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의법출생분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依法出生分 第八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 滿三千大千 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所得福德 寧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 福德性 是故 如來說 福德多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 乃至 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 勝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 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 出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의법출생’이라는 이 분에서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 경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밝힘으로써 상을 타파하는 이 경전의 가르침이 수승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수승함은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는 것 보다 더 한 수승함이다. ‘일체 모든 상의 타파’를 밝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이야말로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 즉 불법이라고 하는 그 상 마저도 타파되어야 할 또 다른 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불법이라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것이 불법이며, 금강경의 가르침이고, 거기에는 불법이라는 상 또한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그렇듯 불법조차 모두 타파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불법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칠보로써 널리 보시하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살펴 보기 앞서 삼천대천세계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삼천대천세계라는 이 말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경전에서도 자주 등장할 뿐더러, 사찰을 지을 때에도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도량을 건축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또한 요즈음의 현대 천체물리학에서 연구되고 있는 결과와도 불교의 우주관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 과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중심에는 수미산이 서 있고 그 수미산을 동심원으로 일곱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 이 칠산팔해(七山八海)의 가장 변방의 산이 철위산(鐵圍山)이고 철위산으로 둘러싸인 팔해의 마지막 바다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커다란 대륙이 있는데, 이곳이 북구로주(北俱盧洲), 남섬부주(南贍部洲), 동승신주(東勝身洲), 서우화주(西牛貨洲)이다. 수평적으로 보았을 때, 이 네 곳의 대륙의 지표면에 인간과 축생이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남쪽의 섬부주로 이 곳이 가장 살기 어렵고 박복한 곳이라고 한다.

한편 수직적으로 보면 인간과 축생이 사는 그 아래쪽 철위산의 밑바닥에 지옥과 아귀의 세계가 차례로 있으며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의 중턱에 사천왕천이 있다. 사천왕천은 네 개의 천상으로 이를 다스리는 네 명의 천왕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다.
그리고 사천왕천에서 더 위로 올라가 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는 33천이라 불리우는 도리천(忉利天)이 있으며, 이 곳의 천주(天主)가 제석천(帝釋天)이다. 또한 천상계는 아니지만 공중에 아수라(阿修羅)가 있는데 이들은 항상 분노와 진심이 많아 인접해 있는 제석천의 천병(天兵)들에게 계속해서 싸움을 건다. 항상 지면서도 업이 그러하기 때문에 늘 전쟁을 일삼아 아수라가 사는 곳은 늘 정신이 없고 전쟁터처럼 폐허가 되어 있다. 그래서 아수라장(阿修羅場)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다.

그 다음이 야마천(夜魔天)이고, 그 위에 차례로 도솔천(兜率天), 낙변화천(樂變化天),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는데, 이상의 여섯 개의 천상을 욕계육천(欲界六天)이라고 한다. 욕계란 식욕․수면욕․색욕과 같은 온갖 욕망으로 뒤덮인 세계를 말한다. 이 욕계의 하늘이 이상과 같이 여섯 가지라 욕계 육천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는 앞서 말했듯이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이 살고 있다. 욕계 육천 위로는 색계(色界)의 18천이 있고, 다시 그 위로 무색계(無色界)의 4천이 있다. 색계란 욕계에서와 같은 온갖 욕망들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물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존재들이 사는 세계로 살아 있을 때 초선부터 사선까지의 4가지 선정을 닦은 사람이 죽은 뒤에 태어나는 곳이며, 무색계란 욕망은 물론이고 물질에서도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4무색선정을 닦은 자가 태어나는 세계를 말한다.

이렇게 수미산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지옥에서부터 시작하여 위로 28개의 천상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계를 하나의 수미세계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의 수미세계 1,000개가 모인 것을 일 소천세계라 하며, 이 소천세계 1,000개를 모은 것이 중천세계, 또 이 중천세계를 1,000개 모은 세계가 바로 ‘대천세계’인 것이다. 이 대천세계는 소천, 중천, 대천이라는 세 종류의 하늘세계가 모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삼천대천세계’라고 불리운다. 즉 삼천대천세계는 10억개의 수미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세계로 그야말로 무량수 무량광 한량없는 크기의 우주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칠보(七寶)는 수많은 경전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의 보물로써 『아미타경』에서는 금, 은, 유리(다이아몬드), 파려(적백의 수정), 자거(백색의 산호), 적주(붉은색 진주), 마노(짙은녹색의 보옥)를 들고 있고, 『법화경』에서는 여기에 파려와 적주를 빼고 대신에 진주와 매괴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한 보배를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량한 세계인 삼천대천세계에 가장 진귀한 보배인 칠보로써 가득 채워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을 복덕이 얼마나 많겠는가를 묻는다. 이에 수보리는 매우 많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이유를 함께 말씀드리고 있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질문하신 깊은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저 많다고 하지 않고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있다. 수보리는 지혜로운 답변을 하고 있다. 그저 많다고 한다면 그 답변은 반쪽짜리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나 수보리는 많다고 답변하면서 그 이유는 ‘복덕은 복덕이 아니므로 복덕이다’고 하고 있다.

