참된 존경과 축복은 그런 껍데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을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경 받을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존경은 그 행동에서 나오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축복 또한 축복받을 만한 위치에 올라갔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활이 축복받을 만 할 때 따라온다. ]

누구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함으로써 매 순간순간의 행동이 법다워 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된 삶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과 삶에 있지 어떤 자리나 위치나 상황에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세상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에 의해서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축에 매여 있듯 세상 모든 것은 행위에 매여 있다.’고 하심으로써, 우리 삶에서 나를 규정짓는 것은 그 ‘자리’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라고 하셨다.

어떤 행위를 통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펼쳐진다. 도둑질하는 행위와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은 곧 우리를 도둑으로 만들고, 수행자다운 행위와 생각은 곧 우리를 거룩한 수행자로 만든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한 행위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인간으로써 행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럽고 법다운 행위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행위다.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몸과 말과 뜻의 삼업이 어떤 행위를 이어가는지를 온전히 관찰하는 것만이 우리의 행을 축복되게 만든다. 깨어있는 행위에는 이처럼 축복이 깃들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른다. 마음을 모아 깨어있는 이의 행동은 가볍지 않아 진중하고, 이해타산과 높고 낮은 차별을 따지지 않아 순수하다. 깨어있는 마음 관찰로써 매 순간 자신을 잘 다스리는 법다운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스러운 행위요 축복의 행위다. 우리의 평범한 행위가 비범해질 수 있고, 밥 한 끼 먹는 행위조차도 성스러워질 수 있고,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도 축복과 진중함이 담기며, 삶 자체가 법다워질 수 있는 그 실천수행의 정점에 ‘깨어있는 마음관찰’이 있다.


부처님 당시 한번은 라자가하에 유행병이 퍼졌다. 한 은행가의 주인도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들인 꿈바고사까에게 숨겨둔 모든 황금과 보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아들을 먼 친척집으로 대피시켰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들이 돌아와 황금과 보석을 찾았지만 갑자기 이것을 꺼내어 쓰면 사람들에게 의심도 받고 절도 혐의를 받을 것을 염려하여 우선 평범한 일꾼이 되어 성실히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황금과 보석을 가져다가 자유롭게 쓰면서 풍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삶을 포기하고 평범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살았으며,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깨어있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지혜로웠으며 순수했고, 행동에 있어서도 진중하여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꿈바고사까는 큰 소리로 일꾼들을 깨워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빔비사라왕이 들었다. 빔비사라왕은 목소리를 듣고 그 주인공의 운명을 알아내는 재능이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분명 대단한 재산가여야 하는데, 저런 일꾼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그의 신분을 조사케 한 결과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꿈바고사까도 모든 것을 고백했다. 이에 왕은 지혜가 빛나며 생각이 깊고 생활 속에서 늘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주의력에 감탄하여 그의 딸을 꿈바고사까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부처님께 데리고 갔다.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면서, 꿈바고사까는 많은 재산과 황금이 있었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성실하고도 깨어있는 삶을 통해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설하시면서, 그 황금과 보석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큰 집을 짓거나, 그 재산을 뽐내고 누리며 사는 삶이 축복되고 존경 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법다우며 지혜로운 깨어있음의 삶이야말로 가장 존경받을 만하고 축복스런 삶이라고 설하셨다.

불교는 부유한 재산가 자체를 부정하는 종교는 아니다. 모두가 가난을 위해 재산을 내다 버릴 필요는 없다. 또한 명예와 권력을 죄다 버리고 은둔해 살기만을 바라는 종교도 아니다. 불교는 부자와 가난,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 이 모든 두 가지 분별을 다 여의는 가르침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재가 재자들 가운데는 거지도 있었고, 불가촉천민도 있었으며, 왕도 있고, 재산가들도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무소유를 주장함으로써 가진 재산과 권력을 다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겉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요, 마음이다.

