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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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Posted by 법상

날마다 새롭게 일어나라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법상 (무한,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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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건 달라도
마음만은
밝은 빛을 꿈꾸는 도반이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나 만일 그대가
현명하고 잘 화합하며
행실이 올바르고 영민한 동반자를 얻게 되 면
모든 재난을 극복할 수 있으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걸어가라.'

라던 [숫타니파타]의 말씀처럼
우린 함께 밝은 한줄기 빛을 기다리는
영원한 도반
영민한 동반자입니다.

도반과 함께 맞이하는
설레는 새벽처럼

도반과 함께
어둠을 깨치고
깨달음의 밝은 빛을 보려합니다.

누구든 먼 저 깨달으면
그 깨침을 나누기로 한
그 옛날 밝은 수행 도반의 그것처럼

우리도...
그런 밝은 도반입니다.

도반의
구도의 길에
아침 햇살이 떠오릅니다.

언젠가 다가올
깨침의 밝은 빛처럼
그렇게 우 리 앞을 환히 비춰줍니다.




그냥...
바라볼 일입니다.

바라보면...
급한 마음 여유로 와 지고,
복잡한 마음이 고요해 지고,
산란한 마음은 평온해 집니다.

바라볼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깊은 휴식을 가집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근심과 긴장에서 자유로워 집니다.

쉽게 성내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너그러워지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인격을 만들어줍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여유로와 집니다.

부드럽고 정갈 한 마음을 갖게 하고,
밝은 마음으로 삶을 긍정하게 되며,
겸손하여 하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 으며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고,
자기 중심 잡힌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판단에서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바른 견해(정견)을 만들어 줍니다.

바라볼 때
비로소 잊고 있었던
인생과 마주할 수 있게 됩니다.

바 라보는 순간이
깨어있는 순간이고,
열반의 순간이 됩니다.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
깨달음을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바라보기 수행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하며
궁극에 밝은 깨달음을 가져 다 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걱정이 생기고,
사랑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므로 사랑하지 않으면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은 미움의 뿌리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 고,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법집요송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데도 방법이 있습니다.
무조건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하 는 방법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잘 사랑하는 방법은
집착을 두지 않는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집착하 여 잡아두는데 있지 않고,
놓아주는데 그 아름다움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으면
만나거나 헤어지거 나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전재로 한 사랑이 아닌,
미움의 뿌리로서의 사랑이 아닌,
맑은 사랑을 하자는 겁니 다.

물론 밉다는 마음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사랑과 미움에 집착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도 괜찮 고,
미워하는 사람 만나도 괜찮은 것입니다.

사람 사는 일상이란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하는 것입 니다.
턱 놓고 살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도리가 나옵니다.

...

얼마전 김제동이 금강경이라고 인용하면서
위의 구절을 이야기 했었는데요,
사실은 법집요송경, 그리고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랍니다.

또 하나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하는 내용이었지요.
이것 또한 금강경이 아니라
숫타니파타라는 오래된 불교경전의 가르침입니다.




될 수 있다면
아침에 일어남과 동시에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 니다.

하루에 얼마를
깨어있는 시간으로 사는가!
알아차리고 살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처음엔 알아 차림이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그냥 휘둘려 살아온
동안의 삶이 습으로 눌러 앉았기 때문입니다.

내 주위 를 돌아보세요.
내 눈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을 찾는 겁니다.

그리고는
'관(觀)'이란 단어를 몇 개 만들어,
눈 가는 곳마다 붙여놓는 것입니다.

