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관자재(觀自在)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 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꿔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아바’는 지킨다는 뜻이고, ‘로키테’는 본다, 관조한다는 의미로, 이는 ‘지켜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스바라’는 ‘자재하다, 자유롭다’는 의미이므로 이름 그대로 뜻을 새기면 ‘자유 자재하게 지켜본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지켜보고 살펴서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관세음보살의 어원에 담긴 속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의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자리, 깨달음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면목 깨침의 자리에 온전히 방하착 하고, 경계를 닦아간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음성, 다시 말해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내면의 참나 본래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인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 즉 온전히 자신과 바깥 경계를 관하고 녹여 보살,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불(念佛)이라고 할 때, 염(念)이란, 우리네 마음속에서 경계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마음의 조각들을 말하며 불(佛)이란, 우리네 마음속에 저마다 갖추고 있는 본래자리, 근본성품, 참나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염불은 우리마음 ‘염’과 부처님 마음 ‘불’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밝은 수행인 것입니다.


보살(菩薩)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인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 고하(高下)의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행이며, 보리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후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것이야말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뽑아놓은 부분입니다. 나머지 뒷부분은 이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의 주요 실천 덕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완벽하고도 치우침 없이, 그리고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깊은’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의 주요한 수행 덕목인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떠한 수행을 말하는 것일까요? 반야바라밀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깊고도 수승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공의 도리, 연기의 이치, 무아, 무자성, 중도의 이치를 올바로 조견(照見)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를 밝게 깨칠 수 있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 연기, 무아, 중도, 무자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공이고, 연기된 존재이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무집착(無執着)이며,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는 분별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고,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여실히 녹아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 무소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대상에 ‘집착’하고, 머리속으로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보다 많이 얻으려는 ‘소유’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공의 이치,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공,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우리는 확연한 지혜[반야]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바라밀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 실천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인 것입니다.


조견(照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춤, 즉 조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 내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내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구성방식을 가만히 비추어 보니, 우리의 신, 구, 의 3가지로 행한 행위가 업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법칙, 현실의 성질, 현실의 구성방식에 대하여 조견하시고는, 그렇다면 현실, 일체, 제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셨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교설이 바로 현실의 모습, 일체 제법, 다시 말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비추어 보신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셨습니다. 즉 조견의 결과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無我)의 교설이기도 합니다.


'반야심경 마음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일체고액  (0) 2008.03.08
개공  (0) 2008.03.08
오온  (0) 2008.01.10
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0) 2008.01.09
바라밀다 심경  (0) 2007.12.11
마하 반야  (0) 2007.12.11
Posted by 법상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자동차 한 대를 놓고 보면 차는 차로써의 이름이 있고, 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의 낱낱의 모든 부품들이 인연 따라 잘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인연 따라 잘 조합되어 있지 못하고 바퀴 따로, 운전대 따로, 엔진 따로,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 그것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낱낱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를 의지하고 연하여 잘 모여 있을 때에만 자동차로써의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는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 의지하여 너트는 볼트에 의지하고, 볼트는 너트로 말미암아 함께 붙어 있게 되고 그런 수많은 상의상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만 자동차는 이 한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연기의 표현으로 본다면,‘볼트가 있으므로 너트가 있고’‘너트가 있으므로 볼트가 있으며’, ‘타이어가 있으므로 타이어휠이 있고’‘타이어휠이 있으므로 타이어가 있고’, ‘엔진이 있으므로 미션이 있고’‘미션이 있으므로 기어가 있고’,