참된 무소유는 물질적인 소유를 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도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난해서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도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난한 자가 소유하지 못함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없음을 비통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유욕에 휘둘린 사람이다. 부유한 자가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소유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소유하면서도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꿈바고사까 처럼 재산을 많이 소유했더라도 그것에 의지해 자신을 재산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며, 재산이 없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성실함으로 살고, 모든 행위에 있어 깨어있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우주의 축복과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르는 것이다. 부자이되 아름다운 부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부자, 부자에 집착하지 않는 부자, 부자이지만 그 삶이 간소하고 청빈을 실천하는 부자, 이 부유함이 내것이 아니라 법계에서 잠시 빌려 온 것임을 알고 인연 따라 베풀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유한 재산을 내 것으로 쌓아두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우주적인 생명력이 정체되고 막히기 때문에 더 이상 재산이 쌓일 수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로 들어 온 재산을 꽉 붙잡아 정체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에게로 회향하고 소통시키는 사람에게 이 우주의 모든 풍요로움은 찾아든다. 그런 사람에게 이 우주는 풍요로움을 세상 곳곳으로 균형 있게 나누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계속해서 풍요로운 것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라. 나는 과연 세상의 모든 풍요로움을 소통시키고 나누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것’만을 소유욕으로 가둠으로써 우주적인 에너지를 정체시키고 있는가. 이 한 생을 살면서 부처님을 대신해, 신을 대신해 우주법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기와 아집으로 온통 꽉 막힌 소인배로 살 것인가.



Posted by 법상



19.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설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20.
경전을 아무리 적게 외우고, 적게 설하더라도
행동에 옮겨 법을 실천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평안을 얻고
생사를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이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공부와 세상의 지식공부는 똑같이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이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지혜는 비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고, 세상의 지식은 쌓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경전에 담긴 지혜의 가르침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비우고, 놓도록 이끎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와지지만,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벌고 싶고, 욕심을 채우도록 이끎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불교 경전에 담긴 지혜를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비워지고, 집착이 놓여지며, 그에 따라 삶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세속의 지식 공부 하듯이 하는 이는 여전히 불교경전의 지혜를 통해 삶의 욕망을 도모하고자 할 뿐, 마음을 비우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불교학과 교수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나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좀 더 높은 교직에 오르고자 하거나, 더 유명한 교수가 되고자 하거나, 부업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팔아 더 부유해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의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후자의 교수님들, 후자의 수행자들, 후자의 불자들이 많이 있다. 비우는 가르침을 공부함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또 많은 불자들은 어떠한가. 경전 공부 한 것을, 교리 공부 한 것을, 기도나 수행 한 것을 어떤 실적인 듯, 자기 과시인 듯, 자랑인 듯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본들 그것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경전 공부도 했고, 백일기도도 했고, 절에도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의 현실의 삶이 남들 보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못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경전은 우리의 욕심과 집착과 헛된 야망을 놓아버리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자비의 씨앗을 뿌린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는 오직 그 가르침에 나를 완전히 열어 놓고, 완전히 비우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경전이 저절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거기에 나를 완전히 비우고 맡기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아상이 개입된다면,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나를 드러내고야 만다. 경전 공부하는 것은 나를 비우기 위함인데, 경전을 얼마나 많이 공부했고 말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도 공부했고, 반야심경도 공부했고, 지장경, 화엄경, 법화경까지 다 공부했으며, 어떤 스님 경전 강의는 재미있고, 또 다른 스님의 경전 강의는 너무 지루하고, 이런 판단과 분별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공부를 통해 내 아상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왜 그 많은 경전을 다 보아야만 하는가. 단 하나의 짧은 경전을 보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평화로와질 수 있다. 백 권의 경전을 보고 그 많은 독서량에 스스로 흡족해 자랑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한 줄의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차라리 내 앞의 거지에게 내가 먹을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이 더 깊은 수행자다.

‘나는 경전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다’라는 아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얼마나 지혜로와 보이고, 얼마나 마음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 보이며, 얼마나 비움과 평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왜 경전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우리의 실적이 되어야 하는가. 경전 공부의 실적은 얼마나 더 비워졌고, 고요해졌고, 놓여졌느냐에 있지, 얼마나 더 쌓았으며, 더 배웠고, 더 많이 아느냐에 있지 않다. 참된 경전은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이요, 참된 수행은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보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귀족 가문 출신의 절친한 두 친구가 함께 출가를 했다. 젊은 수행자는 경전을 통달해 강사스님이 되었으며 온갖 절의 책임을 맡아 사무를 돌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반면 나이 많은 수행자는 오직 수행에 매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을 자랑하거나, 위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수행의 실천 없이 경전만을 공부한 자에게 수많은 경전공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좋은 아상이 된다. ‘나는 위대한 강사스님이다’ ‘나는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 ‘그로인해 나는 절의 높은 직위의 스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랑스럽고 스스로의 모습에 흡족하다. 이렇듯 아상이 커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우월의식도 커지게 마련이다.

