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림'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0.25 어떤 것도 기다리지 말라
  2. 2007.12.20 다 놓으면 본래모습으로 간다
  3. 2007.12.20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기라
그만 기다리세요.
우리가 평생토록 해 왔던
기다림이 지겹지도 않으신가요?
이제 그만 기다림에 대한 환상을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기다리던 일이 완성되면 또 다른 것을 기다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또 다른 기다림의 대상을 만들어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없이 계속됩니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이 되길 기다리고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길 기다리며,
대학생은 좋은 취직 자리를 기다리고,
학생은 좋은 성적 좋은 학교를 기다리며,
직장인은 좀 더 인정 받기를 기다리고 진급하기를 기다리며,
수행자는 깨닫기를 기다립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내 앞에 나타날 사랑을 기다리고,
빨리 졸업하기를 기다리며,
빨리 큰 돈을 벌기를, 큰 집, 좋은 차 사기를 기다리고,
더 나은 직장을, 지위를, 권력을 기다립니다.

출근하고 나면 빨리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평일에는 빨리 휴일이 오길 기다리고,
다음 휴가철을 기다리고,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을 기다리고,
몇일 후에 있을 소풍이나 만남을 기다립니다.

뭔가 재미난 일을 기다리고,
가을엔 첫눈 오는 날을 기다리고,
겨울엔 만물의 태동을 기다리며,
봄엔 여름 휴가 때를
여름엔 가을 단풍구경 갈 때를 기다립니다.
물론 단풍이 떨어질 때 또다시 첫 눈을 기다리겠지요.

성공하기를, 부자 되기를, 행복하기를
깨달음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그렇게 끊임없이 평생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우리는 결국 한번도 기다리지도 않았던 죽음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달려가면서
한 순간도 기다림을 포기했던 적이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 온 것이라고는 한번도 기다리지 않았던
버림이고 죽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삶 속에서 기다림의 결과로 얻어 낸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이라도
결국에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 무의미한 것일 뿐입니다.
모두 다 버리고 가야할 것들 뿐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순간 유일하게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살아오면서 우리가 별로 바라지 않았던
‘현재의 깨어있는 힘(지혜)’과 ‘사랑과 베품(자비)’입니다.

평생을 다음 순간만 바라고 살았지만,
더 낳은 순간만을 바라고 살았지만
죽고 나서 우리가 짊어지고 갈 수 있는 것이
‘기다림의 결과’가 아닌 ‘기다림 없는 순간에 깨어있는 힘’이라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기다림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다림’이 아닌
‘기다림의 놓음’입니다.
기다리지 않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현존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란
지금 이 순간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이 아닌 다음 순간을 원한다는 말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원한다는 말이며,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원한다는 말이고,
‘지금의 나 처럼’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되길 원한다는 말이며,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갖지 못한 것을 원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현재의 모습과 미래의 기대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 갈등이 바로 괴로움의 실체로 다가옵니다.
기다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고되고 괴로울 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기다림은 습관적입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기다리지 않으면 견디질 못합니다.
그 기다림을 좋은 말로 ‘희망’이라고도 하고 꿈이라도도 하겠지요.
또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그런 기다림을 당연하게 여기다 보니
이런 기다림을 ‘희망’이니, ‘꿈’이니, ‘목적의식’이니 하고
좋은 말처럼 꾸며 놓았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우릴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여전히 기다림은 온전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을 방해하고,
삶의 근원적인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방해할 뿐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기다림에
이젠 지칠 때도 되지 않았는가요?
그동안 우리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까.
아니 어쩌면 우리 삶 전체를
이런 쓸모없는 기다림에 헛되이 소모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기다림이란 낭비이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공연히 내적인 에너지를 소모할 뿐입니다.
기다릴 시간에
저지르는 편이 더 현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편이 더 궁극적입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지위, 성공 등은
기다림을 통해 얻게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행복은
결코 기다림을 통해 얻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돈, 명예, 권력, 학벌, 성공이라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위한 방편이 아니던가요?
그런 껍데기를 위한 기다림에 휘둘려서는 안됩니다.
바로 궁극적인 행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행복은 결코 기다린다고 오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돈, 명예, 권력, 지위, 학벌, 성공 속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다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완전한 자족을 통해 드러날 뿐입니다.

