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잡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항상 두 가지 길을 놓고 걱정하니 늘 마음이 괴롭고 안정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지워내고 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하고 왜 그런 생각이 올라오는지,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돌릴 수 있는지 다시 이런 생각에 집착을 하게 되니 오히려 불필요한 생각이 더 많이 들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잡념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 생각들에 끊임없이 휘둘리며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생각과 잡념을 없애려 노력을 하지요. 그러나 지금 법우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방법들 모두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 방법들은 모두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잡생각을 없애고 비우기 위해 또 다시 생각을 가지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저 생각으로 바꾸는 것으로는 그 올라오는 잡념 자체를 비울 수 없습니다. 앞에 질문에서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관찰)’한다고 하셨는데 여기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왜 이런 생각이 올라오는지' '어떻게 긍정적으로 돌릴 수 있는지' 하고 또 다시 생각을 굴리게 되니 그 생각에 집착을 하게 되고 오히려 더 많은 불필요한 생각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한 생각이 들면 이를 관' 하는 데에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그것만이 이 생각으로 저 생각을 대치시키는 그런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아 줍니다. 관하는 것은 생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은 무념(無念)이요, 무심(無心)입니다. 생각으로 관한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어요. 생각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아니라 문제 그 자체일 뿐입니다.

 

부적에 관해 여쭙습니다. 부적을 방편으로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바라는 것은 불교 교리에도 맞는 것이 아닌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적은 전혀 불교적이지 않은 적절하지 못한 길이라 생각됩니다.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종이 쪼가리 하나에 우리 마음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내 안에 어마 어마한 보석이 숨어 있는데, 그깟 종이 한 장에 의지를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부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일이 잘 될 것 같다가 부적을 분실했다고 금방 마음이 불안해진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우리가 왜 부적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외부적인 어떤 것에 나약하게 마음을 의지하고 거기에 내 중심을 빼앗겨야 합니까? 물론 말씀하신대로, 부적을 몸에 지님으로써 '좋은 일이 있을 것만 같은 느낌'과 '왠지 모를 든든함'이 생기고, 그 때문에 실제 삶에서 조금 더 긍정적이 된다거나, 힘을 낼 수 있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유한하고 본질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불교에서는 불교에 조차 전적으로 의지하지 말고, 진리 자체도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하는데, 까짓 부적에 집착한다는 것이야 말이 되겠어요? 심리적인 플라시보 효과 때문에 부적이라는 방편을 쓰고자 한다면, 차라리 무상한 부적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믿는 보다 본질적인 요소에 의지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불성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이름이고, 방편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딘가에 의지를 하려면 세 가지에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귀의의 대상인 '삼보'인 것입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다보니 모든 것이 어긋나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옆에서 계속 잔소리만 하시고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싸우게 됩니다. 제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것도 아닌데 잔소리만 하시니, 저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아프면 주변의 상황들도 함께 아파지곤 합니다. 그러나 문제를 분명히 보면, 사실은 아프다는 그 사실보다 아프면서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그 한 생각이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가져 오곤 합니다. 몸이 아픈 것은 주로 내 안의 어떤 상처나 업장이나 병의 씨앗들을 풀어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즉 나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경계이기 쉽습니다. 즉 몸이 아프다는 상황이 꼭 '나쁜' 상황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돕기 위한 좋은 상황일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몸이 아프면 그 상황을 '나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해석함으로써 그 상황을 더욱 나쁜 상황으로 몰고 가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도 다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아버지와의 갈등이 아니라 내 안의 갈등입니다. 내 안의 갈등을 풀어주는 것이 더 시급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공부요 수행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아픈 현상들과 느낌들과 생각들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지켜보십시오. 약만 약이 아니라 정좌하고 앉아 내면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약입니다. 이 약은 당장에 효과를 보지는 못할지라도 근원적인 병의 원인을 없애줄 수 있는 뛰어난 의사입니다. 나 자신만이 내 병을 고칠 수 있어요. 원인 제공자가 그 원인을 없앨 수도 있는 것입니다. 법우님 안에 얼마나 큰 힘과 지혜가 있는지 직접 내맡기고 시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월간불광 법상스님께 묻습니다 09년 2월호]에서