어느날 모처럼 함께 출가한 도반인 두 스님이 만나게 되었는데, 젊은 강사 스님이 도반이 아라한이 된 줄도 모르고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려고 했다. 아라한인 도반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알고 부처님께서 두 스님께 경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신다. 젊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나, 늙은 아라한은 명확한 답변을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두 게송을 설하셨다.

단 하나의 가르침이라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백 가지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오래된 이 불가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무리 법랍(法臘)이 높을지라도, 아무리 출가 년수가 오래 된 노승일지라도 갓 깨달음을 얻은 사미에게, 혹은 깨달음을 얻은 신도님께 가르침을 하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법문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웠다거나, 더 나이가 많고 적다거나 하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오직 실천 행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17.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18.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한 번 악행을 하고 나면 그 악행은 업습(業習)으로 자리잡는다. 업이 되어 언젠가 갚음인 보(報)를 가져오지만, 보를 가져 오기 이전에 습(習)으로 먼저 자리잡으면서 나를 따라다닌다. 한 번 악행을 하면 그것은 악한 습, 악한 습관의 흔적을 남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 번 할 때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이 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지 않는가. 악행이 바로 그렇다. 악행의 습은 또 다른 악행을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습관적으로 악행을 범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습관들어진 악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어느 때인가 그 갚음인 결과만 남기면 좋겠지만 이 악행은 결과를 남기기 이전에 우리 몸과 마음에 습으로 베이고 스며드는 것이다.

데바닷다의 반역사건은 부처님의 생애에서도 눈여겨 볼 아주 유명한 대목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세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악인의 전형이다. 데바닷다는 마가다국의 태자인 아자타삿투를 부추겨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하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렇게 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이제 불교의 승가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세 번 해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자객을 보내어 살해를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자객은 부처님께 감화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두 번째는 영취산에서 지나가는 부처님께 바위를 굴림으로써 부처님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세 번째로 코끼리에서 술을 먹여 부처님께 돌진케 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부처님의 앞에 이르자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이뿐 아니라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더욱 훌륭한 스승임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님의 계율보다 훨씬 강화된 다섯 가지 계율을 제시한다. 비구는 숲에서만 생활하며, 신도의 공양 초청해 응해서도 안 되고, 쓰레기로 버려진 천으로만 가사를 만들어 입어야 하고, 나무뿌리나 무덤 사이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며, 생선이나 고기는 전적으로 못 먹도록 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제시하였지만, 부처님은 이에 반대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데바닷다는 자신의 강화된 계율에 찬동하는 몇몇 젊은 비구를 이끌고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들 또한 사리불과 목건련의 교화에 다시 승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를 안 데바닷다는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뒤늦게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께로 향했으나 결국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길가 연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설법하셨다.

이에 반해 재산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수마나는 부모님께 배운대로 스님들께 정성스럽게 탁발 공양을 올려 드리면서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틈나는 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데, 결국 수마나도 결혼도 못 한 채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수마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사대 오온에 마음을 잘 집중시킴으로써 죽음 직전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을 지녔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설법하셨다.

악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을 살면서 온통 악행으로 인한 업습에 이끌려 계속해서 악업을 짓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안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업에 따라 고통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선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에도 즐겁고 죽음 직전에도 평화로우며 죽은 뒤에도 항상 즐거운 곳에 난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의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한 번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의 악행은 연이어 악행을 불러오지만, 초심의 선행은 연이어 계속되는 선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될 지라도 그것이 악행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선행이라면 반드시 저질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와 복덕의 시작이다.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15.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근심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한다.
악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16.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기뻐한다.
선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평안을 준다.


