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의 택시는 전부가 4륜구동의 승합차량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곳곳이 가파른 오르막이고
때때로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곳들도 많이 보인다.

택시를 타고 산 아래 안평전까지 가면서도
울릉도의 풍경, 바다위로 피어오르는 태양 빛,
그 빛에 반사되어 황홀경을 선사하는 산세며
어느 것 하나 내 눈을 사로잡지 않은 것이 없다.



울릉도는 섬이라 산세는 고만고만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은 그야말로 완전히 빗나갔다.
주봉 성인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펼쳐져 있는 봉우리들이
그야말로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한참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한동안 산 쪽 오솔길로 들어선다 했더니 벌써 안평전에 다다랐다.
성인봉 쉼터라고 쓰여 있는 바로 이 곳이
안평전에서 오르는 등산의 초입이다.



성인봉 오르는 길,
초입에 몇몇 채 소박한 집들이 늘어 서 있을 뿐
안평전의 풍경은 조용하고 차분하다.



마지막 소담한 농가에서 멀리 바다를 굽어보며
물을 한 잔 얻어 마시고는 이제 본격적인 입산에 들어간다.



저 멀리 바닷가 위로 떠오른 햇살이 아직 따스한 온기와 빛으로
성인봉 얕은 산봉우리들을 비춰주고 있다.

이런 풍경 하나 하나가 내 안에 자연 성품을 일깨우며
감미로운 뉴에이지 피아노 선율이 잔잔히 대지 위로 연주되는 듯
내 온 몸이 마음이 이 법계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연주를 하지 않아도 연주되는 음악이 있다.
때때로 이런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호올로 느낄 때
하늘에서 대지에서 산과 바다에서
온 존재를 하나되게 만드는 음악이 연주되곤 한다.

산길을 걷는 내내 연주는 끊이지 않는다.
발걸음에 바스락 거리는 낙엽 소리도,
앙상한 가지 끝에서 돌아감을 순수히 기다리며 미처 떨어지지 않은 낙엽이
시린 바람과 함께 만들어 내는 소리도,
온갖 새들의 지저귐이며 간간이 들려오는 꿩 소리도,
저 멀리서 들릴 듯 말 듯 간지럽혀 오는 파도 소리도,
또 산길을 오르며 거칠어지는 호흡 소리며,
내 안에서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까지
그 어떤 소리 하나 법계의 노랫소리 아닌 것이 없게 느껴진다.

인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무위의 소리들이
그대로 진리인 양, 사자후인 양
흡사 가릉빈가의 연주처럼 성성하고도 적적한 감미로움을 자아낸다.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다.
산 아래는 아직 가을의 잔영이 남아있다.



육지에서는 벌써 단풍 구경 끝난 지가 오랜데
신기하게도 산 아래는 생의 마감에 미련이 남기라도 한 듯
푸석푸석한 막바지 단풍들이
아쉬운대로 두 계절의 즐거움을 선사해 주고 있다.



오르는 길에 나무로 만든 투박하지만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룬 계단들이 인상적이다.



여느 국립공원 산 같으면
인위적인 가공 계단들을 반듯 반듯하게 세워 놓거나,
또 어떤 곳은 철로 만든 계단을 만들어 놓아
산길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흙과 낙엽 소리 대신에
철철거리는 철계단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도 있었을 터인데
이 곳의 계단들은 하나같이 그 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그것도 반듯하게 잘라서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부러지고 쓰러진 나무들을 엉성하게 모아 만들어 놓은 계단들이다.



이렇듯 계단 하나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가도록 만들 수 있는 법.

산을 오르며 곳곳에 오랜 세월을 버텨오다 버텨오다
인연이 다해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꺾이고 쓰러진 고목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런 쓰러진 나뭇가지들을 적당히 크기 맞게 잘라
이렇게 계단도 만들고 잠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더없는 정겨움과 고향 같은 풋풋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산 중턱 곳곳까지도 고사리류와



섬바디,



섬노루귀 등이



초록의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이 추위를 근근히 버텨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늦가을 겨울 초입의 날씨에 단풍에 초록의 식물들까지
참 대견하다 싶더니만 역시나 중턱을 넘어서면서부터
나무들은 가지 끝에 남은 단풍 한 떨기조차 다 떨구어 냈고
초록의 식물들도 사라진 채
한겨울을 초록으로 끝까지 나는 조릿대만 나무 아래 녹빛 흔적을 남겼다.



