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31 초보 농사 이야기 자연이야기
  2. 2009.08.22 시골의 삶, 도시의 삶
  3. 2009.08.21 자연의 소리를 들으라


요즘 밝은도량에는
온갖 나무와 야생화들
그리고 산나물과 약초들
하늘거리는 바람소리
바람에 낙엽 서걱이는 소리까지
가만히 앉아 느껴보면
온갖 대자연의 소리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새소리가 얼마나 경쾌하게 들리는지 몰라요.
내가 가만히 들어 본 새소리만 해도
한 10가지는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그 울음소리들도 얼마나 신기하고 독특한지...

또 작년 가을까지 도량 주위에서 놀던
꿩 가족들도 겨우내 자취를 감추었는데
여름이 되면서 다시 도량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디로 다녀 온 건지,
아니면 겨울잠을 자고 온 건지는 몰라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좀 야속한 건
이녀석들이 예뻐서 다가가는데
조금만 인기척이 들리면 냅다 꼬리를 빼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몹시 서운해요.

요즘에는
이제 본격적인 여름꽃들 나물들 산야초들이
한창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메꽃,
망초꽃, 고들빼기꽃, 원추리꽃, 괭이밥꽃, 씀바귀꽃,
수영, 소리쟁이, 별꽃, 돌나물꽃, 뱀딸기열매,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고
이렇게 내가 알 수 있는 것들 외에도
아직까지 그 이름도 쓰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관심을 가지고 산야초들
산나물이며 약초 꽃들을 바라보고 공부하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기도 하고
그 신비로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한참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고 있는데
법당에서 지은 농사는
거의 수확이랄 게 없을 정도입니다.

산 중턱인데다
낙엽 떨어져 썩은 부엽토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
그냥 조금 개간해 씨만 뿌렸더니
이 녀석들이 처음에 조금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기운이 달리는지 영 올라오지를 못하데요.

정말이지 혹독하게 실패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 아래 마을 내려가면
누가 지은 농사고 할 거 없이
모두 다 잘 크고 싱싱한 채소들이 푸르른데
법당만 영 기척조차 없으니
신도님들께서 비료 조금만 뿌리자는 말이
왜 그리 혹하게 만들던지요.

내가 농사지어 팔아먹을 거였다면
아마도 당연히 비료를 주고 말았을 겁니다.

안 되겠다 싶어
인근 나무아래에서 부엽토를 긁어다가
한 몇 일 깔아주고,

인근 마을에 인심좋은 모종파는 할머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더니
좋은 거름을 한 포대 주셔서
그놈을 조금 섞어 뿌려주고는
씨앗을 다시 뿌려 보았습니다.

좀 늦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힘을 쓰고 올라오는 듯도 해요.

또 감자 심은 것들도
나무들 사이에 햇빛 조금씩 비치는 곳에 심었다보니
이녀석들이 햇빛 서로 받으려고 위로만 자꾸 크다가 넘어져요.
아무리 북주기를 해 줘도 고개를 떨구데요.

게다가 거름도 얼마 없다보니
줄기가 굵지는 못하고 위로만 크니
감자 농사도 영 시원치 못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조금씩 큰 것들도 있거든요.
저 아래 땅콩도 몇 개 안 되지만 잘 살고 있고,
상추도 거름 하나 없어서 하나도 안 크나보다 했더니
아래 모종한 상추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서 요즘 먹고 있습니다.

전에 강원도 영월에서 이모님댁 모종을 몇 개 얻어 온
배추도 처음에는 영 안 클것 같더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크고 있습니다.

콩 심은 곳은
법당 있는 쪽에서 조금 먼 곳이라
아예 물도 주지 않고 심기만 했었어요.
물론 처음 심을 때는 그 날 저녁 비 오는 날을 택했지요.

그래도 올해에는 꼬박꼬박
비가 제 때 내려 주어서
아직까지는 콩도 제법 올라오고 있습니다.
물론 콩이 아직 달리지는 않았으니
좀 더 지켜봐야 겠지만요.

또 법당에서 한 100미터 떨어진 곳에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참외, 호박
심어 둔 곳에도 거름이 덜 하다 보니
그리 크고 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더디게 크고는 있어요.

물론 모종 두세개가 이유없이 죽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죽은 곳 주변에 개미가 많은 곳도 있고,
칡뿌리가 방해하는 곳도 있어서
그런 것이 이유일 수 있겠다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내 농사는
모든 면에서 너무 게으르고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 신도님들이 성격이 좋아 말씀은 안 하셔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 한창일겁니다.