악을 행하면 악의 흔적이 남고 악의 업장이 남고 악의 습관이 남는다. 악한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악의 기운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악을 행하게 되면 내 안에 악의 기억과 악의 습관이 남아 있으므로 그 다음에도 선보다 악을 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 번 해 본 것은 그 다음에는 더 쉽기 때문이다. 더 쉽고 때로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튀어나온다.

똑같은 상황에서 선으로 반응을 하거나 악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한 번 반응한 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러한 선악의 반응들이 하나 둘씩 계속 이어지게 되면 그 흔적은 습관처럼 굳어지고 만다. 습관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선의 습관은 계속해서 선을 만들어내고 악의 습관은 계속해서 악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 때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이기 쉽다. 첫째는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 줄 수 있고, 둘째는 잘난 척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쏘아붙일 수도 있다. 전자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제 뒷날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주기 쉽다. 아니 그것이 더 쉽다. 몸에 한 번 기억되었고, 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로 기분 나쁘게 반응한 사람은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런 사람이 꼴보기 싫고 밉상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그 때부터는 자동적으로 반응이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선은 또 다시 수많은 선을 불러오고, 악은 또 다시 수많은 악을 불러오게 된다. 전자의 반응을 한 사람은 끊임없이 칭찬해 줄 일이 생기고, 후자의 반응을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꼴보기 싫은 사람이 생겨난다.

화나 성냄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킨 일을 잘 못하는 아랫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잘 다독이면서 오히려 격려해 주고 자비롭게 가르쳐 줄 수도 있고, 화를 내며 이것 밖에 못 하느냐고 면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반응들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業習)을 남긴다. 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도 화나는 상황에서 자비롭게 대처하는 것이 더 편해지고, 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화를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업습이다. 업은 이처럼 습관처럼 굳어져 선은 더 큰 선을 부르고,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그래서 선을 행한 자는 이번 생에서도 기뻐하지만 다음 생에서도 기뻐하고, 악을 행한 자는 이번 생과 다음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 선행과 악행은 언제나 그를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내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을 남기기 때문이다.

선업은 선의 과보를 남기고 악업은 악의 과보를 남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선업을 한 번 짓고 나면 그 다음에도 습관적으로 선업을 지을 확률이 높아지고, 악업을 짓고 나면 그 다음에서 악업을 짓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데 있다. 한 번 지은 과보를 한 번 받으면 그만이지만, 업습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습관처럼 흔적을 남기니 그것이 문제다. 그 습관은 이번 생 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선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평안과 기쁨을 주지만, 악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근심 걱정을 불러온다.


돼지잡이를 55년 동안 해 온 백정 춘다는 돼지를 평생동안 살생한 업을 지음은 물론, 성격도 잔인했으며 착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러 손이 돼지발처럼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죽기 전 7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고,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담미까라라는 한 재가신자는 평소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덕이 많으며 늘 보시를 생활화하였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비구스님들의 탁발을 위해 항상 공양 준비를 해 주었으며, 14명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 또한 부모님의 덕을 보고 배워 계행과 보시를 실천하였으며 늘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이런 결과 대장장이 춘다의 죽음과 상반되게도 담미까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밤낮으로 비구스님들이 찾아 와 독경해 주었고, 죽을 때도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마중해 주었고, 죽음 이후에도 도솔천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이번 생에 행한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죽을 때까지 이어지고, 죽음 이후에도 그 결과가 다음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선행이 중요한 것이고, 한 번의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그 한 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습관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내가 어떤 행을 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악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선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한 번 만들어 낸 선업은 또 다른 선업의 씨앗이지만, 한 번 만들어낸 악업은 또 다른 악업을 부르기 때문이다.

화낼 상황에서, 악업을 지을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자비롭게 대해보라. 자비로운 방식으로 자비로운 말씨로 상대방을 향해 선업의 씨앗을 퍼뜨려 보라.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그래서 연습하고 습관화해 보라. 한 번, 두 번 선행과 자비가 이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워진다. 똑같은 화날 상황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또 그 다음으로 갈수록 훨씬 자비롭게 대응하기가 쉬워진다. 벌써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계속해서 기쁨을 누릴 것인가, 악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언제까지고 근심과 걱정을 안고 갈 것인가.