산 아래에서부터 중턱, 정상까지 오르며
조금씩 계절은 가을에서 겨울로 빠르게 옮겨가고 있다.
중턱을 넘어서니 하늘빛도 더욱 푸르고
잎을 다 떨구어 낸 나무들도 훨씬 홀가분하고 호젓하게 서 있다.



그렇다보니 건너편 산도,



나뭇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도 그대로 시원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없는 산 길,
침묵만이 내 벗이 되어주는 이 길이
오늘따라 내 마음을 왜 이리도 설레게 만드는지.

대자연의 길벗들이,
이 숲의 나무와 바람, 흙과 풀들, 하늘과 청량한 내음들이
모두 내가 걷는 길을 축복해 주고 밝혀주는 것만 같다.
아주 오래 전부터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될 나와의 인연을
그토록 기다리며 마중하기라도 했다는 듯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한 숲의 도반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고 있다.

이런 때, 이런 날, 이런 곳!
난 이런 문득 스치는 낯선 자연의 인연을 미치도록 좋아한다.
내 삶에 가장 소중한 인연이자 도반이자 스승이 되어주는
이 대자연 법계의 소식들이 짠하게 내 품을 감싸주고 있다.

오랜 도반들, 내 삶의 길벗들! 안녕!
산과도 나무와도 바람과도 인사를 건낸다.
모든 숲의 생명들이 속 뜰의 예민한 감성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고 있다.
공평하고 평등한 존재와 존재가
민감하게 서로를 살려주며 공명하고 있음을 느낀다.

느릿 느릿 한 시간 여를 올랐을까.
7시 50분 즈음에 안평전에서 출발했는데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 막 지나고 있는 걸로 봐서
생각보다 걸음이 빨랐던 것 같다.

울창한 마가목 나무 원시림이
또 한번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계곡과 능선 사잇길을 따라 느릿한 걸음으로 한 시간여를 올랐을까
능선 위로 오르면서 원시림이 펼쳐지고 조금을 더 걸어올라가니
발 아래 울릉도 도동항과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잠시 숨을 돌리고 또 다시 울창한 숲 터널을 걷는다.
계곡 쪽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니 비로소 따스한 햇살이 길 위로 내려앉는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태양은 이 산위로, 바다 위로, 도동항 마을 위로, 숲 길 위로
자신의 따스한 햇살을 한없이 나누어주고 있다.



새벽 일출 때부터 지금 즈음까지의 햇살이
하루 중 가장 가볍고 상냥하며 따스한 느낌으로 세상을 비춘다.
그리고 낮 시간에는 정직하고 곧게 내려쬐며 대지를 덥히다가
또 다시 늦은 오후부터 일몰 직전까지는
아침보다 좀 더 짙고 차분하며 따뜻한 느낌으로 대지를 품에 안는다.

햇살도 가만히 관찰해보면 이렇듯
새벽과 아침 오후와 저녁 때가 예민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더라도 그 차이점이 더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마다의 햇살이 제각기 독자적이고 완전한 자기의 삶을 대지 위로 꽃피워낸다.

햇살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대지 위의 모든 존재며 생명들이
모두가 저마다의 시공간 속에서 제각기 독창적이고 완전한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을 온전히 걸음으로써
그 안 깊은 곳에 담겨진 진리를 고스란히 세상에 표현해 낸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온전한 완성과 지복의 행복을 부여받는다.
그래서 울릉도도 울릉도만의 독자적인 모습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이렇듯 법계의 아름다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많은 곳이 그러고 있듯이
이 울릉도도 머지 않아 개발과 발전의 논리가
섬 전체를 집어 삼킬 지 모르겠지만
그랬을 때는 더 이상 울릉도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 것이다.

쭉쭉 뻗은 빌딩숲이나 대형 콘도며 호텔들,
인공의 잔디가 광범위하게 깔린 골프장이며,
산을 뚫고 길을 내거나
저 성인봉 정상에까지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등
이 무위의 섬 울릉도에 문명의 이기와 인위적인 것들을 들여놓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울릉도는 더 이상 울릉도만의 성품을 잃고 말 것이다.

그것들이야 어디든 다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애써 울릉도까지 들어와서 또 봐야 할 것이 무언가.
하기야 이 울릉도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고,
전 세계가 이미 개발과 발전의 논리로 인해
저마다의 온전한 독자성과 독창적인 본성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세계적인 휴양지라는 곳은
죄다 똑같은 유럽식 호텔에, 똑같은 조경에, 똑같은 아스팔트 길이며
무엇 하나 그 나라만의 그 고장만의 독창적인 멋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을 찾아보기 어렵게 돼 버렸다.
그런 인위적인 것들은 생명의 기운을 떨어뜨리며
그 고장만의,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진리 성품을 사장시키고 말 뿐이다.