이 논법은 금강경에서 전체적으로 나오고 있는 논리 전개법이다. 일반적인 생각에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도저히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은 논리를 초월해서 지혜로써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논법이다. 어리석은 이에게 있어서 이 논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논법이야말로 금강경의 ‘완전한 상의 타파’를 그나마 언어로써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언어는 완전하지 못하다. 완전하지 못한 언어를 가지고 완전한 진리를 표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도무지 성립될 것 같지 않은 논법이 진리를 표현하는 금강경의 논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구마라집 번역에서는 위의 번역에서와 같이 복덕과 복덕성이라는 두 가지 표현을 씀으로써 앞의 복덕과 뒤의 복덕성의 차별을 두어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쓰여지는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금강경 논법을 조금 벗어나 있다.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의 해석은 ‘세존이시여, 선서시여, 그 선남자 선여인은 이로 인해서 공덕의 무더기를 쌓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공덕의 무더기라고 여래께서 설하신 것, 그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직역을 중시한 현장의 번역에서도 이러한 해석은 계속되고 있다. [현장역, 世尊. 福德聚福德聚者 如來說爲非福德聚 是故 如來說名福德聚福德聚]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라기 보다는 조금 더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구마라집의 의역일 것이라고 보여진다. 다시말해 혜거스님의 강설에서 이해되었듯이 유위법으로써의 복덕과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성을 대비시킴으로써 조금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즉,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은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을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무위법으로써의 복덕의 성품이란 본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많고 적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유위법으로써의 복덕이란 분명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서는 금강경의 본래의미를 확연히 드러내 주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앞서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의 해석에서처럼 ‘그렇게 보시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공덕의 무더기라고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라고 해석을 하면 다음과 같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를 하면 많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 공덕의 무더기라는 것은 유위법으로 보았을 때 공덕이지만, 무위법으로 보았을 때는 공덕이 될 수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이름 자체도, 그 상 자체도 타파되어야 한다. 앞서 4분에서 이해되었던 것 처럼, 보시를 하지만 상에 얽매여 보시를 하지 않았을 때 그 공덕은 무량한 것이다. 다시말해 많은 공덕의 무더기를 쌓았지만 ‘이것이 공덕의 무더기다’라고 스스로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공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의 무더기라 한 것은 공덕의 무더기가 아니다’라는 논법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공덕이다라고 상을 짓는 것은 공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르게 이해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공덕의 비유를 드심으로써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한 공덕이 무량함을 말하고 계신다. 그 무량한 이유는 무주상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써 보시하더라도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상에 머물러 보시하고, ‘보시했으니 이것은 공덕이 될 것이다’라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공덕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많은 보시를 했으면서도 ‘공덕은 공덕이 아니다’라고 바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것은 많은 공덕이 될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와의 문답을 통해서 물질로써 무주상보시를 하는 것은 이와 같이 복덕이 많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이처럼 복덕이 많은 것이니 물질적으로 많이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이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

부처님께서는 단순히 물질적인 보시가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보시도 무주상이 되었을 때는 이처럼 큰 공덕을 성취할진데, 하물며 이 경 가운데 사구게 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한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사구게란 앞의 제5분에 나왔던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같은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게송들이 시적으로 표현되다 보니 네 글귀의 시적인 게송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사구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 반드시 네 구절로 된 경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떤 특정한 구절을 지정해서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참된 의미는 ‘이 경전 가운데 가르침을 잘 함축하고 있는 어느 한 구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금강경의 핵심 사구게인 제5분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도 구마라집 번역에서나 사구게로 딱 떨어지도록 되어 있지,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네 구절로 딱 떨어지지는 않는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부분에서 부처님 말씀의 핵심은 무언인가. 앞서 언급한 칠보 보시의 비유는 그처럼 많은 물질적 보시를 하더라도 공덕이 무량할진데, 정말 소중한 진리의 말씀 한 구절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보시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물질적 보시보다는 법보시가 더 수승하다는 말이다. 왜 그러할까. 그 답변이 다음 구절에 나온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법보시가 수승하고 공덕이 많은 이유는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경전의 가르침을 깨달아야만 부처가 될 수 있으며, 최상의 법이라는 것도 상을 타파하는 금강경의 이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금강경의 이러한 가르침이야말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으며, 진리의 법을 얻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물질적인 보시를 하더라도 그것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기는 어렵다. 물질적인 보시를 많이 행하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정신까지 부유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보시 중의 으뜸 가는 보시는 물질적인 보시가 아니라 가르침의 보시이다.