Posted by 법상



[사진 : 양평 용문사]



모든 존재는
나와 연결되어 있다.
그저 피상적으로 조금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직접적이고도 가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너와 내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고,
너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것이며,
세상의 문제가 곧 내 문제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하나의 일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 일은 결코 작지 않다.
그 하나의 사건에는 무수히 많은 존재가,
나아가 이 우주법계가
크고 작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와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중에도 내가 만나는 존재, 나와 마주하는 존재는
특별한 어떤 인연의 힘을 가지고
나와 특별한 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존재는, 그 사건은, 그 사물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내 인생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내 인생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사람과 존재들이
모두 내 내면에 있는 어떤 것들이다.

나의 내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내면과 외부가 둘이 아니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가,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있으면
그것이 외부의 어떤 대상을 끌어당기게 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어떤 문제가
겉보기에는 외적인 어떤 문제인 것처럼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외적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문제 또한
나와 전혀 관련이 없던 것이
투영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즉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나와 인연이 있었던,
과거 전생의 어느 시기에 나와 인연이 있었던,
혹은 업의 관계, 빚진 관계, 원수 관계,
복을 베푼 관계, 사제관계, 부자관계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빚어진 업과 인연의 인다라망과 같은
복잡한 사슬 속에 놓여 있던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다.

즉 내 안에 화의 업이 올라오게 되면
과거 전생의 화와 원수관계 등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혹은 물질이나 존재들이
내 안의 화라는 직접적인 원인(인연 중에 ‘인’)에 의해
우주법계의 인연법으로써 내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와 업,
그리고 무수히 많은 생각과 기억과 관념들이 가득하다.
이번 생에서 만들어 낸 것들은 대개 기억과 관념으로 투영되어 존재하고,
지난 생에서 만들어 진 것들은 업이라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번 생의 것이든 지난 생의 것이든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고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형성하면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우리 앞에 나타난 어떤 하나의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그 원인을, 그 무수히 많은 원인을 다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무량수의 인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부처님만이 분명히 환히 볼 수 있지,
가섭존자 조차 낱낱이 살펴 알기 어렵다고 했다.

심지어 매 순간 순간 우리 주변에는
1500만 비트의 정보가 발생하는데 반해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정보는 고작 15비트에 불과하다고
호오포노포노에서는 밝히고 있다.

이것을,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1500만 비트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그 몇 백배, 몇 천배 이상의 복잡다단한 인과의 그물코가
우리 삶의 현장에 매 순간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타고 가던 차를
뒤의 차량이 와서 접촉사고를 냈다고 치자.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앞차와 뒤차만의 인과관계인 듯 보인다.
그러나 업의 차원에서 본다면
이 단순해 보이는 하나의 사건 속에는
수백 수천만가지 이상의 엄청난 인과가 얽혀 있고,
수많은 존재와 존재들, 사람과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 두 차의 운전자가 병원에 갔다면
병원의 의사 간호사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집의 가족들, 친척들, 친구들이 모두 함께 걱정을 할 것이고,
병문안을 와야 할 것이고,
병문안을 오느라고 또 차를 타고 와야 하고,
음료수라도 사 와야 하니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고,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다른 것을 했을 그 시간에
그 모든 사람들이 병문안 오기 위해 시간을 비웠어야 할 것이다.

