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예불을 올리고
좌선을 합니다.

좌선을 하기 전에
잠시 마음나눔의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분들이 똑같습니다.
그냥 이렇게 법당에 앉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지를 못합니다.
어두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앉아 있는 사람,
요즈음의 안 풀리는 일상에 대한 무거운 마음으로 앉아있는 사람,

또 군인 법우들은
내가 지금 군대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에
온전히 앉아있을 수가 없기도 합니다.

사실은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앉아있습니다.

이렇게 앉아있는 데는
다른 분별이 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앉아있을 뿐이지요.

'누가'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에''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있는 그 순간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장도 아니고,
주부도 아니며,
자식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고,
어려운 일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도 아니고,
힘겨운 군생활하고 있는 군인도 아니고,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앉아있을 뿐입니다.
아무런 분별이 없어요.
바로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순간이 됩니다.
깨달음을 체험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온전한 평화로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하며
이 순간을 느끼는 데에는
다른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평화로움과 만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 속에
어제 일에 대한,
요즈음의 일상에 대한,
또 오늘의 일이며 내일의 일에 대한,

일에 대한 스트레스며,
사무실 업무에 대한,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한,
자식 걱정이며 대학, 취직, 진급에 대한질투, 시기, 노여움, 다툼, 욕
심 등의 마음에 대한
온갖 번잡한 마음을 붙잡고 앉아 있게 되면
그것은
좌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마음 모아 관찰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이 마음의 평화를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 때문에
지금 마음 집중하기가 어렵고,
미래에 올 두려운 일 때문에
지금 좌선이 잘 안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선이라는 것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과거나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순간의 문제입니다앉아있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의 모든 시공에서의 문제입니다.

앉아서 평화로울 때 처럼
움직임 속에서,
무수한 일의 스트레스 속에서,
번잡한 출근 길의 정신없음 속에서,
사람들과의 부딪김 속에서,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온전한 평화로움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그냥 다 놓아버리고
그 순간이 되어 느끼기만 하면 됩니다.
온전히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우린 누구나
지금 이 순간 평온을 느낄 수 있고,
자성부처님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짊어지고 있는 것들만 놓으면...
그래서 이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이 부처님을 친견하는
가장 좋은 때가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느 때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
직업도, 스트레스도, 두려움도,
온갖 나에게 붙여진 이름들도,
이를테면 부모, 자식, 사장, 직원, 친구, 수행자 등등하며,

온갖 과거로부터 짊어진 모든 이름, 모양, 아상들이며
오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하고 있는 모든 것들까지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에 집중하여 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충분하다기 보다
아니...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번쩍 열리는 깨달음을 구한다면
천리 만리 길을 잘못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환상에 젖은 깨달음은
그 자체로써 마장인 것입니다.

멀리서 찾지 말고,
엄청난 무언가를 찾지 말고,
아주 소박하지만
아주 미세하지만
그래서 처음에는 익숙지 않아 더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 순간의 아주 작은 평화는
너무 크기 때문에 작게 느껴지는 평화로움인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의 육근이 바깥으로 끄달리는감각적인 행복만을 추구해 오다 보니
이 작지만 온전한 행복을 느끼는데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
다.
크고, 웅대
하고, 엄청난...
그런 깨달음을 구하려 하지 마세요.
부처님의 밝은 미소는
아주 소박하게 다가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잠시 동안이라도 모든 번뇌일랑 다 놓아버린 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을 관찰해 보세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에
가만히 집중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작은 평화로움 한 자락...
아주 미세한 속 뜰의 본래 향기가...
느껴지시는지...








Posted by 법상


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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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달마스님의 파상론(破相論)을 보면
관심 수행에 대한 소중한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결심했다면
그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방법은
다른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다.”

다른 일체 모든 수행법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수행방법은 다름 아닌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관하는 것이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며,
무심(無心)에 이르는 길이고, 집착을 놓는 일, 방하착의 길이며,
나아가 본성을 살피는 길인 것입니다.

제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나 삼계와 육도는 무한히 넓습니다.
고작 마음을 지켜보는 일을 가지고
어떻게 이 끝없는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삼계의 업도 오직 마음에서 나온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삼계와 육도의 모든 업 또한
결국 우리의 마음으로 지은 것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으면
곧장 삼계를 초월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삼계 속에 있지 않다는 말은
'마음을 비운' 자리, 무심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삼계 육도를 다 청정하게 가꾸려 애쓸 필요가 없으며,
수미산 보다 높은 업장을 다 녹이려 애쓰거나
그 무거운 업장을 탓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마음을 관함으로써
지극한 침묵, 무심을 이루게 되면
본래 아무 일도 있지 않았던 본래의 자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달마스님은 또 이야기 합니다.

"그대가 닦는 수행이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지켜보는 깨어있음의 수행은
그대로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됩니다.
깨어있지 못할 때 마음은 있지만,
온전히 깨어있는 순간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대로 무심(無心)입니다.