적어도
눈이 머무는 잠깐의 동안 만큼은
깨어있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관'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다른 모든 분별이며
일어나는 마음을 다 놓아버리고,
순간 집 중하는 것입니다.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알아차리면 되겠지만,
연습이 안 된 초보 수행자라면
호흡을 관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해 보는 것입 니다.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알아차림이 끊어지겠지만,
고개를 들면
또다시 알아차릴 수 있으니
그래도 좋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수행,
바라보기 수행,
마음 집중의 수행,
깨어있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
분명
조금씩 달라지는 나 를 볼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개념작용들은
환영과도 같은 공허한 헛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개념도, 관념도, 분별도, 상징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충만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도, 분별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며 충만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였고, 신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순간 그러한 텅빈 충만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충만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가 없는가.
이 세상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사유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은 이름짓기다.
무엇이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규정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징을 만들어 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감정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감정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름붙이고 상징화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작용, 이름짓고, 상을 짓는 작용
이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또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이 행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100번의 사랑을 했다면
거기에 또한 100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사랑의 상황 가운데
어떤 것만을 딱 찝어 ‘사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성공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연봉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부유하다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도 미움도, 성공도 실패도, 옳음도 그름도, 좋음도 나쁨도,
부자도 가난도, 중생도 부처도,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대충 이러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켰다.

이런 수많은 약속, 수많은 상징, 수많은 이름들은
그 어떤 기억과 감정과 찌꺼기들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이름짓고, 상징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오직 순수하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경험들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분별없이,
과거의 기억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과거의 상징이며 이름들과 섞이지 않은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징과 이름을 정해 놓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우리의 어떤 경험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기억 속에 저장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겨난
어떤 특정한 느낌이며 감정들을 ‘A'라고 이름을 짓기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접할 수 있는 그와 비슷한 감정들은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똑같이 ‘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것은 전혀 ‘A'가 아닌데도 똑같이 'A'로 불리는 것이다.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데 그저 이름은 똑같이 사랑인 것 처럼.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동적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판단하고 분별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한정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혀 새롭고 신선한 매 순간 순간을 늘상 그저 그렇고 새로울 것 없는
따분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과거의 ‘사랑’이 아프고 ‘싫은’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마주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해 보았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사랑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해석과 전제를 깔게 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상황과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상황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지고 해석되게 된다.
과거로 걸러지면서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으로 한정되고 만다.
과거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 기억이 가졌던 감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실수며, 오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아집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된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 ‘나빴던’ 감정은 회피하고 멀리하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집착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하고, 욕망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제까지고 욕망을 끝낼 수는 없다.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욕망을 끝낼 수 없다.
욕망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전체적으로 사유하고 깨달아
욕망이라는 것이 허망하게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볼 때 욕망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망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겠다거나, 욕망을 없애겠다는 생각 모두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일 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욕망과 집착과 아상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욕망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체적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되,
그 어떤 시비분별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좋거나 싫다는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자각하여 바라볼 때
욕망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
우리의 습관은 순간 과거의 어떤 비슷한 상황과 기억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판단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상황에 집착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 관조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용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욕망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욕망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태초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 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사진 : 강화도 적석사 낙조]


Posted by 법상







우리는 평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게 되고,
그렇게 흐르게 되면 좋은 느낌에는 애욕과 탐심을
싫은 느낌에는 증오와 진심을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은 방치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과정은 이윽고 애욕과 집착, 삼독심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좋고 싫은 등의 관념 혹은 편견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관념을 뭉쳐진 실재적 개체로 인정하게 되어
거기에 '나'라는 관념을 개입시켜 '나'를 실체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옳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것입니
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상(相)은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각종의 '느낌'을 놓침으로 인해 연이어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오는 물질적 정신적 인과 작용의 끊임없는
순환작용에 불과한 비실체적 허상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근본교설에서의 '무아(無我)' 개념 또한 이러한 연유입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나'라는 관념에서 시작되어
다시금 무수한 분별과 편견, 새로운 관념이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편견과 관념들을 고집하여 사실이라 받아들이지만
그 관념이란 우리들 습(習)으로 무장된 헛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가만히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관(觀)함에 있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관념이나
생각의 늪에 빠지면 안됩니다.
떠오르는 분별과 생각으로 대상을 관찰해선 안됩니다.

