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방안 널찍한 창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기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러고 있다.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하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런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처음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나면 꼭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한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깊고 굵은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면 섬뜩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게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뽑아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어 피어오르는 것인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너무 커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 될 수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나!

  사람도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처럼 온갖 시련과 힘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풍족하게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명력은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를 몇 번이고 반복할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다.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도 못할 일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한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기에 손으로 떼어 줘도 보고 담뱃재를 모아 우린 물도 줘 보고 했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생기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구나 싶었다.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지 양심이란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는가.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무당벌레들이 모여 진딧물을 처리 해 줌으로써 내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을 막 쳐 놓았다면 그 농약에 무당벌레도 또 다른 익충들도 모두 함께 전멸했을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걸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숨결에, 또 신성神性 충만한 하느님의 뜻에, 어머니 대지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이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낀다.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고 있다.

  우리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산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인 법신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신성한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말과 같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불이요 신성의 피어남이기 때문이다.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고’ 살지 말고 대자연의 진리 성품에 ‘놓고’ 살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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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TAG 대자연

 

 

          세상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평생가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고 여리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살뜰한 소리는 고요한 법계法界의 울림과 모든 존재 내면의 쩌렁쩌렁한 깨우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통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사에 찌든 온갖 소음들만 귀 고막이 터져라 듣고 산다. 세상의 소음에 익숙해지다 보면 작고 여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본래의 청음 능력을 상실한다.

  내 삶 속에 자연이라는 경이와 축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 년 반복되는 계절을 그냥 저냥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심연深淵의 떨림을 느끼면서부터 내 삶에 자연은 더없는 신비요 스승이며 벗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길에 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아주 문득 자연의 가녀린 그러나 청청한 소식을 들었다. 그 작은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치 지리산 전체가 아니 이 우주가 그대로 내게 속삭이는 듯, 침묵 속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은 둘도 없는 내 벗이요 도반이 되었다.

  우리들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본래는 세상의 작고 여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우주와 자연의 작지만 커다란 울림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니 그 본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지진해일이 있었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했다고 했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적으로 사는 원시 부족인들 또한 미리 피함으로써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물들이나 원시 부족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자들이다. 분명 대자연은 그러한 큰 피해에 앞서 그 어떤 힌트를 보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듣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 깃들어 삶을 살 때 대자연은 어머님 품처럼 우리를 품어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봄이 오니 한겨울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그러면서 봄나물이며 봄꽃들이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이며, 또 머리 속은 정신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이 맑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이 법계의 작지만 우주를 울리는 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만 듣고 사는 우리이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고 사는 우리이며,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만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근六根인들 어디 좀처럼 온전할 수 있겠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몸도 마음도 경쾌하게 추스릴 수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인 육경六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고 소박한 데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고요하게 앉으면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쩌렁쩌렁한 속 뜰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고, 이 우주의 작은 한 켠에서도 전 법계의 소리 없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맑게 비우고, 속 뜰의 소리며 대자연이 전해주는 맑고 밝은 소식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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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다. 방안 널찍한 창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기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러고 있다.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하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런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처음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나면 꼭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한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깊고 굵은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면 섬뜩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게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뽑아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어 피어오르는 것인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너무 커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 될 수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나!

  사람도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처럼 온갖 시련과 힘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풍족하게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명력은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를 몇 번이고 반복할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다.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도 못할 일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한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기에 손으로 떼어 줘도 보고 담뱃재를 모아 우린 물도 줘 보고 했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생기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구나 싶었다.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지 양심이란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는가.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무당벌레들이 모여 진딧물을 처리 해 줌으로써 내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을 막 쳐 놓았다면 그 농약에 무당벌레도 또 다른 익충들도 모두 함께 전멸했을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걸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숨결에, 또 신성神性 충만한 하느님의 뜻에, 어머니 대지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이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낀다.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고 있다.

  우리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산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인 법신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신성한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말과 같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불이요 신성의 피어남이기 때문이다.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고’ 살지 말고 대자연의 진리 성품에 ‘놓고’ 살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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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청평사 오르는 길에...]

비가 옵니다.
방안 널찍한 창 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기가 참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럽니 다.