온전히 깨어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다른 곳에서 깨달음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잘 지켜봄으로써 깨어있을 수 있다면,
깨어있음으로 무심을 이룰 수 있다면,
모든 불국토가 그대로 청정해 질 것입니다.
깨어있는 순간이 그대로 부처요, 불국토라는 말이지요.

파상론의 본문에서는
조금 더 구체적인 관심수행의 법문을 청해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단 말입니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육경이라는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 다는 말입니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냅니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합니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힙니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집니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입니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합니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됩니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는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파상론의 말미로 갈수록
달마스님은 더욱 간절한 법문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부처는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어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러니 순간 순간 깨어있음을 통해
우리는 부처를 만나는 것입니다.
천지가 요동을 치는 엄청난 부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아주 쉽고도 은은하고 평화롭게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마음이 쉬는 데서 나온다...
세상을 지켜보는 것이나, 거룩함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진정한 문은 감추어져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 마음을 쉬는 일입니다.
애쓰려는 마음, 깨달음에 도달하려는 마음을 모두 쉬고
묵묵히 지켜봄으로써 열반의 영원한 기쁨은 나옵니다.
또한 세상을 지켜보고 마음의 거룩한 본성을 지켜보는 수행은
눈 깜짝할 사이보다도 빠르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바로 지금 일어난다.
오직 마음을 지켜봄으로써 그 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바로 그대에게
깨달음은 한없는 평화로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Posted by 법상





[월출산 도갑사 대웅보전]

이따금씩 찾아오는 법우님들 중에는
당장에 괴로운 일들 때문에 수행이며 깨달음은 별 관심이 없고
오직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
지나치기까지 하신 분들 또한 더러 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참 바람직하다 할 만하겠지만
이따금씩 ‘깨달음’병에 걸려
빨리 깨닫고자 하는 조급증이
좀 심하신 분들도 있는 것을 더러 본다.

수행자에게 있어 깨닫고자 하는 것이야
당연한 서원(誓願)이라 하겠지만,
그것도 지나치면 안 될 일.
중도의 가르침을 다시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빨리 깨닫겠다는 조급한 마음이 앞서면
도리어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한 깨달음의 향기를 놓치고 만다.

깨달음을 미래의 일로 설정해 두고
기다려서는 안된다.
‘빨리 깨쳐야겠다’거나
‘언젠가 깨닫겠지’ ‘왜 이렇게 안 깨달아지지’ 하는 마음은
다 분별이고 망상일 뿐.

깨달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닌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엄격히 말해
깨달은 자는 없고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이란 말이 있다.

깨닫게 되면
내가 깨달았다거나 하는 아상이 몽땅 사라지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이 순간 순간 있을 뿐이란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시간의 개념 자체가 그냥 텅 비어 있으며,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나’라는 관념 또한 비어 있다.
오직 순간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우리들이 깨달음에 대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한가지.

언젠가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깨어있는 순간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다시말해 깨닫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얼마나 하고 있는가를
늘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의 문제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깨달음이란 환상에 불과하며, 깨달은 자는 없다.
오직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만 있을 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누가 하는가.
깨달은 각자(覺者)만이 할 수 있는가?
다 이룬 부처의 행위만 깨어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깨어있는 행위’는 그 행위의 주체 문제가 아니라
행위 그 자체의 문제이다.

부처님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의 연장이지만,
우리들의 행위는
깨어있는 행위와 그렇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면 수행자는 무엇인가.
매 순간 순간이 깨어있는 행위가 될 수 있기 위해 정진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어 가는 사람이다.

언젠가 부처가 되기 위해, 깨닫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행위가 깨어있는 행위가 되기 위해
애쓰고 정진해야 하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 미래에 있을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은 깨달음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전도된 생각이다.

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시간이 흘러 지금에까지 이르렀으며
또 그 시간이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시간이 공하다면
깨달음을 어느 순간에 찾을 것인가.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위는
그대로 진리 그 자체인 것이며, 불성의 싹틈이다.

지금 이 순간의 행위를 깨어있는 행위로 바꾸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10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사는 것이 된다.

어떤 법우님들은 묻는다.
‘이렇게 수행하면 깨닫나요?’
‘언제쯤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나 또한 깨달음 병이 너무 크게 나서
한동안 꼼짝달싹 못하던 적이 숯한 나날이다.

도대체 빨리 깨달아야 할 것 같고,
깨닫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빨리 부처가 되야지 이렇게 언제까지 중생으로 살 것인가 싶었던 날들...

그러나 그건 내 착각.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우린 이미 깨달은 것이고,
우린 그 순간 부처인 것이며,
진리와 하나되고, 온 우주 법계와 하나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또다른 순간 이를테면 깨달음의 순간이라거나,
부처되는 순간 그런 것을 바라는 마음을 놓아야 한다.

