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에
해가 집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지는 해지 만
해는 지고 뜨고가 없습니다.

뜨는 해는 희망차고
지는 해는 아련하고...
그렇게 우리는 분별하지만
해는 언제나 처럼
그자리 그 모습일 뿐입니다.

뜨는 해가 설레이는 만큼
지는 해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하루를 비치우고
온갖 하루의 일상을 낱낱이 짊어지고
그리고 또다른 세상을
비추기 위 해
그런 아름다움의 여운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기엔
지는 해지만
또 다른 세상이 보기엔
새 롭게 떠오르는 붉은 희망입니다.

나고 죽는
우리의 삶도 그런거지요...

여기서 보기엔
서러운 죽음일 지 몰라도,

또 다른 세상이 보기엔,
또 다른 내가 보기엔,
희망찬 새로운 시작임을...

뜨고 지 지만
뜨고 짐이 없는 햇님처럼...
나고 죽지만
생과 사가 없는 우리입니다.





겨울 바다입니다.

거센 파도가
삼킬 듯 밀려옵니다.

금방이라도
두 아이를 덮칠 것 처럼...

그래도
아이들은 관심 없이
그냥 놀기만 합니다.

성 난 파도가 덮치더라도
거샌 바람에 추위가 몰아치더라도
그저 순진한 아이들은
그냥 놀 뿐이네요...

때론
아이 들같은
천진 무심(無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가슴을 쫙 펴고
마음을 활짝 열고
넉넉하고 시원하게 살아갈 일이 다.

세상사
온갖 괴로움 들이란
한바탕 웃음으로 받아넘길 수 있는
그런 여유를 가질 일이다.

본래 훤 히 뻥 뚤려
한없이 자유로운 마음
애써 붙잡아 두려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고 살아갈 일이다.

저 망망대 해의
묵직한 고요 만큼이나
이 마음 평온을 지킬 일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그대로 자유롭다.





문종성 번뇌단 聞鐘聲 煩惱斷
지혜장 보리생 智慧長 菩提生
이지 옥 출삼계 離地獄 出三界
원성불 도중생 願成佛 度衆生

이 종소리 듣고...
번뇌가 끊어지이다.
지혜가 자라 깨달 음 얻어지이다.
지옥을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지이다.
원하옵건데
부처님 되어 일체중생 건져지이다.


부처님 의 법음은
언제나 법계를 가득 채워 줍니다.
언제 어디서나
맑은 음성으로 법을 설하십니다.

다만
우리들 귀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잣대를 가지고
선택해서 분별해서 받아들입니다.

그냥...
온전히 다 받아 들이질 못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들으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
내 기준에 맞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말 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세상살이 모습들은
그대로 법신 부처님이 나투신
법의 세계, 법계 (法界)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부모님의 모습으로
자식의 모습으로
미운 사람의 모습으로
온갖 설법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세요.
이 소리가 들리는지...

부처님 일승원음(一乘圓音)
범종소 리
은은히 들리는지...


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절에서 몇몇분들과
한달에 두 번
법구경 공부를 하기로 하여,
이 참에 법구경 강의를 조금씩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올렸던 강의를 조금 수정하였습니다.

.........

제1장 쌍서품(雙敍品)

마음

[경전]

1.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2.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 형상을 따르듯이



[강설]

경전에 보면 ‘마음’이란 말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 경전에서 나오는 마음이란 용어가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도 있다. 대표적으로 진심(眞心)과 망심(妄心)으로 나뉠 수 있다. 진심이란 본래심(本來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본래마음, 즉 불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망심이란 번뇌심, 생멸심(生滅心), 산심(散心)이라 이해되며 우리들의 산란하고 번뇌에 휩싸인 분별심이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마음이란 진심이 아닌 망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망심, 즉 분별심이 근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며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망심이란 유위법(有爲法)의 근본이 되는 마음으로 유위란 위작(爲作) 혹은 조작(造作) 즉, ‘만들어진 법’이란 의미다. 다시 말해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세계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유위법 즉 망심이 근본이 되어 현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만들어 내게 된다.

반대로 진심이란 무위법(無爲法)으로 만들어지거나 생멸하는 법칙이 아닌 만들어지기 이전 세계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진심이란 무엇 하나 붙을 것이 없고 만들어 질 것이 없는 일체가 딱 끊어진 공(空)의 본래자리이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말한 ‘마음’이란 망심 즉 우리의 분별심, 생멸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의 분별 망심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세상을 만든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만드는 근본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말이요,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만들고 모든 것을 시킨다는 말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 되어 모든 일을 만들어내고, 모든 일을 시키며, 마음이 주인이 되어 이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든 것도 인간의 마음이며, 나에게 주어진 내 세상을 만들어 낸 것 또한 나의 마음이다. 마음이 없었다면 세상도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일으킨 마음이 오늘날의 현실을 만들어 냈고, 지금 이 순간 일으키는 마음이 나의 미래를 만들어 낸다. 우리가 일으킨 모든 마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세상은 그것을 놓치지 않는다. 세계, 법계는 그것을 놓치지 않지만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놓치고 만다. 아니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가 마음을 일으켜 놓고도 스스로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끊임없이 마음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끊임없이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지만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 낸다는 이 단순하고도 분명한 이치를 통째로 집어삼키지 못하고 있다. 다만 머리로만 대충 알 뿐, 온 존재로써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지금처럼 주의 깊지 못하게 마음을 함부로 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주어진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으며, 무엇 때문에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전혀 살피지 못한 채 그냥 그냥 주어진 생을 소모하고 있다. 마음을 놓치면 세상을 놓치는 것이다. 마음을 놓치면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이 진실을 주의 깊게 사유해 보라.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면, 세상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머물렀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전체적으로 깨닫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을 보면 된다. 세상 모든 것을 깨닫고 싶다고 세상 모든 것을 다 살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다만 마음을 보라.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시키고 세상을 만든다. 모든 일을 시키고, 이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인은 바로 마음이다.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끊임없이 운명을 변화시켜 갈 뿐.