가르침의 보시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타파해 주고, 탐진치 삼독심을 버릴 수 있게 해 주며,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러한 가르침의 보시 중에 가장 으뜸가는 가르침은 금강경의 가르침,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하여 법상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상이란 상은 다 타파해 주는’ 가르침이다. 일체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깨달아 일체 모든 상에서 벗어나며, 상에 얽매이지 않고 물들지 않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으로 깨달으신 분들이 부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부처님일 수 있는 이유는 일체의 모든 상을 다 타파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말씀하고 계신다.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구마라집 역에서는 ‘불법이란 곧 불법이 아니다’라는 말로만 맺음이 되어 뒷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부분의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 역에서는 그 뒤에 ‘그러므로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는 부분이 있다. 현장역에서는 ‘수보리야, 여래가 설하길, 모든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라고 여래는 설한다.’라고 했고,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수보리여, 불법들이라는 것은 불법들이 아니라고 여래에 의해서 설해졌나니, 그래서 말해지기를 불법들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 뒷 구절이 나와 있어야 비로소 아상타파를 위한, 공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금강경의 논법인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이다’라는 논법이 성립된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말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법보시의 공덕에 대해 설하는 이 장의 맺음에서 왜 갑자기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가.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체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이 경전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 다시말해 불법 속에서 부처님이 나왔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흡사 이 말은 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불법만이 진리이며, 이 법만이 부처님을 나오게 한다고 들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불법을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불법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상을 타파하라는 불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불법이라는 상에 얽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법 속에서 모든 부처가 나왔으며, 이 불법을 보시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렇게 듣고 나니 어리석은 중생들은 ‘아 이 불법만이 나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칫 불법에 집착하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를 경계하고 계신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즉 불법에도 집착하면 안 되고, 불법이라고 고정된 어떤 실체도 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법이라는 틀, 불법이라는 상까지도 타파했을 때 비로소 참된 불법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불법을 불법이라고 하면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불법을 불법이 아니라고 바로 알았을 때 비로소 불법은 빛을 발할 수 있다.

불법도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불교도 이름이고, 부처도 이름일 뿐이다. 그래서 옛 스승님들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다. 상의 타파에는 그 어떤 예외도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부처가 되었든, 불법이 되었든, 그 어떤 것이 되었든 고정되게 실체화하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될 수 없다. 불교를 불교라고 하면 불교가 아니고, 진리를 진리라고 하면 진리가 아니며, 부처를 부처라고 하면 더 이상 부처가 아니다. 불교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라는 상을 세우면 이미 진리가 아니며, 부처라는 상을 세워도 이미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스스로를 ‘불자’라는 틀에 가둬선 안 된다. 불법의 진리를 ‘불교’라는 틀에 가둬서는 안 된다. 가두어진 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고 신앙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참된 불자라면 이렇게 활짝 열려있어야 한다. 그 어디에도 걸려선 안 된다.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불교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고, 진리라는 틀에서도, 부처라는 틀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불교를, 진리를, 부처를 바로 보고 믿으며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를 버렸을 때 비로소 불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어디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이 세상의 종교이고, 이 세상의 진리이다. 믿건 믿지 않건 간에,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건 그렇게 생각하지 않건 간에 불교는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공통된 종교인 것이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해 놓았다 보니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일 뿐이다. 이름이 불교일 뿐,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그렇기에 불교이다. 그렇기에 진리이고, 그렇기에 일체 모든 존재의, 일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이며 진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천상세계의 종교는 오직 ‘불교’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시말해 천상세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다는 말이다.
어떤 다른 종교의 신자들이 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불교라는 이름을 보고 있거나, 불교라는 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오해가 있는데는 불자들의 잘못이 크다. 불자들 스스로 ‘불교’를 틀에 가두고 그 틀 속에 많은 신자를 끌어 모으기에만 바빴고, 불법이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혀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불교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며, 어떤 말로도 규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름을 ‘불교’라고 했을 뿐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이름 하여 ‘불교’라고 이름 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의 불자, 수행자들은 간간이 그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두고 그 안에 갇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왜 불교신자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어야 하는가. 불교가 타종교에 비해 신자가 많아져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를 어떤 하나의 ‘종교’로 가두어 놓고 사람들을 그 안에 많이 포섭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동일 뿐이다.
우리의 신자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이고 생명이며 우주법계 그 자체다. 심지어 소나 돼지나 강아지조차 우리의 신도이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구름과 바람과 하늘이 다 우리의 신도이다.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 원불교 신자, 이슬람교 신자, 그리고 종교가 없는 그 모든 이들이 우리의 신자이다. 그들이 우리의 신자이며, 우리가 그들의 신자이다. 이름을 불교라고 해서 그렇지, 이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대로 진리의 신자이며, 진리 속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좋은 도반들일 뿐이다.

