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머문 남체에 벌써 정이 든 것인지,

발걸음을 떼려니 꽁대와 남체바자의 풍광이 시선을 잡아 끈다.

 

 

 


 

 

매 순간 순간의 현실에 나를 활짝 열어 둔다.

진정 열려있음이란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진하게 느낀다.

이 대자연의 모든 것이 그 어떤 걸러짐도 없이 파도치듯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것들을 받아들여 충분히 느끼는 것 뿐이다.

 

남체에서 텡보체(Tengboche, 3860m)까지의 첫 번째 구간은

어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보았던 바로 그 길로

두세 시간 동안 계속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웅대한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아! 이것은 자연이 만들어 내는 장엄한 예술작품이요

엄중한 오케스트라이고 설산의 대서사시다.

 

발걸음과 호흡과 눈에 비친 대자연이 투명한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되어 걷는다.

아! 그렇다. 이것은 걷는다기 보다는 그렇게 하나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설산을 배경으로

하얀 설산과도 같은 스투파(탑)가 우뚝 서 있다.

 

 

 

 

여행자는 길을 걷다

스투파 앞에서 예를 올린다.

 

이 장엄한 스투파 앞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다.

종교의 틀이라는 것조차 조잡한 하나의 형식이 아닐까 하는,

그리하여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장대하고 너른 사유가 희말라야에서는 저절로 피어오른다.

 

아마다블람과 스투파의 미묘한 조화.

 

 

 

 

왼편으로는 에베레스트를

오른편으로는 탐세쿠, 아마다블람, 눕체 등의 영봉을

함께 걷는 구도의 도반처럼 곁에 두고 푸르른 하늘길을 걷는다.

 

 

 

 

 

한 두 시간 쉬엄 쉬엄 걸으면 사나사가 나오고,

두어 채의 롯지와 기념품 판매하는 곳에 이른다.

잠시 롯지 마당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롯지의 툭 트인 전망을 바라본다.

 

 

 

 

 

이 곳까지 함께 걸어 온 많은 여행자들이

이 곳 사나사에서부터 고쿄로 가는 팀과 에베레스트 방면의 팀으로 나뉜다.

 

사나사를 지나다 보면 좌측 오르막길로 쿰중 가는 길이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고쿄와 에베레스트의 두 갈래 길이 나온다는 것을 안내하는

반가운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희말라야를 다니면서 어지간 해서는 갈림길이라도 이정표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이정표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갈림길임을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위쪽 산 중턱을 가로지르는 오르막이 고쿄로 가는 길이고,

아래쪽 숲길이 에베레스트와 칼라파타르로 가는 길이다.

 

남체에서부터 사나사를 지나 점심을 먹을 곳인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까지는

평탄하거나 완만한 내리막이다.

가벼운 발걸음이 마음까지 경쾌하게 만든다.

설산 봉우리 중에도 단연 눈에 띄는 아마다블람을 가까이 곁에 두고 함께 걷는다.

 

 

 

 

 

아! 비로소 나는 지금 이 길 위에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바람도 없이

그저 그저 걷고 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것들이 놓여지고

지금 이 순간 내 앞에는

바로 다음의 발걸음과 한 호흡의 들숨과

눈앞에 펼쳐진 하이얀 산맥의 현존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아! 이 느낌!

이 현존,

모처럼 잊혀졌던 그 무언가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존재 위를 흐른다.

 

푼키텡가 조금 못 미처 타싱가(Thasinga, 3600m)를 지나니

동네 아이들이 숲속을 놀이터로,

꺾어진 나뭇가지를 시소삼아 올라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

 

 

 

 

 

마을길을 지나 설산 초오유에서 발원한 두드코시를 지나는 다리를 건넌다.

두드코시는 우유란 뜻의 두드와 강이란 뜻의 코시가 합쳐진

우유빛을 띄는 빙하 녹은 물로

빙하물은 미세한 광물입자들을 함유하고 있어 빛과의 산란작용에 의해

우유빛 바탕에 푸른 에머럴드 색을 동시에 띈다고 한다.

 

 

 

 

이 두드코시가 언뜻 보기에는 그저 작은 산골의 골짜기 같지만,

이 강이 흘러 흘러 인도인의 영혼의 고향, 갠지즈강으로 뻗어나가고

최종적으로 인도양까지 흘러들게 되는 장대한 역사를 만들어내는 발원지인 셈이다.

