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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달연 예쁠아 님이 제게 보시해 주신 작품입니다]

우리는 흔히 베풂과 나눔을 실천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이렇게 베풀고 나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고통받는 이를 다 구제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이 세상의 어느 한 귀퉁이
아주 작은 마을 고작 한두 개,
내지는 몇몇 사람에게 밥 몇 그릇 나누어 주거나,
교육을 뒷바침해 주거나,
아무리 도움을 준들 겨우 그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하고 만다.

아무리 우리가, 내가 열심히 돕는다고 한들
그것은 너무나도 미약하여
이 세상을 밝히는데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 같아
좌절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내가 베푼 아주 작은 나눔의 행위가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나눔과 베풂일지라도
이 전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한 줄기 커다란 빛과 사랑으로써
우주법계에 기록되고 공명하여
더 많은 자비와 나눔으로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

그 어떤 작고 보잘것 없는 보시일지라도
그것은 우주법계를 변화시킨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고도 부드럽게
이 세상을 바꾸어 내는 무한한 권능을 담고서 말이다.

왜 그럴까?
내가 한 것은 고작
제3세계 어린 아이 한 명을 도운 것 뿐인데,
네팔이나 미얀마의 학교를 위해
고작 1만원을 베푼 것 뿐인데,
법보시 서적 고작 몇몇 권을 베풀었을 뿐인데,
그것이 어떻게 이 우주법계를
강력하게 자비의 빛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질의 차원이 아닌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질적 차원에서 내가 베푼 것은
고작 몇 만원이고,
한 두 명을 도운 것 뿐이고,
자원봉사를 며칠 한 것 뿐이지만,
정신적인 차원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한 사람을 도울 때
뿌듯한 행복감과
도와줄 수 있었다는 기쁨과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느낌,
나의 작은 보시가 누군가를 배부르게 했다는 풍요의 느낌 등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행복한 느낌과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도울 때 중요한 것은
사실 물질적인 나눔에 있다기 보다는
도울 때의 그 행복한 느낌, 풍요로운 느낌,
상대방을 도울 수 있었다는 자신에 대한 대견하고도 뿌듯한 느낌,
누군가를 내가 돕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다는 귀한 감정
바로 그 느낌과 감정에 있다.

우주 법계가 원하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풍요와 행복과 나눔의 정신이 깃든
그 마음인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물질적 보시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시한 마음,
베풂의 그 풍요의 정신,
나눌 수 있다는 그 넉넉한 마음을 받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그 풍요와 나눔과 보시의 마음을 받아들여
다시금 이 우주법계 곳곳으로 공명시키고
더 많이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간 보시의 마음, 나눔의 마음은
우주법계라는 무한한 정보장, 불성의 장을 거쳐
이 우주법계 끝까지, 세계 곳곳에까지,
저 아프리카의 굶주린 모든 어린 아이들의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인구의 정신 깊은 곳에까지
그 마음을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군가가 보시를 행할 때,
사실 그 마음은
이 우주 전체에까지 퍼져나가
온 우주에 영향을 미친다.

심지어 전 세계 모든 인구의, 유정 무정의 전체 생명에게
그 마음은 비국소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의 정보장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행한 보시의 순수하고도 귀한 마음은
온 우주의 모든 세포, 공간, 존재 전체에
정보로써 입력을 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법계는
우리의 보시 액수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시할 때의 그 마음을 기억하여
그 마음의 정보를
온 우주 끝까지 비국지적인 정보장으로써
펼쳐 내는 몫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신 한 사람의 보시는
우주적인 것이다.

당신 한 사람이
오늘 행한 아무리 작은 액수의 나눔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작을 수가 없다.
그것은 결코 잊혀질 수 없다.
그것은 곧장 이 우주 끝까지 전달되어
온 우주로 공명이 되고,
모든 생명에게 공명이 되어 공동의 자산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더없이 고무적인 것은,
바로 그 보시의 마음들이 모이고 또 모이게 되었을 때
이 우주법계는 단순한 수치적인 것을 넘어서서
여러분이 보낸 보시의 마음과 느낌과 감정들을
그대로 우주 곳곳으로 반사해 낸다는 데 있다.