관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념과 생각이 게재되지 않는 순수한 주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이 게재되면 또 다른 관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저마다의 관념의 틀에 세상을 대입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법당에서 '목탁'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보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전의 경험과 기억, 관념을 목탁에 투사하여
자신의 관념대로 목탁에 대한 분별을 이야기 합니다.
'목탁이다', '소리나는 나무다', '둥글고 속이빈 소리나는 통이다' 하며
애써 편견없이 보려 하지만
우리네 관념의 틀은 너무나도 깊숙히 개입이 되어 있음만을 증명해 줄 뿐입
니다.

목탁을 바라보는 순간 좋고 나쁜 분별 또한 일어납니다.
불교신자이며 목탁이 친근한 이라면 좋다는 느낌을
또 타종교 신자라거나
심지어 산골자기에서 자라 목탁채로 맞으며 자란이가 있다면
싫은 느낌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각에서 목탁을 바라본다면
'나무'라는 관념도, '소리'난다는 생각도
'둥글다' '속이 비었다' '좋다' '싫다'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전에 만들어 오던 고정된 관념을 빼고 사물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은 고요할 것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좋고 싫음이 아닌 그저 '들릴 뿐'
무엇을 보아도 그저 '바라볼 뿐'
냄새를 맡아도 그저 '냄새날 뿐'
이와 같이 육근의 모든 감각기관은 오직 '할 뿐'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만나는 직장의 상사를 만난다거나
가족이며 친구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상사' '싫은 친구' '좋은 사람' 하는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 놓은 관념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늘상 관념의 늪에 빠져 그 대상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행복하고
싫은 사람 만나면 괴롭고
그렇듯 대상에 내 마음이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령 미워하던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일을 했더라도
내 마음의 편견 때문에 그렇게 쉽게 칭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에 빠져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저 일체의 모든 사물, 사람, 대상을 바라봄에
오직 고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고 담을 수 있도록
그런 열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워하던 사람, 싫어하는 음식, 도저히 못 할 일, 내 능력 밖의 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어설픈 관념일 뿐입니다.
놓아 버렸을 때 잡히지 않던 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어설픈 관념을
현실로까지 가져와 투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에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의 틀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묶어두는 관념의 사슬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현실에서 떠오르는 생각, 관념
그 자체의 '현상'은 현재의 실제이지만
그 관념과 생각을 파고 들어가보면 이미 그것은 공(空) 그 자체입니다.
거짓된 분별이며 인연따라 만들어진 허상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 몸과 마음의 '현상' 그 자체가 가장 참된 진실에 가깝습니다.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텅 빈 거짓 관념일 뿐 더 이상 진실일 수 없습니다.
거짓된 허상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참된 실재' 그 자체가 수행의 대상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라는 '보다 가까운 실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순간 미세하게 끼어드는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오는 일체의 무수한 관념을
그저 순수한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녹여야 할 것입니다.

관념의 틀은 '나다' 하는 아상과 아집(我執)을 형성하지만
관수행은 관념의 허상을 바로 봄으로써
관념의 소멸, 아상의 소멸, 아집의 소멸을 돕습니다.

'진리'는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 속에 있습니다.

오직 대상인 '현상'과
현상에 대한 고요한 '관찰'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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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꽃마리]

요즈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밝은도량 주위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도량에
또다른 사랑이
마음 속에서 싹튼다.

봄이 오고
산에 도량에 꽃이 피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이래서 봄이란
사람들 마음을 생기롭게 움트게 하는 계절.

연한 초록의 산빛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냥... 어찌 할 수 없게 만든다.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핀다는 말도 그냥 가슴에 팍팍 와 닿는다.

수많은 야생화들하고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새순이며 약초들 봄나물들이
얼마나 화알짝 신명나게 피어있는지
하루 종일 거닐며 바라만 보아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더구나
봄이 되고 보니
더욱 이 산의 멋스러움과 소중함이 더하다.

얼핏 보면
그냥 얕은 산이고
멋 없는 산일지 모르지만
이 산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하면
조금 과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주고 싶을 정도.

