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포카라-나야풀-김체)

포카라 사랑콧의 꿈같은 하룻밤

4년 전, 포카라(Pokhara) 페와호수(Phewa Lake)에 나른해진 심신을 띄워놓고 저 멀리 설산을 바라보며 도반들과 나누던 안나푸르나의 품속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잊혀 지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 져만 가고 있었다.

포카라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사랑콧(Sarangkot, 1592m)에 올라 거센 오후의 빗줄기를 만났을 때, 또 그 빗속을 뚫고 새벽 첫 안나푸르나 일출의 장엄한 연주를 들었을 때, 아마 그 때부터 나의 그리움은 설산의 은빛 속살을 타고 내 뼛속 깊숙이까지 스며들었을 터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Annapurna Base Camp, 4130m) 트레킹이나 라운딩을 마치고 산에서 막 내려온 사람들 모습 속에서 나는 마치 신을 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그을렸으며 며칠은 굶었을법한 퀭한 눈과 낯빛으로 다가 온 트레커들의 산 이야기는 내 안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희말라야와의 오랜 인연을 홀연히 끄집어내어 주었고, 그 이야기 속에서 나는 이미 설산의 길 위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몇 날 며칠이고 계속해서 생각이 나더니 사랑콧과 나갈콧(Nagarkot)에서 보았던 설산 속에 내가 서 있는 꿈을 종종 꾸곤 했다.

네팔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그냥 주저앉아 울고만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다시 출가하는 심정으로 저 희말라야의 품속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 가고만 싶었다. 묵직한 배낭 하나 짊어지고, 깎지 않은 수염에 초췌해 보이는 얼굴로 그러나 눈빛에는 아이 같은 천연의 생경함을 담아 초롱초롱한 호기심을 가지고 튼튼한 두 발에 의지하여 저 산 속을 홀로 누비며 걷고 있는 상상의 나래를 단지 마음속으로만 꽃피우며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히말라야로 갈 것이냐 탈영승이 될 것이냐

출가 까지 하며 훌쩍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걸릴 것이 있어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가고 싶은 곳에 못 가겠느냐 싶겠지만 출가를 했다고 결코 모든 것에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돌아갈 곳, 아니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나는 군인이었다!

스님이면서 그러나 동시에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특별한 나의 신분과 사정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묻는다.

“스님들도 군대가요?”

그럼 가죠! 스님도 목사님도 신부님도 다 군대를 간다. 군종장교(軍宗將校), 군대에서 자신의 군생활을 하며 장병들에게 종교생활을 지도하고 인성함양을 심어주는 수행자이자 장교인 이중적 신분의 특별한 군인들이 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보다도 군종장교에게는 장교가 먼저냐 성직이 먼저냐, 군인이 먼저냐 종교인이 먼저냐 하는 해묵은 우스개의 농이 있다.

나는 마음이 난다고 그저 쉽게 일정을 변경하여 희말라야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의 공식적인 신분은 다만 잠시 휴가를 나온 군인이었다! 스님이고 뭐고 나의 공식적 신분은 잠시 휴가를 나온 군인, 만약 휴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을 터다. 그렇다. 탈영! 아마도 세계 최초의 탈영병이 아니라 탈영승이 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희말라야에 대한 나의 상사병을 뒤로 하고 한국 땅을 밟았다. 누군가가 말했던가.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라고.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일 진데, 여행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병 중에도 큰 병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잊혀 지지가 않는다.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 하고도 한 해 두 해가 지나가건만 희말라야에 대한 일방적인 나의 사랑은 일상 속에 묻혀 희미해져만 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또렷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야말로 나의 현재의 조건에 있어 희말라야는 꿈일 뿐이다. 에베레스트나 안나푸르나를 내 마음처럼 자유롭게 걸으려면 적어도 한두 달 정도는 필요하건만 어떤 군대가 한 달 이상 휴가를 내준단 말인가!

이 즈음 되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희말라야를 포기하던가 아니면 군인이기를 포기하던가. 시간이 흐르면 희말라야가 포기가 되겠지 하며 지낸 세월이 어언 3년, 그러나 이 그리움은 3년째가 되면서 더욱 커져 급기야는 전역을 신청하고서라도 가야겠다는 마음에까지 이르렀다.

이게 무슨 열병이란 말인가. 이정도면 이게 집착인가! 그래, 집착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희말라야와 나와의 오랜 인연이 무르익었다는, 드디어 만날 때가 되어간다는 내면 깊은 곳에서의 어떤 소식, 혹은 어떤 내밀한 메시지였을지 모른다. 물론 그러한 나의 그리움에는 오래 전부터 꼭 다녀와야 겠다고 생각했던 인도의 부처님 성지와 ‘오래된 미래’를 읽고 이 또한 언젠가 꼭 한번 가야지 했던 라다크에 대한 그리움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3개월 정도만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 모든 곳으로의 꿈같은 순례가 가능할 것이다. 이런 그리움이 충만하게 채워질 것이다. 물론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뿐,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거짓말 같은 히말라야와의 인연

‘마음에서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는 이 때 나의 간절함과 그리움과 서원 또한 이루어진 것일까! 이 우주를 뒤덮고 있는 우뚝 선 세계의 지붕 희말라야가 나의 그리움에 탄복이라도 한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이번 생에 나와 이 산과의 인연이 영겁의 오랜 기다림으로부터 이미 계획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결국 저 설산의 여신 초모랑마가 꿈처럼 나와의 만남을 허락해 준 것이다.

작년 한 해 안나푸르나와 희말라야에 대한 그리움은 그 어느 때 보다도 크고 간절했으며 사무쳤고 묵직한 것이었다. 되돌아 보건데 그 한 해 나는 운명적인 히말라야와의 조우를 근원적인 차원에서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토록 한 해 내내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네팔의 설산과 고타마 붓다의 고향 인도의 향기를 그토록 진하게 맡을 수 있었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 일은 참으로 절묘하다. 그야말로 인연이었구나 싶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왜 나는 그렇게도 작년 한 해 희말라야와 라다크와 인도에 대한 열병과도 같은 뜨거운 무언가를 깊이 깊이 품게 되었을까. 왜 그리도 가지도 못할 그 곳을 찾아 책, 인터넷, 블로그, 사진 등을 뒤져가며 그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마음만은 그 허한 산길을 걷고 있어야 했을까.

왜 그토록 자주 꿈속에서 설산 위를 훨훨 날았으며, 붓다가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의 대탑 아래에 앉아 좌선에 들었던 것일까. 그것이 바로 이 일이 일어나기 위한 내 마음 속에서의 메시지이자 힌트가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이제 떠날 때가 되었으니 네 안에서 준비를 하라는 우주의 메시지가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군에는 매년 기독교 군종목사님 중 한 분씩을 선발하여 약 3개월 간의 성지순례를 보내주는 자비(自費)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들이나 신부님들에 비해 목사님들이 훨씬 많고 군종장교의 상당수를 차지하다 보니 아직까지 스님, 신부님들에 대한 혜택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해 갑자기 군 종교의 형평성 차원에서 스님들에게도 인도, 동남아 등 불교지역으로의 성지순례 해외연수 프로그램의 문호가 개방 된 것이다! 갑자기 바로 그 해에! 게다가 혜택을 볼 수 있는 첫 해다 보니 아직 홍보가 덜 되어 있어서, 군의 선배 스님들께서 그런 제도가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가 보다. 최종 선발 날짜까지 나를 제외한 단 한 명도 신청 접수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나를 위한 제도가 생겨난 셈이 되었다.