어디 그 뿐이겠는가.
밥 한 톨이 내 앞에 오기까지
우주 법계가, 수백 수천만 이상의 사람들, 존재들이
밥 한 톨 먹는 것을 도왔다는 연기법의 이야기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온갖 존재들이
이 접촉사고 하나와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차사고가 난 두 당사자는
우연으로 그런 접촉사고가 났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어떤 부분이
상대방 안의 어떤 업의 부분과 절묘하게 바로 그 순간에 만나서
그런 사고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왜 하필이면 앞차가 5초만 빨리 왔어도
그냥 지나갈 수 있는 교차로에서 멈춰서게 되었으며,
왜 하필이면 뒤차의 운전자가 바로 그 순간에
주의가 흐려져 앞에 서 있는 차를 못 보고 그냥 들이받았겠는가?

그 또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업과 인과의 차원에서의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직장에서 상사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바람에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빴다는 상황을 가정 해 보자.
이 또한 상사와 나 사이에, 또 수많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일어난 법계의 일인 것이다.

그로인해 그 상사는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을 수도 있고,
그래서 오후에 있을 일의 성과가 좋아졌을 수도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나빠져서
직장 동료들에게도 화를 내고, 집에 와서도 뾰로통 해 있으며,
오늘 했어야 할 일들을 다 끝마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상황은 단순히 그 상사와 나, 둘 만의 일이 아니다.
그로인해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 일들을 생각해 보라.
그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새롭게 연결되어져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양산해 낸다.

회사의 부장이 과장에게 화를 냈다는 그 하나의 사실,
그로인해 그 부서에 그 과에 분위기가 하루 종일 냉랭했고,
그 탓에 부하직원 한 명은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 조퇴하려고 했다가
눈치보느라 조퇴도 못 하고 꼼짝 없이 회사에 갇혀 있는 바람에
병이 더 심해 져서, 저녁에 쓰러질 수도 있다.

그 하나의 상황은
크고 작은 수많은 또다른 상황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그 하나의 상황은
이 모든 사람, 상황들까지도 감안한 법계의 치밀한 계획이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한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하나의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고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나와 연관되어져서 그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그 사람들’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은 내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어지겠지만,
사실은 나와 연결된 문제이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내 문제’인 것이다.

법계의 계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깊고 더 세세하며 더 치밀하다.
수많은 업과 기억과 생각과 수많은 정보들을
법계에서는 분명하게 보고 분명하고도 치밀한 계획으로
그 문제를 바로 그 순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와 연관된 사람들 또한
모두가 그 문제와 연관된 나름대로의 내면의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인 것이다.
그 문제와 관련된 어떤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그 문제 주변에 모여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 삶 속에서 일어나는, 혹은 내 삶 속에서 목격하는
그 모든 일들은
모두가 나와 직간접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문제가 내 외부의 문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 문제 아래에 놓여 있는 문제란 뜻이다.

내가 목격하는 모든 문제는,
내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제3자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관계된 문제이며,
나아가 바로 ‘내 문제’라는 것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결코 내 밖으로 투영되어 나오지 않는다는
법계의 이치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면의 투영이다.
내 문제요, 내 책임이다.

그것은 또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에게서 나온 문제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문제나 고민을 가지고 올 때
그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내려 주지만,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네 잘못’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것은 ‘너의 문제’이고 나는 그 문제를 상담해 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그의 문제이기도 한 동시에
‘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내 안에 어떤 문제가 없다면
그 사람이 그 문제를 나에게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우리 공동의 과제가 된 것이다.

왜 그런가?
세상은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하려 왔겠는가?
나와의 공유된 업이,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상대방의 고민을 들으며
사실은 내 안의 업을 닦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문제를 치유해 준다는 것은
곧 내 안의 문제를 치유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큰스님들께 상담을 하고 온 신도님들 중에는
특별히 큰스님께서 답을 주신 것은 없는 것 같은데,
다녀오고 났더니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거나,
병으로 아파하던 환자가
큰스님을 친견하고 났더니 낫기 시작한다거나 하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 가능한가?
큰스님과 심리상담가의 차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담가들은 상대방의 문제를 상대방의 문제로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치유를 하면 될지를 알려주는데 반해,
수행자의 방식은
상대방이 가져 온 문제를 상대방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바로 내 문제라고 생각함으로써
내 닦을거리라고 받아들인다.