아직 많이 모르지만
그래도 전 좀 더 연구해 볼까 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힘으로
농사도 자연이 지어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연과 하나되는 농사법.

내가 뿌린 채소씨가 잘 안 크잖아요.
그런데 그 곁에서 잡초들은 정말 잘 자라고 있거든요.
잡초들은 거름 없어도 잘 자라고
비료 뿌려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름이 없어서가 아니고,
비료를 뿌리지 않아서가 아닌것 같습니다.
씨앗에 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 생각해 봅니다.

씨앗을 그동안 너무 약하게 키웠던 거지요.
사람의 힘으로 돌보고 비료도 주고, 잡초도 뿌려주고 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클 수 있는 야생의, 자생의 힘을
사람들이 없애버리지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요즘 나오는 무슨 종묘상에서 파는 씨앗들이
거의 그렇게 너무 약합니다.

자연의 것들은
따로 물 주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가지고도 잘 자라고,
거름이나 비료 주지 않아도
흙에 있는 것 만으로도 잘 자라고,
제초제나 농약 뿌리지 않아도
스스로 커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만 안 그렇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야생스럽지 않은
온실에서 조심스레 큰 여리디 여린 씨앗을
제 마음이나 신념만 가지고
야생의 잡초들과 경쟁을 시키다 보니
당연히 경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요즘 또 하나의 관찰이
어느정도 경쟁에서 지고 또 어느정도 이기는가
그것도 주 관심사 중에 하납니다.

아래 모종 심은 상추나 배추도
처음에는 시들시들하여 다 죽은 듯도 하고
영 거름이 없어 죽어가는 듯 하더니
그래도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식 다시 되살아납니다.

상추는 힘없이 그래도
다른 야생초들과 어렵게 겨루고 있어서 대견합니다.

상추 심은 곳에 피어났던
민들레 두 송이를 그대로 놓아두었었습니다.
민들레 잎이 크게 자라면 상추잎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영양가도 못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상추보다
그 곁에서 더 힘있게 자라나는 민들레 잎을
뜯어다가 상추처럼 쌈 싸 먹고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녀석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상추는 힘겹게 커가고 있고
그 속도도 한참을 더디게 크는 반면에,
민들레는 그야말로 쑥쑥 커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땅 똑같은 조건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요.

요즘 같아서는
정말이지 농사지으려고 씨 뿌릴 것 없겠다 싶어요.
이렇게 민들레처럼 그냥 야생의 것들을
따먹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요.
아니 너무 많은 게 아니라
따 먹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돕니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요즘 밥상에 오르는 것들만 해도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토끼풀,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등이 있어요.
여린 것은 먹을 수 있고
조금 크거나 꽃이 피면 못 먹는다는 것도
알고보면 못 먹는다는 게 아니고
좀 억새서 먹기 힘들다는 말이거든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좀 게으르게 하고,
내 노력 좀 덜 들이면서
자연의 노력을 흠뻑 받을 수 있도록
대자연의 온전한 흐름에
턱 내맡기면서 자랄 수 있도록
참된 부처님의 농사가 꼭 있을 것입니다.

그런 농사를
발견했으면 하고
모든 이들이
그런 대자연의 부처님 농법으로
농사 지을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완전 초보 농사꾼이
너무 말만 앞서는거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Posted by 법상



[강원도 양구의 해안마을-펀치볼]

오래도록 서울이나 서울 근교 경기도 쪽에서 생활을 하다가
이렇게 강원도 시골로 들어 와 보니
더욱 더 시골이라는 곳, 자연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본질적인 부분이었는지,
우리에게 있어 시골의 의미가 과연 어떤 것인지
더욱 선명해지고 뚜렷해진다.

분명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그 지역, 주변환경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

그 옛날 수많은 선배 수행자들께서
왜 그토록 깊은 산 속을 찾아 들어 갔는지
이제사 알 것도 같다.

물론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마음만 고요하게 선을 행하고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아란냐요, 적정한 수행처가 아니겠느냐만,
나같이 아직 모자라고 부족한 수행의 이력을 가진 이에게는
사는 곳의 영향이 참 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느낀다.

서울에 살게 되면
그리 바쁜 일이 없어도 늘상 바쁘다.
마음도 바쁘고,
정신도 바쁘고,
몸도 덩달아서 바쁘다.

그렇게 바쁜데는
주변의 영향이 클 수 밖에 없다.

