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행복해 지는 방법
  -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나와 부처와 신은 하나다

 

불성(佛性), 신성(神性)이 있다는 말은

곧 나와 부처, 나와 신이 하나란 뜻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하나란 뜻이다.

 

일체 모든 존재가 하나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것도 나약하고 어리석은 중생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부처로써, 신으로써 완전한 하나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내가 바로 부처라는

동체(同體)와 불이(不二)사상이야말로

인류의 오랜 성자, 현자, 선각자들과

모든 종교들의 공통된 가르침이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에

내가 상대에게 행하는 것이 곧 나에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상대를 도울 때 사실은 나 자신을 돕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을 도우면서도 도왔다는 상을 낼 필요가 없는 이유가

상대방과 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며 내가 나에게 밥을 보시했다고 하지 않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보시한 것은

사실은 내가 나에게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상 없이 보시하라, 무주상 보시하라,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

그것은 바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한다는 윤리적인 지침이 아니라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다면

당연히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불성과 신성이란 것은

부처님의 성품, 신의 성품 그 자체라는 것이 아닌가.

부처님이나 신은 불완전하거나, 부족한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꽉 차 있고, 완전하며, 온전한 분들이다.

그렇기에 사실은 불성과 신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라는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그렇기에 사실은 보시해도 한 것이 아니다.

 

너도 완전하고 나도 완전하며,

너도 풍요롭고 나도 풍요로운데

무엇을 주고 받을 것이 있는가!

주고 받았다 한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에너지의 이동일 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거나,

주어서 대단하거나 주지 못해 아쉬울 것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상을 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을 내지 말고 보시하라는 말은

‘이렇게 하라’는 윤리 규정이거나, 명령이 아니라

그저 진리가 그러하기 때문에 나온 가르침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불성이 있다, 신성이 있다는 말은

곧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했다.

아니 어떻게 부처가 신이 불완전할 수 있단 말인가.

 

완전하고 완벽하며 충분하고 충만하다.

그렇기에 불성과, 신성과 다르지 않은 이 세상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써 더없이 완벽한 존재이다.

모두가 신이요 붓다로써 완전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 세상 자체가 완전하다는 의미다.

이 세상의 본 바탕, 근원은 이러한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완전성을 이루고 있는 힘이 바로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사랑의 에너지,

둘이 아닌 완전한 자비, 동체대비 그 자체인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란 희망의 약속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현실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내가 완전한 부처란 말인가?

내가 어찌 신이란 말인가?

그건 너무 엄청난 이야기이며,

또한 너무 불경스러운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다.

진실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2,500년 전에 부처님께서 진실로 말씀해 주셨고,

인류의 수많은 성인들도 같은 말을 해 왔다.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모두가 부처였다고 말씀하셨다.

구제해야 할 중생이 따로 없다고 하셨다.

 

 

 

 

삶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한 진실된 말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믿지 못할까?

왜일까?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내 스스로 ‘나쁘다’고 판단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판단과 분별작용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무분별의 중립적인 현실에

끊임없이 판단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괴롭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본래는 완전한 자비의 불성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 그 자체만 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악마, 사탄, 마왕 파순이

우리를 꼬셔서 지옥으로 빠뜨린다고?

 

그렇지 않다.

악마도 사탄도 마왕도 없다.

사랑 밖에 없는 완전한 우주법계 어느 곳에

마왕이나 악마, 사탄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과 사탄이 싸운다는 것은 순전한 상징일 뿐이고,

부처와 마왕 파순의 싸움 또한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상징한 것일 뿐이다.

 

사랑의 신이 세상을 창조한 근원이라면

어찌 사탄이나 악마를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순전한 인간의 상상이거나,

상징이었을 뿐이다.

내 바깥에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악마나 사탄은 없다. 완전한 허구일 뿐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며,

아상이고, 에고라는 허상을 상징하는 것일 뿐이다.

즉 내면의 번뇌, 욕망, 집착, 화, 어리석음, 아상인 것이다.

 

악마는 바로 아상이며 에고다.

사탄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과 판단이다.

마왕은 바로 탐욕과 화와 번뇌이다.

 

즉 내 바깥에 있는 어떤 존재나, 상황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괴롭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외부적인 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나의 판단과 해석이

그 모든 괴로움과 두려움을 가져왔을 뿐이다.