우주는 우리의 보시의 마음을 받아서
고스란히 이 우주로 그 마음을 반사하고 반영하여
더 많은 행복과 나눔과 보시의 정신이
이 우주 곳곳에 뿌리내려지도록 도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시의 액수가 아니다.
우리가 보시할 때 느낄 수 있는 그 느낌, 감정,
고양된 기분, 풍요롭고도 뿌듯한 그 마음,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특히 가르침을 보시하고, 법문을 들려주고,
지혜의 말씀을 나눔으로써
상대방을 영적인 진보와
수행의 성숙으로 이끄는 토대를 베풀어 주었다면
그것은 사소한 물질적 베풂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영겁을 이끄는 정신적인 완성의 토대가 될 것이 아닌가.

사실이 이러할진데,
어찌 가진 것이 별로 없다고
보시하고 나누며 베풀지 않을 것인가.

별로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나누는 순간의,
베푸는 바로 그 순간의 고양된 느낌,
거기에 있는 것이다.

보시는 또 다른 보시를 불러오고,
보시는 또 다른 풍요로움을 불러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당장에
이 우주를 위해
내가 행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보시와 나눔과 사랑을 베풀라.

힘겨워하는 이웃에게,
친구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결코 그 친구와 나 사이의
개별적인 관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행한 그 따뜻한 사랑의 마음은
우주 전체에 따뜻함과 사랑을 가져다주고
공명해주고 반사해 주는 역동적인 자비의 힘이 될 것이다.

나아가 내가 행하는 하루 삶의 모든 순간들이
조건 없는 사랑, 무주상의 보시가 될 수 있도록,
이 세상을 밝힌다는 고귀한 발원의 행위가 될 수 있도록,
단 하나의 행위와 말과 생각에서도
보시와 나눔을 실천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법상



[질문]

 이틀전 새벽예불을 보고 절문을 나서는데 
낯익은 분이 맨발에  주저앉아 절망을 남편에게 마구 쏫아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산길을 돌아 내려오며 만감이교차  올 것이 와나보구나 하는 직감이었습니다
이분들을 두번 보았습니다 .
한번은 절 문전을 기웃대며 바라보기만 다가가서 법당을 들어가 보시라니까  쓸쓸한 웃음만...
두번째는 남편께서  언제 들어가도 좋으냐고 물어오더군요.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시라고.....
땅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모습,남편이 어찌 해야 할찌 기로에 서있는 모습 에 
점점 죽음의 늪에서 포기 하는 상태를 느낄수 있었습니다.  
절을 가면  무언가 위안을 받기에  그럼에도 절 문턱을 넘지 못하는 애처로움,,,,

그분들의 모습에   나는 살아있음에  감사. 건강함에 감사.
나의기도가 탐진치 삼독에 물들지 않기를 발원했습니다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함께하길  이틀내내 마음이 쓰였습니다
오늘 새벽예불을 보고 산 모퉁이를 내려오는데 만났습니다
차 앉에 기대어 축 늘어져있는 상태로 컵라면을 들고
한젓가락 입에 넣는 힘없는 애처로운 모습 살기위해  먹어야 한다는 그모습에  
나도 모르게 한없이 눈물이 나도 모르고 흘렀습니다.
과감히 도와드리고 싶다고 전화번호를 받아냈습니다

내일은 그분을 만나  병마와 싸우는 부인을 힘이 되어주고자 방문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까지일지 모르지만 그 분이  가는길에  한 번이라도 
법당의 부처님을 뵙게 해 주고 싶습니다
스님 , 망설임 없는 결정에 다소 긴장이 됩니다
어떤 자세로 대하여야  하며 혹여   저로 인해 상처않받고
마음편히 가슴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수있게 할 수있을까요?


