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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9 금강경 4분 묘행무주분 강의 - 집착 없이 베풀라




4, 묘행무주분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
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이면 행이지 함이 없는 행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말씀이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묘한 가르침인가.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궁금해 질 터인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묘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 즉, ‘무주’인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진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다. 즉,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이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무주묘행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니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 즉 보살마하살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즉 보살이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분별과 번뇌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깨달음에 이르러 하화중생의 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들에게만 이 보시의 법문이 중요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일체 모든 발심한 선남자 선녀인, 즉 우리들 같은 생활 수행자들의 모든 실천 수행 또한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상구보리의 측면이고 상구보리가 체득되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저절로 하화중생의 발원, 즉 일체 중생을 향한 동체 대비의 마음이 바탕 된 보시행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구보리가 그대로 하화중생이란 말이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곧 보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지혜가 곧 자비인 것이다.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곧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반대로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은 곧 지혜의 증장으로,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보시를 하되 진리의 보시를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보시를 하며, 또한 보시를 하되 색성향미촉법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발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처럼 보시와 수행은 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묘행무주의 실천행으로,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에 묘행무주의 보시행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이어지는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 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아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 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한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 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는가.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 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륜이란 시륜(施輪)과 수륜(受輪), 물륜(物輪)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바퀴인 륜(輪)의 의미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처럼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인가.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이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한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이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이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한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된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진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이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이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이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이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한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이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인연법이라는 법칙에 따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사람이 가졌다 버렸다 하거나, 주고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인연의 법칙에 따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준다 받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 처럼.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