 

 

 

 

 

두드코시를 건너 푼키텡가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자리가 꽉 찬 터라 저쪽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계시는 지긋한 어르신께

옆 자리 함석을 여쭙는다.

 

그런데 지금까지 산에서 한 번도 보아오지 못했던 한국분이 아닌가!

“한국 분 아니세요?”

하는 물음이 얼마나 반갑던지.

춘추가 60이 넘으셨는데 이렇게 정년 퇴직 후에 산으로 산으로 떠도신다고 한다.

 

퇴직 후 지난 몇 년간 세계 도처를 여행하시다

요즘은 네팔의 설산에 반해 안나푸르나, 랑탕에 이어 이렇게 에베레스트까지 오시게 되었다고.

희끗희끗한 연세에 홀로 저렇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물론 그만한 경제적 여유도 있어야 하니

특별한 소수 특권층이나 가능한 것이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도 주위에 있다고 하던데,

이 어르신의 대답은

“물론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돈이 있어도 못 오는 사람도 많고,

또 조금만 절약하면 인도나 네팔 같은 나라는 한국에서 지내도 그 정도의 돈은 쓸 정도”

라고 항변하신다.

 

아내나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그 험한 산에 힘들게 왜 가느냐?”고 한다네.

 

그런 거 보면 모든 것은 제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아무리 좋은 것도 저 싫다면 그만이다.

 

 

 

 

그래서 때때로 삶을 힘겨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방법 같은 것을 알려줘도 그것이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관점과 견해와 좋고 싫은 어떤 견고한 틀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진정으로 길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비우고 활짝 열 수 있어야 한다.

가슴의 창이 닫겨 있으면

그 창으로 지혜도, 행복도, 풍요로움도 들어갈 수 없다.

 

닫혀진 마음에는

늘 자신의 기존 관점이나 색안경으로 걸러진 선택적인 것들만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갈 때는

언제나 빈 마음이어야 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려 놓고

‘내가 옳다’고 여겨 온 모든 울타리를 걷어 치우고 친견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기 고집, 아상과 아견을 꽁꽁 움켜쥔 채 찾아간다면

붓다나 예수를 만날지라도 거기에 소통과 참된 이해는 깃들지 않는다.

그 때 우주는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늘 충만한 우주의 도움을 당신은 스스로 닫음으로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인연 없는 중생은 붓다고 구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잠시의 대화를 뒤로한 채

점심을 마치신 어르신은 포터와 가이드를 영솔하며 먼저 길을 나서신다.

점심을 먹고 이 곳 롯지에서 파는 상점을 잠시 돌아 보며 숨을 돌린다.

 

 

 

 

 

이 곳 푼키텡가부터 텡보체까지는

무려 고도 600미터를 단숨에 올라야 하는 가파른 오르막 구간이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오른 무릎의 통증은 여전하다.

오르막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어 오르며

오른 무릎으로 주의력을 옮긴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찌릿찌릿한 느낌이 그곳에서 감지된다.

그것을 탓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빨리 나으라고 재촉하지 않고

다만 그 작은 통증을 가만히 지켜보며 걷는다.

 

지켜보는 동안 그 통증은 사실 ‘통증’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저 단순한 어떤 느낌일 뿐이다.

공연히 그 하나의 생생한 느낌에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렇게 걷다보면 그것은 싫은 어떤 느낌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오히려 지켜보는 가운데 생기로운 생명력 같은 무엇을 느끼게도 되고,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은 것을 느끼게도 된다.

그 하나의 통증이 오히려 명상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이제 본격적으로 설산의 초대를 받는 것인가 싶어
마음을 다시한번 추스르며
삼보일배를 올리는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조붓한 발걸음을 옮긴다.

탐세쿠, 캉테가(kangtega) 영봉들이 연이어 마중을 나오고
설산의 빙하가 녹아 흘렀을 남빛 계곡물이 길벗이 되어 흐르며,
이 믿기 힘든 풍경 위로 그림 같은 아름다운 계곡마을이 펼쳐진다.