항상 행복은 이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늘 그렇게 있을 뿐이지요.
기다리는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 자리를 봐야 하는데
다른 자리를 찾고 기다리고 있으니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기다림의 결과로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그 때 언제나 있어왔던 행복을 볼 수 있을 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내가 무슨 일에 종사하든 간에,
나의 직위, 직장, 학벌, 재산, 세속적인 성공에 상관없이
다만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인정하며 사랑하고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그냥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이면 되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나 얻을 수 있는
‘다른 그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만큼의 소유물에,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고 존중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또 다른 것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순간에 깨어있는 법을 터득할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분명 머지 않아
맑은 행복과 평화로움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다림을 놓아버리세요.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마시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이
기다림을 이룬 순간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 순간에 서 있으면
무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
기다림을 놓아버리고
바로 이 자리에 서 있으시길...

Posted by 법상



[보성 녹차밭]

방하착 방하착 하였 더니 묻습니다.
‘다 놓으면 다 해결됩니까’
‘놓는다고 다 된다는 것이 어찌 말이 됩니까’
하고 말입니다.

'놓으면 된다 된다 다 된다’
저는 그렇게 말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세속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되는 것과
‘참’으로 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눈으로는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분간하기 어렵 습니다.

우리 중생의 마음에서야
편하고 쉽고 이기심이 충족되는 쪽으로 일이 흐르면
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참으로 되는 것이란 그렇게 간단한 일만은 아니기 때문입니 다.

우리는 거짓나의 생활에 익숙해 있기에
거짓나의 마음이 충족되고, 거짓나가 행복하면 그만입니 다.
그러나 거짓나의 충족과 참나의 충족,
거짓나의 되는 것과 참나의 되는 것은,
어쩌면 때로는 상반되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 다.

거짓나의 입장에서는 안 되는 일이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본래 마음자리의 입장에서는 되는 일일 수도 있는 노릇입니 다.

된다는 말은 본래로 간다는 말입니다.
본래로 간다는 말은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참주인공,
본래 마음 자리와 하나된다는 말입니다.

본래 마음자리, 참주인공 자리는
아무것도 잡을 것 없는 지고의 맑음과 고요함
텅 비어 오히려 충만한 모습이라 합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소유 속에
일체를 소유하고 있으며,
‘나’ 라고 내세울 것 없는 무아 속에
‘전체로서의 나’, 진아가 밝게 빛나고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 중생의 마음은
무엇이든 끊임없이 붙잡으며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집착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한없는 노력을 기울입니 다.
끊임없이 붙잡으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 삶의 모습입니 다.

하나되는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의 분별이 끊어진 자리이므로
되고 안되고도 없고, 잘나고 못나고, 잡고 놓음도 없는 자리입 니다.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나툰 것입니 다.
우리 모두의 본래 고향이며
우리가 가야할 곳, 추구하며 살아가는 궁극의 본향인 것입니 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자리를 바로 깨쳐야 합니 다.
그래야 모든 것이 본래 있던 제자리를 찾아 갈 수 있습니 다.

그렇다면 마음자리를 깨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은 무엇이든 ‘잡는’ 마음이 며,
본래 마음자리는 일체가 텅 빈 잡음 이전의 자리입니 다.
그러니 잡으며(집착) 살고, 잡음으로써 행복을 느끼며, 또한 잡아서 괴로운
그 일체의 잡음 즉, 집착심을 모두 텅 비우고 놓아버려
잡음이전의 본래 텅 빈 마음자리를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바로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 다.