이렇게 툭 터진 마당에 왜 억지로 ‘불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교신자와 타종교 신자로 나누어 놓고 불교신자로 만들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라는 틀을 깨야 한다. ‘불법’이라는 틀을 깨야 한다. 그 틀만 깨면 아무런 장애가 없고, 다툼이 없으며, 일체가 고요하고 평화롭다. 불교신자라는 틀이 없으니 타종교신자라는 틀이 있을 것도 없고, 불교라는 틀에 가두지 않으니 일체 모두가 불교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진리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의 보편적이고 온전한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불법이다.


Posted by 법상






제 2, 선현기청분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함.

善現起請分 第二
時 長老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선현기청분은 말 그대로 선현이 가르침을 청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선현이란 수보리를 말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은 ‘수부티’(Subhuti)로 나와 있는데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보면 ‘착한 존재’ 혹은 ‘잘 나타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지므로, 의미로 옮기면 ‘선현기청분’이란 제목에서처럼 ‘선현’이 되고, 본문에서처럼 원어의 발음만 따서 ‘수보리’로 옮길 수도 있다. 본문에서 구마라집은 주로 수보리로 옮기고 현장은 선현으로 옮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그 때 그 때 제자들의 간청에 의하여 설법을 하고 계신다. 많은 경전에서 제자들의 이름이 언급되는 이유도 이처럼 제자들이 부처님께 궁금한 것을 여쭙고 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금강경에서는 장로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하고 그에 답변하시는 모습을 부처님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난 존자가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과 함께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수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공경스럽게 두 손 모아 합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해공제일이라 불린다. 해공제일이라는 말은 공의 이치를 가장 밝게 깨달았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개시허망’, ‘여몽환포영’ 등 공의 이치를 열어 보이고 있는 금강경의 법문을 청하는 제자가 해공제일인 수보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수보리는 해공제일에서도 알 수 있듯 공의 이치에 밝은 분이며,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수보리의 행동 하나 하나 또한 앞의 법회인유분에서 밝힌 것처럼 온전히 깨어있는 행동이며, 이미 도착한 이의 궁극의 순간 순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을 가만히 묘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어있는 행을 보여준 것처럼, 여기에서도 아난은 수보리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까지 세심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장로 수보리 또한 부처님과 똑같이 좌선에 들어있다가 공양 때가 되어 가사와 발우를 수하고 부처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어 사위성으로 들어가 탁발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와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걷으신 뒤 발을 씻고 부처님 곁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부처님 곁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깨어있고 온전한 모습을 지켜보던 수보리는 부처님에 대한 한없는 감사와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그 순간 한생각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그리하여 수보리는 아주 천천히 마음을 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한없는 공경스러움으로 합장하여 법을 청하는 예를 올린다.
어쩌면 이 질문은 수보리 개인만의 질문이 아닐 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해공제일인 수보리는 이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제자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제자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의 마음을 읽고 그 의문을 대신해 질문하기도 한다. 자신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도반들이 궁금해 하고 있는 점을 모두를 대신해 부처님께 사뢰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또한 바른 제자는 질문이 떠오른다고 답을 구하는 마음에 미리부터 얻어 들을 답변에 마음이 먼저 가 있지 않다. ‘어떤 답을 주실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없다. 온전히 깨어있는 행으로써 천천히 일어나기만 하고, 가사를 입기만 하며, 합장 공경을 하고, 질문 할 뿐이다. 이 모든 순간 수보리는 철저하게 깨어있다.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희유한 일입니다.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십니다.

늘상 보아오던 부처님의 일상이지만, 또한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지만 수보리는 그러한 겉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이면 깊이에 한없는 지혜와 자비로움으로 충만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경이로움과 희유함을 느끼고 있다. 겉 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에 두루 미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되어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한없는 지혜로움에 경이로움을 느끼고, 이렇게 많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잘 보살펴 주시고 자비로써 감싸주시는 모습에 희유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보살 수행자들을 잘 보살피고 이끄시며, 또한 그들에게 내 수행의 완성으로 끝내지 말고 세상의 일체 모든 어리석은 중생들을 밝은 가르침으로 안내할 수 있도록 부촉하고 계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즉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모든 수행자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시며, 또한 그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고, 감싸주시며 거두어 주고 계신다.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호념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수행자들에게 또한 당부하여 부촉하고 계신다. ‘내가 너희들을 밝은 깨달음으로 안내하겠노라. 너희들을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잘 보살피고 감싸주며 호념하겠노라. 그러나 이러한 여래의 호념 아래에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해 수행하여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너희들처럼 보리심을 발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많은 어두운 중생들을 위해, 내가 너희를 호념하듯 너희들도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잘 감싸주고 호념해야 할 것이다.’ 바로 수보리는 이러한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보면서, 부처님의 무량수 무량광 끝없이 펼쳐지는 자비로움에 경이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 또한 이러한 부처님의 보살피심과 호념하심 속에서 이렇게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었으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께 수보리는 어떻게 해서든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누구의 도움을 바라는 분도 아니고, 은혜에 보답을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을 수보리는 무엇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보답할 수 있는 길이 도저히 없는 것인가! 그것은 단 한 가지 부처님께서 수많은 보살들을 잘 보호하시고 깨달음으로 이끄셨던 것처럼, 제자들 또한 아직 보리심을 발하지 않은 수많은 중생들을 위해 부처님의 그것과 똑같은 자비로움으로 그들을 보호하고 호념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만이 수보리와 또 다른 수많은 보살들이 부처님의 은혜로움에 보답하는 길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은 이와 같이 서로 하나가 되어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간절히 부촉하시며, 제자들 또한 부처님의 부촉에 마땅히 흔연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그런 마음은 이미 둘이 아닌 마음으로 이심전심 통하여 있다.