아! 이것은 한 폭의 그림,
어찌 이 속에 애살스럽고 어루꾀는 천박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겠는가.
그를 애워싸고 있는 둘레 환경은
곧 자기의 분신처럼 업의 투영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 사기꾼이 많다면
그것은 곧 내 마음에 사기의 업이 있는 것이고,
내 주변에 나를 돕는 이들이 많다면
나의 마음 한 켠에 이타심이 춤추기 때문이다.

내가 살면서 만날 수 있는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상황도, 그 어떤 문제도, 그 어떤 환경도
사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외적으로 투영된 것일 뿐이다.

내 안에 없는 것들은 내 앞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은 일터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지옥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 그곳은 천국일 수도 있다.
마음이 세상을 만들어내기 때문.

똑같은 조건, 똑같은 세상 속에서
어떤 이는 지옥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자유를 경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 하나가 바뀌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이 바뀌면서 세상 자체가
그 어떤 물리적이고 직접적인 개벽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라,
내 마음에 비친 세상이 바뀜을 의미한다.

똑같은 물을 독사가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면 독이 우유로 바뀌고 불행스럽던 현실이 행복으로 바뀐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주변 환경은 그 속의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그 주변 환경을 바꾼다.
모든 것은 상의상관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이 사는 곳은 그 풍경도 아름다워지고,
아름다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풍경 덕분에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그것이 바로 신토불이의 소식!

큰 산이 큰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반대로 큰 사람이 그 산을 위대한 산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큰 산, 명산, 명당 자리에서 위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 산에 위대한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그 산이 거꾸로 성스러워지는 것.

이 아름답고 성스러운 쿰부 계곡 자락에
어찌 마구잡이로 시류에 휩쓸린 사람들이 깃들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와중에도 희말라야의 성스러운 품어줌과 길들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에고와 아집의 길에서 길을 잃은 영혼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
세상 어디에나 돌연변이는 있게 마련이니까.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이 가지는 또 다른 역설이요,
어쩌면 그 또한 꼭 필요한 더 깊은 차원의 다양성이고
삶이라는 연극을 위한 필수적인 신의 장치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밴커(Bankar)와 몬조(Monjo) 마을을 연이어 지난다.



마을을 정확히 관통하는 마을길을 따라 걷자니
아기자기한 집들과 지붕 위에 흩날리는 룽다,
그리고 집집마다 작은 돌담을 쌓아올려 밭농사를 짓는 모습들이
새삼스런 진풍경으로 다가온다.

 



아침 햇빛에 반짝이며 빛나는 배추잎사귀며
흡사 상추나 쑥갓을 같은 소담한 초록빛 채소들이
어쩌면 저렇게 싱그러울 수 있는지,
저 평범한 채소들조차 이 희말라야 대자연의 품 속에서
그 기운을 먹고 자란 것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저들에게서 마구마구 생명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다.

 

 



나른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집 앞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지나치는 여행자들을 보며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침밥을 짓는 것인지
집집마다 하얀 연기를 뿜어올리며
여행자의 가슴에 고향의 정감을 선사하고 있다.
머얼리 하얀 구름 테를 두른 캉테가가 올려다 보이는
몬조 마을의 풍경이 선명하다.
그림 같은 마을 풍경들이 계속된다.

 



몬조 마을을 지나서 조금 더 걸으니
조르살레를 조금 못 미쳐
퍼밋과 팀스를 체크하는 조르살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팀스(TIMS, 트레커 정보운영 시스템)는
카투만두에서 미리 준비 해 와야 하고
퍼밋(Permit, 입장허가서)은 이 곳에서 직접 발급을 받을 수 있다.
잠시 팀스와 퍼밋을 체크하고 숨을 돌린 뒤에 곧장 조르살레로 향한다.



이른 점심을 조르살래의 빛이 잘 드는 식당에서 가볍게 먹고
오후의 여유를 즐긴다.
부서지는 햇살이 온 세상을, 순례자의 얼굴을,
한 포기 이름 모를 풀을 향해 축복을 내린다.
이 투명한 여유와 평화로움을 시끌시끌한 식당 앞 뜨락에서 가만히 누려본다.

지텐이 너무 이른 식사라 조금 더 가다가 점심을 먹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내 말에
앞으로는 남체까지 전혀 밥 먹을 수 있는 마을이 없다고 하더니
역시 점심 이후에는 그동안의 나지막한 계곡이 완만함을 뛰어올라
폭포 같은 거친 가파름으로 바뀌더니
인간의 길 또한 가파른 오르막으로 바뀌고 있다.