온갖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가
군락을 지어 피어오른 곳이 곳곳이고,
-이름을 명확하게 다 모르는 것이 너무 애석-

또한 작고 앙증맞은
우리꽃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꽃들로
주름잎, 꽃마리, 냉이꽃, 꽃다지, 민들레,
제비꽃, 하얀 각시제비꽃, 양지꽃,
뱀딸기꽃, 별꽃, 산괴불주머니...
등이 피어있고,

나무도 주로
참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오동나무 정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곳곳에 예쁜 꽃들을 피워내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봄 연출에 한창이고,

봄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두릅나무 새순도 막 올라와 있고,
고사리도 막 올라오고 있으며,
참나물 원추리 돋나물 민들레 제비꽃 꼭두서니 쑥 고들빼기도
봄나물로 무쳐 먹으니 입맛이 돈다.

민들레나 고들빼기는
쓴 봄나물의 명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야생의 그것이라 그런지
시장에서 파는 재배된 봄나물에 비해
써도 너무 쓰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란 계절에
너무 더워 수분이 많은
수박이나 참외 같은 것이 많이 나오듯,
봄에는
춘곤증 같은데 좋은
쓴 나물 들이 많이 나온다고,
봄에 쓴 나물들은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요즘 재배되는 나물이며 채소들은
그야말로 온실에서 고이 자라다 보니
모든 채소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맛이고,
거의가 연하고 질기지를 못하며,
저마다 특유의 쓴맛이라던가 특유의 향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비료주고, 똑같은 거름주고
늘 똑같은 땅에서 키워지니
맛도 다 똑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온실이나 검은비닐 같은 것으로
경쟁할 수 있는 다른 풀들이 아주 자라지 못하게 막아 놓고,
심지어 재초제로 채소외의 다른 것들은 다 죽게 해 버리니
경쟁할 수 없어 생명력이 약화되고
연하고 당장 입에는 질기지 않고 달지 모르겠지만
그 내적인 생명력은 그냥 작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사람도 저마다 특유의 삶이 있고, 향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특이하게 보일 것은 없겠으나,
요즘같이 교육도 똑같이 시키고
똑같은 것들만 똑같이 머릿속에 주입을 시키고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먹을거리에, 똑같은 주거환경이며
똑같은 TV를 보고, 책을 읽으며, 삶의 학습을 받아오고,
돈, 명예, 권력, 학벌, 등 똑같은 삶의 욕망을 삶의 제일가치로 알고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다 보니
저마다의 색깔이 없어지고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나툰
자신만의 화신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나답게 살 때
그것이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고,
부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자연도 그러하지만
애석하게도 요즘의 대자연은 인위적인 힘으로 인해
자기자신의 삶의 모습을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도량 주위에 돋아난 봄나물들만 캐어 먹어도
어지간한 채소는 농사지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천으로 먹을 것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모를 때는 그냥 다 잡초라고 치부해 버리고 지나치지만
조금만 알고 나면 봄들녁의 새싹들은
그야말로 다 먹을거리가 된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무슨 무슨 대형 마트에 가서 에어콘 바람 쐬가며 쇼핑도 하고
카트를 끌고다니며 채소를 고르는 것 보다
조금 덥더라도 차라리 산으로 들로 호미 하나 들고 뛰어들어
자기 자신의 무한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지.

사실 올바른 농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의 노력을 들여
심고 물주고 뿌리고 가꾸고
나아가 농약주고 풀 뽑아주고 비료에 재초까지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생각했을 때,
또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현재의 농사법을 생각했을 때,

그저 대자연에서
제 스스로 씨앗 뿌리고 가꾸고 만들어 내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먹거리일 것이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하고 깨어있는 농사고 농부의 일이 아닐까.

그랬을 때
인간의 노력과 욕심, 또 반환경적인 어리석음을 투여해서 일구어낸 먹거리 보다
더 생명력이 강할 것이고,
더 온전한 영양이 깃든 먹거리가 될 것이며
온전한 삶과 건강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고,
부처님의 음식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산은,
대자연은
가만히 두어도
날마다 비옥해 지지 않나.