대자연은 항상 진리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며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살려지고 있다.
법신 부처님의 숨결대로,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의 선택 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며 자연스레 자신만의 성품을 드러내고 있다.

그렇게 인위적인 개입을 최소화 시키고
대자연의 진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면서 살려지도록 놓아두는 것만이
시름 시름 앓고 있고, 아름다운 생명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숲 터널을 따라 계속해서 오르니 어느새 인가
가을의 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완연한 겨울로 옮겨왔다.



발 아래는 지난 주엔가 왔다는 눈이 완전히 녹지 않은 채 길 섶에 있고
때때로 마가목 빠알간 열매들만이 흑백의 명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성인봉 가까이에 조금 더 다가가니
발 아래로 어제 가 보려다 못 갔던 봉래폭포 쪽 계곡과
저동항의 풍경이 창창하게 펼쳐진다.



햇살이 많이 비치는 곳에는 눈이 거쳤는데
초록의 연한 이끼들이 햇살을 받아 곁의 눈을 녹여가며
겨울을 날 생명수로 흡수하고 있다.



조금 더 걸으니 안평전과 도동 대원사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
성인봉 오르기 전 만나는 곳, 삼거리 쉼터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드디어 성인봉 정상.



바람은 차다.
성인봉 정상에 올라서니
그야말로 울릉도 섬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눈만 돌리면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펼쳐진다.



올라오는 쪽 하늘은 구름이 별로 없어 화창했는데
성인봉에 올라 반대쪽을 보니 하나 둘씩 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성인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나리분지와
그 너머의 바다, 그리고 그 위로 펼쳐진 구름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구름이 오며 가며
나리 분지의 신비를 열었다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한참을 성인봉 위에 앉아 울릉도 중심에 서서
이 울릉의 법계를 다만 바라보고 있다.

아침에 민박집 어르신께서 성인봉의 산기운이 전국에서 제일이라며
꼭 정상에 오르면 정성스런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라고 했던
당부가 생각났다.
언뜻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당신께서도
불경 공부를 꾀나 많이 하셨고 요즘도 집안에서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 수행을 퍽이나 열심히 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르신의 말씀도 말씀이려니와
이 생경한 신비감에 저절로 기도심이 북받쳐 올랐다.
“이 법계 두루 두루에 대자연 법신의 사랑이 가득하기를,
이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지 못하고 여전히 아만과 욕심,
이기에 물든 모든 이들에게 지혜의 빛 찬연히 비추기를,
기아와 가난, 전쟁에 깊은 상처를 받고 죽어간 수많은 형제들께
본래 청정, 본래 원만 구족의 대 적멸이 깃들길,
이 세상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 깨어있음의 연꽃 한 송이 피어오르길,
깨달음을 향한 적멸의 발원 이 생을 넘기지 않길,
성인봉 산신님께, 울릉도 이 대자연 법신불께,
아버지 하느님, 어머니 대지에 간절한 마음 모아 기도드렸다.”


둘째날, 성인봉에서 나리분지까지(성인봉출발, 10:00)

아이젠을 하지 않아 그런지
나리분지로 향하는 내리막길은 퍽이나 미끄럽다.



초록과 흰 눈, 그리고 나무와 하늘색의 조화가
마치 하늘 예술가가 내려와 물감을 뿌려 놓은 듯
내 안의 특별한 정서를 일깨우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약수터 성인수에서
성인봉의 정기어린 시원한 생명의 감로수를
대자연 벗들에게 한 잔 대접받고 났더니 더없는 생기가 돌았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는데
‘이곳이 성인봉 원시림이구나’ 싶은 생각이 번뜩 스칠 법한
그런 창연한 숲과 오랜 고목들을 만났다.