그것을 ‘방하착’이라 이릅니다.
방하착, 놓았을 때 우리의 마음은 쉴 수 있습니 다.
잡아서 버겁고 무거운 마음을 놓음으로 가볍게 만들 수 있습니 다.
진정 놓았을 때 우리 마음은 본래로 가는 것입니 다.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되는 것입니다.

본래자리와 하나되었을 때
일체 모든 삶의 의문이 ‘참’의 가르침으로 풀립니 다.
도저히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던 의문들이 풀리게 됩니 다.
금방 죽을 것 같이 느껴지던 병의 고통이 며,
돈 없으면 못 살 것 같던, 경제력에 대한 집착이 며,
사람에 대한 집착,
명예, 지위, 권력, 학력, 배경, 대학, 이 성...
이 모든 집착들을 놓아버림으로써
본래 자리에서 나오는 확연한 해답을 체험해 볼 수 있습니 다.

놓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자리와 하나됨이 며,
‘나’를 잡고 사는 아상의 굴레를 벗고 부처님 생명으로 산다 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성 부처님’으로 사는 것입니 다.

괴로운 것도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요,
즐거운 것도 부처님이 즐거운 것이며,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철학, 이성, 지 식...
이 모든 것을 가지는 주체 또한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 다.
그러니 사사로운 내 욕심으로 가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 다.
일체 모든 것을 부처님께 돌려 놓으면 그만입니 다.
돌려 놓고 나면 본래 가야할 곳을 찾아 자연스럽게 가게 됩니 다.

본래 있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 기준에서 되고 안되며, 잘되고 잘못되는 것이 아닌
본래 마음자리에서 무분별의 지혜로운 판단으로
되는 쪽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안 되는 듯 보여도 걱정할 것 없 고,
되어지더라도 호들갑 떨 것 없습니다.
놓고 가면 그냥 그냥 살려지는 것입니다.
여여하게 함이 없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다 놓고 살아야 합니다.
잘하고 못하고 다 부처님 일이니 상관할 바가 아닙니 다.
다 놓고 살아야 본래마음이 사는 것입니 다.

어두운 중생마음으로 붙잡고 사니 힘이 듭니 다.
본래 마음자리로 살아 법계를 호령하는 수행자가 되어야 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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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대흥사 연못]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괴로우신가요?
이미 지나간 잘못되어진 일로 마음고생 하고 있진 않는가요?
앞으로 있을 막중한 일과 스트레스로 인해 답답하진 않으신가요?

우리들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면
'일'로 시작하여 '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일' 속에서 행복을 찾고 또한 괴로움을 느끼게도 됩니다.
일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적성에 맞는 일인지,
돈 벌이가 괜찮은 일인지, 일하는 환경이 좋은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지,
일이 잘 풀리는지, 할 일이 많은지, 일이 힘든지 재미있는지...
온통 우리의 삶은 일, 일, 일 뿐입니다.
심지어는 노는 것 조차 '노는 일'이 되니 말입니다.

이런 속에서
일이 잘 될 때는 '행복'을 느끼고,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는 '괴로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일'의 홍수 속에서
울고 웃고를 연신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듯 일을 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에서 시작하여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어디서 일을 할 것인지,
언제 일을 할 것인지, 왜 일을 할 것인지 하는 것들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수행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여 한번 돌이켜 보지도 않던 문제
즉 '누가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일을 하다니 당연히 '내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나'가 누구입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일에 괴로움과 즐거움, 시비와 분별, 잘하고 못함 등이 있는 이유는
거기에 '나'가 붙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한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일' 이라고 하는 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일을 하면
자동적으로 일의 결과에 대한 시비가 생겨납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언제 어디에서 왜 일을 하는지에 따라,
또한 누구와 하는지, 좋아서 하는지, 적성에 맞는지...
등등의 인연관계에 따라 숯한 시비와 분별이 생겨나게 됩니다.