이와 같은 자동차를 이루는 모든 부품들이 서로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연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의 모든 부품 하나 하나는 서로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써만이 한 공간에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연기로써 모여 인연화합을 이루어야지만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형성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연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지만 존재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뿐 아니라 존재가 이루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흉 보고 뒷담화를 하게 될 때 A라는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화장실에 가서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면 A라는 사람은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에게 욕을 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껄끄러운 인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앙숙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험담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또 같은 험담이더라도 친한 친구끼리의 허물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과 맞선을 보는 자리나, 사업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과는 크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도 공간적으로 어떤 조건과 원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보더라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 침범을 했을 때 마침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면 큰 사고가 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기의 공간적 이해로 본다면 ‘졸음운전이 있으므로 중앙선 침범이 있고’‘중앙선 침범이 있으므로 사고가 있고’‘사고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그러나 상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면 이 연기는 이런 비극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저홀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이 상호의존적이며 상의상관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공기가 없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공기는 숲과 나무가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숲과 나무가 없다면 머지않아 생명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숲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공간적인 연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으며, 물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물과 흙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쌀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농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논과 밭이, 과일과 채소가, 시내와 강이, 호수와 구름이, 정치인과 경제인이, 도매상인과 소매상인이, 옷과 집이, 옷 만드는 사람과 집 짓는 사람이, 나아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키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법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의상관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을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처럼 자연에 대한 대대적인 훼손과 파괴를 자행해 왔다. 자연의 파괴와 훼손 위에 기초한 개발과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만큼 자연은 고스란히 인과응보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환경오염 아니 환경재앙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모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유럽이며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환경은 그대로 두고 후진국의 자연을 파괴시켜 온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지만, 결국 환경재앙은 후진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숲은 살려두고 저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 전체의 살림부족으로 나타나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모두가 한생명이며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아프리가의 밀림이 있어야 우리의 숲이 있고, 숲과 자연이 있어야 우리가 마실 공기가 있고, 맑은 환경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남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고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숲이 사라자고 사막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황사로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의 숲이 있어야 한국의 맑은 자연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내가 굶지 않을 수 있고,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우리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으며, 브라질의 아마존이 있어야 나에게 맑은 공기가 있고,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의 보호가 있어야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온 우주가 이와 같이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나비효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둘째,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공간적인 자동차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시간적인 의존성과 관계성을 살펴본다면 자동차의 역사를 거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간적인 부속들의 인연화합의 결합에 따라 자동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동차가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단순한 공간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둥근 바퀴를 만들었을 것이고, 연이어 수레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처음에는 소나 말 등의 가축이 끌기도 했을 것이고, 이윽고 증기 자동차를 거쳐 가솔린 자동차 등의 단계별로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연관관계를 볼 때, 지금의 자동차는 어느 날 갑자기 저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탈 것으로 발전해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둥근 바퀴가 생함으로 수레가 생했고, 수레가 생함으로 우마차가 생했고, 우마차가 생함으로 증기 자동차가, 증기자동차가 생함으로 가솔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가 생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발생하는데는 오랜 세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의 수많은 다양한 노력과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듯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계속해서 거슬러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조상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 명,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이 수많은 조상님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때인가 저 위의 조상님들 대에서는 부부였을 수도 있고, 형제나 부자지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 뿌리요, 한 가족, 한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씨줄 날줄로 서로 서로 얽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조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했고, 할아버님이 생함으로 부모님이 생했고, 증조 고조 할아버지가 생함으로 할아버님이 생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조상님들이 생함으로 지금의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론에서 보면 수많은 포유류가 있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기능과 구조 등이 모두 같으며, 목뼈를 놓고 보더라도 그 개수가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을 비롯한 목이 짧은 동물이나 모두 같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고래의 앞지느러미나 포유류의 앞발, 그리고 새의 날개 등도 지금은 서로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기본형은 같다고 한다. 이것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신체 구조와 기능이 바뀌었을 뿐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상의상관적인 시간적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과 인간 사이에도 시간적인 연기의 관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연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조상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조상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조상도 포함되며, 나아가 인간과 동물들의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홀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환경문제라는 것도 과거의 수많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재앙과 기상이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각종의 개발과 발전이 생겨남으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기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김으로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며 상황은 시간적으로 수많은 다른 존재와 상황들과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숫타니파타]

많은 사람들에게 소유가 기쁨이다.
집착하는 것을 얻었을 때 하늘을 날아갈 듯 기쁘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내 것’이라는 소유를 늘리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과제일 것이다.

자녀가 있으면 자녀로 인해 기쁘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고,
차가 있으면 차로 인해 기쁘다.

그러나 이 모든 소유에서 오는 기쁨은
항상 하지 않으며 근원적이지 않다.
언젠가 소유물은 없어지고 만다.
소유한 것이 소멸되었을 때 그에 따른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소유하더라도 소유에 대한 집착이 없을 때
그 때 참된 기쁨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우선 당장에 달콤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마침내 근심이 되고 만다.
집착으로써, 소유로써 행복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행복의 크기만 한
불행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기쁘지만
또한 자식으로 인해 괴롭고,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기쁘지만
돈 때문에 괴롭기도 하다.

모든 소유의 기쁨은 곧 괴로움으로 바뀐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세상의 모든 집착을 놓으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소유물에 집착하지 말라.
집착 없이 소유한다면 세상을 다 소유해도 상관없다.
언젠가 소멸되었을 때 마음에 아무런 파장이 없을 것이기에.
집착이 없으면 근심도 없다.
Posted by 법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