차들도 바삐 지나가고,
지하철도, 버스도, 비행기도 정신 없이 달린다.
일도 많고,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사건 사고도 많고,
많은 것들이 너무 많이 넘쳐나다 보니
그 많은 것들 속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드러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빠져야 한다.

도시의 한 가운데 서 있으면서
사람들의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흔들리는 눈빛과 소란스런 소음, 쉴 새 없는 정신을 보게 되면서
내 마음도 덩달아 바빠진다.

도시의 하루는 정말이지 너무 바쁘다.
그런 바쁜 도시에 살다보면
사람도 저절로 도시를 닮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의 정신에 도시의 사고가 깃들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빛을 잃고 만다.

그러나 시골의 하루는 간소하고 느리다.
시간도 느릿 느릿 지나가고
사람도 느릿 느릿 스쳐 간다.

사람도 적고, 건물도 적고,
차도 적고, 일도 적다 보니
그리 바쁠 일이 없을 수 밖에.

사람들 마음은 언제나 여유롭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도시에서는 밥을 한 끼 먹어도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듯
전투적이고
밥이 그저 입을 거쳐 뱃속으로 돌진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시골에서 밥을 한 끼 먹는 일은
하루 일과 중에 아주 중요한 요소이며
밥도 찬도 그 맛을 보며 음미하며 먹을 수 있다.

도시에서는 일이 없어도
왠지 모를 불안감과 근심 걱정에 시달리거나,
쉬는 날이 주어지더라도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 중독에 빠지기 쉽지만,
시골에서는 흡사 일이 좀 많더라도
마음이 일의 무게에 억눌리지 않아 여유롭고
꼭 쉬는 날이 아니더라도 참으로 쉬는 휴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순간 순간 저절로 깨닫게 될 것도 같다.

도시에 살면
필요한 것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우선 어디를 가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넘쳐난다.
대형 마트만 한 번 가더라도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는 생필품들이
더욱 기능을 업그레이드 시켜 진열되어 있다.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가까운 곳에서 구할 수 있다.
아니 조금 필요치 않더라도
너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에 쓸데 없이 구하는 물건들이 넘쳐난다.

그렇게 너도 나도 좋은 소유물들을 쌓아 놓고 지내니
그것들을 본 이웃들은 덩달아
그 좋아보이는 것들을 사게 되고
그런 상호욕심의 작용이 도시를 더욱 넘쳐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없는 것이 많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온갖 기능을 갖춘 최신식 기계나 생필품들이 잘 없다.
기초적인 생필품들 또한
도시에서처럼 온갖 디자인과 기능들을 갖추어서
몇 곱절이나 비싸게 파는 것들 보다는
단순한 쓰임에 맞는 싼 것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절로 도시에서보다 소유도 줄고
최신식 무슨 무슨 기기로부터 자유로우니
생각도 단순해지고
욕심도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없는 것이 많다보니
그냥 없이 사는 일이 많아진다.
도시에서 같으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나가서 사게 되지만,
시골에서는 필요한 것이 있어도
도시까지 나가 사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없으면 없는대로 지내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때때로 없는대로 사는 방법을 익히는 일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본연의 지혜를 움트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없으면 없는대로 그냥 저냥 지낸다.
모두가 그렇게 지내다 보니
누구는 있는데 나는 없다고 서운할 것도 없고,
같이 없으니 사야겠다는 욕심도 적다.
설령 이웃집에 좋아보이는 물건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어디서 어떻게 구입해야 하는지 모르니 아예 포기를 하기도 쉽다.



작년도인가 신문에서 강원도 태백을 시작으로
인구 5만 내외의 소도시에도 대형마트점을 입점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대형마트회사들이 너도 나도 뛰어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얼마나 시골을 죽이는 일이고,
시골에 사는 즐거움을 없애는 일이며,
또한 시골의 작고 소박한 장사꾼들이나
장을 떠돌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분들에게는
그야말로 죽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친다.

대형 마트점에는
그 마을에서 난 농산물이며 생필품이 없고,
대신에 외국에서, 중국에서,
그야말로 다량으로 유통시켜야 하다 보니
다량으로 기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전부다.

심지어 먹거리 농산물 조차
다량으로 납품하는 것들이니
거기에 비료, 농약, 제초제, 방부제 등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무조건 다량으로 생산을 하려면
반환경적이고, 우리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이 뿌려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대형 마트점의 과일들은
외국에서 이 곳에 오기까지 한 두달이 지난 과일이
아주 생생한 모습으로 먹음직스레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그 과일에 뿌려진 농약과 방부제 등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그게 어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과일이겠는가.