 

당신을 위한 우주의 놀라운 계획

생각해보라.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나는 인도, 네팔, 히말라야, 라다크 등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고, 그곳을 다 다니려면 적어도 2~3달 정도는 소요가 된다. 군 생활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진묘하고도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내가 원하는 곳에 모두 다니려면 2~3개월이 필요했고, 나에게 주어진 공문상 출장 기간은 12주였다. 군승으로써는 3개월을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계기 자체가 전혀 없었는데, 갑작스레 기회가 생겨났다. 선배 스님들이 너도 나도 지원했을텐데, 마침 아무도 지원하지 않았고, 평소 공문이나 인트라넷의 거의 보지도 않던 내가 그날따라 다른 일이 생겨 사무실에 갔다가 시간이 남는 바람에 잠깐 공문을 보았고 그 공문을 본 날이 마감 전날이었다. 또 보통은 3개월이나 부대를 비우기 어려울뿐더러 지휘관이 그렇게 허락하기도 힘들 것인데, 마침 지휘관께서 흔쾌히 허락해 주었고 추천서를 써 주셨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의 완벽하게 짜여 진 대본처럼 느껴진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모든 수단을 총 동원하여 만들어낸들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할 것들은, 이와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짜 맞춘 듯 그것이 일어날 수 있도록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내 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우주법계의 조화요, 인연의 신묘한 조화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하나의 신비이며 매 순간이 기적과도 같다. 이와 같은 일만 기적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이 시간에 이 장소에서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기도 하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길 위를 걷고 있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적이다.

 

삶이 보내주는 힌트 알아차리기

우리 삶은 이처럼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조화와 신비들로 뒤덮여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만히 되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깜짝 놀라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대학 캠퍼스에서 수업 시간이 늦어 빨리 뛰어가지만 않았더라도 그 여인과 부딪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그랬었다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아내와 자녀들은 없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 때 그 회사에서 사고를 치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사장 자리도 없었을지 모르며, 그 때 배낭여행 중 우연히 그 나라로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의 해외유학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심지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그 날 밤 너무 정숙했던 나머지 사고를 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연인 것 같은 필연과 인연들이 거짓말처럼 얼키설키한 그물코처럼 우리의 삶을 조화롭고 균형 잡히게 해 주고 있다. 모든 우연은 우연을 가장한 소중한 인연이다.

아무리 우연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그 인연을 열매 맺게 해 주기 위해 이 우주 전체가 발 벗고 나서서 그 일을 성사시킨 것이다. 이른 봄 매화 한 송이가 꽃을 피우는 데에도 전 우주의 장대한 계획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우주적인 계획은 언제나 우리에게 힌트를 보내주고 있다. 삶의 사소한 일상조차도 우주적인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그 해 나도 모르게 인터넷을 켜면 인도와 히말라야를 찾고, 가슴 속에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룽다가 휘날리는 설산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피어나며, 꿈속에서조차 히말라야 길 위를 걸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나를 준비시키기 위한 우주법계의 메시지요 힌트였던 것이다. 그 한 해 동안 직관적인 영감들이 왜 그토록 나를 인도로 향하게 했고, 히말라야를 향하게 했는지 그 당시는 분명히 느끼지 못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투명한 의미로써 다가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가만히 지켜보고, 직관적인 어떤 느낌의 흐름조차도 차분히 주시해 보라. 삶의 모든 부분들을 놓치지 말고 관찰 해 보라. 애써 해석하지 말되, 전체적인 흐름을 놓치지 말고 지켜본다면, 당신 삶의 수많은 힌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들은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와 직접적으로 당신을 돕게 될 수도 있다.

우주는 이와 같은, 혹은 더 깊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무수한 방법으로 우리를 돕고 있다. 그 자비로운 도움의 방편들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도 상징적이다. 마음이 투명하여 예술과 감성적인, 그리고 직관적인 의식에 깨어있는 사람일수록 그 상징과 힌트들을 머릿속의 해석 없이도 자연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안나푸르나 앞에 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안나푸르나, 마차푸차레 희고 고운 영봉이 올려다 보이는 네팔 포카라(Pokhara, 620m)의 한 식당에 앉아 폐와호수와 마차푸차레를 앞뒤로 바라보며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8월말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꿈에 그리던 라다크와 성스러운 부처님의 성지를 순례하고 날도 좋은 10월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순례를 위해 잠시 포카라에서 목욕재개하고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다.

아! 다시 생각해 봐도 지금 내가 이렇게 네팔 포카라에 앉아 하얀 설산을 올려다 보며, 폐와호수를 내려다보며 고요한 오후를 보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행복감이 호수의 표면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 주는 햇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한없는 풍요, 평화, 혹은 행복! 그 무슨 말로 지금의 이 감격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드디어 오늘, 이렇게 감격스러운 오랜 그리움의 무게로 안나푸르나를 내딛는다. 포카라에서 안나푸르나의 입구격인 나야풀(Nayapul, 1070m)까지는 차로 약 1시간 가량이 걸린다. 나야풀까지 가는 길목 곳곳에는 다랭이 논들이 초록과 노오란 진한 빛을 뿜어내며 그림처럼 파노라마로 펼쳐져 있다.

트래커들이 입산하기에는 늦은 시간인 오후 1시에나 되어 나야풀에 도착. 일반적으로 ABC 트레킹의 첫날 숙박 예정지인 간드룽(Ghandrung, 1940m)까지 가려면 한참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간드룽이 문제가 아니다. 어디서든 잘 곳이 있으면 자면 되고, 걸을 수 있으면 걸으면 되는 것, 산행의 즐거움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www.moktaksori.org]

Posted by 법상

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드디어 오늘부터는 모든 고산에의 적응을 마쳤다고 보고

한없이 원 없이 오르는 날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안나푸르나도 다녀왔고,

물론 그 전에 인도 북부의 라다크, 판공초에서 5,000고지를 몇 번 넘어도 봤고,

또 이렇게 지금껏 일주일 동안 5,000고지 이상을 오르기 위한

느릿느릿 고산적응 산행을 계속 해 온 터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도를 올리며

내가 가야 할 바로 그 곳들을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올라 줄 차례다.

첫 새벽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른 청신(淸晨)의 길을 나선다.

 

 

 

어제 출발하던 바로 그 언덕길을 걸어올라 이제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어제처럼 오늘도 타보체피크, 촐라체, 아라캄체,

니제카 피크, 로부체피크 등의 봉우리들이

내가 가야 할 방향 앞으로 병암(屛巖)처럼

그 우뚝 선 백발의 봉우리들을 한껏 드높이며 장중하게 버티고 서 있다.

 

찬 새벽 공기를 가르며 겨울옷과 장갑, 모자까지

단단히 몸에 붙여 메고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차분하고도 초엄한 솜씨로 한발 한발 나아간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은 이미 수목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라

초원이요, 벌판이며, 흙먼지길이거나 소설(素雪)의 해쓱해쓱한 설산이 전부다.

이런 낯선 황량함이 왠지 모르게 고향처럼 따뜻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웅려하고도 시린 풍경 앞에서

내 눈은 찬란히 부셔오고 감각은 새록새록 깨어나며

발걸음 하나조차,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설산 너머 어디쯤에선가 들려오는 침묵이 무너지는 소리조차

다 들려오는 듯 민예하게 활짝 열려 있다.

 

 

‘이것이 정작 현실이란 말이냐.’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

아늑한 영겁 전에 이미 이 길을 뒤 뜰 처럼 거닐었던 듯

새로우면서도 익숙하고, 시리면서도 따스하며,

외로우면서도 꽉 차 있는 느낌!

철저한 고독감 속에 그러나 온 존재와 함께 하고 있는 듯한 이 느낌! 느낌!

 

이런 선연한 길 위를 내 존재를 이끌고 이렇듯 두 발로

그것도 아무도 없는 이 적막의 새벽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요, 경이에 가까운 체험이 아닌가.

 

걸으며 모든 생각을 잊는다.

모든 기억과 기대, 바람과 희망도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과거와 미래 따위는 더 이상 입에 담을 흔적조차 없다.

모든 사고의 기초가 붕괴된 듯, 텅 빈 대지 위, 텅 빈 하늘 아래,

텅 빈 한 존재가 다만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을 뿐!

 

걷다보니 햇살이 발길을 비추고, 하나 둘씩 짐꾼들이 스쳐간다.