Posted by 법상



9.
마음에 번뇌가 많아 청정하지 못하고
무모한 욕심으로 자기를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노란색 가사를 입으려는 자여,
그대는 수행자의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

10.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하고
계율을 지켜 절제됨이 있으며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는 사람,
그대야말로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가 어울리는 자다.



수행자의 옷, 가사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아주 매력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앉아 있는 스님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마음 속에 존경과 혹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회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걸망 하나 메고 만행을 떠나는 스님들의 뒷모습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을 찾는 이들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사람들은 흔히들 외부적으로 비치는 모습에 속기 쉽다. 어떤 것이든 유니폼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심어준다. 군복, 의사복, 경찰복, 승복, 수녀복 등 다양한 종류의 유니폼은 그것을 입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한다. 하물며 그 가운데 불교 수행자의 옷과 삭발한 머리는 단연 독특하고 눈에 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수행자의 옷 속에 수행자는 없다. 수행자의 가사와 장삼 혹은 삭발한 머리모양이 불교의 수행자를 대변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하다. 만약 당신이 스님을 그 어떤 편견을 가지고 ‘스님들은 이래야 해’라는 편견을 가지고 다가선다면 그 스님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아주 쉬운 것이 외모이고, 옷이며, 겉모습이지만, 더 깊고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모습을 넘어서 있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느니 차라리 그윽한 눈빛 속에서, 혹은 깊은 말투 속에서, 또 때로는 침묵 속에서 그의 내밀한 속뜻을 살펴보는 게 낫다.

수행자는 그 모든 바깥에서 오는 치장과 허식과 꾸밈을 내던진 사람이다. 요즘의 사회를 보면 속은 텅 비었어도 밖은 끊임없이 꾸미고 치장하고 고치며 외부로 비추어 지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는 어리석은 단면을 본다. 그렇게 바깥으로 바깥으로 치달아 나갈수록 내면의 뜰은 사유와 평온을 잃고 해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더분하고 신경 쓸 필요 없는 누더기 옷 조각을 기워 입는다. 그것이 수행자의 옷, 가사에 담긴 의미다.

그것은 옷 그 자체에 어떤 권위를 담기 위함이 아니다. 수행자의 위엄과 권위와 차별성을 선입견처럼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너와는 다른 차별된 나’라는 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입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 치닫는 모든 관심과 치장과 꾸밈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모든 바깥으로 치닫는 산란한 마음을 내 안 깊은 곳으로 되돌려 귀의토록 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요 약속에 불과하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옷이 있는 이유다.

그러니 아무리 수행자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마음이 바깥으로 치닫고 온갖 욕심과 번뇌에 휩쓸리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한다면 그에게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수행자의 옷을 입었다고 다 수행자가 아니며, 세속의 옷을 입었다고 다 수행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핵심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보여지지 않는 내밀한 속 뜻은 저마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수행자의 옷을 입고 살면서도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속적인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수행자의 행을 행하는 이가 있다. 이 문중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모습을 더욱 아름다운 수행자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에 머물던 데바닷다에게 한 재가신자가 비싼 고급 천으로 가사를 만들어 보시를 한 적이 있다. 고급스런 가사를 선물 받은 데바닷다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은근히 돌아다니며 다른 스님들께 뽐내곤 했다. 이를 전해들은 부처님께서는 데바닷다가 전생 이야기를 하셨다.

전생에 데바닷다는 코끼리 사냥꾼이었는데 코끼리가 가사를 입은 수행자에게는 경계를 풀고 공손히 대하는 장면을 보고는 가사를 입고 코끼리를 유인하여 접근하는 코끼리를 사냥하곤 했다. 이를 본 코끼리왕이 데바닷다를 잡았지만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살려준 적이 있는데 그 때 코끼리왕이 지금의 부처님이다.

데바닷다는 이처럼 전생에도 수행자의 옷을 입고 삿된 행동을 하였는바, 이렇게 수행자가 된 연유에도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가사를 입고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뽐내고 자랑스레 여기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아무리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번뇌가 많고 욕심이 많아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 수행자의 본면목은 입은 옷이나 치장한 장식이나, 혹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명예나 지위나 이름이나 심지어 법랍(法臘)과 무슨 학위 같은 것으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하고 계율을 잘 지켜 절제됨이 있으며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관을 잘 다스리는 데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재가자이든 출가 수행자이든 스스로 날마다 지켜보라. 나에게 과연 수행자의 옷이 어울리는가, 나는 과연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는가.