 



호흡에 발걸음을 일치시키며
한 숨 한 숨 지켜보는 걸음걸이로 오르막을 오른다.

이 높은 계곡 중턱에 아찔한 출렁다리 위로
사람도 건너고 야크도 건너고 룽다와 산골 시린 바람도 함께 건넌다.

 



그 오금이 저려오는 절벽 위 출렁다리를 중간 쯤 걸어갔나 싶은데
저 쪽 반대편 끝에서 야크의 육중한 행렬이 이어지는게 아닌가.
이 비좁은 흔들다리 위에서 야크와 마주치는 운명이라니.
다리 위로 펄럭이는 룽다가 점점 거세진다.



계곡의 바람치고는 너무 거칠다.
아슬아슬 다리를 건넜는데 이번엔 이쪽 야크 떼와
조금 더 규모가 큰 저쪽 야크떼가
내 바로 앞에서 비좁은 길을 앞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나부터 살고 보자 싶어
그 가파른 산자락을 숨도 안 쉬고 아슬이 야크떼를 피해 뛰어오른다.

 






그리고 이윽고 계속되는 오르막길.



천천히 천천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발 한 발만을 숨과 함께 내딛다 보니
어느덧 남체의 그림 같은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이얀 설산으로 둘러싸인 옴팍하게 부채꼴을 이루며
마치 야외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쿰부지역 제일의 마을이자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의 전초기지,
바로 남체바자다.

마을의 입구에는 티벳과 가까운 마을임을 알려주듯
티벳불교의 스투파와 스투파 주위를 감싸며 휘날리는 룽다와 타르초가
여행자를 반기듯 맞아 준다.

가려고 했던 시설 좋고 값도 싸고 음식 맛도 좋다던 유명한 롯지는
오전에 이미 꽉 차고,
조금 허름하고 오래되었지만
지텐의 친구가 운영한다는 롯지가 있어 그리로 방을 정한다.

이 산중에서 하룻밤 싱글룸이 200루피,
지텐 친구라고 특별히 할인하여 150루피에 얻었다.
약 2,000원 남짓하는 돈이니 시설은 허름하지만 가격대비 재법 만족스럽다.
이렇게 거의 모든 롯지가 방값은 200~300루피를 오르내리지만
한 끼 밥값도 똑같이 200~300루피를 심심치 않게 넘어선다.
그도 그럴 것이 방에는 침대 하나 달랑, 희미한 형광등 하나가 전부다.
난방이며 전기 충전시설, 화장실이나 욕조는 꿈도 꾸지 마시라.

물론 500~600루피를 생각한다면
몇몇 고급 롯지에서 묵으며 욕실 겸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마음껏 전기 충전도 하며 호화롭게 묵을 수도 있다.
하기야 그래 봐야 우리 돈으로 7,000~8,000원 정도의 돈이지만
이 곳 네팔에서는 손을 덜덜 떨며 쓰기 어려운 돈에 속하다 보니
길 위의 여행자에게도 마찬가지의 큰 돈이 되고 있다.

작은 방에 짐을 풀어 놓고 잠시 남체바자의 시내를 돌아본다.
이 산중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마을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제법 큰 마을이다.
어떻게 이 많은 건물들과 상점들과 다양한 물건들을 도로도 없는 곳에서
그것도 3440고지나 되는 고산 마을에 이렇게 지어다 날랐을까를 생각해 보면
인간의 능력과 의지가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길 없는 곳에, 그것도 걸어서 이틀을 꼬박 걸어 와야 하는,
그것도 루클라에 공항이 없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투만두에서 버스로 이삼일을 달려 와야 루클라에 도착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기적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체바자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
주로 트레킹 관련 장비를 팔거나 대여해 주는 상점들이 많고,
여행자들이 많다 보니 여행자를 위한 편의시설들도 제법 있다.
제과점이나 빵집, 에스프레소 커피 카페에, 인터넷방,
국제전화가 가능한 인터넷 전화방, 책방, 편의점 같은 마트도 있고,
여행자들에게 현지의 티벳 전통 물품들을 파는 기념품 가게나 옷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점과 마트가 즐비하게 늘어 서 있다.