약 500여 년 된 섬피나무가 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 한 곳에서 살아내며
500번이나 반복되었을 계절의 변화와 생멸을
온몸으로 버텨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00번의 봄에 꽃을 피웠을 것이고,
또 500번의 여름을 짙은 초록으로 물들였을 것이며,
500번의 가을에 단풍을 만들어 잎을 떨구고
지난한 500번의 겨울을 시린 침묵에 잠겨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잎은 흙이 되고 거름이 되어
다시 제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 가
또 다시 자신의 뿌리를 가지를 잎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윤회의 작업은 500여 년 동안 끊임없었을 터다.
겉모양을 바꾸며 몇 번이고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면서
저렇듯 육중하게 세월의 역사를 한 몸에 담아
지금의 원시림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것 같은 나무 한 그루도
그 존재 안에는 무시무종의 윤회와 숯한 업연이 담겨 있고
전 우주적인 소식을 내제하고 있으며
그 피어남을 위해 온 우주가 기꺼이 도왔을 터다.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도, 풀 한 포기도, 하찮게 보이는 곤충 하나조차
전 우주 법계의 거룩한 신성이 불성이 담겨 있는 숭고한 존재다.
하물며 사람이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이든,
가난에 찌들어 괴로운 사람이든,
하물며 큰 죄를 지은 죄수라 할지라도
어찌 그 존재가 하찮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이 담기고 역사가 담긴,
지난 세기를 묵묵하게 살아 낸 원시림 숲의 정령들과
나무와 대지에 깃든 생명신들,
대자연의 천사들과 청량한 선신들
어떻게든 이름 지어진 그 모든 인연 도반들께, 이웃들께
이렇게 숲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대한 깊은 감사와 경외를 보냈다.

원시림 숲 속을 가로질러 내려오는데
저 아래 계곡이 크게 몸살을 앓고
살저름을 떼어내는 듯한 아픈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태풍으로 인해 이 거대한 원시림 계곡이 무너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조화는 언제나 여여하고 법에 맞다.
여법한 일들, 꼭 필요한 일들만이, 꼭 필요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대자연을, 이 우주 법계를 바라보는
가장 큰 ‘보는 관점’, 정견(正見)이 되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숲이 왜 이렇게 훼손되고 있을까.
왜 태풍은 매년 이 아름다운 대지를 할퀴고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은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지구적인 문제이며,
전 역사적인 복잡한 인과가 인다라망처럼 얽혀 있는 문제다.

어쨌든 그 이유들을 하나하나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태풍 또한 이 세상에, 이 곳에
꼭 필요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여여하게 이렇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어쩌면 아직 더 많은 태풍이, 폭우가, 지진이, 해일이
이 세상을 뒤덮어 버릴 지 모른다.
지금까지 있어 온 기상이변들은 어쩌면 서막에 불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에 전 세계적으로 거대하게 일어나는 기상이변은
대자연 존재계의 본질에서 보내는 지구를 위한 자비로운 힌트일 지 모른다.

여전히 신은, 붓다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경고 혹은 힌트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공업(共業)을 세계적으로 꾸준히 짓다보면
인과의 결과 이 지구는 결국 그 당사자인 인간들을 훼손시키고 말 것이다.
그것이 공평한 인과응보의 이치가 아닌가.

지금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기상이면들은
바로 그것이 시작되고 있음을,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끊임없이 개발지상주의에 빠져 전 지구를 파헤치고 있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강력한 힌트를 존재계의 본질에서 꾸준히 보내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 힌트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알아채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욕심충족과 만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들,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삼독심이 그 힌트를 무시하고 있다.

대자연이 보내는 자비로운 경고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수많은 기상이변이며 대형 태풍들이 불어닥칠 때
그 힌트를 알아채고 곧장 본질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본질은 무엇인가.
이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더 이상 대자연을 훼손시키지 말고,
개발이란 이름으로 죽이지 말고,
사람의 생명과 대지의 생명이 둘이 아니란 자각으로써
조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조금 더 절약하고, 조금 더 만족하며,
욕심을 줄이고 집착을 버리며,
대자연의 시름 시름 앓고 있는 몸살을 동체대비로써 어루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본질에 접근하기 보다는
지엽적인 것에만 매달려 어리석게 일을 진행시키고 있다.
태풍으로 계곡이 무너졌다고
콘크리트로 계곡을 반듯하게 바를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전국의 모든 하천들은 예전의 생명하천이 아니다.
모두가 반듯반듯하게 콘크리트 등으로 인위적으로 쌓아 놓아
작은 하천생명들이 더 이상 살아낼 수 없는 죽은 환경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든 하천은 깨끗해졌다.
흙도 별로 없고, 풀도 없고, 나무도 없으며
그 안에 깃든 하천 생명들도 사라져 버렸다.
오직 죽은 물이 흐르기만 하는 기능성 정비 하천이 되어 버렸다.
그래놓고 사람들은 그런 하천 풍경을 보며 개발되어 좋다고 말한다.
너도 나도 우리 동네 하천도
그렇게 포크레인과 거대 자본으로 개량해 주길 바란다.

