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선한 마음...
착한마음은 무엇일까?

착함이 깃드는 마음,
우리가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마 음

그 착한마음을 알려드립니다.

착한마음으로 사시길...

善의 心所(마음이 있 는 곳)

1. 믿음(信) :
마음이 청정하며
객관 세계를 비롯한 모든 대상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고 확 신을 갖는 것.

마음이 청정해야 믿음이 생깁니다.
모든 대상을 확신한다는 것은 모든 대상과 내가
둘이 아님 을 믿는 것입니다.
모두가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믿는 마음이 첫번째 으뜸가는 착한마음입니다.

2. 방 일하지 않기(不放逸) :
선법(善法)을 수행하며
항상 올바른 일에 정진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

선법이란 착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선한 일상을 실천함에는 게으름이 있어선 안됩니다.
방일이란 게으름입니다.
부지런한 마음, 게으르지 않는 마 음이
착한마음의 씨앗입니다.
다시말하면
게으름 또한 하나의 나쁜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 피해만 안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란 말입니다.
부지런함도 착한마음입니다.

3. 경안(輕安) :
몸 과 마음을 경쾌하게 하고
안정을 지속하는 것.

수행자는 늘 경쾌하고 고요합니다.
경쾌하다는 말은 늘 즐겁고 밝다는 말입니다.
수행자는 나날이 환한 마음이라야 합니다.
경쾌한 가운데 고요함과 안정감이 깃듭니다.
나날이 좋은날 이란 이런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여한 마음입니다.
여여한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4. 사(捨) :
마 음이 침체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평등하게 하며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것.

친하고 친하지 않음 이 없어야 수행자입니다.
모든이를 대함에 평등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마음에 모든 분별을 쉰 마음이기 에 그렇습니다.
일체 분별을 다 놓은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평등심이야말로
참으로 착한마음입니다.

5. 자 기 부끄러움(懺) :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신의 죄과가 있다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과거에 얽매이지 않음이
진정한 참회의 시작입니다.
이미 지난 잘못은 참회로써 턱 놓아버릴 일입니다.
한번 참회하여 놓아버리고 나면
또다시 끄집어 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참' 의 마음입니다.
스스로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 마음이 참회입니다.
자기 부끄러움이 착한마음입니다.

6. 남 부끄러움(愧) :
이는 타인과 사회에 대하여
잘못을 반성하고 항상 부끄럽게 생각하 는 것.

타인의 잘못이 내 잘못입니다.
사회의 허물이 내 허물입니다.
대상은 그대로 내가 됩니다.
상대와 내가 둘 이 아님을 진실로 깨닫고,
상대의 잘못도 내가 참회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되어 참회하는 마음
그 남부끄러운줄 아 는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7. 탐욕이 없음(無貪) :
이미 얻은 재산에 지나치게 탐착하지 말고
앞으로도 과욕을 내지 않는 것.

얻은 재산은 얻은 재산이 아닙니다.
얻었다는 마음이 없어야 무탐의 마음입니다.
인연따라 잠 시 이리로 온 것일 뿐,
잠시 갈 인연따라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욕심없는 마음입니다.
과욕의 과보는 부자가 아닌 가난입 니다.
탐욕이 없어야 참으로 부자가 됩니다.
욕심없는 마음이 참으로 착한마음입니다.

8. 성냄이 없음(無瞋) :
사람을 비롯한 모든 유정(有情)들에게
자비로써 대하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 것.

성내는 이유는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낼 것 없는,
꿈같은 세상, 신기루 같은 세상을 바로 본다면
성낼 것도 없 습니다.
마음 온전히 관하고 있으면
세상을 온전히 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성낼 상황은 있을지언정
성낼 마음은 쉬게 됩니다.
잠시 성내더라도 화나는 마음의 성냄이 아닌
자비로운 성냄이 될 수 있습니다.
성내야 하니 내는 성냄 말입 니다.
화내지 않는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9. 해치지 않음(不害) :
마음을 착하고 어질게 하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와 괴로움을 주지 않는 것.

무외시는 참으로 아름다운 보시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편안케 해 주고,
손해와 괴로움 을 주지 않는 일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역지사지란 말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볼 일 입니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마음
그 마음이 착한마음입니다.