Posted by 법상




7.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8.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수행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 모든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정진의 덕목이 있다. 먼저 이 게송이 나오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에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과 정진이 투철했지만 동생은 성실히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형을 속세로 환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뒤따라 출가를 했다. 그러다보니 동생은 끊임없이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음식에도 절제가 없고, 수행 정진은 뒤로한 채 게으름만 피우다가 하루는 속가의 가족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는데 따라갔다가 결국 출가 전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그 길로 속세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면에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으로 마음집중 수행을 성실히 행하여 결국 삼법인을 깨닫고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후에 형 또한 출가 전 아내가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려고 하자 많은 제자들이 동생처럼 형 또한 다시 환속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형은 환속한 동생과는 같지 않음을 말하시면서 다음의 게송을 설하셨다.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이것은 출가한 수행자 뿐 아니라 모든 진리를 찾고 참된 삶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요 삶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조심하고 절제해야 할 부분이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과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다.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수행, 진리, 법과는 정 반대의 길이다. 수행자란 몸과 말과 뜻으로 청정행을 닦는 이를 말하는데, 육체적인 쾌락이야말로 순결한 청정행을 더럽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쾌락은 곧 정신적인 쇄락을 가져오고 우리 몸도 마음도 녹슬게 만들어 청정한 수행자의 정신을 빼앗아간다.

다섯 가지 욕망이란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의 욕망을 말한다. 눈으로는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 귀로는 칭찬과 좋은 말을 듣고 싶은 욕망, 코로는 더 좋은 향기를 맡고자 하고, 혀로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며, 몸으로는 더 좋은 촉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외부를 향해 치닫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요 욕구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오관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핵심적인 수행법 중 하나다. 눈귀코혀몸이 대상을 향해 어떤 욕망을 일으키는지를 오관을 잘 관찰함으로써 깨닫게 되고 그 치닫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 번째로 수행자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그 양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입으로 먹을 것들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원초적인 욕망에 패배하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우주의 주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식욕이란 욕망에 쓰러지고 만다면 그는 더 이상 수행을 진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식욕이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우리를 무너뜨리기 쉬운 욕망이다. 누구나 식욕 앞에서는 굴복당하기 쉽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내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한번이 되었든, 두 번이 되었든, 세 번이 되었든 음식을 먹는 때를 정하고 될 수 있다면 그 이외의 때에는 입과 위를 모두 쉬게 해 주어야 한다. 입과 식도와 위와 장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마음도 고요해지기 어렵다. 삶에 질서가 잡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먹고 자는 때에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

또한 때에 맞춰 먹는 것 못지않게 먹는 양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많은 양을 허겁지겁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가만히 몸과 마음을 살펴보라. 몸도 무겁고 마음도 덥수룩한 것이 오래도록 마음 집중이 되지 않는다. 몸이 무거우면 정신도 무거워진다. 때때로 많은 양을 먹고 난 뒤에 무겁고 멍한 나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끄럽고도 부끄럽다. 먹을 수 있는 만큼의 반만, 혹은 60~70%만 채우고 나면 식후의 잠시의 휴식과 함께 몸도 마음도 새로운 에너지로 깨어난다.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다면 삶에도 다른 모든 욕망에도 절제와 균형이 생긴다.

이러한 쾌락적인 즐거움과 감각적인 욕망,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있게 되었다면 이제 수행의 절반은 이루었다. 그런 튼튼한 토대 위에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리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마치 큰 바위산을 아무리 험한 바람도 휘두를 수 없듯이.

그러나 감각적인 욕망에 휩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없으며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는다면 그 틈 사이로 온갖 마장이 스며들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했던 마왕 마라의 군대가 그대를 쓰러뜨릴 것이다. 마라의 군대가 쏜 불화살이 꽃비로 변해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보리수를 수놓았듯이, 마라의 세 딸들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으로 유혹할 때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마라의 유혹임을 바로 보셨듯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고,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으며,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마라의 군대가 오더라도 삿된 마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러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 길을 바로 보여주셨고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에, 뒤따라가는 우리들 또한 그 바른 수행의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