제 몸보다 더 크고 높고 무거운 짐을 이마에 짊어지고

몸을 최대한 앞으로 낮게 기울인 채 목에 힘을 딱 주고

시선은 오직 땅에 고정,

때때로 그 힘겨운 눈을 치켜뜨며 몇 미터 앞 길을 주시하며 묵묵히 나아간다.

 

 

 

 

그 노련한 시선과 여행자의 눈길이 마주칠 때

그들은 어김없이 미소 짓는다.

그 힘들고 고된 짐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도 무거울 거라는 생각은

단지 여행자들의 상념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이 설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포터나 짐꾼들은

그 순수한 눈빛에 수줍은 미소를 품고 있다.

 

때때로 짐꾼들의 풍경은

이 히말라야 속의 또 다른 설산이요 산맥처럼

이미 이 풍경 속의 한 자락을 형성하는 또 다른 살아있는 자연 그 자체다.

 

 

 

검은 새들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고산 야생화들의 생명력처럼,

저 설산 주위로 붙었다 떨어지고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감감 도는 구름의 출몰처럼,

저들 셀파 족들의 걸음 걸음 속에는

또 다른 히말라야가 맥박처럼 흐르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위적이기를 거부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택한, 말하자면 자연주의자,

그러나 그것 또한 듣기 거북한 하나의 거추장스런 수식일 수밖에 없는

‘그저 거기,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히말라야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내려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에서는 줄로 홀로, 혹은 둘이서 오는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반해

이 곳 에베레스트 지역에서는

주로 이처럼 팀을 이루어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다.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두사(Duda, 4503m) 마을을 지난다.

마을이라고 해야 집 두어 채가 전부인데다

그곳조차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기는 한 건지, 전혀 인기척이 없다.

아마도 그저 목장 주인이 때때로 야크를 데리고 풀 뜯으러 올 때나 잠시 들러

바람을 피해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두사에서 약 30분 쯤 더 걸으니

산산한 작은 계곡을 감돌아 토클라(Thokla, 일명 Dughla, 4620m)가 나온다.

 

 

토클라 또한 롯지 두세 곳이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를테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로부체로 가기 위해

잠시 쉬어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는 간이역인 셈이다.

 

 

 

토클라 롯지 앞 빈 의자에 잠시 앉는다.

몇몇 여행자와 포터, 그리고 짐꾼들이 야외 식당에 잠시 걸터앉아

풍연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롯지 뒤로는 바로 설산이 휘몰아쳐 있다.

바람에 펄럭이는 룽다 조차 잠시 쉬어가는 곳,

새들만 바삐 먹이를 찾느라 롯지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너무 오래 지체할 수는 없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배낭도 풀지 않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

이십 여 미터를 오르다

고개를 돌려 다시금 토글라를 바라본다.

 

 

이제부터는 다소 가파른 오르막 하나를 넘어야 한다.

숨을 고르고는 이제 다시 출발! 4,600 이상의 고도에서

오르막길을 오른다는 건 아무래도 호흡에 벅찬 일이다.

단숨에 200미터를 올라 4,800고지를 밟아주겠다던 야무진 계획이

호흡에서 턱턱 막힌다.

 

한두 걸음 걷고 잠시 멈춰 서서 호흡을 고르고,

몇 걸음 걷고 거친 숨을 헉헉거리며 쏟아내면서

느린, 아주 느린 발걸음을 꼬무작거리며 꾸준히 옮긴다.

우리나라 같았으면 그야말로 단숨에 뛰어 올랐을

평범한 언덕 정도인데 보는 것처럼 만만하진 않다.

 

 

 

포터 지텐은 벌써 저 멀리 달아났다.

지텐은 언제부턴가 출발하고 나면

으레 알아서 다음 코스에 먼저 가서 쉬면서 기다리고 있다.

고지로 올라갈수록 현지인들과의 호흡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그야말로 체력 차이라기보다는 호흡 차이가 아닌가 싶다.

저들은 이 숨쉬기 힘든 고지에서 아주 헐하게 산을 오른다.

 

가파른 비탈길을 도드밟아 꼭대기에 올라서니

초르텐들이 줄지어 서 있고,

룽다가 여기저기에서 외로운 진혼곡을 부르듯 처연하게 흩날린다.

 

 

이들 초르텐은 이 쿰부지역 설봉을 오르다가 명을 달리 한

세계 각국의 히말라야 등반 대원들을 위한

추모와 명복을 비는 개개인의 무덤 내지는 묘탑이다.

 

 

 

 

 

 

잠시 숙연해진다.

내 마음만 숙연해 지는 것이 아니라

공기도, 룽다도, 바람도, 흙과 바위도,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숙엄하게만 느껴진다.

 

로부체 방향으로 백여 미터 더 걸으니

장쾌한 시야가 터지며 또 다른 호장한 풍경을 빚어낸다.

 

 

 

좌우 설산을 배경으로 계곡이 흐르고

이제부터는 계곡 옆길을 따라 걷는다.

햇빛에 반짝이는 계곡물이 완전히 살아있는 그 어떤 생명력을 연출해 낸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서 어떤 생명을 본다.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물이 아니라

무언가 모를 생동하는 깊은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다 그렇지만 유독 이곳에서 만난 계곡물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생명의 연주를 감지한다.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4,800고지 이 높은 곳을 흐르는 생명의 물이 아닌가.

 

나는 때때로 흐르는 물 앞에 서곤 한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의 아주 내밀하고 깊은 무언가를 보는 것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그 어떤 새로운 박동이 느껴진다.

완전히 살아 생동하는 그 어떤 우주적 흐름과도 같은,

혹은 내 안에서 흐르고 있는 수대(水大)의 여린 움직임의 감각과도 같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히말라야의 맑고도 시린 호흡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하다.

내 호흡과 히말라야의 호흡이 일치를 보는 듯,

이 생기어린 주변 환경과 걸음과 호흡이 마치 하나가 된 듯,

걷는다는 사실도 잊고 걷는다.

 

모든 것이 조화롭고 순화롭다.

유장한 침묵이 흐른다.

이 묵연한 선정을 따라 내 존재도

자연스레 본래의 커다란 침묵과 공명을 이룬다.

평소 같았으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생각이라는 목소리들이 이 고요한 풍경 앞에 넋을 잃었는지

끼어 들 틈을 잃었다.

 

저 산 아래에서는 매일같이 내 존재를 복잡하게 휘어잡던 온갖 것들이

제자리를 찾고 질서를 찾아가는 듯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다.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두가 충분히 제 몫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나 또한 이 길 위를 걷고 있음으로써

내 몫의 삶을 표연히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이 순간 내 존재의 몫은 길 위를 그저 걷는 것에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100% 순수하게 현존하는 것이다.

 

내가 그 어떤 엄청난 성취를 할 때나,

대단한 일을 이루어냈을 때보다도

그저 지금 이렇게 걷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완전히 삶을 연소하고 있다는 생생한 존재감이 깃든다.

단순히 걷는다는 행위 속에서

이렇게 충장하고 꽉 찬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배운다.

 

우리 삶에 있어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행위를 하느냐보다

그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행위 자체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아무리 성스러운 행위일지라도 그 행위 하는 자의 마음속에

삿된 생각이 끼어들어 있다면

그것은 먼저 우주에서 알고 그 행위를 성스러움에서 배제시키겠지만,

아무리 사소한 행위를 하고 있을지라도,

심지어 겉으로 보기에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행위자가 온전히 깨어있음으로써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든 진리에서의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행위 자체보다 행위의 바탕을 이루는 마음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다.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물길을 따라 한두 시간 걸었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이 처연한 땅 위에 계곡 옆으로 작지만 빼어난 풍경의 마을,

로부체가 나타난다.

 

 

 

 

6,000미터 로부체 피크를 비롯해

7,000, 8,000미터의 거대한 지붕들을

마치 뒷산 거느리듯 연꽃처럼 옴팡진 곳 꽃술자리 한 가운데

로부체 마을이 꽃처럼 피어나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오늘 하루를 신세질 곳인데,

서너 곳 있는 롯지는 이미 이른 아침에 다 차서 방이 없단다.