잠시 마을길을 따라 언덕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니
남체바자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건물들이 주로 롯지며 게스트하우스인데,
현대식으로 또 유럽풍으로 아름답게 지어 놓은,
그것도 최근에 지었을 법한 최신식 건물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색색의 롯지들이 선명하고도 아름답다.
이런 풍경은 사실은 매우 낯선 풍경이어야 하는데
내 눈에는 낯설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
아주 친숙하고도 설레는 친근한 마을풍경으로 다가온다.




 



산그림자가 일찌감치 슬금슬금 기어오더니 금방 마을을 뒤덮는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얕은 집 지붕 위로 야크똥과 함께
바로 그 곁에서 무슨 야채인지 나물인지를 말리는 풍경이 한눈에 잡힌다.
먹거리 바로 옆에 야크똥을 함께 말리고 있는 풍경이 낯설지만
인도와 네팔을 한두달 다니다 온 나로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진다.

 


다시 마을로 내려오니 어둠이 완전히 내린 작은 시내 상점들이
모두들 흐릿한 불빛을 켜 놓고 막바지 여행객들을 호객하며
여전히 장사를 이어가고 있다.

여행자들도 모처럼 큰 마을의 시내구경에
흥미로운 눈빛으로 거닐며
이런 저런 필요한 것들을 구입도 하고, 산책도 하고,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들을 빌리기도 하는 듯 밤풍경이 제법 활기차다.

 

 

 

 

 

 

 

 

 

다시 롯지로 돌아오니 롯지 식당이 여행자들로 꽉 차 만원을 이룬다.
그야말로 한 명 끼어 앉을 자리가 없다.
이럴 때는 지텐의 친구가 경영하는 롯지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텐의 친구인 20대 초반의 롯지 사장이
지텐 친구면 자신에게도 친구라며 의외로 후한 대접을 해 준다.

자신의 안방을 내어주면서
그곳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
카메라 밧데리 충전비용이 한 시간에 200루피인데
모든 밧데리와 핸드폰, 전기기구를 몇 시간이든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특별 대접도 받는다.

그 뿐 아니라 내 작은 침낭을 보더니
두툼한 이불을 두 개나 가져다 주면서 따뜻하게 자야 한다고 말해 주는데
이 작은 관심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고맙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저녁 공양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뛰어든다.




Posted by 법상




 

밤새 잠을 설쳤다.
생각지 못했던 추위 때문이다.

팍딩 마을 자체가 계곡 바로 곁에 위치한데다가
높은 산 아래 그늘진 곳이라 그런 것인지,
본래가 안나푸르나에 비해 이곳이 더 추워서 그런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2주쯤 전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4,000고지 이상에서도
그리 큰 추위를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추위가 이번 산행의 가장 큰 관건으로 떠올랐다.

2,600고지 밖에 안 되는 이 낮은 곳의 추위가 이 정도면
앞으로 걸어 올라5,000고지 이상에서 며칠을 묵어야 하는 나로서는
달리 다른 고민 할 필요 없이
남체에서라도 겨울 침낭을 빌리는 것 외에는
뽀족한 다른 수가 없어 보인다.

8월말 한국에서 출발하면서 봄여름용 작은 침낭을 하나만 가져 온 데다가
그것 하나만으로도 안나푸르나에 올랐을 때는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기에
여기도 괜찮겠지 하고 카투만두에서 침낭을 안 빌려 왔더니
그 예상이 크게 빗나간 것이다.

팍딩에서 남체까지는
쉬엄쉬엄 걸어도 3~4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언 몸, 언 손을 따뜻한 밀크티 한 잔과 가벼운 스프로 녹이고
이른 아침 길을 나선다.



어젯밤을 배회하던 바로 그 거리를 가로질러
팍딩 마을을 뒤로 하며 길을 걷는데,
길 좌우로 우뚝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선연한 기상이 시선을 압도한다.

 



계곡 옆 길을 따라 걷는다.

 



밤새 밖에서 노숙을 했을 야크들도
짐을 잔뜩 등에 인 채 출발 준비에 한창이다.

 


어제와 같이 계곡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들이,
아니 롯지와 집들이 하나 둘씩 모여 있다.
출렁다리로 계곡을 두 번 건너고
몇몇 마을과 게스트 하우스를 지난다.