모든 사람이 죽은 하천을 바란다.
그것을 깨끗하다고 여기며,
그것이 개발과 발전의 이기이며 축복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인위적인 정비 하천을 보며 물도 맑아졌고
물길도 구불구불하던 것이 잘 펴졌으니
이만하면 환경 정비가 잘 되었다고 하겠지만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자연 하천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온전하다.
그래야만 사람도 살고 그 물에 물고기도 작은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모든 개발 정책은 최우선에 생명을 두어야 한다.
하찮게 보이는 생명이 살아나야 인간 생명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 곳 성인봉 아래 나리분지 가기 전의 무너져 가는 계곡도
그걸 살리겠다고 지금 곳곳에 포크레인과 대형 장비들이 들어 와
계곡에 새로 튼튼한 인위적인 벽을 쌓는 현대적 정비작업에 나섰다.



반듯하게 쌓아 올린 인공 계곡과 하천의 모습을 보니
더 깔끔해 지고 있다는 느낌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무언가 산과 나무와 계곡의 조화가 깨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연은 저절로 진리에 걸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비와 정화를 스스로 해 낼 것이다.
인간의 해석과 장비를 들이대니 그것이 병인 것 처럼 보이고,
인간이 개입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만히 놔두었을 때,
자연의 일은 자연 스스로에게 맡겨 두었을 때
자연은 정확하게 해야 할 일을 알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의 현실이 애초부터 사람에 의해 발전되고 파괴되다보니
한 번 사람 손이 간 것들은 이제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에 길들여 져 복구가 되어야지만 되도록 해 놓아서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손길이 필요한 곳들도 있지만,
그런 곳이라도 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모든 생명을 살리는 방법으로
그 방법이 전면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본래 자연에는 병이 없다.
자연 속에 깃든 모든 존재는 병으로 앓지 않는다.
유독 인간들만이 병으로 고생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 애완동물들만이 인간의 병을 닮은 온갖 병들로 고생한다.

자연이 병들어 보이는 것도 사실은 그게 병이 아니다.
변화의 한 모습일 뿐.
그래서 자연은 파괴되는 듯 보이는 겉모습도
자연스런 삶의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인간이 보기에 병들어 보이는 것도
가만 내버려 두면 스스로 알아서 치유된다.

저 성인봉 아래 하천을 정비하겠다는 모습만 보더라도
자연을 보호한다는 것이 도리어 흉측하게 바꿔 놓았다.
한 번 인위가 개입되면 그 때부터는
작은 상처에도 인간이 개입되야 하고, 온갖 기술과 장비,
돈과 인위적인 노력이 따라 들어와야 한다.
여러모로 번거롭고 어리석은 일들이 점차 우리 주위에는 늘어가고 있다.

이 늦가을, 하천 정비 공사장 곁에는
6, 7월에 피는 섬바디 하얀 꽃이 계절 감각을 잃고 피어올라 있다.

더 아래 나리분지 가까이에는 또 하나
한창 겨울에 피어야 할 동백꽃도 유독 한 나무에서만
빠알간 생명의 숨결을 틔워올리고 있다.



조금 더 걸어내려가니
울릉도 전통 가옥이라는 투막집 몇 채가 보이고



나리분지 쪽에는 너와집도 몇 채 보인다.



요즘 흙이나 통나무로 만든 전통 가옥에 대해 관심이 가던 터라
유심히 관찰하며 투막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그야말로 울릉도의 자연에서 나온 흙과 나무 그리고 볕집들이
조화롭고도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역시 옛 사람들의 자연스런 지혜는
인위적이기 보다는 무위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선지자의 그것이다.
옛 것을 보라.
어느 것 하나 파괴되거나 조화를 깨는 것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아 말할 것이고,
또 실제로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이고도 혁명적인 방법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요즘은 그런 옛 것의 우수성이 점차 알려지기도 하고
또 옛 것과 새 것을 잘 공유시킨 의식주 물품들이 유행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한 때의 유행이나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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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릉군 북면 나리 | 울릉도
도움말 Daum 지도
Posted by 법상

관례적으로, 고산증세가 오기 시작한다는
3,440고지 남체바자에서
많은 여행객들은 고산적응 시간으로 이틀 밤을 머문다.