사정을 알고 봤더니 요즘 같은 성수기 빅시즌에는

단체 트레커들이 자신의 포터를 전날이나 당일 새벽부터 로부체 마을에 먼저 보내

방들을 전부 잡아 놓는다고 한다.

 

더구나 로부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와 칼라파타르를 오르기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곳이라

다양한 루트로 올라 온 사람들이

거의 전부 이곳에서는 꼭 하룻밤을 묵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보니

더욱 방 잡기가 힘든 곳이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이 곳 로부체뿐만 아니라,

고락샵, 종라, 고쿄 등 정상 부근 사람들이 붐비는 전초기지로서의 마을들은

항상 방 잡는 일이 전쟁과도 같다고 한다.

 

 

 

 

마침 우리 지텐이 잠시 기다려 보라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로부체 위로 두세 시간 거리, 내일 하루 묵기로 계획된 고락샵에

마침 도미토리 침대 딱 한 자리가 남았다고 그곳이라도 가겠느냐고 묻는다.

 

그마저도 누가 고산병으로 부랴부랴 내려가는 바람에

조금 전에 취소된 자리라고 한다.

당연히 따지고 생각할 겨를 없이 고락샵에 가서 묵기로 한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어제 5,000고지의 낭카르창 피크를 다녀왔으니

고산 염려는 안 해도 될 거라는 지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힘을 내기로 했다.

 

사실 고락샵까지 안 가고 오늘 하루 로부체에서 자고

내일 고락샵에서 자기로 계획한 이유는

거리가 멀거나, 힘들어서가 아니라 고산 적응을 위한 계획이었다.

 

지금부터의 높이에서는

고산병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 대부분 여행자들의 조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된 바에야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법계에 맡기고 그저 인연 따라 갈 수밖에.

 

어쩌면 이것이 더 깊은 차원의 나와 연결된 우주 법계의 지성이

나를 위해 준비한 본연의 계획이었을지 모른다.

언제나 나의 생각, 인간의 판단과 계획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에서

준비한 더 깊은 계획에 맡기고 산다는 것이야말로

내 삶의 중요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저 믿고 맡기며 자연스러운 우주의 이치대로 흐르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일과를 하느님께 맡기라’고 했던 성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 혹은

‘아상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라’는 가르침,

노자가 말했던 ‘무위자연’의 이치 또한 바로 그것이다.

 

내가 계획했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안(假案)의 계획일 뿐,

‘절대’ 바꿀 수 없는 계획은 없다.

언제든 그 계획은 바뀔 수 있다.

유연하고도 활짝 열려 있는 마음으로

미리 잡아 놓은 계획에 집착하지 않는다.

 

여행의 일정도 그렇고, 삶의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내일, 아니 당장에 다음 순간 벌어질 일에 대해

내가 무엇을 결정적으로 정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혹은 이 계획대로 되야만 한다’고 고집하게 되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롭다.

 

그러나 계획은 있되 그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치에 나를 맡기다 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내 앞에 펼쳐질 수많은 가능성에 대해

활짝 마음을 열어 둠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과 마주할 투명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보통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정해 놓으면 스스로 정한 그 틀에 갇혀

새로운 가능성으로 눈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틀 안에서의 비좁은 삶만을 반복적으로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은 진부하고 반복적인

그냥 그런 통속적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어떤 정해진 방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내 앞에 펼쳐질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삶에 나를 활짝 열어두고,

그 어떤 것이 오더라도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새롭고 창조적이며

나아가 영적인 차원과 접촉할 수 있는

깨어남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것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혹시 고산병이 걸리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하나의 가능성이자,

새로운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최종적인 목적지의 하나였던

칼라파타르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그리 좌절할 바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의 성공이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순간 성공만이 있을 뿐이지 실패란 없다.

더 깊이 들어간다면 실패도 성공도 없고

다만 우리 생각이 성공이라고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일 뿐이다.

 

판단과 해석을 놓아버리면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모든 것이 성공적이다.

사실 모든 실패는 실패했다는 생각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이 고지대에서도

봄처럼

아름다운 노오란 꽃이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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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법상 스님과 함께하는 쿰부 트레킹

 

국내 최초로 스님이 쓴 히말라야 쿰부 트레킹 입문서

 
  예년에 비해 빨리 찾아온 더위가 일상의 탈출을 부추긴다. 떠나고 싶은 욕구가 춤을 춘다. 마음은 벌써 떠나고 있다. 어디로 떠날 것인가?

휴양지, 테마가 있는 여행, 트레킹이 좋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꼭 한번 추천할 만한 책,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나왔다.  

국내 최초로 스님이 쓴 히말라야 쿰부 트레킹 입문서이기도 한 이 책은 그동안 수행과 명상,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쓴 진지한 깨침의 글들로 큰 반향을 일으켜 온 법상 스님의 여행기이기에 솔깃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저자(스님)는 어떤 마음으로 떠났을까?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느꼈을까?’ 갖가지 궁금증이 일기 마련인데, 이 책은 이런 의문들을 상큼하게 풀어준다.

하루하루 일기를 써내려가듯, 바로 옆에 앉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트레킹을 떠날 때의 마음가짐’, ‘홀로 걷는 트레킹을 통해 명상하는 법’, ‘히말라야에서 만난 대자연의 장관’, ‘트레킹 기간 중 만났던 사람을 비롯해서 동물과 바람, 꽃, 강 등등에서 건져 올린 깨달음’을 간결하면서도 생동감 있는 필치로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때문에 읽어가는 재미를 만끽하면서 그 여정을 따라가기만 해도 마치 히말라야의 품에 안긴 듯, 그 성스러운 영혼의 고향이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저자가 직접 담아 온 히말라야의 자연, 사람, 꽃, 동물 등 150여 컷의 사진도 그 생생한 감동을 더해준다.

또한 부록 ‘법상 스님께 묻는 트레킹 Q&A’을 통해 트레킹 준비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히말라야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 꿈을 이루는 방법을 조목조목 일러주고,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을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히말라야를 느끼면서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오게끔 이끌어준다.  

수행자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명상순례기,
삶의 지혜를 열어주는 최고의 인생 가이드북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

티베트의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의 말에 홀린 것처럼 히말라야를 찾았다는 저자는 히말라야 순례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운명 같은 것이었고, 내면의 히말라야를 찾아가는 구도과정이자 만행이었다고 토로한다.

  “세상에서는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빠져 살지만, 여행을 떠나 삶을 관조하게 되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작아짐의 즐거움은 곧 정신적 차원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작아지고 작아져 무아(無我)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 되는 우주적 참된 자아와 만나게 된다.” 

저자는 히말라야 쿰부 트레킹을 통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느꼈다. 여기서의 나는 에고다. 불교식 표현으로는 금강경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하고 있는 아상(我相)이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세상 모든 문제, 다툼이 이 ‘나’에서 출발한다.

“참된 여행을 통해 나라는 틀 속에 갇혀 아옹다옹하며 돈, 명성, 권력, 인기, 소유 등을 끊임없이 확장해 오려고 애썼던 자기의 에고와 아상을 겸손히 비우고 내려놓게 된다.”

저자의 글들을 읽어가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홀로 걷는 투명한 여행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구에게나 구도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 정보를 나열해 놓은 평범한 트레킹 입문서가 아니다. 수행자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눈부시게 아름다운 명상 순례기요,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지혜에 눈뜨게 되는 최고의 인생 가이드북이라 할 수 있다.  

내면의 히말라야로 떠난 여행기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은 삶의 굴레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진정으로 경쾌하고 행복한 삶을 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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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법상 스님

  인연 닿는 도량에 여행하듯 머물며 수행과 전법에 매진하고 있으며, 현재는 강원도 고성의 설악과 동해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소담한 절 운학사에 머물고 있다.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www.moktaksori.org)’와 다음 카페 ‘목탁소리 지대방(http://www.moktaksori.kr)’의 지도법사로서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수행을 이끌어 가고 있다.  