새벽빛에 반짝이는 꽃들과 인사를 나눈다.
아직은 낮은 고도라 발아래 작고 소박한 꽃들이 소담히 피어올랐다.

 

 

 

 

 

 

 

한참을 걷자니 돌을 깨 집을 짓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 쪽에선 힘줄 굵은 사내들이 모여 앉아 거친 돌들을 깨어 다듬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 돌들을 모아 벽채를 세우고 있다.
그 모습이 햇살에 따스히 반사되어 아름답고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모든 일은 성스럽다.
위대한 일과 하찮은 일이란 인간의 잣대일 뿐,
그래서 오히려 위대하고 유명하던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다음생으로 가면
지옥의 동기동창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말이 나왔다.

위대함과 큰 일 속에서는
더욱 아상(我相)과 아집(我執)이 개입되기 쉽기 때문이다.
대단한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엄청난 크기의 욕심과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큰 업에는 큰 과보가 따르는 법.

천상세계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으로,
이를테면 먹는 것, 입는 것 같은
어찌보면 작고 유치한 어린이나 할 법한 일들로 다툰다고 한다.

업이 무겁지 않다보니 큰 규모의,
이를테면 사업 확장을 위해 엄청난 돈을 대출받거나,
진급을 위해 타인을 음해하거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치거나,
땅을 몇 만평씩 사서 리조트를 짓거나,
산을 깎아 골프장이며 스키장을 짓거나,
어디 어디에 투자가치가 좋은가를 살펴 투기를 하거나,
사업을 국제적으로 키워 가거나,
명성이 온 세계에 드러나거나 하는 등의
무거운 고민거리가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업이 가벼운 사람들은 고작해야
기본적인 의식주 같은 사소한 것이 크게 보인다.
그래서 선방의 스님들은 저 스님이 나에게 얼마를 크게 사기쳤다거나 하는
그런 걸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먹는 것 하나로 유치한 투덜거림을 일삼기도 한다.
아주 원초적이고 가벼운 것들이 작지만
그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옛날 부처님의 제자 아난다는
꽃밭에서 꽃향기를 맡았다는 이유로 선신(善神)들의 꾸중을 들었다.
아난다가 발끈하여 저 많은 사람들은 꽃을 꺾고 꽃밭을 해집는데도 왜 가만히 놔두면서
나는 향기 맡은 것을 가지고 그리 크게 꾸중을 하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업이 무거운 자들에게는 그 무거운 업에 비해
꽃을 꺾는 정도의 업은 죄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지만,
업이 가벼운 수행자에게는 그 어떤 탁한 악업의 구름이 없어 투명하고 맑기 때문에
작은 죄업도 크게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큰 일 보다는 작은 일,
작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몫이 있는 법이니
자기 그릇에 주어진 몫을 그저 받아들이고
집착과 욕심 없이 행할 수 있다면
아무리 큰 일을 할지라도 그것은 흔적 없는 위대성이 깃든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직업’ 자체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행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업적이나 성취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이 아집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그 성취의 과정에서 아무런 무리가 없고,
타인의 고통 위에 기초하지 않는
그런 자연스러운 일을 행할 것이다.

그런 일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법계(法界)의 흐름을 타고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무위(無爲)의 바탕에 기초한다.

그래서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 일을 행하면서 억지와 개인적 욕심으로 무리하게 추진되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주변 환경의 흐름을 타고,
주변 법계의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도움을 받으면서
힘들이지 않고 너무 과도하게 애쓰지 않고 진행되는 일,
그 일이야말로 진리의 일이요 신이 나에게 부여해 준
이번 생에 내가 가야 할 나다운 삶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이 은연중에 나를 드러내고 과시하며
아상을 강화시키려는 삿된 목적에 동조하는 일이라면
당장에 그 일을 그만두거나,
그 일의 흐름을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이타적인 자비로써, 무아의 실천으로써, 또 깨어있음으로써 바꿔 나가야 한다.