도착한 다음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더 머물며,
주로 남체바자 마을의 뒤쪽 산 위에 자리잡은 샹보체(syangboche, 3720m)와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 로체(lhotse, 8,516m), 타보체(Taboche, 6367m),
탐세르쿠, 에베레스트(everest, 8,850m) 등의 영봉들이 환히 보이는
일본인이 소유의 에베레스트 뷰 호텔(Everest View Hotel, 3900m)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하루를 더 보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때때로 젊고 혈기 왕성한 트레커들이 하룻밤 고산적응 시간 없이,
또 얼마나 빠른 시간내에 완주를 이루어내나 내기라도 하듯
하루 사이에 700~1,000 고도 이상을 오르는 강행군을 며칠이고 이은 끝에
몇몇은 당연한 고산증세로 뛰쳐 내려오거나 실려 내려오고,
또 몇몇은 그 초월적인 일정을 신기하게도 무사히 마침으로써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으쓱한 자기 과시도 이어가는 경우도 있더라고 한다.

나야 시간도 느긋하게 잡았고,
빨리 오르는 것이 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생에 처음으로 친견하는 희말라야 산군에게 나를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법신(法身)을 친견하듯 오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이른 새벽, 아직 동도 터오기 전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찌뿌등한 몸을 좀 풀고
아래층 화장실 옆 작은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고 나왔는데도 도저히 추위가 가시지를 않는다.
그나마도 전날밤은 두꺼운 이불을 두 개씩이나 무겁게 누르고 잤기에
설치지 않고 푹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동쪽 하늘이 어둠을 뚫고 짙푸른 빛으로 물드는 듯 하더니
콩대(Kornde, 6187m)의 만년설 봉우리 위로 황금빛 일출이 시작된다.



방에 올라가 커튼을 활짝 열었더니
창문 밖으로 콩대 봉우리가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펼쳐진다.

 


 

봉우리의 일출을 방 안에서 마주하며
그 황금빛 붓다의 성상을 향해 차분히 예불을 올린다.

아침 식사를 롯지 식당에서 간단히 마치고,
바로 뒷산 격인 샹보체를 오르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산을 오르는 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눈에 띄고,
이 높은 곳에 학교가 있는 것인지 가방을 둘러 여학생들과,
목에 댕댕 거리며 종소리를 울리고 무겁게 걷는 야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길을 오른다.

 

 






샹보체를 향해 한발 한발 오르는 동안
남체바자의 조망이 한층 드넓게 트이면서
이윽고 산정에서 하나도 가리지 않은 알몸의 남체 전경을 만난다.





남체바자는 그야말로 희말라야 산정 마을의
그 어느 곳보다 크고 아름다우며 성스럽다.
안나푸르나의 촘롱이나 간드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조망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샹보체를 향해 걷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면 너댓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20여 분 더 오르면 바로 샹보체가 나온다.
샹보체가 상 정상에 있는 마을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마을이라기 보다는 황량한 초원벌판의 비행장이다.
롯지가 두어 곳 있고, 그 옆으로 너른 비행장이 펼쳐져 있다.
말이 비행장이지 그저 헬기장 수준의 너른 벌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샹보체, 툭 터진 비행장의 전경 앞에 앉아 호흡을 돌린다.
흡사 골프장 잔디밭을 연상케 하는 자연 그대로의 푸른 초원,
그 건너편 위로 솟아오른 구름에 반쯤 가려진 탐세르쿠와 캉테가 만년설산,
산행하기에 적당한 날씨와 따스한 햇살,
산들 산들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꿈같고, 선연하여
마음을 추스르기 힘겨울 정도다.

 

 




초원의 비행장 좌측 얕은 산 정상 위에
캉테가와 탐세르쿠를 병풍처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롯지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것이 희말라야 뷰 호텔인가 했더니 호텔은 그 롯지 너머에 있다고 하네.



한참을 앉아 있자니 미니 비행기 한 대가 루클라 쪽에서 날아오더니
남체와 샹보체를 한 바퀴 휘휘돌아 건너편 산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 잠시 뒤 한 대의 헬기가 날아오더니
샹보체가 이렇게 어설퍼 보여도 헬기장이 맞다고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는 큰 소음과 함께 프로펠러를 휘날리며 착륙한다.



한참 전부터 헬기장 한 편에 서 있던 일단의 여행자들이
헬기에 몸을 싣고 짐을 싣더니 곧장 수직 상승하며 날아간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곳 샹보체에서 헬기를 통해
곧장 카투만두로 가는 헬기 교통편이 있다고 한다.
대략 1인에 50만원을 상회하는 금액이 든다고 하니
우리 같은 최대한 아끼며 다니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나마도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상관이 없지만,
부득이하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미리 선금으로 헬기값을 지불해 놓고도
구름 속에서 헬기 소리만 듣다가 착륙을 못해 타지 못하고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 일단 헬기가 떴기 때문에
비용을 되돌려 받지는 못한다고 하니
그 막대한 비용을 고스란히 버리고도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한참을 앉아 쉬었더니 설산을 휘휘 돌아 불어오는
툭 트인 초원의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느라 한기가 느껴진다.
샹보체에서 비행장 좌측편으로 보이는 얕은 언덕 사이로
희말라야 뷰 호텔, 그리고 쿰중과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쿰중과 호텔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산정 즈음에
스투파 하나가 당차게 서 있다.