스님은 불교와 명상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다 쉽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수행과 명상, 자연과 여행을 주제로 쓴 진지한 깨침의 글들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게 스님의 글을 읽고 ‘생활 속의 수행’에 뜻을 모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이다. ‘목탁소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생활인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소중한 깨침의 공간이 되었고,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여 마음을 맑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고향과 같은 귀의처가 되면서 불교와 명상 분야의 대표적인 웹사이트로 자리 잡았다. 

동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교를 공부했으며,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조계종 포교사이트 「달마넷」을 비롯 「한국일보」 「법보신문」 「월간 불광」 등에 글을 연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금강경과 마음공부』『생활수행이야기』『마음공부이야기』『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기도하면 누가 들어 주나요』 등이 있다. 특히 저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는 불교출판문화협회에서 주관하는 ‘2005년 올해의 불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홈페이지 http://moktaksori.org
다음 카페 http://moktaksori.kr
블로그 http://moktaksori.net
트위터 http://twitter.com/moktaksori


▦ 차례

  

1일차 : 카투만두→루클라→팍딩

결국, 히말라야를 품다 012

○ 비행기 추락, 우주적인 질서를 수용하라

○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 루클라에서 만난 여인

○ 지텐라이의 행복

○ 티베트 불교문화의 향기, 루클라에서 팍딩까지

○ 여유작작 따뜻한 차 한 잔

○ 히말라야 젊은이들의 소망

○ 팍딩의 밤, 고일(高逸)한 외로움이 분다

 

2일차 : 팍딩→남체바자

탐세쿠, 설산 영봉에 취하다 048

○ 추위에 잠을 설치다

○ 자신의 일을 하는 즐거움

○ 히말라야의 아이들

○ 히말라야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

○ 쿰부의 최대 도시, 남체바자의 풍경

   

3일차 : 남체바자→샹보체→히말라야 호텔→남체바자

남체바자와 샹보체, 그 선연한 하루 070

○ 고산 적응을 위한 하루 휴식

○ 가벼운 산책, 샹보체와 에베레스트 뷰 호텔

○ 산중 롯지의 고즈넉한 저녁 풍경

   

4일차 : 남체바자→텡보체

쿰부의 최대 사원, 텡보체 곰파 086

○ 걷는 것은 곧 하나 되는 과정

○ 푼키텡가에서 만난 한국인

○ 통증과 함께 600의 고도를 오르다

○ 텡보체 곰파, 순례자의 기도

 

5일차 : 텡보체→팡보체→딩보체

쿰부의 본격적 풍광, 팡보체와 딩보체 106

○ 이른 아침, 처음 보는 풍경 속을 걷다

○ 팡보체와 딩보체, 그 황량하고도 압도적인 풍광

○ 산중 마을에서 생각이 멎다

○ 자연 치유, 통증이 사라지다

   

6일차 : 딩보체→낭카르창 피크→딩보체

낭카르창 피크, 다음 발자국을 향해 걷다 130

○ 이것이 바로 히말라야구나

○ 다음 발자국을 향해 걷다

○ 5086 낭카르창에서 시간이 멈추다

○ 밀라레빠의 노래, 욕망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가자

○ 온전한 휴식, 달빛 쇼크

   

7일차 : 딩보체→투클라→로부체→고락샵

로부체를 넘어 고락샵까지, 내맡김의 길 156

○ 고독과 침묵 속의 새벽길

○ 4,800 고지를 흐르는 생명수

○ 계획은 언제든 변경될 수 있다

○ 고도가 오르면 물가도 오른다

하나의 방식일 뿐, 더 나은 방식은 아니다

○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8일차 : 고락샵→칼라파타르→로부체

칼라파타르, 목적 없이 다만 걸을 뿐 184

○ 최종 목적지에서 최악의 악천후를 만나다

○ 완전한 신비의 순간, 완벽한 날들

○ 칼라파타르 롯지의 아침 풍경

○ 걸을 때 정신은 우주와 연결된다

     

9일차 : 로부체→종라

종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206

○ 우주의 역설, 버릴 때 더 큰 것을 얻는다

○ 내가 작아지는 것을 즐거워하라

○ 마땅히 모든 것을 잃어라

○ 정신 번쩍 드는 로부체의 새벽

○ 개발과 발전으로 히말라야가 사라진다

○ 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 종라 롯지의 평온한 오후

   

10일차 : 종라→촐라패스→닥낙

촐라패스, 빙하와 크레바스를 넘다 238

○ 촐라패스 정상을 향해 걷다

○ 아슬아슬 빙하지대를 넘는 사람들

○ 삶을 심각해 하지 말라

○ 최악의 오르막을 앞두고 펼쳐진 콘서트

 

11일차 : 닥낙→고쿄→고쿄리→고쿄

쿰부 설산의 장엄한 파노라마, 고쿄리 260

○ 부풀려진 미래라는 환상에 속지 말라

○ 고쿄리를 오르며 침묵의 연주를 듣다

○ 알고 떠나는 여행, 모르고 떠나는 여행

○ 한두 번 가 보고 여행기를 출간한다고?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12일차 : 고쿄→마체르모→포르체탱가→쿰중

하산, 신의 거처 마체르모를 지나 286

○ 외로운 설산 마을에서 한 생을 유유하다

○ 신들의 마을을 지나 계절을 관통하다

○ 대자연과의 연대감

산중 도시, 쿰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다

  

13~14일차 : 쿰중→남체바자→루클라→카투만두

순례, 삶이라는 또 다른 히말라야로 304

○ 몸살감기에 간절한 차 한 잔 생각

○ 아픈 몸을 바라보는 즐거움

○ 다시 루클라에서

   

○ 저자의 말 004
○ 히말라야 트레킹 지도 011
○ 법상 스님께 묻는 트레킹 Q&A 320

  

저자의 말 

티벳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내 안에 밀라레빠의 이 명징한 외침이 전해지는 순간 모든 시간과 우주는 정지되었고, 뛰던 맥박도 멈춰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밀라레빠의 말에 홀린 것처럼 네팔과 히말라야를 찾았고, 먼발치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내 심장은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번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내 삶에 아주 장대한 오랜 계획의 일환임을 의심할 수 없다.

이 히말라야 순례기는 하나의 단순한 여행기가 아닌 내면의 히말라야로 떠난 여행이다. 내 안에서 히말라야는 단순한 설산이 아니라 속뜰의 깊고 드넓으며, 높고도 웅건한 지고의 지향점이다. 그렇기에 이 여행은 내면으로 떠나는 나를 찾는 하나의 구도의 과정이자 수행이요, 만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기에 이 책은 정보를 담고 있는 여행 안내서가 아닌, 홀로 걷는 투명한 여행을 통해 자기 안의 히말라야를 찾아가는 삶의 안내서이기도 하다.

외국에 나가 보니 한국의 대학생들이며, 직장을 그만 두고 여행을 떠나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요즘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붐처럼 일어나는 걷기 여행의 흐름을 타고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다른 여행에 비해 히말라야를 걷는 트레킹은 그 어떤 여행보다도 자기 자신을 살피고 내밀한 삶의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자기 탐구의 여행으로 손색이 없다. 트레킹은 차나 운송 수단을 빌려 목적지까지 편히 다녀오면서 눈요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두 발로 걸어 오르는 지난한 과정이 아닌가. 편의 시설도 거의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의 산 속을, 그것도 해발 3,000~5,500m의 높은 설산의 기슭이나 봉우리까지 직접 온 몸으로 온 감각으로 걸어 올라야 한다. 그 걷고 걷는 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은 고요함을 찾게 되고, 오래고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잊고 지냈던 본래적인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것은 흡사 구도자들의 수행의 길과 다르지 않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하는 아주 중요한 수행 방법이다.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 삶에 대한 지혜로운 사유와 사색이 뒤따른다. 비로소 삶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적력한 자각이 열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곤 한다.