물주고 가꾸고 비료주고
농약이며 재초재 비료 뿌려주고
갈아주고 잡초 뽑아주고 북주고
그러기 위해 온갖 것들을 돈들여 사야하고
노동력을 탕진해야 하며
많이 수확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뭐 그런 것 하나도 하지 않더라도
산은 항상 비옥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숲을 가꾸고
모든 생명들을 품어내고 있다.

그것이
참된 법계의 모습이고, 진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우리 사람들도 자연을 가까이 할수록
진리와 가까워지고
행복해지며
평화로움이 내면에 깃드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법신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

봄 따스한 햇살에
앞다투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봄의 생명을 보며
내 안의 생명도 한없이 피어남을 느낀다.



Posted by 법상




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Posted by 법상




[보물 제833호 기림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으며 삼존부처님은 현재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으로 부처와 중생 무명과 지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온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 참생명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부처님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이 성성히 깨어 있는 깨침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금 이곳 현실까지 불러들여
집착하고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괴로움으로
지금 현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재, 바로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를 살 수도, 미래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의 마음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이는 마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완벽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이 말하길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싸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을 올바로 가질 것을 경책하는 말입니다.
바로 현재를 올바로 사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배고플 때 오직 먹기만하고,
졸리면 온전히 자기만할 수 있다면 참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위에 충실히 온전히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온전히 밥 먹는 것에 집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고플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밥먹으며 딴 생각하고 딴 짓하고
밥 먹는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겉 모습은 똑같이 밥을 먹고 있더라도
이렇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나는 것입니다.

틱냩한 스님은 말씀하시길
"설거지를 위한 설거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설거지를 할 때에 오직 설거지만 할 수 있다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기 싫고 짜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수행하기 싫고, 절하기 싫고, 남편 뒷바라지 하기 싫고...
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빨리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나고 싫고 빨리 끝내려는 마음만 앞서게 됩니다.

이렇게 청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다만 깨끗하다는 결과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얼마나 깨끗할까요.
그러나 청소를 위해 청소를 한 수행자는
그 행위 속에 수행의 힘까지 남게 됩니다.

청소를 하며 마음을 집중하고 청소하는 그 마음에 온 힘을 기울였기에
청소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방하착 한 것이 됩니다.
빨리 하고 나서 쉬어야지 하는 게으른 마음이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대학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에 충실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대학합격이라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면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일을 할 때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퇴근할 시간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일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봉급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우리는 돈은 벌 수 있을지언정 진정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그 자체를 위해 절하는 그 순간, 염불하는 그 순간이
그때 그때 목표가 되어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수행해서 성불해야지 라든가
빨리 수행해서 복많이 짓고 편한 삶을 살고 집안이 편안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수행하고 절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른 시일안에 수행의 결과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을 때 개종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잘되면 내탓
못되면 부처님 탓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남편 뒤 바라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때에도
오직 그때 그때 내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그 뒷바라지 자체에 충실할 일입니다.

뒷바라지 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남편이 승진을 못할 때, 자식이 대학에 떨어질 때,
자신에게 잘 못해줄 때 괴로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데 하는 상(相)이 있으면
자식이나 남편이 내게 서운하게 대할 때면 괴로워집니다.
오직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부처님 시봉하듯이 현실, 현실을 충실히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처럼 모시며 시봉하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집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집에서 남편을 대할 때, 자식, 부모님을 대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시봉한다는 마음으로 현실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크나큰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상 하나 하나,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책 읽는 것,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 부모님 모시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
회사에서 일하는 것, 친구들과 모여 술마시러 가고 노래방가서 놀고 즐기는
그 속에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때 그때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상의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인 것입니다.

절에서 애써서 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행하는 삶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현실에 충실하는 그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한 다는 것은 완벽하게 현실을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현실을 올바로 집중한다는 것은
항상 현실의 마음과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방하착(放下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올바로 관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착(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에 얽매이면
우리는 이미 그 실체가 없는 괴로움에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리며 한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고 방하착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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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문경 김용사]

분별하지 않으며
묵묵히 비추어 보십시요.

