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8강-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 시제법공상

 

앞에서 반야경의 핵심 사상인 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공(空)이란, 존재 본질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금강경에서도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즉 공임을 올바로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한 것입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장에서, 일체제법은 공상이기에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공의 모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모양을 살펴보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법(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진리, 최고의 실재(實在)’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가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 때, 언제나 법의 개념 정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에서 ‘법(法)’도 역시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석하면, ‘이 모든 존재의 공한 모양은’이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과 멸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불’이란 부정의 의미라기 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입니다. 인연생기하여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不]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영원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인 것입니다. 누군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며 인생이 허무함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육체가 인연이 다해 쇠해졌기에 겉껍데기를 갈아치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롭고, 보다 젊고, 건강한 몸을 받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나름대로의 업에 걸맞은 껍데기를 찾아 다시 태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반복하는데, 일본 동경대학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간은 약 7년 사이에 몸의 전체 세포가 바뀐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몸과 7년 후 내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포는 죽고 살지만, 좀 더 크게 인간을 놓고 보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300여개) 소립자들로 상호 형성되어 서로 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 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구성하는 실체적인 기본 입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어떤 존재라도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수많은 인과 연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즉 인연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생멸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 유와 무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공의 두 번째 모양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본성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정’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작업복을 입으며, 의례 옷이 더럽혀질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더러워지더라도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맞선을 보려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나갔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작은 잡티가 있어도 신경이 쓰이고, 더럽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할 때 훨씬 더 더러운 데도 말이지요. 이처럼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도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다른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있지 않은 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상을 내며, 더럽다는 상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분별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련대회를 진행하다 보면 초심자이신 분들이 발우공양을 하기 싫어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여쭈었더니 한마디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김치를 휘휘 둘러 숭늉으로 씻고는 다시 마시는 것에 대해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밥상을 차려 놓고 밥을 먹고 나서 김치를 먹고 숭늉을 마시면 깨끗하고, 이것을 발우에 놓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이지요. 다만, 시간적으로 선후가 정해지면 깨끗하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은 우리의 분별이지, 실제로 더럽고 깨끗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언가를 판단할 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있기에,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비해서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더럽고 깨끗한 가치의 분별은 좀 더 넓게 확대하여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불구부정이란 공성의 이해는, 어떤 사물에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없애려는 사상이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인종, 학력, 재산, 명예 등에 있어서도 불구부정임을 올바로 깨닫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순수하게 다가서기보다는, 온갖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신분, 재산의 유무, 학력의 고저 등에 의해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못나고 잘난 것이 어디 있을 수 있으며, 청정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나뉘어 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의 바탕, 연기법의 바탕에서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본래 더럽다거나 청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간 청정성의 회복이며, 인간 무죄의 엄숙한 선언인 것입니다.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러워질래야 더러워질 수 없는 절대 청정한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행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연가합(因緣加合)으로 잠시동안 귀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는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증불감

 

마지막으로 공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면을 봅시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보시하면 아깝고,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소유와 나눔이 오히려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성의 원만 구족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부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그를 부유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과 소욕의 정신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다’, 혹은 ‘너다’ 하고, 너와 나를 갈라놓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상(我相), 아집(我執) 때문에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아상이 없는 곳에 네 것, 내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어디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만 원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이 백만 원은 한없이 가난한 인도나 북한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 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천 원, 몇만 원과도 같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만 원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 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공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 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즉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 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습니다.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동체(同體)’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내 것이 줄어들면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나와 다르지 않거늘 무엇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금강경과 마음공부 동영상

이른 새벽부터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숲이 더없이 생기롭습니다.
흙이 질펀하게 감로의 물을 빨아들여
봄의 생명을 잉태하는데 더욱 바빠지겠습니다.

이곳 강원도는 아직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추워
다음 주 쯤에나 씨앗을 뿌리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멀게는 5년 쯤 전부터
또 가깝게는 작년 말부터 뿌려두었던
금강경의 씨앗이
이제서야 그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금강경과 마음공부'라는 이름으로
출간을 하여
현재 서점에 베포를 마쳤다고 합니다.