 

 

 

 

이미 행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남부러워하는 한 좋은 직장의 중역 간부가 찾아와 말한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조금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자니 진급을 못 할 것 같고,

진급을 하자니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렸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시냐고.

지금 자신의 삶이 대체적으로 행복한가 하고.

과거에 생각했던 행복을 지금 이루었는가 하고 여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더니 하는 말씀이

그러고 보니 자신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

처음에 오르고자 했던 자리에 지금은 이미 와 있고,

벌고자 했던 정도의 경제력을 지금 누리고 있고,

아내도 하고 싶은 일 하며 행복해 하고,

자식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적 자신이 생각했던 바로 그 행복의 삶이

어느 샌가 벌써 실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지금껏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몰랐다.

왜 몰랐을까?

여전히 돈도 더 벌어야 하고,

진급도 더 해야 하고,

자식들도 더 잘 뒷바라지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부족하고 더 필요하고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여전히 그 행복을 누리기는 커녕

더 높은, 더 많은, 더 큰 목적을 향해 내달리고자 하는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 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 차 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 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 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누리는 것을 더 많이 누릴 때

세상은 우리에게 보다 더 많이 누리도록 해 준다.

반대로 누리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기만 할 때

세상은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준다.

 

진실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할 것인가?

누릴 것인가 아니면 추구할 것인가.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느끼며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삶의 완전성을 삶에서 드러내는 법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추구하고 빌고 욕망할 때

존재 본연의 완전성은 사라지고

결핍과 부족과 실패가 창조되고 만다.

 

사실은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무언가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필요하다고 욕망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행복하지 않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이다.

 

지금 이대로 행복하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복하기 위한 어떤 특정한 조건’이라는 것은 없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보라.

 

부처는 어떤 조건도 필요치 않는다.

신은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만약 무언가를 얻어야지만 그 때 가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성과 신성의, 우주법계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완전성을 짓밟아 버리는 것이다.

 

부처도, 신도

우주 법계도 언제나 완전하다.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 또한 완전하고 완벽하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완전하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으며,

실패로 인한 괴로움도 없고, 실패 자체도 없다.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고,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는

아직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

나 자신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부족하며 어리석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생각이 모든 문제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에 대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삶을 창조하는 토대

 

그렇게 생각하면

그러한 현실이 창조된다.

우리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 같아서

마음 먹은 대로 현실이 창조된다는 화엄경의

준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

그것이 바로 나다.

그리고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또한 내가 바로 당신이고, 우주이며, 존재 자체이다.

 

그리면 그린대로 이루어진다.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토대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 토대의 생각을

‘나는 부족하다’

‘나는 가난하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실패할 지도 모른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

‘나는 근기 낮은 수행자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아니면

‘나는 완전하다’

‘나는 풍요롭다’

‘나는 행복 그 자체다’

‘내가 바로 부처요 신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다’

‘실패라른 것은 없다. 삶은 언제나 성공적이다’

라는 데 둘 것인가.

 

전자의,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음의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더 필요하고 성공해야 하고 싸워 이겨야 하고

더 많이 벌어야 하며,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현실을 그려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곧 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 필요하다는 생각의 본질에는

아직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고,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이면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그것이 창조된다.

사실은 바로 그 토대의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부족과 가난과 불행과 어리석은 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토대는 어떤가?

완전하고 풍요로우며 행복하고

삶의 모든 순간이 그대로 성공이며

나와 너가 모두 부처요 신이라면 어떨까?

 

완전한 존재는

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더 벌 것도, 바랄 것도, 욕망할 것도 없다.

언제나 충만한 행복과 만족과 풍요로움과 평화가 넘쳐 흐른다.

넘쳐 흐르는 그 행복을 나누어 주는 것,

바로 그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으며,

부처가 되어야 겠다는 환상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순간 완전함을 누릴 뿐이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는

언제나 삶의 완전성이 창조된다.

 

아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완전했으며 완벽했다는

바로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존재 본연의 고향,

완전성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귀의, 귀향!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이 말은 상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뜬구름 잡는 말이거나,

비현실적인 이론적이기만 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완전하다고 외치라.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요와 행복을 누리라.

 

완전하고 풍요롭다면

내 돈이 아까워서 상대방을 돕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무한한 풍요로움이란

우주 전체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것이다.