밝은 수행자라면 그 어떤 일에도
'나'가 없어야 합니다.
나 없는 내가 함이 없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말은 나를 쑥 빼놓고
일체의 모든 일을 부처님께로 되돌려 놓고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안 된다고 괴로워 할 것도 없고
잘 된다고 행복에 겨워 호들갑 떨 것도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이의를 달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부처님이 일을 한단 말인가.'
'기복으로 흐르는 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여기에서 부처님이란
우리들 내면 속의 본래자리, 참나, 주인공을 말함이며,
일체 법계에 편만하신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통이 바로
'내가 한다'는 아상입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게 되면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더 잘하고 싶은 마음,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 칭찬받고 싶은 마음,
남보다 못했을 때의 열등감, 보다 잘 했을 때 우월감에서
남을 얕보는 마음, 나 잘났다고 하는 거만함,
못하면 괴로운 마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의 답답한 마음...
등등 수없이 많은 분별심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너무 큰 일이 터져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이 되면
우왕좌왕 괴롭다 괴롭다를 연발하며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내가 하는 일'이 되기 때문 에 생겨나는 일들입니다.
나의 일이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번거롭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일체의 모든 일을 함에
'내 일' 이 아닌 '부처님 일'로 되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거짓 나의 일'이 아닌
참나의 본래자리에서 하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가는 것입니다.

본래로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마음자리, 본 래자리에서 나온 일입니다.
주인공이라 해도 좋고, 한마음, 불성, 참나, 여래장, 참생명...
이름이야 뭐라해도 좋지만 그 한자리에서 나온 일임은 분명한 일입니 다.
주인도 없고, 내것 네것의 분별도 없고,
그저 텅 비어 있는 그 자리에서 나왔건만
우리들이 내것이라고 분별하고 잡으려 하고
내 일로 붙잡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 니다.

그러니 본래 나온 자리, 그 근원으로 다시 돌이켜 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다'고 하는 어리석은 마음으로
온갖 시비분별과 갖은 숱한 일들을 만들어 놓았으니
여기에 또다시 내가 하게 되면 도리어 또 다른 업식만 더하는 꼴이 되고 맙 니다.

'나'만 쑥 빠지고 없어지면 됩니다.
나만 죽어버리면 됩니다.
더럽혀진 거울을 닦으면 맑고 깨끗한 거울이 저절로 드러나듯,
탐진치에 물든 '나'를 비워버리고 나면
저절로 본래자리 참성품이 밝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부처님 일로 돌려놓고 나면 저절로 부처님 일, 불사(佛事)가 되는 것입니 다.

'불교 수행을 한다', '내가 수행자다' 하지 만
정말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정작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닌 부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굳은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굳게 믿고 온전히 놓는 일 말입니다.

부처님께로 돌이켜 놓고 나면
이제부터 일체의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할 것도 없고, 좋아 날 뛸 것도 없습니다.
잘 되는 것도 부처님 일, 못 되는 것도 부처님 일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본래의 참생명 주인공은 이렇듯 어디에도 걸 림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 밝은 주인공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써의 삶을 접고 부처님으로써의 삶을 살자는 것입니 다.

'턱 놓고는 진짜 부처님 일로 되어졌을까?' 하고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음에서 돌이켜 놓았다 하면 이미 그렇게 되어진 것입니다.
자꾸 생겨나는 의심이 되려 한생각 돌이킨 부처님 마음을 주저앉게 만듭니 다.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바치고 온전히 공양을 올리는 일,
이보다 더 쉬운 일이 어디있겠습니까.
이렇게 쉬운 것이 부처님 법입니다.

억겁동안 중생마음을 닦고 닦아 언젠가 부처 마음 될 날을 기다리자니
얼마나 더디고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이 몸 그대로, 이 마음 그대로
이 자리에서 놓고 나면 그대로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한생각 돌이키면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한다'는 아상을 녹이기 위해 나를 비우고
대신에 밝은 참생명 부처님 본래자리로 일체를 던져버리자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부처 되려고 닦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되어있는 부처 생명으로 살아가는 공부입니다.
부처님 되는 공부가 아니라 이미 부처님임을 믿는 공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