 

 

 
우측 비행장 옆으로는 그림 같은 노오란 초원이 펼쳐진다.



좁은 숲길을 산책하듯, 경행하듯
길가에 자유로이 피어난 꽃이며 작은 풀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거짓말처럼
모든 희말라야의 봉우리들이 환희 보이며
내일부터 걸어 올라가야 할 마을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언덕 위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만난다.



좁은 숲길에서 꽃들과의 숨바꼭질을 하다가 숲길 끝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만나니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놓칠세라 여행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곳에서 위쪽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또 다른 쿰중으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작은 오솔길이 에베레스트 뷰 호텔로 가는 길이다.
이 아래쪽 호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절벽 같은 산사면의 구부능선 즈음에
길 옆으로 빨갛고 노오란 꽃들이 앞다퉈 피어난
그야말로 그림 같은 길이다.

 



황막히 불어와 뺨에 박히는 칼바람만 아니어도
이 길가에 앉아 가만가만 살펴도 보고,
여유있게 누워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앙증맞게 피어난 울긋불긋한 꽃들도 바라보고,
건너편 우뚝 솟아오른 만년설산에도 눈길을 주면서,
그러다가 심심하면 책도 읽어가면서 오후 내내 염연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히려 에베레스트 뷰 호텔보다 호텔로 가는 길이 더 뷰 포인트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
호텔 야외 전망대에서 따뜻한 레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인다.

 



설산의 봉우리들이 자신의 하얀 살저름에서 떼어내 구름을 만드는 것인지
새벽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청연하던 하늘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름으로 뒤덮인다.



주로 구름은 텅 빈 하늘을 떠 다니는게 아니라
산봉우리 주변으로 띠를 이루며, 연모의 포옹을 하듯
그렇게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구름으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게 아쉽다.
곁에서 전문 사진장비를 갖추고 숨죽이며 전망을 주시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두 분이
일본인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투박한 영어를 내뱉으며
두 팔을 뻗어 구름을 확 걷어내고 싶다는 몸짓을 보이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타박타박 걷던 길을 다시 돌이켜 남체바자로 향한다.



한적하게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선명한 희말라야를 흠뻑 느껴본다.
남체로 내려가는 길에 부채꼴 모양의 선명한 남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샹보체와 호텔을 두루 돌아 왔는데도 오후 시간이 고스란히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몇몇 트레킹 샵을 돌아본다.
엊그제 팍딩에서의 추위가 생각나
든든한 겨울용 침낭을 빌리러 몇몇 곳에서 가격을 살핀다.

어떤 가게에서는 하루 대여료가 200루피,
또 다른 가게에서는 150루피였는데,
한 가게에서 살짝 얼굴만 내밀고 물었더니 80루피를 부르는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 가게에 들어서니,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다 말고
“Japan?” “Korea?” 하더니 바로 다시 150루피를 달라는게 아닌가.

방금 전 분명히 80루피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더니
웃으면서 살짝 보고 네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며,
어차피 말했으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시원스레 침낭을 보여준다.

한국이나 일본인들의 여행자들이 트레킹을 하러 많이 오는데,
처음 출발할 때는 여행자 같다가도 일주일 이상 지나고 나면
까맣게 탄 얼굴이며, 씻지 않은 몸, 헤어지고 더러워진 옷가지 등으로 인해
말만 안 하고 있으면 네팔 현지인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때때로 그 덕을 보기도 하니 그도 좋은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의자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혼자라 이런 점이 좋다.
그저 자리가 없어도 한 자리 정도야 아무 곳이나 끼어 앉아도 좋다.

대부분 롯지 식당의 특색은
우리나라처럼 따로 따로 4명, 8명씩 앉도록 해 놓은 것이 아니라
ㄷ자로 만들어진 회의장을 연상하면 딱 맞다.

덕분에 오붓하게 세계 각지의 여행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도 보내며 또 서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또 자신이 먹는 음식들에 대해,
그리고 대부분은 주로 다음 트레킹 일정이나 루트에 대해 묻고 답하면서
이런 저런 정보교환과 살풋하고 정감어린 교류의 장을 마련하곤 한다.