여행 중에 만난 한 여행자가 칼라파타르 그 높은 고지까지 갔다 오면서 추억이 될 만한 작은 조약돌 하나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아니면 인도 갠지스 강에서 작은 물병에 물 한 방울 담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곳은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얻어오는 곳이 아니라 다만 내려놓고 오는 곳이다. 그래서 성지를 여행하는 여행자는 언제나 비우고 비워 작아져 돌아오지, 무언가를 키우고 얻어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참된 여행을 통해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진다. 우리가 그동안 ‘나’라는 틀 속에 갇혀 아옹다옹하며 돈, 명성, 권력, 인기, 소유 등을 끊임없이 늘리고 확장해 오려고 애썼던 자기 자신의 에고(ego)와 아상(我相)을 겸손히 비우고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아집과 집착과 욕망과 소유물의 크기를 나의 존재감으로 알고 키워오려고 애쓰던 그 마음을 한껏 작아지게 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내가 확장되는 즐거움’에 빠져 살지만, 여행을 떠나 삶을 관조하게 되면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작아짐의 즐거움은 곧 정신적 차원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작아지고 작아져 무아(無我)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 되는 우주적 참된 자아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상이 작아질 때 본연의 지혜로운 참 나는 한껏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막막한 삶의 갈림길 앞에서 지혜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우주적인 답변을 들을 수도 있으며,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해 내 안의 붓다께 신께 직접 답변을 듣게 되기도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과 함께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쿰부 여신의 명징하고도 포근한 품속을 느릿느릿 걸으며 얻은 것, 아니 내려놓은 것들을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회향하며, 이 한 권의 책이 여행을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기 안에 잠재해 있던 구도의 향기를 꽃피우고, 순례의 여정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또한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일상에 갇힌 이들에게 한번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과 동시에 ‘내가 영적으로 커지는 즐거움’을 깨달아가고 있는 모든 여행자들에게 각별한 연대감 같은 것을 느끼며 그 모든 여행자들에게 깊은 깨달음이 있길 소망해 본다.

끝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주신 목탁소리의 많은 법우님들과 선후배 도반 스님들, 그리고 불광출판사 사기순 편집부장님을 비롯한 출판사 관계자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10년 초여름 운학사에서

법상 합장

   

▦ 본문 미리 보기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너무 생각이나 판단에 의존하려 하지 말라. 과거의 기억들로 오늘을 판단하거나 과거의 색안경으로 지금 이 순간을 평가하지 말라. 무심(無心)의 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가보라. 생각이 놓아지는 순간 우리 마음은 짧은 평화를 경험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생각이 힘을 잃고 대신 그 자리에 무심과 관조(觀照)가 빛을 비출 때 우리의 의식은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바로 그때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나 기존의 관습을 넘어서는 번뜩이는 창의, 그리고 기억과 사고 너머의 깊은 존재의 심연 속에서 지혜의 가르침들이 직관적이고도 창조적인 영감의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생각과 기억이라는 과거의 잔재, 또 계획과 바람과 욕망이라는 미래의 잔재가 모두 사라진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존의 순간에 깃드는 것이다.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 중에서

  이 척박한 먼지 나는 산비탈에서 신비롭게도 도량 주위에만 졸졸졸 생명수가 흐르고, 그 주위로 초록의 생명들이, 또 꽃들이 거짓말처럼 내 시선을 잡아끈다. ‘이래서 이곳에 오랜 곰파가 설 수 있었구나.’ 대자연이 품어주는 곳, 이 황량한 곳들 가운데 유독 이 산자락, 이 터에만 이렇게 생명을 품어 주도록 그렇게 우주에서는 이미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우주법계의 숭고한 뜻을 이을 이 시대의 눈 밝은 수행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 뿐! 이런 곳에 앉아 설산을 붓다로, 면벽으로 여기며 ‘나는 누구인가’를 들고 관조(觀照)를 이어간다면 그 어떤 게으른 수행자가 제 허튼 정신을 깨고 이 외외당당(巍巍堂堂)한 쿰부 설산의 협조를 받지 않을 수 있을 건가.

- ‘밀라레빠의 노래, 욕망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가자’ 중에서

  
아무리 걸어도 인적이 없다 보니 문득 이 적막공산 음음한 행성 위에 나 혼자만 삶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존적 외로움이 가슴 한 켠을 스친다. 말 그대로 산공야정(山空野靜). 순간 허우룩하면서도 텅 빈 고독이 내면에 낮게 깔리며 가슴 벽을 두드린다.
 이 순간의 걸음걸음이 나를 깊이 깨어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든다. 삶을 진하게 경험한다. 루소는 걷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를 통해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본연의 내 모습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루소의 말처럼 두 발로 직접 걷는 여행,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며 본연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중에서

  명상할 시간이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많이 걸으라. 온갖 생각의 짐을 짊어지고 걷지 말고 그냥 걸으라. 생각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라 다만 홀로 걸으라. 그렇게 텅 빈 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이 우주와의 진정한 관계성이 회복되고 지난 시간을 살아 온 나의 삶이 분명하게 보여 지기 시작할 것이다. 걸으며 애써 수행이나 명상을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자주 하려는, 성취해 내려는 그런 마음으로 인위적인 ‘걷기 명상’을 해서는 안 된다. ‘걷기 명상’은 진정한 명상이 아니요, 오직 다만 ‘걸을 뿐’이 되었을 때만이 참된 명상과 연결될 수 있다.

- ‘걸을 때 정신은 우주와 연결 된다’ 중에서

  이제부터라도 무지를 털고 깨어나야 한다. 모두가 조금씩 불편을 감수하면서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른 자연, 깨끗한 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히말라야의 감동스런 풍경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천진함과 무한함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지켜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이 엄청난 파괴의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모든 모순을 깨고 나부터 이 지구 행성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작은 것이 우주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윽하고도 강력한 공명의 힘을 가지고 주위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 ‘불편하게 사는 즐거움’ 중에서

  ‘말을 잊게 만드는 풍경’이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그런 풍경 속에서 우리는 말을 잊고, 글을 잊으며, 생각과 지식을 잊는다. 오직 장엄한 풍경 앞에서 모든 것이 멈춰진다. 세상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침묵할 뿐이다. 별 앞에 설 때나 푸른 초원의 언덕 너머로 떨어지고 솟아오르는 일몰과 일출을 마주할 때, 이와 같은 설산의 산령 앞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은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춘다. 그저 경이감에 현묵할 수밖에 없다. 그 숭고함은 언어를 초월해 있고, 시성(詩聖)의 그 어떤 표현보다도 더 깊고 넓다. 바로 그 모든 것이 침묵하는 외경과 신비의 순간,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 우주 본연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깊이의 생명력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지식과 정보와 온갖 종류의 과거의 흔적이 끼어들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바라봄이다.

- ‘알고 떠나는 여행, 모르고 떠나는 여행’ 중에서

  여행을 떠나고 싶은가? 히말라야를 그리워하는가? 삶이 팍팍해서 여행이나 떠나볼까 하는 여행자도 있고, 풀리지 않는 꽉 막힌 삶의 흐름을 여행을 통해 뚫어보려는 이도 있으며, 그저 여행을 업처럼 삶처럼 되풀이하는 이도 있다. 때로는 너무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마음뿐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는 이도 있다. 그러나 여행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행은 삶의 여행이다. 인생의 여정을 경건한 순례의 길로 여기는 자에게는 매 순간의 삶이 바로 거룩한 순례의 길이며, 그러한 이가 바로 구도자이며 또한 순례자다.

- ‘순례, 삶이라는 또 다른 히말라야로’ 중에서

히말라야내가작아지는즐거움법상스님과함께하는쿰부트레킹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한국에세이
지은이 법상 (불광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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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관례적으로, 고산증세가 오기 시작한다는
3,440고지 남체바자에서
많은 여행객들은 고산적응 시간으로 이틀 밤을 머문다.