내용이 많다 보니
교정 보고 또 수정 정정도 하고
하나 하나 꼼꼼히 훑어 보면서 다시금 복습도 한다고
5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러 버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책 분량이 좀 많아졌습니다.
약 600 페이지 분량이니
이 금강경 공부가 만만치는 않아 보입니다.
아무래도 쉽게 풀어 쓰고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풀어 쓰다 보니
이렇게 길어진 듯 합니다.

이번 원고와 편집은 특히 작년에
함께 네팔 순례를 다녀왔던 도반 스님들께서
함께 도움과 조언도 주셨고,
아울러 네팔에서 찍어왔던 수많은 사진들을
선뜻 베풀어 주셔서
자칫 딱딱해 지기 쉬운 금강경 원고 곳곳에
시원스런 사진들을 많이 넣을 수 있었습니다.

도반 스님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출판사에 보내면서
애초에 흑백으로 찍으려던 계획을 바꾸어
출판사에서 사진이 너무 좋다고
올컬러로 사진을 살리는 방향으로 편집을 해 주셨습니다.

아울러 말씀드렸듯이
금강경 독송집 내지는 '금강경 독송 지침서'의 성격으로
'금강경 독송'이라는 작은 책도 함께 출간하였고,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에 함께 붙여서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을 사시는 분들께는
한 권씩 함께 드릴 수 있도록 출판사에서 배려 해 주셨습니다.

금강경 독송 책에는
금강경 우리말 번역과 한문본을 함께 넣어
금강경 독송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였고,
아울러 뒷쪽에는 '금강경 수행을 위한 길잡이 혹은 지침'들을
조금 자세히 적어 두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이번 금강경 책에는
경전을 유포한다는 마음으로
이래저래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이렇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아울러 금강경 독송을 위한 독송집인 '금강경 독송' 책자와
금강경 해설서인 '금강경과 마음공부' 책을
법보시 하시거나,
영가천도나 사십구재 법보시 용으로 구입하실 경우에는
60% 할인 된 금액으로 출판사에서 보내드린다고 하십니다.

책값이 25,000원이니까,
법보시 할인가는 15,000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책에 대해서는
10권 이상 구입하시는 분들께도 15,000원의 금액으로
할인하여 보내드리도록 이야기를 하였으니,
10권이상 법보시 용으로 구입하실 분들께서는
이메일 (buda1109@hanmail.net)로 주소와 전화번호 권수를
보내주시면 출판사에 연락하여 책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두권씩 책을 구입하실 분들께서는
아래의 책 제목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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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과 마음공부(교보문고)
금강경과 마음공부(인터파크)
금강경과 마음공부(리브로)
금강경과 마음공부(yes24)
금강경과 마음공부(반디북)
금강경과 마음공부(영풍문고)
금강경과 마음공부(알라딘)

다음은
출판사에서 보내 온
'금강경과 마음공부'관련 내용들입니다.



인류 정신사의 최고 정점인 금강경과 명쾌한 풀이
『금강경과 마음공부』 (금강경 독송 포함, 양장본)


불교출판문화협회 ‘올해의 불서10’에 선정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에 이어
5년여에 걸쳐 쓰인 또 하나의 생활 속 경전 실천서
네티즌들이 극찬한 바로 그 책!!

불교출판문화협회 선정 ‘올해의 불서10’에 선정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를 저술한 법상스님은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출간 5년 만에 반야심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경을 풀이하여 『금강경과 마음공부』를 출간했다. 인터넷에서 생활수행도량 ‘목탁소 리(www.moktaksori.org)’를 개설하여 많은 이들에게 수행과 명상, 자연과 환경, 종교와 지혜를 주제로 한 진지한 깨침의 이야기들을 전하면 서 네티즌들에게 널리 알려진 법상 스님은 생활 속에서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명상수행과 자연 속에서의 조화로움을 찾는 깨침의 글들을 조계 종 포교 사이트인 ‘달마넷’ ‘한국일보’ ‘법보신문’ 등에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 진리의 보고, 금강경

『금강경(金剛經)』은 많은 불교의 경전 가운데에서도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는 경전이다. 『금강 경』은 600권에 달하는 『대반야경』 중 577부에 들어있는 「능단금강분」을 말하며, 그 구체적 명칭은 『금강반야바라밀경』 혹은 『능단금강반 야바라밀경』이다. 이 『금강경』은 600권이나 되는 『반야경』 가운데에서도 경의 중심이 되는 사상인 반야사상, 공사상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을 짧 고 간략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방대한 분량인 『반야경』을 공부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널리 두루 읽혀지는 경전이다.