여기에서 보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한없는 자비로움과 보호하심에 한없는 감사를 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부처님의 호념에 보답하는 길은 스스로 밝게 깨닫는 길과 모든 중생들을 섭수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들 스스로 밝게 깨달으라는 말씀을 생략하고 제자들에게 모든 중생들에게 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시는데 중점을 두신 이유는 지금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제자들 상당수는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하신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아라한과를 증득한 이든, 아니면 보리심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든 모든 이들을 부처님은 하나같이 잘 호념하고 계시며, 또한 모두에게 부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펴 주시고’의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을 상구보리로, 깨달음으로 잘 이끌어 주신다는 의미이며, ‘모든 보살들이 불법을 잘 전하도록 부촉하신다’는 의미는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하화중생을 잘 실천하시도록 이끌어 준다는 의미인 것이다. 결국 부처님께서는 우리 모든 수행자들에게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부촉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마땅히 너희 수행자들을 호념할 것이니 너희들은 나의 호념 아래에서 열심히 닦고 정진하여 위로는 깨달음을 증득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을 섭수하여 깨달음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계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살피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 부촉하고 있느니라.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와 선여인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그대에게 설하리라. "
"그러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쁜 마음으로 듣고자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란 마땅히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수행의 길로 들어선 모든 보살들이란 의미다. 여기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현장의 번역에서는 ‘발취보살승’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무상정등정각으로, 이는 ‘더 없이 높고, 비길 데 없는 바른 깨달음의 마음’이란 의미로, 한 마디로 말하면 발보리심이라 할 수 있다. 즉, ‘보리’가 깨달음을 의미하니, 발보리심은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킨’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킨’이다. 현장 번역의 발취보살승이 범어의 원본의 의미와 좀 더 가까운데, 이는 ‘보살승에 굳게 나아가는’의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범어 원본과 현장, 구마라집의 번역을 보았을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이라는 것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이라고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좀 더 쉽게 해석해 본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더 없이 높고 비길데 없는 바른 깨달음’이니 ‘최상의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했다는 말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남자 선녀인이란 ‘부처님께 귀의한 사람’ 혹은 ‘불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불법에 귀의한 남자와 여자를 가리킨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이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보살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들로, 여기에서는 첫째, 이미 깨달음을 얻은 보살의 의미와 둘째로, 아직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초발심이라도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두 가지 모든 종류의 수행자들의 나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의 가르침은 두 가지 수행자 중 전자의 의미, 즉 이미 깨달음을 얻어 보살이 된 수행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제자들도 있으며, 수보리처럼 이미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지만 보리심을 발한 모든 수행자들을 위해 질문하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처럼 깨달음을 얻었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진 보살들을 위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수행자는 모두 상구보리(저 언덕) 하화중생이라는 공통된 발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발원의 성취를 위해 현재 이 언덕에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두가지 수행자 모두에게 중요한 법문으로 다가온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호념과 부촉을 찬탄하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 나가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이 바로 선현기청의 내용이며, 이에 답변을 하는 부처님의 말씀이 바로 금강경의 본문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수행자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고, 수행하며, 다스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이야 말로 보리심을 발한 모든 보살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물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구마라집의 번역에서는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만 나오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의 물음은 생략되고 있는데 범어 원전에서도 등장하고 현장의 번역에서도 ‘수행’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말과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가’ 하는 의미가 비슷하기 때문에 생략하지 않았나 싶다.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보통 항복받는다는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는데, 항복받는다는 의미는 ‘마음이나 생각을 잘 다스려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 정도로 이해할 수 있으며 쉽게 말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불교 수행을 흔히 ‘마음공부’라고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 세상 그 무엇이라도 화엄경의 말씀처럼 마음에서 나왔으며 이 마음이 세상을 짓고 무너뜨리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이 마음을 잘 다스려 본래 마음자리를 되찾는 것이 마음공부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렇게 날뛰는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 또한 잘 머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받고 다스려 나가야 하는지가 불교 수행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깨달았지만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고자 하는 보살들에게 있어 어떻게 하면 저 언덕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을 다스려 이 언덕에서 중생을 교화할 수 있는지, 이 언덕에서 깨달은 마음과 교화 하겠다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는지, 어떻게 하면 이 언덕에서도 다시는 퇴전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고 수행해 갈 수 있는지, 저 언덕으로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고 다스려 발원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칭찬하시면서, 수보리의 말을 그대로 긍정하고 수보리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고자 하면서 선현기청분은 끝을 맺게 된다.