대형마트점이 들어오면
우리 시골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고
좋아라 하는 사람들도 있고,
시골 사람들 다 죽인다고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
거의가 환영하는 사람들 일색이라고 하니
우리 시골을 지키는 사람들부터가
조금 더 지혜로운 시골 생활의 각성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야말로
마음 속으로는 부자를 꿈꾸며
부자가 되지 못한 박탈감에 사로잡혀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부유함을 버리고
지혜로운 깨달음에 입각하여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이 보배롭듯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도
스스로 도시에 가지 못한 것을 비하하면서
성공하지 못해, 자신이 없어 시골에 남아 있는다는 생각으로
어쩔 수 없이 시골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도시 생활의 편리함을 뿌리치고 나와
자발적이고도 지혜로운 삶의 선택으로써
시골의 삶, 귀농의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요즘같은 환경 위기의 세상에서 얼마나 보배로운 사람들이겠는가.

분명 주변환경이, 자기가 서 있는 곳의 조건이
자기를 결정짓는 일이 크다.
도시가 도시인들의 삶을 결정짓고,
시골이 시골인들의 삶을 결정짓는다.

저잣거리에서 그 경계를 이겨내며
수행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면
고요한 시골 마을, 적정처를 찾는 일은 어떻겠는가.

이렇게 도시에서보다
조금 포기하고 사는데도 이렇게 자유롭고 평화로우니
여기에서 조금 더 포기를 하고
조금 더 자연에 깃들며 자급할 수 있는 지혜를 지닌다면
아, 얼마나 내 삶은 풍요롭게 깨어날 수 있을 것인가.

도시로 도시로만 몰리고 쏠릴 것이 아니다.
시골로 시골로 깃드는 즐거움,
아, 이 즐거움을 그저 나홀로 즐기고 말 것인가.



이 장소를 Daum지도에서 확인해보세요.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 강원 양구군
도움말 Daum 지도

'산방한담 산사하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주는 평형을 맞추는 쪽으로 흐른다  (0) 2009.08.22
마음의 고향  (0) 2009.08.22
시골의 삶, 도시의 삶  (0) 2009.08.22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라  (0) 2009.08.04
마음의 고향  (0) 2009.08.04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0) 2009.07.26
Posted by 법상

 

 

          세상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평생가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고 여리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살뜰한 소리는 고요한 법계法界의 울림과 모든 존재 내면의 쩌렁쩌렁한 깨우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통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사에 찌든 온갖 소음들만 귀 고막이 터져라 듣고 산다. 세상의 소음에 익숙해지다 보면 작고 여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본래의 청음 능력을 상실한다.

  내 삶 속에 자연이라는 경이와 축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 년 반복되는 계절을 그냥 저냥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심연深淵의 떨림을 느끼면서부터 내 삶에 자연은 더없는 신비요 스승이며 벗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길에 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아주 문득 자연의 가녀린 그러나 청청한 소식을 들었다. 그 작은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치 지리산 전체가 아니 이 우주가 그대로 내게 속삭이는 듯, 침묵 속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은 둘도 없는 내 벗이요 도반이 되었다.

  우리들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본래는 세상의 작고 여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우주와 자연의 작지만 커다란 울림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니 그 본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지진해일이 있었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했다고 했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적으로 사는 원시 부족인들 또한 미리 피함으로써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물들이나 원시 부족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자들이다. 분명 대자연은 그러한 큰 피해에 앞서 그 어떤 힌트를 보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듣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 깃들어 삶을 살 때 대자연은 어머님 품처럼 우리를 품어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봄이 오니 한겨울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그러면서 봄나물이며 봄꽃들이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이며, 또 머리 속은 정신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이 맑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이 법계의 작지만 우주를 울리는 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만 듣고 사는 우리이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고 사는 우리이며,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만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근六根인들 어디 좀처럼 온전할 수 있겠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몸도 마음도 경쾌하게 추스릴 수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인 육경六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고 소박한 데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고요하게 앉으면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쩌렁쩌렁한 속 뜰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고, 이 우주의 작은 한 켠에서도 전 법계의 소리 없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맑게 비우고, 속 뜰의 소리며 대자연이 전해주는 맑고 밝은 소식을 들어보자.


 

현재 교보문고에서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책을
8월 한달간 40% 특별할인하여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는
그간의 목탁소리 글들을
핵심적인 것들만 모아 엮은 책입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