우리는 순간 순간
끊임없이 경계를 마주하게 됩니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의 경계를 마주하는 것이지요.

경계를 마주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는 자동적으로, 반사적으로
분별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보통 사람들일 경우
100가지 경계를 만나면 100가지 분별을 일으킵니다.

분별을 일으킬 때는
우선 앞선 나의 기억이나, 경험, 업식들을
하나 하나 샅샅이 뒤진 뒤에
지금 이 경계와 유사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게 되고,
그 색안경 같은 업식의 거울로
지금의 경계를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눈(안근)으로 장미꽃을 보면서(색경)
옛 애인에게 주었던 100송이의 장미꽃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것이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면
장미꽃 또한 기분 좋은 분별을 만들어 낼 것이고,
이후에 헤어진 애인이었다면
서글퍼 진다거나, 그립다거나, 원망스럽다거나
심지어는 격한 감정이 올라오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납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우리 마음 속에서는 충분히 그 사람을 분
별해 버립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건 나쁜 사람이건,
어떤 사람인지 그것은 둘째 문제이지
그 사람의 본래 바탕에는 우선 관심이 없습니다.
우선 첫째는 내 안에서 분별부터 하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업식이 본래부터 텅 비어있다면
어찌 처음 보는 사람을,
처음 보는 풍경을
처음 행하는 일들에 대해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 분별할 수도 없고 분별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별을 짓는 이유는 업 때문인 것이지요.

처음 보는 어떤 스님이 설법을 하십니다.
그 스님은 한 분이고 한 가지 설법을 하셨을 뿐이지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분의 스님을 분별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한 분이 아니라 듣는 사람 수 만큼의 스님이 되어 버립니다.

설법을 잘한다, 못한다,
말투는 어떻고,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쉽고 어렵고, 훌륭하고 그렇지 못하고,
내 안에서 업식이 비춰주는 한 끊임없는 분별이 이어집니다.

스님의 똑같은 말 한마디를 가지고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해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르게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대로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 신기한 것들을 발견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무엇을 듣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저도 모르게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 TV를 보면서도
연예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꼭 이런 저런 한마디를 거들고 끼어들어야 하고,
사소한 몸짓 하나, 몸매 하나를 보고도
꼭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나무라고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
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지를 못하는 거지요.
TV를 보고 있지만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궁시렁 궁시렁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은
결코 비추어 보지 못하고
매냥 남의 모습, 남의 말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거지요.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 보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말인 줄 잘 알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소득이 없음을 알고 있더라도
경계를 만나면 또다시 금새 궁시렁 거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업식인 것이지요.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경계를 만나더라도
업식에 비추어
입으로 몸으로 아니면 생각으로
끊임없이 분별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이어갑니다.

이것이 모든 이들의 병통입니다.
이 분별이 바로 모든 업의 시작이기 때문이지요.
업에 비추어 모든 분별을 일으키고,
또 그 분별은 또다른 업의 씨앗이 되고 말입니다.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지독한 윤회의 수레바퀴 아니겠습니까.

수행이란
바로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비우고 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짓지 않도록 하고,
업의 그림자인
안에서 올라오는 경계며,
바깥에서 다가오는 경계를
그 자리에서 녹여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계와 맞닿은 순간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분별을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를 보고
싫다거나 좋다는 분별이 일어날 때,
바로 그 분별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일을 하면서
답답하다, 버겁다 하는 분별이 일어날 때
그 분별을 즉한 순간 비추어 보고 비워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을 때(눈)
또 무엇을 들었을 때(귀),
무슨 냄새를 맡았을 때(코),
무슨 음식을 먹고 맛을 볼 때(혀),
무슨 대상을 감촉하여 부딪기고 느낄 때(몸),
어떤 생각이 올라올 때(뜻),
그 여섯가지 경계와 맞닫는 순간
분명 분별은 올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올라오는 분별을 잘 단속해야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분별이 올라올 때
잘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대상을 보고 좋게 분별하여 집착과 애욕을 만들어 내고,
싫은 대상을 보고 싫게 분별하여 미움과 증오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이 선업과 악업의 씨앗이 되며
그로 인해 우리는 또다른 업을 짓게 되어
괴로운 삶을 스스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바로 그 때를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잘 비추어 보면 그대로 비워집니다.
관조(觀照)가 깊어지면 저절로 방하착이 됩니다.