Posted by 법상







제 1, 법회인유분
법회가 열리게 된 연유

法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 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衛大城 乞食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알리는 바로 이 부분, 제 1분이 금강경의 서분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금강경을 주해하신 많은 선승들께서는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부처님 최상의 설법이며 32분까지의 모든 가르침이 사실 이 제 1분에서 다 설해 마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계실만큼 제 1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고, 우리가 공부해야 할 만한 그 어떤 가르침도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저 평범한 부처님의 일과를 잠깐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이러한 부처님의 일과를 단순하게 겉모습만 본다면 깨달음의 한 줄 작은 빛도 보기 어려울 것이지만, 마음의 눈으로 이러한 하루 일과를 온전히 살고 계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면 수많은 선사 스님들의 그러한 고결한 안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들여다 보도록 하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여시아문’ 경전을 몇 번이라도 독경하고,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경전의 앞 부분에 늘상 등장하는 이 말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경전이 부처님께서 스스로 쓰신 것이 아니라 법문을 들은 제자가 부처님께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전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난존자에 의해 암송되고 옮겨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시고 20여 년 간을 홀로 전법의 길을 걸으셨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나고 나니 가르침을 배우려는 제자들도 나날이 많아지고, 또한 부처님의 연령 또한 많아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이 시자를 둘 것을 간곡히 권유하셨고, 부처님께서는 이윽고 허락을 하셨다. 제자들이 가만히 살펴보니 아난 존자는 총명하며 기억력도 뛰어나고 성품도 온화하였으며 외모도 출중하고 또한 부처님의 사촌동생인지라 부처님을 곁에서 시봉하기에는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부처님께서 29세에 출가하시고, 35세에 성도하셨으며, 55세 즈음에 비구 아난을 시자로 두었으니 아난은 부처님께서 80세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약 25년간을 곁에서 시봉하였다. 가장 오랜 기간 부처님 시봉을 하다보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아난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을 하시자마자 상수제자인 가섭존자는 아난존자와 우파리존자를 위시하여 50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게 되었다. 물론 그 때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었던 아난 존자의 역할이 중요하였을 것임은 분명하다. 부처님 말씀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 존자가 가르침 즉, 법을 담당하고, 출가하기 전에 이발사였던 우파리존자가 처음 출가하는 수행자들의 머리를 깍아 준 인연으로 율에 대하여 가장 많이 들었기에 율을 담당하여 결집을 이루게 된 것이다.
경전을 결집하는 방법은 아난이 먼저 일어나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여러 대중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 때 아난은 언제라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시작함으로써 내 생각대로 부처님 가르침을 함부로 이야기 하지 않고, 부처님께 들었던 사실만을 온전히 대중에게 이야기 하고자 하였다. 이 사실은 불교 경전들이 비교적 지금에 이르기까지 큰 혼란됨 없이 잘 이어져 내려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말을 들었을 때, 백이면 백 다 제각기 자기 색안경으로 걸러 알아듣기 마련이다. 자기 판단과 고정관념이 개입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특히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을 것이다. 아난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이 개입됨이 없이, 아무런 가감도 없이 그대로 부처님께 들은 것들만 있는 그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이 무엇을 말할 때 대부분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하기 쉽다. 물론 내 말이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말은 사회에서, 학교에서, 책에서, 스승님들에게서 얻어 들은 말들이다. 그런 것들을 우린 오직 내 잣대, 색안경에 비추어 걸러내어 ‘내 식대로’ 조합하는 역할 정도를 할 뿐이다. 그리고는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얻어 들은 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집하며, ‘내 말’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곤 한다. 물론 자신 스스로도 그것이 온전한 내 생각인 줄로 착각하고, 옳은 생각인 줄로 착각을 하고 산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혹은 부처님 말씀을 누군가에게 들려 줄 때, 아난 존자의 이런 겸손함과 진실함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말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말을 순수하고 참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내가 옳다’라는 아집와 아상이 비워진 텅 빈 진실을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이야 그저 입가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런 걸러짐 없이 그것도 자기 생각인 양 마구 끄집어내다 보니 여러모로 번거롭고 복잡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게 주워들은 내용을 내 말인 양 마구 토해 내다 보니, 자신 내면에서 침묵과 명상을 통해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진실을 더욱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팔만대장경이라는 수많은 경전을 이렇게 생생한 부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데는 아난의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가감 없고 진실된 아난의 음성은 이 다음 구절에서부터 더욱 빛을 발한다.