10. 부지런함(勤) :
이는 善을 수호하고 과실 을 없애며
옳은 일에 두려워하지 않고 정진하며
진리 탐구에 근면하는 것.

선법에 방일힘이 없어야 하지만,
진리에 또한 방일함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닦으며
과실을 없애고
진리의 실천에 정진의 끊을 놓쳐선 안됩니 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야말로
착한마음입니다.




어떤 법우님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함께 읽어보고 싶어 이렇게 올립니다.
------------------ -------------------------- --


- 어떤 것을 알려면 -

류 시 화


만일 당신이 어떤 것에 대해 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아야 한다.

나무를 바라보면서

' 이 나무에 봄이 왔 다 '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이 바라보는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양치식물의 꼬불거리는 잎사귀와

검은 줄기가 되어야 하고,

잎사귀들 사이 작은 침묵 속으 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잎사귀들이 꺼내 보이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

제 딴에는
끄집 어 내어 본다고
줄줄이 글을 써 내려가는데...
쓰고보면 늘상 어지럽고 정신없이 느껴집니 다.

이 절제된 글을 읽으며
어쩜 이 짧은 글에
이 쉬운 말로써
아름다움과 깊이를
한꺼번에 담아낼 수 있었는가
하 는 마음이 납니다.

"
어떤 것을 알고자 한다면
그것이 되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 사이의 작은 침 묵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꺼내보이는 평화로움을
만질 수 있어야 한다...
"

참으로
'어떤 것'과
참으로 하나될 수 있어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린 산과 하나될 수 있는 마음 을 지녔고,
들녁과 햇님과
작은 물풀과도 하나될 수 있는
넓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지니 고도
우린 그저 '나'만을 고집하니
그들을 조금도 느껴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참으로
어떤 것과도 하나되 기 위하여...

그것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되어 보아야 합니다.

느낌이든,
마음이 든,
어떤 대상이든...

그것과 하나되기 위하여...
온전한 동체대비를 느끼기 위하여...

*** 경주 대왕암을 내려다 보고 있는
감은사지 석탑입니 다.



Posted by 법상




부처님 저는
'만약 이 복잡한 세상을 살다가
어느 순간 죽게 된다면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이며, 어디에 태어나게 될까'
하는 생각만 하면 두려워집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설령 그대가 죽는다 해도 괴로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믿음과
계율을 지님,
진리를 배움,
집착과 욕망을 버림,
지혜을 닦는 등의 수행을 하였다면
비록 언제 어떻게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설사 사나운 짐승이나 새에게 먹힌다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된다.

마치 기름종지를 깊은 연못에 넣어 깨트리면
깨진 종지의 조각들은 가라앉겠지만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이
오랜동안 믿음, 지계, 진리, 비움, 지혜를 닦은 이는
설사 죽는다 해도 그의 마음은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처럼 그대가 죽는다 하더라도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죽은 뒤를 걱정하지 말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걱정하지 말라.
어차피 죽음은 오게 되어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다만 지금 이 순간
나의 믿음과 지계, 진리, 비움, 지혜가
부족하지 않은가를 살피라.

죽음 이후는
이미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을 통해 결정된다.

삶에서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을 지니고 살았는가!
계율을 생명처럼 지키고 살고 있는가!
진리를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가!
욕망과 집착을 비우며 살고 있는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에 대해
나는 얼마나 떳떳한가!
얼마나 지키고 닦으며 살고 있는가.

이 다섯 가지 실천의 가르침을
아름답게 실천하고 있다면,
혹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 실천을 향해
내 삶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면,
진보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높이 높이 올라 좋은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설사 죽음을 맞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나쁜 죽음은 없을 것이다.

똑같은 죽음을 목격한다고
그것이 모두 같은 죽음이 아니다.
같은 병으로 똑같이 죽었을지라도
그 죽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는 전혀 다르다.

나의 죽음 이후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삶을 보라.
삶에서 내가 벌이는 모든 일들을 살피라.
그 삶의 방향이
믿음과 계율과 진리와 비움과 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답하기가 두렵다면
그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며,
죽음과 동시에 간장종지가 깨져
호수 아래로 가라앉듯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지옥 끝까지 도달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삶을 두려워하라.
주의깊지 못한 삶을 두려워하라.