[답변]

예... 아름다운 마음을 내어 주셨네요.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어렵고 힘겨운 분들을 만났을 때,

눈물이 나오고, 함께 가슴 아프고,

그럴 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첫마음은 누구나

'돕고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 투명한 사랑과 자비의 마음 일어남을

외면하지 말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우님, 아주 잘 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돕고싶은 마음이 일어나다가도,

그 다음에 연이어 일어나는

아상에서 기인하는 생각, 판단, 분별, 과거를 개입시키기 때문에

얼른 저질러 돕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법우님처럼 그렇게 탁 저질러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우리 마음은

또 다시 아상에 기인한 생각, 분별들이

끊임없이 솟구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부터가 제대로 된 생활 속의 수행을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순간을 맞는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그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생활 선원이요, 선방이 아닐까 싶습니다.

 

잘 한 일일까?

너무 성급한 일은 아니었을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 도움을 순수하게 여기지 않으면 어쩌지?

오히려 저들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언제까지 도울 수 있을까?

끊임없이 도움을 주지 못할 바에는 도움을 주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

 

하면서 끊임없이 분별이 올라올 것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분별들을 잘 지켜보면서,

놓아가는 것이야말로

생활 속의 수행이고 명상이며 선인 것입니다.

 

그런 분별들은 잘 지켜보고,

탁 내려놓으세요.

내려 놓는 것이 잘 안 되면,

내려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아, 이런 마음이, 이런 생각이 또 일어나는구나'

하고 가만히 내버려 두고 지켜보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엇부터 시작할까,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와주어야 할까,

어떤 말을 해야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많은 생각과 계획을 세울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마음으로

저질러 보시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생각보다

우리의 텅 빈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사랑과 자비의 근원적인 마음이

더 깊고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텅 빈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이

온갖 생각으로 계획을 짜는 것 보다

더 지혜롭단 말입니다.

 

너무 고민하지 마시고,

턱 맡겨 버리세요.

생각도 놓아버리고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들도 가만히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법상

 

 

대학을 다닐 때였습니다.

한번은
겨울에 기름값이 없어
추운 방에서 잠바 입고 이불쓰고 산 적이 있었습니다.

형님같은 스님이 계셨답니다.
집에 놀러 오셨다 가셨는데
기름값을 하라고 메모만 남겨두고는
한 30만원을 놓고 가시는 겁니다.

또 한번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부르셔서는
학비로 쓰라고 또 돈을 주십니다.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어차피 내 돈도 아니라며
그냥 인연따라 온 돈이니
필요한 사람에게 가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학생 때, 그 소중한 시간에
공부를 해야지
다른 거 해서 시간 버리지 말라시며 말입니다.

고마워 할 것도 없고,
부담 가질 것도 없다시며 말입니다.

또 하루는 방을 구하려고 다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절 앞에 방을 구해 놓았으니
빨리 이사오라고 그러십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이 받고만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스님께서는
주고 받은 게 없으십니다.

그런 스님께서
제가 출가할 적에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모릅니다.
입으시던 옷들 물려주시면서
입가에 미소가 가득이셨습니다.

제게는 친형보다 더한 스님이십니다.

연말이 되니
또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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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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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4, 묘행무주분
머무름 없는 묘행(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라.)

妙行無住分 第四
復次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須菩提 菩薩 應如是布施 不住於相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須菩提 於意云何 東方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南西北方 四維上下虛空 可思量不 不也 世尊 須菩提 菩薩 無住相布施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須菩提 菩薩 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
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이면 행이지 함이 없는 행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말씀이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묘한 가르침인가.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궁금해 질 터인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묘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 즉, ‘무주’인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진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다. 즉,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이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무주묘행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니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 즉 보살마하살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즉 보살이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분별과 번뇌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깨달음에 이르러 하화중생의 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들에게만 이 보시의 법문이 중요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일체 모든 발심한 선남자 선녀인, 즉 우리들 같은 생활 수행자들의 모든 실천 수행 또한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상구보리의 측면이고 상구보리가 체득되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저절로 하화중생의 발원, 즉 일체 중생을 향한 동체 대비의 마음이 바탕 된 보시행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구보리가 그대로 하화중생이란 말이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곧 보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지혜가 곧 자비인 것이다.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곧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반대로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은 곧 지혜의 증장으로,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보시를 하되 진리의 보시를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보시를 하며, 또한 보시를 하되 색성향미촉법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발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처럼 보시와 수행은 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묘행무주의 실천행으로,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에 묘행무주의 보시행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이어지는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 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아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 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한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 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는가.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 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륜이란 시륜(施輪)과 수륜(受輪), 물륜(物輪)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바퀴인 륜(輪)의 의미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처럼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인가.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이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한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이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이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한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된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진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이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이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이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이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한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이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인연법이라는 법칙에 따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사람이 가졌다 버렸다 하거나, 주고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인연의 법칙에 따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준다 받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 처럼.