나무들이며 들풀, 야생화들도
오늘은 한참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저 녀석들 지금이 야 한참 정신 없다 보니
하늘에서 내리는 거친 비를 원 망할 지 모르겠지만
이런 역경이 자신을 더욱 강인하 게 만들어 준다는 걸
아마도 지금은 모를 겁니다.
비 가 그치고 햇살 쨍 하고 내려 쬘 때
그 때 조금씩 느낄 수 있겠지요.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 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집니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 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합니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 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 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 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럽니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 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달라요.
처음 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시간 조금 지 나고 나면
꼭 나무 처럼 쑥쑥 자라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들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 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합니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길고 굵 은 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 면
섬짓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고 두려움 마저 일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뽑아 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 어 피어오르는 것이고,
저렇게 당당한 뿌리를 만들었을 것인 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됩니 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 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 버려 둡니다.
너무 커 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 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 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고
도반이 될 수 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합니 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 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함께 살아가려고 서로 서로 도와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 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 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 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어요?
사람도 마찬가 지 아닙니까.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 처럼
온갖 시련과 힘 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행복하게만, 늘 풍족하게 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 명력은 빛을 잃게 되고 맙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 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 를
몇 번이고 반복할 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 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지요.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 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 못할 일이
도저 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그럽니 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길래
손으로 떼어주고 떼어주고 하다가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기를 듣 고 담뱃재 우린 물도 줘 보고
그래도 그래도 끊임없이 끊 임없이 진딘물이 생기데요.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 지 싶어
그냥 내 버려 두었지요.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 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부실한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 도 얼마나 고맙나 싶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었지 요.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럽니 까.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 지
양심이라는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아요.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겁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개미들이 모여요.
아직도 긴가 민가 하지만
아마도 개미들이 진딧물을 잡아 먹는 가 봅니다.
그러더니 며칠 전 부터는
무당벌레들도 몇몇마리 나와 서는
진딧물 사냥에 나서 주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 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 막 쳤어 봐요.
그 농약에 개미들 도 무당벌레도 다 죽었을 거 아닙니까.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지 요.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거 이겨내려고 발버둥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 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부처 님의 숨결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대자연 우주 법계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입니 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 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낍니다.
정확하 게 그 일이 바로 그 때 정확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필요 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는 겁니 다.

우리들 인간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 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 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 기고 산다는 것은
흡사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알 고 산다는 말이고,
자성불 주인공 자리에 일체 모든 것 을 맡기고 산다는 말입니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신이기 때문이지요.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 고 살지 말고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일로 돌려 놓고 살 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법상




오후가 되더니
갑자기 하늘 이 맑게 어두워지고
이내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 진다.

마침
다실 문을 활짝 열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있던 중이었다.
이럴 때 갑자기 귀 속을 씻어주는 빗방울 소리는
이 얕은 산사에선 얼 마나 좋은 다반(茶伴)인지 모른다.

낮은 산 밑 작은 도량
이 6 월 청청한 산방에서
빈 속에 맑은 차 한 잔
그리고 갑 작스레 떨어지는 빗소리 좋은 도반...
생각이 되시는 가.

덕분에 어제 밤은
늦은 녘 까지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떨어지는 빗소리 를 보고 있자니
조촐한 도량의 풍경하며
이 산사 를 은은히 비추고 있는 외로운 가로등 하며
가슴 속 깊 이 파고드는 그 어떤 떨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좋고,
그 떨어지 는 빗방울에
묵은 때 벗어내는 이 자연이 좋 다.

우리들 또한 이 속에서 함께 숨쉬는
대자연의 숨결 그대로였을 터인데...
비가오면 비를 맞 고
눈이오면 눈 속을 걸어야 하는
그런 나그네였을 것이 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나그 네 성품, 대자연의 성품을
많이 잊고 지내고 산 다.

내가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러하며,
이 세상이 이 법계와 하나이기를 거부하게 된 것은 아닌가.

이 어둠 속에
이 비를 느끼 면서
문득 미친 생각 하나 스쳤었다.
발가벗고 이 산 속 에서
나무들과 함께 비 흠뻑 맞으며
첨벙첨벙 뛰어 놀고 싶다 는 생각.
물론 실천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부디 자유롭 게 실천할 수 있기를 법계에 빌어 볼 뿐...

사실은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우리일 터인데...

그러고 보면
우리도 그렇 고, 우리 아이들도 그렇고
참 딱한 처지다.

그 흔한 흙한 번 맨발로 밟아 보지 못하고,
떨어지는 빗속을 맨몸으로 흠뻑 맞아 볼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저 나무를 두 팔 벌려 껴안고는 그 숨결을 느껴보지 못하며,
풀벌레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

구두를 신고 딱딱한 아스팔트 를 밟아야 하고,
고급 우산으로 떨어지는 비를 막아야 하 며,
모처럼 방에 들어온 풀벌레를 홈키파로 죽여야 한 다.

하기야 요즈음의 시대가
빗 물을 맨 몸으로 맞을 수 없게 되었고,
풀벌레나 꽃가 루 같은 것들에게 조차
무슨 전염을 옮기고, 무슨 무 슨 알레르기를 조심해야 할 정도로
우리도 나약해 졌고, 자연 도 오염을 시켜 버렸으니 어쩔 도리는 없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대 자연과 하나가 됨을 의미하고,
우주 법계의 큰 흐름 에 온전히 나를 맡기고
그것과 함께 흘러 가는 것을 의미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그리 거창하거나 요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대자연의 섭리 는 그대로 우리의 삶이요 진리인 것이다.

그저 이 우주 법계 대자연의 순일한 흐름처럼
아무런 분별 없이
턱 맡기고 흐 르면 그만이다.
그것이 수행이고 그것이 부처의 삶인 것이다.

요즈음 들어
사람들과 함 께 하고 싶은 마음 보다
이네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이 더 간절하다.

이 맑은 법신 부처님의 숨결 과...

비가 오니 자연도 씻길 때가 되었나 보다.
자연도 이제 목이 말랐는가.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