한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1250인의 큰 비구 스님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공양 시간이 되자, 가사와 발우를 수하시고 사위성에 들어가시어 차례대로 탁발을 하신 다음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셔서 공양을 하셨다. 공양을 마치시고는 가사와 발우를 제자리에 놓으시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가만히 이 광경을 그려보라. 1250인이라는 대식구가 저마다 보리수나무 아래 차분히 명상에 들어 있다. 아마도 아침 햇살 내리기 전 새벽녘에 밝게 깨어 저마다 좌선에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공양 때가 되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처님을 위시하여 모든 비구스님들께서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는 차례로 줄지어 마을로 향한다. 배가 고파서 조금 빨리 걷고 싶더라도 ‘배고픈’ 마음을 관하며 차분히 대열에 서서 한 발 한 발 차분히 무겁고도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고 있을 것이다. 1250인이라는 수많은 스님들이 걷고 있지만 그 걸음 걸음에는 한없는 고요와 침묵만이 향기롭게 대열을 감싸고 있다.
사위성 큰 마을에 다다르자 스님들은 차례 차례 골목 골목으로 나뉘어 부처님께서 설법해 주신 것처럼 분별심을 놓고 부잣집, 가난한 집을 따질 것 없이 처음 정한 집에서부터 차례로 일곱 집을 걸어 탁발을 한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사시 때 일종식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시간에 맞춰 집 앞에서 음식을 준비해서는 부처님과 그의 청정한 제자들이 오기를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아직 승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스님들은 저마다의 탁발한 음식이 다름을 보고 분별심을 일으킬지 모른다. 음식의 맛과 양 또 그 종류에 따라 때로는 탐심이 올라오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곧 다른 많은 스님들이 그렇게 하시듯 그 마음을 관찰하고는 분별심을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고요히 탁발을 하시고는 다시금 본래 자리로 돌아오셔서 저마다의 자리에 앉아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을 하기 전에 잠시 저마다 침묵으로써 명상을 할 것이다.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수많은 인연, 온 우주 법계의 인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안으로 안으로 은은히 피어오르게 할 것이다. 행여 몸이 약하거나 병이 들은 도반이 곁에 있다면 내 발우에 담긴 몸에 좋은 음식이나 고기 등을 나누어 줌으로써 약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리고는 때때로 맛에 탐착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를 잘 관하며 고요히 공양을 할 것이다. 공양이 끝나면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다음 자리를 펴고 앉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금 고요히 선정에 들 것이다.