금강경은 모든 이들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가슴이 뻥 뚫리도록 명쾌하게 풀어주고, 어떻게 살아갈 것 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철하게 지적해 주며, 나아가 보다 조화롭고 평화로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대안적인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 는 보기 드문 진리의 보고다.

그런데 그동안 금강경은 그것이 지니는 진리의 가치에 비해 세상에서 너무 외면 받아온 감이 있다. 그 이유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너무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사실 『금강경』은 해설서를 보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최 대한 이해하기 쉽게, 또한 현실의 삶 속에서 어떻게 『금강경』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쓰였다.

현재 사람들이 쉽게 접하며 독송하고 공부하는 『금강경』은 요진의 구마라집이 번역한 번역본이다. 이 번역본이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가장 널리 읽혀지고 있으며, 이 책에서도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기본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구 마라집의 번역본이 산스크리트 원전과 비교해 볼 때 다소 미흡하거나 내용이 빠져 있는 부분도 더러 있는 것을 감안하여, 경전의 내용에서 꼭 필요 한 부분이라면 산스크리트 원문 및 현장스님의 번역본을 비교하면서 경전을 강의하였다. 그래서 더 풍부하고 폭넓으며, 원전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설명을 하는 장점이 있다.

* 삶속으로 이끌려오는 진리의 말씀

저자는 『금강경과 마음공부』에서 될 수 있는 한 『금강경』을 우리들의 세상으로 끌어내려 우리들의 근기에서 우리들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동안 역사 이래로 많은 해설가들이 금강경을 해석해 왔지만 그 깊이 있는 해석 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 금강경의 존재이유를 분명히 보여 주는 데는 여전히 어렵다는 한계를 넘지 못한 듯 보인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금강경이라는 경전은 단연코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 최고의 정점에 서 있는 몇 안 되 는 가르침 중 하나다. 금강경은 모든 이들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의문을 가슴이 뻥 뚫리도록 명쾌하게 풀어주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구체 적으로 명철하게 지적해 주며, 나아가 보다 조화롭고 평화로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대안적인 해답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보기 드문 진리의 보 고다. 금강경은 우리를 중심 잡힌 온전한 삶으로 이끈다.

< 금강경과 마음공부를 향해 쏟아진 네티즌들의 뜨거운 찬사!! >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합니다. 여러 금강경 강의 책들을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설명해주 신 분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법상스님의 글은 금강경과 너무나 잘 어울립니다. 스님의 글은 진리를 닮은 물과 같아서 맑고 투명하고 유연합니 다. 도대체 얼마나 수행을 하면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이런 문체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 길상

스님 강의를 보면 세상만사 온갖 시름이 일시에 확 걷히는 느낌입니다. 스님의 강의를 들으니 환희심 이 솟아나며 ‘순간순간 깨어있으라’는 가르침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금강경 공부는 하면 할수록 뼈에 사무치도록 가슴에 와 닿습니다. - jikeunhye

희유합니다. 이러한 해설을 듣는 것만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어느 책을 보아도 스님의 해설보다 자세한 설명 은 없었습니다. - 죄 많은 중생

스님의 글은 항상 한꺼번에 읽게 되지 않는군요. 조금 읽다, 감동으로 인하여, 그것을 가지고 내 안으 로 가지고 들어가, 소가 되새김질하듯이 반추합니다. 가슴 저변에서부터 나오는 감격! 금강경 풀이를 이렇게 쉽게, 깊게 해주시는 스님, 감사합니 다. - 본원심

금강경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무한한 진리에 온 몸이 전율을 일으킵니다. 법상스님이 올려주시는 금강 경 강설로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불자로서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할지, 살아가는데 중심이 섰습니다. 지금까지 어렵다 고만 생각했던 금강경이 너무나 쉽게 제게 다가왔습니다. 법상스님의 금강경 강설 공부를 하면서 그 큰 가르침에 때론 환희심에, 때론 가 슴 가득 밀려오는 충만함에, 때론 나의 무명을 참회하면서 나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친구에게 달려가 금강경에 대해 이야기 해주기도 했습니다. - 관음행

여시아독(如是我讀)한 것 중 가장 자세히 오늘의 언어로 된 금강경을 만났습니다. 정말 무주상 법보시입니다. 감사합니 다. - 아고타행

이 순간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행운이고 머물 수 있는 즐 거움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혜명화

불교가 이 땅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 봉배산 숲속

<책속 문장 밑줄 긋기>

* 우리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바로 그 ‘무엇’의 실체가 허망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내가 목숨 걸고 쟁취하려 했던 바로 그 ‘무엇’이 사실은 그렇게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때 바로 그 ‘무엇’에 대한 괴 로움은 끝이 나는 것이다.