수행자에게는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이 육신의 겉모습은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지만
근본에서는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삶 그 자체는 언제나 영원하다.

지혜로운 수행자는
미래에 올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주의깊게 살핀다.



Posted by 법상



[대승사 산내암자 윤필암]

부처님과
하느님이 둘이 아니십니다.

불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와
기독교 신자가
참으로 둘이 아닙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과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이 둘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자성부처님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굳게 믿어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놓고 가는 것이
삼위일체 하느님 가르침의 실천인 것이지요.

하느님을 내밖에 그 어떤
동떨어진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밖을 향해 믿음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하느님과 부처님은 이름만 다를 뿐 '하나'가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일체를 당신께 맡기고 가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성령이
그대로가 성부이며 성자인 것이지
그 셋을 어찌 서로 다르다 할 수 있겠어요.

성부와 성자 또한
성령으로써 내 안에 항상 충만한 것이며,
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이
모든 생명 모든 사람에게 항상 빛을 놓고 계십니다.

법신과 보신과 화신 삼신 부처님 또한
서로 다른 부처님이 아닌
내 안의 자성부처님으로서 '하나'인 것입니다.

'참 나'의 이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면 어떻고,
또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어떠할 것이며,
알라신이라고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결국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란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진리의 몸(法身)인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인데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고 합니다.
다만 여러 가지로 말할 뿐
근본이 흔들리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현자들이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가지고
어리석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
분별하고 나누어 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니
니 종교니 내 종교니 하면서
싸울 것도 없고,
내 가르침이 더 깊이가 있다고 고집할 것도 없으며,
내 가르침만이 나를 천당으로 가게 할 수 있고,
내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진리란
고집하지 않음입니다.
어느 한 쪽을 고집하게 되면
벌써 진리에서 한참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좋고 싫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일체 분별을 다 여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가
'불교이기 때문에'
'천주교, 기독교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해서는 안될 일입니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지요.

그 말은
불교를 믿고 있지만,
천주교를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또 다른 참진리를 만난다면
당연히 그 참진리 또한 버려서는 안 된 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아가 더 밝은 진리를 만난다면
기존 종교에 대한 모든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밝은 진리를 따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야 참 진리를 찾는 구도자이며,
수행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고집이 아닌 맑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종교만이 옳다'는 고집을 가지고
'참된 믿음'이라 착각을 하지는 마세요.

참된 믿음이란
억척스러운 고집이 아니라
텅 비어 어느 것이라도 담을 수 있는
맑고 향기로운 열린 믿음일 것입니다.

마음이 어느 한 쪽에 머물러 고집스레 집착을 하게 되면,
다른 그 어떤 가르침도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진리란 어떤 방법으로든 설해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인지요.

활짝 열린 탁 트인 마음이
모든 수행자의, 모든 구도자의 참마음일 것입니다.
수도자란 모름지기 그래야 합니다.

텅 비어 있기에 도리어 꽉 찬 그런 훤칠하게 트인 길로 가야지,
좁은 한 길만 고집하는 옹졸한 마음으로
어찌 만중생을, 숯한 어린 양들을 구할 것입니까.

불교 신자, 수행자 법우님들과,
기독교 천주교 신자, 수도자 형제 자매님들
참으로 우리 모두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는 참 진리의 길을 걷는 '좋은 도반'입니다.

세계일화
세계는 한 송이 꽃으로 언제나 맑고 향기롭습니다.

'내 종교'라는 울타리에 갖혀
불교다, 기독교다, 천주교다 하고 금긋고 살았지만,
실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인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같은 진리의 길을 걷는 도반이었음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나'도 놓아버리고,
'내 종교'도 놓아버리고,
'내 알음알이 진리'도 놓아 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본래자리 밝으신 '자성부처님' '한마음 부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내면의 참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실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은 중생으로,
어린 양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자성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당당하고 시원스레 살아갑시다.

부처님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산다고 생각지 마세요.
자꾸 아상을 키우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나'라는 아상 대신에,
'자성부처님'께서,
그리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가시도록 온전히 믿고 맡기시면 됩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 모든 이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십니다.
그 믿음에서 '자비'가 나오고 '사랑'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 믿음 안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은
세계일화의 맑고 향기로운 빛을 놓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린 모두 '하나'이며 '참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