Posted by 법상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키워주었고,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로 인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며, 먹고 자고 살아갈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가 이 우주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되겠는가.

감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감사의 마음만 보낼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감사의 실천을 행할 일이다. 이 우주 법계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바로 보시며 나눔이다.

사실 우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히 따진다면 보답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으며, 이 우주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우주가 있다면, 또한 그들이 소멸되면 나도 소멸되고, 우주가 소멸되면 나도 소멸된다면 이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동체(同體)적인 한생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한 몸, 한 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만유가 모두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면 어찌 나와 너라는 나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가 없다면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도 사라진다. 네가 아픈 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며, 네가 굶는 것이 곧 내가 굶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가난이 곧 나의 가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나누고 보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동체적인 보시는 보시나 나눔이라는 말조차 필요치 않는다. 내가 배고플 때 내가 먹는 것을 가지고 내가 내게 보시한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베풀더라도 사실 그것은 베풂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참모습이다. 동체대비란 말 그대로 온 우주법계가 한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크나큰 자비를 말한다. 이러한 큰 자비는 자비라는 말조차 쓸 필요가 없는 자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야말로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꽃피어나는 상(相) 없는 자비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실천되어지는 자비는 아무런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티를 낼 것도 없다. 스스로의 자비를 자비라고 치켜세울 것도 없고, 자비를 행하고서 스스로 자비를 행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일 뿐이다.

내가 배고프면 내 밥을 먹듯이 누구라도 배고프면 내 밥을 먹여 주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먹이는 것이지만, 연기법에서는 내가 나를 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베풀면서 베풀었다는 상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베푸는 것은 동체대비요 베풀었다는데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이다.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으니 내 것을 너에게 준다는 관념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라는 존재 또한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공한 존재, 연기적인 존재일진데 내 소유가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으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연기로 바라본 이 세상의 본질에는 무아(無我), 무소득(無所得), 무소유(無所有)의 덕목이 있다. 나도 없고, 내가 얻을 바도 없으며,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 따라 다만 나라는 존재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일 뿐이며, 내 소유라는 것도 잠시 인연 따라 내게로 왔다가 잠시 머무른 뒤 어김없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무아요, 무소득이며, 무소유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 ‘내 것’이라고 가두어 둘 수 있겠는가. 내 소유를 늘려나가는데 집착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연 따라 나에게로 잠시 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내게 온 것들조차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이 우주 전체의 것일 뿐이다.

우주의 것이 인연 따라 내게도 오고 너에게도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연 따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있도록 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 상대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그것을 내어줄 뿐이다. 그렇게 내어 주고 나서도 내가 상대에게 주었다는 상을 낼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있어야 할 자리에 간 것일 뿐이다. 내가 네가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다만 나는 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러한 연기의 세계에서 보시는 보시가 아니다. 보시를 하고서도 보시했다는 상이 생길 여지가 없다. 이러한 보시야말로 연기적인 보시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입각한 보시인 것이다.

연기를 깨달으면 이처럼 동체대비의 보시행이 저절로 삶의 방식이 된다. 그러나 연기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반대로 상 없는 무주상보시를 끊임없이 행하면 보시의 실천행 속에서 연기적인 자각이 꽃피어난다. 그러니 보시행, 자비로운 나눔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고, 연기를 깨닫는데 있어 중요한 실천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