상대방과 나 사이에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으로써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그를 나에게 이끌었으며
그와 내가 만나는 순간 그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닌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상담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본다.
내 안에 어떤 업장, 어떤 문제가
저런 고민을 가진 상대방을 내 앞에 오게 했는가?

물론 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원인이 되는 이유는 한두가지가 아니며,
한 두 생에 걸친 원인이 아닌 몇 생에 걸친
수많은 업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거나,
수백 수천가지 이상의 크고 작은 인연들이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얽혀 있을 수도 있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사실 그 원인은 이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수백 수천 수만가지 이상의
우주 법계와 연결되어 있는 전체적 연결고리를
어떻게 우리 중생의 눈으로 다 볼 수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1500만 비트의 정보 중에서도
고작 15비트만을 인식하는 우리가,
수억만 종류 이상의 업과 인과의 소식을 어떻게 다
헤아려 알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처님께서만 아실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원인은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고,
그렇기에 내 안에 있는 그 원인을 닦고 비움으로써
상대방과 연결되어 있는 공업이 함께 닦여지면서
상대방과의 문제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 의식이나 법회에서 행하는
축원의 비밀이다.
스님들이 축원을 해 준다고
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물론 가장 직접적이고 빠른 방법은
자기 자신이 직접 닦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인연지어진 스님께서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축원을 해 준다면
당신의 마음 닦은 그 힘이 법계를 울리고
나와 연결되어진 내 안의 업도 함께 변화를 맞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수행자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능하며
실제로 수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기적들이
이러한 마음 마음, 발원과 기원의 힘들에 의한 것들이 많다.

이상에서 공부한 이 이치는
결과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모든 경계, 사건, 문제, 사람들은
사실은 온전히 내 문제며, 내 책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대를 탓할 일은 하나도 없다.
상대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라.
그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 돌리고,
그 잘못을 상대방의 잘못으로 돌리면서
상대방이 바뀌기를 바뀌는 한
그 문제의 본질은 흐려지고 만다.

그 문제를
내 내면이 투영된 ‘나의 문제’요, ‘나의 책임’이라고
자각하면서
나 자신으로 돌아올 때,
그 문제는 이제 본격적인 열쇠를 스스로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관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닦아갈 때
나와 연결되어 있는
상대방의 문제, 내 밖의 경계들이 닦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문제를 바깥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내가 그 문제를 인식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은 내 문제요, 내 숙제다.

내 안에서 그 문제를 풀라.
내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
정치문제, 경제문제, 사회적인 각종의 문제들, 부정부패들,
환경문제, 가정문제, 아들문제, 남편문제,
이 모든 문제들은 사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내 문제’다.

내 문제가 풀리고 나면
내가 사는 세상이 청정해진다.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 진다는 경전의 말씀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때때로 사회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들이
자기 자신의 변혁은 등안시 한 채,
부정부패로 얼룩지고 탐욕으로 점철된 시대를 나라를 개혁하고자 하지만
마음 같이 사회가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로인해 자신 안에 화를 키우고,
사회에 대한 불신과 미움과 증오를 키우다가
오히려 자신 몸에 병도 나고,
자신의 마음이 미움과 증오로 얼룩지곤 하는 것을 본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변화이며,
자기 자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내가 변하면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변한다.
세상은 이미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법계로 언제나 청정해 있다.
다만 내 마음이 오염되고 물들어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본 나의 세상도 오염되어 있을 뿐이다.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본래부터 깨달아 있었다는 말이 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특별히 구제해야 할 중생은 없다는 말도 있다.

내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이 우주는 동시에 함께 깨어난다.
내 업장을 닦고 소멸시키는 순간,
이 우주도 함께 어둠을 닦아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바깥으로 돌리지 말고,
내 문제로 보고
나 자신을 닦으라.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