깨어있는 행위를 하는 순간
방하착이 되고,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이 되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깨닫지 못한 것에 조급해 하지 말 것이며,
다만 지금 이 순간 얼마만큼
‘깨어있는 행위’를 하고 있는가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있는 행위’를 하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부처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그대로 부처인 것.

부처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그대로 부처가 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Posted by 법상




[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Posted by 법상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샌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꽃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 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 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바로 그 상황, 지금 이 순간의 그 상황이 바로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리 편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으면
그 마음은 평화가 아닌 번뇌요 복잡스런 순간이지만,
아무리 정신 없고, 큰 문제가 생겨난 순간일지라도
그 순간 마음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바로 직접 그 자리에서 본연의 지혜를 보게 될 수 있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지혜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정진,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말한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 법신,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 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



[정동진 바닷가에서...]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지눌스님의 수심결에 나오는 말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알아차림'의 수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뿌리가 됩니다.

다른 말로
관(觀)
혹은 위빠싸나라고도 하여
요즘 대중적으로도 많은 호응을
불러 오고 있는 수행법이기도 합니다.

대기업의 사원 연수에서도
위빠싸나를 지도하여 마음을 맑히는 수행을 통한
능률 향상에 큰 이바지를 하고 있음은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관'수행은
종교적인 벽을 넘어 너무도 대중적이며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수행방법입니다.

우린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놓치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아니 일생을 살아가면서
온전히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절절할 것입니다.

상황에 이끌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이끌려
괴로울 때, 화가 날 때, 답답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이러한 순간 순간
우린 그 상황에 이끌려 상황에 휘둘리게 됩니다.
상황에 노예가 된다는 말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
친한 친구와 싸움을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싸우는 순간 우린 친한 친구라는 것도 망각하고
이렇게 욕을 하면 안된다는 것도 잊은채
그저 욕하고 주먹이 날라가고 그럽니다.
이를 보고 '정신이 나갔다'고 합니다.

이렇듯 순간의 상황에 이끌려 내 마음을 챙기지 못하고
정신을 밖으로 나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듯 우리는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화가 나는 순간 '화 남.. 화 남... ' 하고
알아 차릴 수 있다면...
친구에게 욕을 하는 순간 '욕 함... 욕 함...' 하고
알아 차릴 수 있다면...
어떤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나를 마음대로 내 몰 수는 없습니다.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올라오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에
그 마음에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나다'하는 아상(我相)이 없는 마음이며
나를 한 발짝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내 욕심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분별심(分別心)'이 없는 마음입니다.

'나다'하는 아상이 없어 분별하지 않는 마음은
맑고 향기로운 수행자의 본분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순간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호들갑스럽지 않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 여법하게 태연할 수 있게...
'좋다' '나쁘다'는 분별의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일이 잘 안되고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오더라도
오직 그 마음 관찰하면 그만입니다.
분별심을 내어
'왜 답답하지'
'왜 나는 되는 일이 없지...' 한다면
이는 수행자의 당당함이라 할 수 없습니다.

좋다 나쁘다는 것은 그 대상에
'나'라는 아상을 세우고 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가 있기에 좋고 싫음이 있는 것입니다.

신심명(信心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도의 궁극적 경지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분별, 선별하지 않음이니라.
단지 싫어하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으면
환히 드러나 명백해지노니라.

이렇듯 '알아차림' 관수행이야말로
생활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는
생활 속의 불교 수행입니다.

임제스님께서는
'특별히 구하는 바 없는 일상의 평범함이
그대로 불법'이라 하셨습니다.
'평상심이 도(道)'라는 것은
우리 생활 속에 수행코자 하는 법우님들께
매우 중요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모든 일과 속에서
언제나 마음을 '바로 여기'에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임제스님께서 말씀하신 '평상심이 도'의 본 뜻일 것입니다.

밥 먹을 때 가만히 밥 먹는 것을 지켜 볼 수 있고
화장실 가서 똥 누울 때 가만히 지켜 볼 수 있고
화 나서 싸울 때 가만히 화 나는 마음을 지켜 볼 수 있고
탐욕심이 일어 날 때 가만히 욕심나는 마음을 지켜 볼 수 있다면
오직 '현실'의 마음에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수행심이며 구도심이고 보리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밥 먹을 때 밥만 먹지 못하고
똥 누울 때 똥만 누지 못합니다.
언제나 한 가지에 집중치 못하고
항상 다른 두세 가지, 아니 그 이상의 생각들에 얽매여 있습니다.

언제나 '나'를 관찰하며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가만히 알아차릴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당당할 것입니다.

내면에 커다란 바위를 두고 있는 듯
살아가며 어떤 비바람이 몰아쳐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나 자신을 항시 '관찰'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와 나의 환경을 이루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나'에게서 나왔기에
'나'를 올바로 관찰함으로써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또 나 자신에 대한
확연한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