* 진리는 그 무엇도 붙잡고 있기 않다. 항상 빈손이며, 텅 비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다만 우 리 인간들이 스스로 붙잡을 것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 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 도 아무 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 다.

*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 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 『금강경』을 아무리 잘 공부했고, 수지독송했으며, 다른 이를 위해 수많은 위인연설을 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에 그렇게 했다고 하는 생각과 상이 있다면 전혀 『금강경』을 공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금강경』을 더럽힌 것이다. … 매 순간순간 나의 『금강경』 공부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드러낸 것인가, 아니면 파괴한 것인가를 잘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한 다.

<지은이>

법상(法相)

자연과 더불어 시골에서 어린 날을 보낸 스님은 동국대와 동 대학원에서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불심도 문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생생한 삶이 곧 수행처라는 생각으로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www.moktaksori.org)’를 개설하여 많은 이들에 게 수행과 명상, 자연과 환경, 종교와 지혜를 주제로 한 진지한 깨침의 이야기들을 전하면서부터 네티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생활 속 에서 삶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명상수행과 자연 속에서의 조화로움을 찾는 깨침의 글들을 조계종 포교 사이트인 ‘달마넷’, ‘한국일보’, ‘법 보신문’ 등에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기도 했으며, 불교출판문화협회에서 선정하는 ‘올 해의 불서 10’에 『반야심경과 마음공부』가 선정되기도 했다. ‘06년 겨울 강원도 양구의 산골 작은 암자 도솔사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놓아버림과 내 적 휴식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며 살고 있다. 저서로는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생활수행이야기』『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 히 걸어라』『관심』『반야심경과 마음공부』등이 있다.

목탁소리 : http://www.moktaksori.org

<목차>

서문
금강경, 어떤 경전인가
경전의 제목, 금강반야바라밀경

제1분 법회인유분 - 법회가 열리게 된 연유
제2분 선현기청분 -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함
제3분 대승정종분 - 대승의 바른 종지
제4분 묘행무주분 - 머무름 없는 묘행
제5분 여리실견분 - 진리의 참 모습을 보라
제6분 정신희유분 - 바른 믿음은 드물다
제7분 무득무설분 -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
제8분 의법출생분 - 이 법에 의해 모든 가르침이 나온다
제9분 일상무상분 - 깨달음이란 상도 없다
제10분 장엄정토분 - 정토를 장엄하다
제11분 무위복승분 - 무위의 복은 수승하다
제12분 존중정교분 - 바른 법을 존중하라  
제13분 여법수지분 - 여법하게 받아 지니라
제14분 이상적멸분 - 상을 떠나면 적멸이다  
제15분 지경공덕분 - 경을 지니는 공덕
제16분 능정업장분 - 업장을 깨끗이 맑힘  
제17분 구경무아분 - 구경에 내가 사라지다
제18분 일체동관분 - 일체를 하나로 관하라
제19분 법계통화분 - 법계를 모두 교화하다
제20분 이색이상분 - 형상과 모습을 여의다
제21분 비설소설분 - 설함 없이 설하다
제22분 무법가득분 - 얻을 법이 없다
제23분 정심행선분 -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제24분 복지무비분 -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
제25분 화무소화분 - 교화하는 바 없이 교화하다
제26분 법신비상분- 법신은 상이 아니다
제27분 무단무멸분 - 단멸함이 없다
제28분 불수불탐분 -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제29분 위의적정분 - 위의가 적정하다
제30분 일합이상분 - 합쳐진 세계나 부수어진 미진이라는 상을 버리라
제31분 지견불생분 - 지견을 내세우지 말라
제32분 응화비진분 - 응화신은 참이 아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