도착한 다음날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고산에 적응하기 위한 시간으로 하루를 더 머물며,
주로 남체바자 마을의 뒤쪽 산 위에 자리잡은 샹보체(syangboche, 3720m)와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 로체(lhotse, 8,516m), 타보체(Taboche, 6367m),
탐세르쿠, 에베레스트(everest, 8,850m) 등의 영봉들이 환히 보이는
일본인이 소유의 에베레스트 뷰 호텔(Everest View Hotel, 3900m)을 다녀오는 일정으로
하루를 더 보내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 또한 그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때때로 젊고 혈기 왕성한 트레커들이 하룻밤 고산적응 시간 없이,
또 얼마나 빠른 시간내에 완주를 이루어내나 내기라도 하듯
하루 사이에 700~1,000 고도 이상을 오르는 강행군을 며칠이고 이은 끝에
몇몇은 당연한 고산증세로 뛰쳐 내려오거나 실려 내려오고,
또 몇몇은 그 초월적인 일정을 신기하게도 무사히 마침으로써
세간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으쓱한 자기 과시도 이어가는 경우도 있더라고 한다.

나야 시간도 느긋하게 잡았고,
빨리 오르는 것이 목적인 것은 더더욱 아니고,
생에 처음으로 친견하는 희말라야 산군에게 나를 낮춰 겸손한 마음으로
법신(法身)을 친견하듯 오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이른 새벽, 아직 동도 터오기 전에 저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찌뿌등한 몸을 좀 풀고
아래층 화장실 옆 작은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두꺼운 방한복을 껴입고 나왔는데도 도저히 추위가 가시지를 않는다.
그나마도 전날밤은 두꺼운 이불을 두 개씩이나 무겁게 누르고 잤기에
설치지 않고 푹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드디어 동쪽 하늘이 어둠을 뚫고 짙푸른 빛으로 물드는 듯 하더니
콩대(Kornde, 6187m)의 만년설 봉우리 위로 황금빛 일출이 시작된다.



방에 올라가 커튼을 활짝 열었더니
창문 밖으로 콩대 봉우리가 액자에 걸린 그림처럼 펼쳐진다.

 


 

봉우리의 일출을 방 안에서 마주하며
그 황금빛 붓다의 성상을 향해 차분히 예불을 올린다.

아침 식사를 롯지 식당에서 간단히 마치고,
바로 뒷산 격인 샹보체를 오르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일찍부터 산을 오르는 여행객들도 드문 드문 눈에 띄고,
이 높은 곳에 학교가 있는 것인지 가방을 둘러 여학생들과,
목에 댕댕 거리며 종소리를 울리고 무겁게 걷는 야크들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길을 오른다.

 

 






샹보체를 향해 한발 한발 오르는 동안
남체바자의 조망이 한층 드넓게 트이면서
이윽고 산정에서 하나도 가리지 않은 알몸의 남체 전경을 만난다.





남체바자는 그야말로 희말라야 산정 마을의
그 어느 곳보다 크고 아름다우며 성스럽다.
안나푸르나의 촘롱이나 간드룽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조망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샹보체를 향해 걷는다.



능선을 따라 오르다보면 너댓집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작은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20여 분 더 오르면 바로 샹보체가 나온다.
샹보체가 상 정상에 있는 마을의 이름인줄 알았는데
마을이라기 보다는 황량한 초원벌판의 비행장이다.
롯지가 두어 곳 있고, 그 옆으로 너른 비행장이 펼쳐져 있다.
말이 비행장이지 그저 헬기장 수준의 너른 벌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샹보체, 툭 터진 비행장의 전경 앞에 앉아 호흡을 돌린다.
흡사 골프장 잔디밭을 연상케 하는 자연 그대로의 푸른 초원,
그 건너편 위로 솟아오른 구름에 반쯤 가려진 탐세르쿠와 캉테가 만년설산,
산행하기에 적당한 날씨와 따스한 햇살,
산들 산들 불어오는 달콤한 바람까지 모든 것이 꿈같고, 선연하여
마음을 추스르기 힘겨울 정도다.

 

 




초원의 비행장 좌측 얕은 산 정상 위에
캉테가와 탐세르쿠를 병풍처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롯지 하나가 시선을 잡아끈다.
그것이 희말라야 뷰 호텔인가 했더니 호텔은 그 롯지 너머에 있다고 하네.



한참을 앉아 있자니 미니 비행기 한 대가 루클라 쪽에서 날아오더니
남체와 샹보체를 한 바퀴 휘휘돌아 건너편 산 뒤로 사라진다.



그리고 또 잠시 뒤 한 대의 헬기가 날아오더니
샹보체가 이렇게 어설퍼 보여도 헬기장이 맞다고 소리치는 듯
웅웅거리는 큰 소음과 함께 프로펠러를 휘날리며 착륙한다.



한참 전부터 헬기장 한 편에 서 있던 일단의 여행자들이
헬기에 몸을 싣고 짐을 싣더니 곧장 수직 상승하며 날아간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곳 샹보체에서 헬기를 통해
곧장 카투만두로 가는 헬기 교통편이 있다고 한다.
대략 1인에 50만원을 상회하는 금액이 든다고 하니
우리 같은 최대한 아끼며 다니는 배낭여행자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구경거리일 뿐이다.

그나마도 오늘같이 날씨가 좋은 날은 상관이 없지만,
부득이하게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은 미리 선금으로 헬기값을 지불해 놓고도
구름 속에서 헬기 소리만 듣다가 착륙을 못해 타지 못하고
걸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경우 일단 헬기가 떴기 때문에
비용을 되돌려 받지는 못한다고 하니
그 막대한 비용을 고스란히 버리고도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에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한참을 앉아 쉬었더니 설산을 휘휘 돌아 불어오는
툭 트인 초원의 시린 바람을 온몸으로 마주하느라 한기가 느껴진다.
샹보체에서 비행장 좌측편으로 보이는 얕은 언덕 사이로
희말라야 뷰 호텔, 그리고 쿰중과 연결되는 길이 보인다.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쿰중과 호텔로 가는 길이 나뉘는 산정 즈음에
스투파 하나가 당차게 서 있다.

 

 

 
우측 비행장 옆으로는 그림 같은 노오란 초원이 펼쳐진다.



좁은 숲길을 산책하듯, 경행하듯
길가에 자유로이 피어난 꽃이며 작은 풀들에 마음을 빼앗기며 걷는다. 

 

 

 

 

 


조금 더 걸으니 거짓말처럼
모든 희말라야의 봉우리들이 환희 보이며
내일부터 걸어 올라가야 할 마을들이 한눈에 펼쳐지는
언덕 위 아름다운 뷰포인트를 만난다.



좁은 숲길에서 꽃들과의 숨바꼭질을 하다가 숲길 끝나는 곳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만나니
무슨 선물이라도 받은 듯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하다.
이 전망 좋은 풍경을 놓칠세라 여행자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며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곳에서 위쪽 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또 다른 쿰중으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으로 산허리를 가르는 작은 오솔길이 에베레스트 뷰 호텔로 가는 길이다.
이 아래쪽 호텔로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부러 만든 것처럼
절벽 같은 산사면의 구부능선 즈음에
길 옆으로 빨갛고 노오란 꽃들이 앞다퉈 피어난
그야말로 그림 같은 길이다.

 



황막히 불어와 뺨에 박히는 칼바람만 아니어도
이 길가에 앉아 가만가만 살펴도 보고,
여유있게 누워서 하염없이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고,
앙증맞게 피어난 울긋불긋한 꽃들도 바라보고,
건너편 우뚝 솟아오른 만년설산에도 눈길을 주면서,
그러다가 심심하면 책도 읽어가면서 오후 내내 염연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오히려 에베레스트 뷰 호텔보다 호텔로 가는 길이 더 뷰 포인트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30여 분을 걸어 호텔에 도착,
호텔 야외 전망대에서 따뜻한 레몬티 한 잔으로 몸을 녹인다.

 



설산의 봉우리들이 자신의 하얀 살저름에서 떼어내 구름을 만드는 것인지
새벽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청연하던 하늘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구름으로 뒤덮인다.



주로 구름은 텅 빈 하늘을 떠 다니는게 아니라
산봉우리 주변으로 띠를 이루며, 연모의 포옹을 하듯
그렇게 달라붙어 있다.