마음을 간절히 일으킨다면 세상은 거기에 반응을 할 것이다. 그 마음이 더욱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간절한 소망으로 사무친다면 우주는 조금 더 민감하고도 강하게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간절이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법칙이다.

그러나 그 반응은 일률적이지는 않다. A라는 마음이 반드시 a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b나 c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결과는 빠르고 어떤 결과는 늦을 수도 있다. 또한 간절히 마음을 내더라도 내가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업(業)과 인과(因果)와 전생의 사건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마음 낸 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빨리 혹은 늦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물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주의 에너지는 공평무사하게 응당한 반응을 가져다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반응이 너무 복잡하고 무량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인과의 법칙, 다르마(진리)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인 경우 그 반응의 법칙은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따른다. 즉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앞선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경전에서는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으로 선악을 대비시키고 있다.

삿되고 악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意]으로 말[口]하거나 행동[身]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이 말은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악업(三惡業)을 짓게 될 경우 허물과 괴로움이 따르며, 신구의로 세 가지 선업을 짓게 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가진다.


『법구비유경』에서는 위의 게송이 나온 연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푸라세나지트왕이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손 씻을 물을 나르고 음식을 만들어 공양 올리는 것을 보고 한 상인은 ‘부처님은 제왕과 같고 제자들은 충신과 같구나. 저 왕은 참으로 현명하다. 부처님을 높이 받들고 자신의 뜻을 낮출 줄 아는구나.’라는 찬탄의 마음을 낸 공덕으로 훗날 왕위에 오르지만, 또 한 상인은 ‘저 임금은 어리석구나. 자기가 국왕인데 무엇을 더 구하려고 부처님께 공양하는가. 부처는 마치 소와 같고 제자들은 수레와 같구나. 저 부처에게 무슨 도가 있다고 저렇게 뜻을 굽혀 받드는가?’라며 나쁜 생각을 일으킨 과보로 죽어 태산지옥에서 불수레에 깔리는 갚음을 받게 된다.

이처럼 첫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좋은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왕이 되었으며, 두 번째 상인은 마음으로 수레에 깔려 죽을 종자를 심었기 때문에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는 가르침에 따라 지옥의 과보를 받게 됨을 설하면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여기 『법구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인과의 방편법에서 머물지 않고 본질적인 근본법을 아울러 설하고 있다. 근기가 낮은 이들에게는 선악이라는 인과의 법칙이 더 쉽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선악의 마음을 대비시켜 설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삿된 마음과 순수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불교에서는 선악의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선다. 본래 세상에 선악이란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악한 마음도 근본적이지 못하지만, 역시 선한 마음도 본질적이지 않다. 옛 말에 ‘선한 것은 도(道)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불법문중에서는 깨달음을 문제 삼을 지언정 착한 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선악이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일 뿐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악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선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본다면 그 모든 마음은 삿된 분별심일 뿐이다. 악한 마음만 삿된 마음이 아니라 선한 마음도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선과 악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선을 선택, 분별, 차별하는 마음을 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이미 삿된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이며, 악한 마음을 일으켜 집착해도 번뇌일 뿐이다. 선한 마음을 내면 스스로 선한 마음을 냈다는 상이 생기고, 선한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거나 미워하게 되며, 사랑하는 마음을 내면 표면적으로는 사랑이 깊어가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증오의 마음도 함께 커가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배신을 당했을 때 증오도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선한 마음도 차별심이며, 악한 마음도 차별심이라고 보았을 때, 불교에서는 선악의 차별적인 모든 마음을 다 여읠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마음을 일으켜 무엇을 해 보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번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면 선에 집착하게 되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면 악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수행자와 구도자들은 한결같이 ‘마음을 비워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마음을 내는 것 보다 그 마음 자체를 비우는 것이 더욱 수승하다.


한동안 세간에 화재가 되었던 책 ‘연금술사’나 ‘시크릿’ 등은 바로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이 주인이 되어 모든 일을 만들고 세상을 만든다’는 것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기에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설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어디까지나 본질적인 측면이 아닌 방편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간절히 원해서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불교의 근본 목적이 아니다. 마음을 사용함으로써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본질적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다. 요즘 같은 세상의 트렌드에는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이런 종류의 책들이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간절히 원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고, 간절히 원하면 명예나 지위도 얻을 수 있으며, 간절히 원하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사람들을 들뜨게 하고, 희망을 가지게 하며, 꿈과 욕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가. 그러나 잔뜩 욕망에 넘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비워라’ ‘간절히 원하는 그 마음도 궁극에 가서는 놓아야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김빠지는 말인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과 놓음의 가르침보다 오히려 시크릿이나 연금술사 같은 류의 책들이 세간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결국에는 넘어서야 할 것들이다. 그 마음 조차도 결국에는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경구를 다시 살펴보면, 삿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은, 무언가 마음을 일으켜 말하거나 행동하면 허물과 괴로움이 그를 따르고, 마음을 비우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말이다. 즉 삿된 마음은 일반적인 우리의 마음[心]을 의미하고, 순수한 마음이란 ‘마음비움’ ‘마음 놓음’이란 무심(無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살아나가라는 말인가. 선한 마음도 악한 마음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 도대체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순수한 마음이란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마음을 아예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마음이다. 선한 마음을 일으키더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켰다는데 집착하지 않고, 악한 마음을 일으켰더라도 죄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의미인 것이다. 마음도 일으키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되 집착 없이, 머무는 마음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좌절하고 괴로워 할 것이지만,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을 내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이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과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