그야말로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 혹은 일행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산에 오르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활짝 열린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삼면으로 둘러쳐진 테이블 가운데는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보았을 법한 뗄감 난로가 있고,
그 주위로 여행자들의 시선이 차분히 오고 간다.

묵묵히 맛있게 밥을 먹는 사람,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몸을 녹이는 사람,
다정히 웃고 떠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하며,
그윽한 오랜 중년의 부부,
또 한 켠에서는 머리에 해드랜턴을 켜고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
그 가운데 난로 주위로 현지인 포터들의 다정한 이야기꽃하며,
접시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식당 종업원들까지,
이 설면한 풍경이 가슴 속에 짠하게 사진 찍히듯 박혀 온다.
두고 두고 롯지의 저녁 시간은 추억속에 아롱질 듯 하다.

보통 6시 쯤이면 저녁 식사를 하니
7시 쯤부터 시작되는 저녁의 호젓한 시간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낼까!
아마도 하루 이틀은 이 텅 빈 시간이 낯설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할 일들로 북적이며,
우리의 집에는 언제나 TV와 인터넷이 저녁시간을 가득 채운다.
이제 이 낯선 어둠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여행을 떠나는 의미에 답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이런 일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모처럼의 그윽한 순간 조차
포커와 화투를 들고 와 때로는 소량일지라도 돈까지 오가며
곁에 있는 여행자의 여유로움까지 방해하는 일은
때때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물론 홀로가 아닌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때때로 적당한 그런 놀이가 어쩔 수 없는 관계형성의 장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면 무엇이든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여행의 질적 차원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내가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녁을 먹고 오늘도 어두운 마을길을 따라 랜턴에 의지하며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제법 큰 마을이라 그런지 팍딩에서의 산책과는 다른
분주하고 활기찬 풍경이 이 무거운 어둠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하다.

나처럼 터벅터벅 소요를 즐기는 사람,
가벼운 쇼핑을 즐기는 사람,
미쳐 준비하지 못한 트레킹 용품을 구입하는 사람,
그리고 이 먼 산에서 느려터진 속도에 인내심을 키워가며
비싼 인터넷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
- 참고로 카투만두에서는 1시간 80루피하는 인터넷 비용이 이곳에서는 1분에 100루피 - ,
또 모처럼 1년 만에 대목을 맞은 트레커 용품점 주인들의
손님을 끄는 능숙한 목소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짓들이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아름답다.

산책을 마치고 나도 시간이 아긋하다.
나 같아도 다른 때 같았으면 이 밤중의 시간을 무슨 일을 한다,
글을 쓴다, 뉴스를 시청한다, 인터넷을 한다고 바빴을 터다.
이번 오랜 순유(巡遊)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남과 함께 내던져지고
저녁시간의 여유가 오직 나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깨어남의 공간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이번 여행의 투명하고도 오롯한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잠들기 전의 투명한 깨어있음은 밤과 잠자는 시간 내내 이어지고
우리의 잠을 순수하고 청연하게 만든다.

잠들기 직전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거나,
좋지 않은 뉴스를 듣거나, TV를 켜두고 자거나 할 경우는
그 무의식적인 혼란이 밤중 내내 이어지고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꿈까지 쫓아와 의식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런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해보라.
예민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찌뿌드하고 개운하지 않은 의식의 흐려짐을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다음 생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듯,
잠들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새벽녘 오랜 계곡의 투명한 폭포수처럼
잠들기 직전의 깨어있는 현존은
밤과 새벽 뿐 아니라 그 다음날의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곤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듯
마음을 예민하게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느낄 것이다.

오랜 인도 여행에서 보다
오히려 지난 안나푸르나에서,
그리고 이번 쿰부 에베레스트 순례에서
저녁시간의 명징함이 더욱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 깊은 의식의 빛이 점차 매 순간순간으로
그 투명함을 전달해 주는 듯하다.
낮 시간 동안 걷는 걸음걸음 사이에,
오르막을 오르는 그 숨가쁜 호흡 사이에 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 하나 하나의 발자국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한 발걸음의 아름다움, 한 순간의 온전함,
매 현재 현재의 전체성이 이론과 생각을 너머
저 희말라야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듯
조금씩 높고 깊은 내면의 희말라야로 가까워 옴을 느낀다.

명상도 일상 속에서의 그것과
여행 속에서의, 자연 속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래서 저 티벳의 밀라레빠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된 것’이라고 했던 것일까.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