자기 손으로 자기 집을 짓고 고치고 보수하며 산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본래적인 일인가.
네팔의 시골마을을 다니다 보면 자신의 집 뒤안에
누구나 집을 짓고 고치는데 필요한 공구함이나 창고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다.
또한 젊은이들이 직접 톱질하고 켜고 짜맞추면서
나무를 손질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지붕을 고쳐나가는 풍경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지구상의 모든 숨을 가진 생명은
모두가 제 집을 제 힘으로 짓고 고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생명 고유의 본능적인 것이지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새삼스러운 본연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가.
유일하게 인간의 세계에서만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지 못하며,
자기가 먹을 먹거리를 제 힘으로 구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족이 입고 살 옷을 제 힘으로 얻지 못한다.

의식주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래적인 것을
오직 인간들만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 본래적인 차원에서 무언가 벗어나 있다는 것조차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돈이 다 해 주는데 무슨 상관이람!”
요즘 같은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세상에서
무슨 얼토당토 않은 논리를 펴는가 할 것이다.
바로 이 분업화와 전문화가 이 세상을 파괴하고
인간 본연의 창조적이고 자발적이며 자연스러운 삶의 기초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을 걸으며 내 얼굴에 미소를 만드는 것은 꽃들과
진하다 못해 새까맣게 푸른 하늘과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나무와 계곡 물들 뿐인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
새까만 얼굴에 발그라니 익어간 볼살,
줄줄 흘러내려 손등으로 훔친 자국이 역력한 콧물 자국,
오래 씻지 않았거나 빗지 않은 자유분방한 머릿결과 살결,
기워 입고 덧데입고 오래도록 어머니의 손길로 오히려 예스러워진,
아마도 몇 대를 물려받아 입었을 법한 오랜 누더기 웃옷하며,
이 성스러운 설산의 기운을 닮은 반짝이는 눈빛 속에서
자연과 하나 된 듯한 천연의 또 다른 자연을 만나는 것이다.

 

 

 

 

 

 

 

 

 



저 어린 아이의 투박하지만 살풋하고,
열퉁적지만 오달지고 선명한 눈빛을 보라.
부디 저 천진함이 먼저 슬어 간 어른들의 시그러진 정신과
세상의 어리석음을 닮지 말기를.

아이들이 뛰어노는 마을 한 켠 귀퉁이 낡은 책상 위에
나른한 눈빛으로 아이들을 지켜보다가
낯선 여행자의 카메라를 보고 깜짝 놀라는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코스모스는 파아란 하늘을 배경으로 옆 집 담장 곁을 하늘거리며 서 있다.

 


여행자들의 발길은 쉼 없이 흐른다.
어떤 여행자는 그저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만이 이 여행의 목적인 양
끊임없이 양 발로 땅을 퍽퍽거리며 내치며 걸어가고,
또 어떤 여행자는 하늘도 바라보고 아이들의 눈빛도 바라보고
느릿느릿 세월아 네월아 하며 발걸음을 즐기고 걷기도 한다.

이른 아침 팍딩에서 함께 출발했던 두 커플인 듯 보이는 한 무리의 여행자가
꼬질꼬질한 여자 아이에게 막대사탕을 하나 건네더니
아예 짐을 풀고 쉬면서 이내 그 집안까지 둘러보고는
아이와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삶 속에서, 또 이런 자칫 팍팍해지기 쉬운 순례길에서
잠시만 시선을 평범한 곳에 고정짓고 지켜보다 보면
이렇듯 일순간의 작은 웃음과 여유가
밋밋한 여행길에 맑은 샘 같은 청량함을 선사하곤 한다.
미소가 있고, 웃음이 있는 풍경은
바라보기만 해도 정겹고 살갑다.

그리고 또 발걸음은 계속된다.



우뚝 우뚝 솟아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진한 하늘색과 어우러져
마치 동화 같고 소설 같은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 푸르른 하늘색을 배경으로
이번에는 그림같은 높은 폭포수가 길 바로 옆으로
시원한 노랫소리를 연주하며 떨어진다.
이 이른 아침, 사뭇 찬 온도 속에서도 폭포 아래 작은 샘터 호수에는
벌거벗은 아이들의 물장난이 흥미롭다.

 



그리고 바로 그 인상적인 폭포를 지나자마자
건너편에 어둡게 드리워져 있던 검은 그림자의 앞 산이 툭 트이면서
그 뒤로 숨어 있던 하이얀 설산
탐세쿠(thamserku)가 거짓말처럼 순간 눈 앞에 솟아올랐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