모든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이란
분별을 여의는 일입니다.
분별을 여의기 위해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별하지 마세요.
그냥 담담해 지고 여여해 지세요.
이렇다 저렇다 취사 선택하지 말고,
잘잘못을 따지려 들지 마세요.
한 티끌도 분별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억지로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업이 있는 이상
저절로 분별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분별이 올라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잘 비추어 보아 관하라는 것이지요.

분별이 없으려며는
그냥 다 받아들이고,
이래도 괜찮고 저래도 괜찮아야 합니다.
다 인정하고 수용하며 섭수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묵묵히 비추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깨어있게 되고,
분별이 잦아들게 되어
어느 순간 무념(無念) 무심(無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지금 분별 녹이는 연습을 자꾸 하고,
지금 관하는 연습을 자꾸 해야
그것이 성불인연 짓는 것이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성불할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도 그냥 놓아버리세요.
그것이 아닙니다.

나중이란 아무 필요도 없고
또 그런건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비추어 보는 그 순간이
그대로 본래자리 자성부처님의 현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가 되야 하고,
부처님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무량수 무량광 부처 마음을 쓰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부처이며,
부처 마음으로 법계를 호령하며 산다는 것이,
이 꽉 찬 우주 법계를 자유롭게 꺼내 쓰고
자유자재 하게 굴리며 산다는 것이 말입니다.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하여
언젠가는 깨닫겠다, 부처 되겠다 그러면
공부 못합니다.

공부는 지금 이 순간 하는 것이고,
깨달음도 지금 이 순간의 일입니다.

다시한번 말하건데
애쓰지 마세요.
깨달으려 애쓰지 말고
성불하려 노력하지 마세요.

묵묵히 비추어 보고
온갖 분별을 여의기만 하면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자성불 본래자리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욕심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에 대하여
애착하고 좋아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이다.

또한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감촉을 접촉하여 그것을 만날 때
애착하고 즐겨하며 생각하고 물들어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대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거나 태어나지 않았거나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써
존재하는 자연일 뿐이니
우리가 항상 보고 듣는 사물 그 자체가 욕심은 아니다.

이 세상의 갖가지 대상에 대하여
보고 들으면서 느끼고 생각하여 분별하는 것이 우리의 욕심이다.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집착심을 잘 다스리는 것이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길이다.

[잡아함경]


눈으로 사물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감촉을 느낄 때,
또한 생각으로 온갖 번뇌를 일으킬 때,
바로 그 순간 집착이 생겨난다.

눈귀코혀몸뜻이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법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을 잘 비추어 보고 다스려야 한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들은 바로 그 순간 일어난다.

눈이 대상을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일으키고,
귀로 칭찬이나 비난을 들음으로써 좋고 싫은 번뇌가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번뇌 분별의 시작이 바로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이 세상의 여섯 가지 대상을 만날 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접촉점을 잘 살펴야 한다.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이 일어나는지, 어떤 분별이 일어나는지,
어떤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잘 살피고 지켜보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관찰하면
다만 주관이 대상을 만날 뿐,
더 이상 분별과 집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귀로 어떤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순식간에 그 말에 대해 좋거나 나쁘다는 분별을 하곤 한다.
바로 그 순간, 말과 귀의 접촉점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귀로 말을 듣는 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말은 중립적인 말일 뿐이지 좋거나 싫은 말이 아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좋거나 나쁜 어떤 극단으로 몰고 가려는 습성이 있다.
이 나쁜 습성의 치료약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에 접촉하여 일어나는
분별과 집착을 잘 관하여 다스림으로써
욕심과 집착을 벗어나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수행의 길이고, 명상의 길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