이러한 아난의 묘사에 어디 시끄럽고 복잡스런 느낌이 있는가. 이 많은 스님들이 일상을 살아가지마는 어느 한 구석 시끌벅적한 광경이 아닌 한없이 고요하고 여법한 광경일 뿐이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은 항상 그림자처럼 부처님 옆에 서 있다. 부처님께서 탁발을 나가실 때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부처님을 따르고, 공양을 하실 때 말 없이 옆에 앉아 함께 공양하며 항상 부처님을 지켜보고 있다. 그러한 부처님에 대한 지켜봄이 있었기에 부처님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큰 깨달음의 순간인지를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가 보았을 때 시시콜콜해 보이는 이런 사소한 일상까지 아난존자는 경전에서 소중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수많은 선사 스님들께서 이 광경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으며 부처님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하셨던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하루를 돌아보면 어떠한가. 잠이 안 깨니 자명종도 소리 큰 것을 사다가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출근하기 직전 빠듯할 만한 시간에 맞춰놓고 잠에 든다. 시끄런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지 못해 푹 눌러 놓고는 또 자다보니 이만 저만 늦은 게 아니다. 그러니 아침이 얼마나 바쁘겠나. 정신없이 시계 보면서 씻고 화장하고 대충 밥 먹고, 아니 아마도 아침밥도 굶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후다닥 뛰쳐나가 회사로 학교로 출근을 한다. 하루의 시작이 정신없으니 어찌 하루가 온전할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저녁 때 동료들과 어울려 한 잔 걸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쓰러지듯 잠이 들곤 한다. 다 이렇지는 않겠지만 정신없이 마음 챙기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 금강경 제 일분에 나오는 부처님의 평화롭고 고요한 삶과 우리의 허둥지둥 정신 없는 삶을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하루 일과는 모든 순간 순간이 그대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밥 먹고, 걷고, 씻고, 앉는 이 모든 일들이 어느 하나 소중한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따로이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것도 없다. 어느 한 가지 사소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든 일과가 그대로 소중한 깨어있음의 행이다. 우리들은 중요한 일이 있고 사소한 일이 있으며,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사소한 일들은 일일이 신경을 쓰지 못하곤 한다.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어지간한 사소한 일이나 과정에서의 소소한 일들은 그냥 흘려 보내기 쉽다. 회사에 가야 된다는 목적 때문에 집에서 밥 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걸어가는 그런 일상은 사소하고 귀찮은 일 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행에 있어 사소하고 중요한 분별은 없다. 낱낱의 모든 일상은 그대로 하나의 소중한 깨달음의 행이 된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밥 먹는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좌선에 들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이다.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 것이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드실 뿐인 것이다.
밥을 먹는 순간, 발을 씻는 순간, 걷는 순간, 탁발을 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다. 매 순간 도착해 있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 도착지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 또 다른 도착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는 것이다. 걷는 순간 오직 걸을 뿐, 탁발을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고, 발을 씻는 순간 오직 씻을 뿐, 빨리 씻고 좌선에 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다. 모든 순간 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다.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라.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로 이러한 점을 일깨우고 계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과라도 매 순간 순간의 삶이 지금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온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마조스님께서 말씀하셨던 ‘평상심이 도’라는 말 또한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선사 스님들께서 부처님의 일상을 언급하신 금강경 제 일분을 두고 깨달음 최고의 순간이며 최상의 설법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똑같은 일상이라도 그 일상이 깨달음의 순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어리석은 중생들의 평범한 일과가 될 것인가 하는 데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똑같은 일상이라도 온전히 그 순간 집중을 하여 깨어있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늘상의 일과가 깨어있지 못한 우리들의 안목으로 보았을 때, 금강경의 제 일분이 얼마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겠나. 그저 우리들의 삶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의 눈을 맑게 씻고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살짝 엿보게 되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모든 일과가 그대로 깨달음의 순간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겉모습은 서로 같더라도 그 내면에서는 하늘과 땅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도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고 역대의 고승들도 지금의 우리들도 모두 배 고프면 밥 먹고 잠 오면 자지 않는가. 그러나 그렇듯 평범하고 똑같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내면에 중심을 세우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보내느냐 그저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느냐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화롭게 깨어있는 낱낱의 일들이 곧 좌선을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모든 일상을 살아감이 그대로 좌선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과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니라고 말이다.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가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구절인데, 아쉽게도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구마라집의 번역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대일로 직역하는 것을 중시하는 현장스님의 번역이라던가, 진제, 보리유지 등의 다른 한역 금강경본에서는 모두 번역이 되고 있으며, 빠알리어 경전에서도 이 부분은 잘 드러나 있음을 볼 때, 분명 이 부분은 금강경의 원본에서는 나타나 있는 경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금강경 제 일분에서 말하고 있는 부처님의 일상 하나하나가 그대로 가부좌를 결하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는 좌선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는 말하고 있다. 앉아서 하는 좌선은 중요하고 법 먹고, 탁발하고, 발을 씻는 등의 일은 중요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낱낱의 행위가 그대로 마음집중의 수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양이 끝나시고 부처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가부좌를 결하시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입술 바로 위쪽으로 호흡이 들고 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시며 앉아 계신다. 호흡이란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스님은 이 부분을 ‘주대면념’이라고 하여, ‘전면에 마음을 집중하시고서’라고 해석을 했다. 빠알리어에서는 ‘전면’이라고 해석한 부분을 원본에서 ‘무카(mukha)’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얼굴, 혹은 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하고, 산스크리트본에서도 무카는 입이나 얼굴을 나타낸다고 한다. 전후 사정을 보았을 때 아함경 등에서 나오는 사념처 수행에 빗대어 ‘얼굴에 마음을 집중한다’거나 ‘전면에 마음을 집중한다’는 해석 보다는 ‘입술 위 부분의 호흡이 들고 나는 곳에 마음을 집중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어쨌거나 여기에서는 호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온전히 마음을 집중하여 깨어있다고 하는 점에 말씀의 중심을 새겨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금강경의 제일분에서는 부처님의 평범한 하루 일상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가르침을 열고 있다. 우리들의 삶과 부처님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똑같이 먹고 자고 걷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깨어있는 정신으로 오직 그것을 할 뿐이며, 오직 매 순간 순간 최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매 순간 다른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기 때문에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처님의 하루 일과를 보며 우리의 삶도 부처님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외양상으로는 그리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내면의 빛을 현실에 피어오르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또한 그대로 깨달음을 삶 속에서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어디로 갈까 망설이지 말고, 자꾸만 욕망을 일으켜 도달할 곳을 찾지 말고, 번뇌와 집착으로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삶과 하나 될 수 있다는 것을 일러주고 계신 것이다.

매 순간 순간 깨어있으라. 그것이 부처님의 행이고, 금강경의 실천인 것이다.




Posted by 법상
한 가지 소식이 있어 전합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에 대한 의견들이 많았었습니다.
주로 사진들이 너무 많아서 글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의견과
가격이 비싸다보니 사거나 선물하기도 망설여진다는 의견들이
많았었습니다.

아마도 출판사에도 그런 의견들이 개진되었었나 봅니다.
출판사에 사진을 다 빼도 좋고 흑백으로 하고,
표지도 하드보드지로 안 하고 최대한 값을 줄여줄 수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출판사에서 그런 단점을 보완하여
사진을 줄이고 흑백으로 하고 표지와 속지 종이질도 조금 낮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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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이 너무 비싸서 저도 좀 독자분들께
죄송한 감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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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