때문에 구름으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을 뚜렷이 보지 못하는게 아쉽다.
곁에서 전문 사진장비를 갖추고 숨죽이며 전망을 주시하던 일본인 사진작가 두 분이
일본인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투박한 영어를 내뱉으며
두 팔을 뻗어 구름을 확 걷어내고 싶다는 몸짓을 보이면서 아쉬워하고 있다.

타박타박 걷던 길을 다시 돌이켜 남체바자로 향한다.



한적하게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선명한 희말라야를 흠뻑 느껴본다.
남체로 내려가는 길에 부채꼴 모양의 선명한 남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본다.

 



샹보체와 호텔을 두루 돌아 왔는데도 오후 시간이 고스란히 주어졌다.
점심을 먹고 몇몇 트레킹 샵을 돌아본다.
엊그제 팍딩에서의 추위가 생각나
든든한 겨울용 침낭을 빌리러 몇몇 곳에서 가격을 살핀다.

어떤 가게에서는 하루 대여료가 200루피,
또 다른 가게에서는 150루피였는데,
한 가게에서 살짝 얼굴만 내밀고 물었더니 80루피를 부르는게 아닌가.
너무 반가워 가게에 들어서니, 내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다 말고
“Japan?” “Korea?” 하더니 바로 다시 150루피를 달라는게 아닌가.

방금 전 분명히 80루피라고 했는데 왜 그러냐고 따져 물었더니
웃으면서 살짝 보고 네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며,
어차피 말했으니 그럼 그렇게 하자고 시원스레 침낭을 보여준다.

한국이나 일본인들의 여행자들이 트레킹을 하러 많이 오는데,
처음 출발할 때는 여행자 같다가도 일주일 이상 지나고 나면
까맣게 탄 얼굴이며, 씻지 않은 몸, 헤어지고 더러워진 옷가지 등으로 인해
말만 안 하고 있으면 네팔 현지인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렇게 때때로 그 덕을 보기도 하니 그도 좋은 일이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들어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의자를 가득 메우고 있다.
혼자라 이런 점이 좋다.
그저 자리가 없어도 한 자리 정도야 아무 곳이나 끼어 앉아도 좋다.

대부분 롯지 식당의 특색은
우리나라처럼 따로 따로 4명, 8명씩 앉도록 해 놓은 것이 아니라
ㄷ자로 만들어진 회의장을 연상하면 딱 맞다.

덕분에 오붓하게 세계 각지의 여행자가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도 보내며 또 서로에 대해, 나라에 대해, 또 자신이 먹는 음식들에 대해,
그리고 대부분은 주로 다음 트레킹 일정이나 루트에 대해 묻고 답하면서
이런 저런 정보교환과 살풋하고 정감어린 교류의 장을 마련하곤 한다.

그야말로 자기 나라 사람들끼리, 혹은 일행끼리만 어울리는 것이 아닌
모두가 같은 산에 오르는 동료 의식을 가지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활짝 열린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희미한 형광등 불빛 아래 삼면으로 둘러쳐진 테이블 가운데는
어릴적 초등학교에서 보았을 법한 뗄감 난로가 있고,
그 주위로 여행자들의 시선이 차분히 오고 간다.

묵묵히 맛있게 밥을 먹는 사람,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몸을 녹이는 사람,
다정히 웃고 떠드는 한 무리의 사람들 하며,
그윽한 오랜 중년의 부부,
또 한 켠에서는 머리에 해드랜턴을 켜고 조용히 책을 읽는 사람,
그 가운데 난로 주위로 현지인 포터들의 다정한 이야기꽃하며,
접시를 들고 분주히 움직이는 식당 종업원들까지,
이 설면한 풍경이 가슴 속에 짠하게 사진 찍히듯 박혀 온다.
두고 두고 롯지의 저녁 시간은 추억속에 아롱질 듯 하다.

보통 6시 쯤이면 저녁 식사를 하니
7시 쯤부터 시작되는 저녁의 호젓한 시간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낼까!
아마도 하루 이틀은 이 텅 빈 시간이 낯설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할 일들로 북적이며,
우리의 집에는 언제나 TV와 인터넷이 저녁시간을 가득 채운다.
이제 이 낯선 어둠의 빈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런 때야말로 우리가 진정 여행을 떠나는 의미에 답해 주는 공간이 아닐까?
이런 일상에서 누려보지 못한 모처럼의 그윽한 순간 조차
포커와 화투를 들고 와 때로는 소량일지라도 돈까지 오가며
곁에 있는 여행자의 여유로움까지 방해하는 일은
때때로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물론 홀로가 아닌 함께하는 여행에서는
때때로 적당한 그런 놀이가 어쩔 수 없는 관계형성의 장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지만
너무 과하면 무엇이든 문제가 된다.

그래서 홀로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여행의 질적 차원이 조금 다를 수밖에 없다.
물론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도 좋지만,
내가 홀로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녁을 먹고 오늘도 어두운 마을길을 따라 랜턴에 의지하며 가벼운 산책을 즐긴다.
제법 큰 마을이라 그런지 팍딩에서의 산책과는 다른
분주하고 활기찬 풍경이 이 무거운 어둠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듯 하다.

나처럼 터벅터벅 소요를 즐기는 사람,
가벼운 쇼핑을 즐기는 사람,
미쳐 준비하지 못한 트레킹 용품을 구입하는 사람,
그리고 이 먼 산에서 느려터진 속도에 인내심을 키워가며
비싼 인터넷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
- 참고로 카투만두에서는 1시간 80루피하는 인터넷 비용이 이곳에서는 1분에 100루피 - ,
또 모처럼 1년 만에 대목을 맞은 트레커 용품점 주인들의
손님을 끄는 능숙한 목소리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몸짓들이 이어진다.
이 모든 것이 그윽하고 아름답다.

산책을 마치고 나도 시간이 아긋하다.
나 같아도 다른 때 같았으면 이 밤중의 시간을 무슨 일을 한다,
글을 쓴다, 뉴스를 시청한다, 인터넷을 한다고 바빴을 터다.
이번 오랜 순유(巡遊)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여행을
떠남과 함께 내던져지고
저녁시간의 여유가 오직 나 자신과 함께 존재하는
깨어남의 공간으로 바꾸어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이번 여행의 투명하고도 오롯한 아름다움이 되고 있다.
잠들기 전의 투명한 깨어있음은 밤과 잠자는 시간 내내 이어지고
우리의 잠을 순수하고 청연하게 만든다.

잠들기 직전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거나,
좋지 않은 뉴스를 듣거나, TV를 켜두고 자거나 할 경우는
그 무의식적인 혼란이 밤중 내내 이어지고
때때로 그것은 우리의 꿈까지 쫓아와 의식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런 밤을 보내고 새벽을 맞이해보라.
예민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 찌뿌드하고 개운하지 않은 의식의 흐려짐을 경험할 것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다음 생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듯,
잠들기 직전의 의식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새벽녘 오랜 계곡의 투명한 폭포수처럼
잠들기 직전의 깨어있는 현존은
밤과 새벽 뿐 아니라 그 다음날의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곤 한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듯
마음을 예민하게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 차이를 느낄 것이다.

오랜 인도 여행에서 보다
오히려 지난 안나푸르나에서,
그리고 이번 쿰부 에베레스트 순례에서
저녁시간의 명징함이 더욱 빛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 깊은 의식의 빛이 점차 매 순간순간으로
그 투명함을 전달해 주는 듯하다.
낮 시간 동안 걷는 걸음걸음 사이에,
오르막을 오르는 그 숨가쁜 호흡 사이에 맑은 공간이 생겨나고
그 하나 하나의 발자국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한 발걸음의 아름다움, 한 순간의 온전함,
매 현재 현재의 전체성이 이론과 생각을 너머
저 희말라야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가듯
조금씩 높고 깊은 내면의 희말라야로 가까워 옴을 느낀다.

명상도 일상 속에서의 그것과
여행 속에서의, 자연 속에서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래서 저 티벳의 밀라레빠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된 것’이라고 했던 것일까.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