내가 아까워하고, 축적하고, 적다고 생각하게 되면

바로 그런 궁핍과 결핍의 결과가 만들어질 뿐이다.

넉넉하고 풍요롭다는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모든 이를 두려움 없이 도우라.

그 마음에 우주 근원의 에너지인

풍요와 완전성이 깃들게 될 것이다.

두려움 없이 풍요의 토대 위에서 돕게 된다면

도우면 도울수록 더 많은 풍요가 당신을 찾아 올 것이다.

 

완전히 행복하다면

무언가를 더 바랄 것이 없지 않은가.

미래에 오게 될 행복을 꿈꿀 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이 완전무결한 행복이라고 외치라.

아무리 작고 사소한 기쁨이라도

그것이 바로 완전한 행복임을 알아차리라.

넘치는 행복 그 자체인 사람은

언제나 세상을 향해 행복을 흩뿌릴 수밖에 없다.

나처럼 타인도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복한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진다.

 

내 삶에 실패란 없다.

언제나 삶은 완전하며 성공적이다.

부정적으로 보이는 현실 또한 사실은 성공이고,

실패라고 보이는 상황 또한 더 깊은 차원에서 본다면

성공이었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실패라는 단어를 내 삶과 결부시키지 말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패가 곧 성공이다.

내 삶은 언제나 성공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으라.

현실의 상황에 대해 성공 혹은 실패라고 해석하지 말라.

성공적인 삶을 사는 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두려운 현실을 창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성공만을 창조해 낸다.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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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





요즘 들어 부쩍 가난과 청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며 또 돌아보게 된다.
가난한 삶, 청빈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 아니 나에게 있어 가난의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가난이란
모든 수행자들의 삶에 있어,
아니 모든 근원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삶이란
곧 근원적인 삶을 의미하며,
‘나’ 자신과 소탈하고 순수하게 대면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가장 체험적인 수행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가난이야 말로
삶을 보다 윤기있고 지혜로우며
향기롭게 또 맑게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한 체험이자 요소인 것.

가난해야 그 속에서 맑음과 청정이
또 참된 지혜가 움튼다.
부유한 사람이 수행하기 보다
가난한 사람이 수행하기 훨씬 더 쉽고,
부유한 사람이 지혜롭기 보다
가난한 사람의 속 뜰에서 더 충만한 지혜가 움트는 법.

가난해야 수행하지
부유하면 수행은 벌써 멀어지고 만다.
가난과 수행
이것은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가난했을 때
그 안에서 법계를 체험할 수 있고,
이 대자연의 경이로움이며
참 진리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가난 속에서
또 저 대자연에 기댄 맑은 의식 속에서
지혜가 움트고 사랑이 움트지
저 빌딩 숲 속에서
거대한 부유함 속에서
참되고 맑은 지혜와 사랑은 그 생명력을 잃고 만다.

인류의 모든 성인들은 다 가난했다.
어쩔 수 없는 가난이기 보다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서의 가난이기 보다는
그들의 삶의 지혜의 근원으로서의 가난이었다.

가난을 가까이 하고 살수록
우리 안의 지혜와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가난하게 살자.
가난하게 살고 있는지 비추어 보고 살자.

그렇다고 가난한 삶이란
단지 외적인 모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돈’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돈이나 경제력 같은 단어가
‘가난’이라는 단어를 좌지우지 할 만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요소가 못 된다.

가난은 돈이나 경제력과 상관없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가난해질 수 있다.
아무리 적게 소유하더라도
그 속에서 부유할 수 있는 것 처럼...

어쩌면 작은 의미에서 물질적 가난이 필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물질적 가난을
구하려고 애써 좋은 조건의 직장을 그만둘 필요는 없다.

물론 물질적 가난은 모든 이들에게 있어
맑고 지혜로운 삶을 누리도록 해 주는
참 좋은 요건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모르긴 해도 우리에게 있어
‘가난한 삶’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설사 물질적 풍요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린 그 속에 살면서 가난해 질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은 어렵지만 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소유에, 그 부와 풍요에 집착하지 않는 것.

다시말해 삶 그 자체가 가난해야 참된 가난이지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만이 참된 가난인 것은 아니라는 말.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마음 속에 욕심과 욕망을, 또 물질적인 부를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많이 소유해도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생각이 가난할 수 있다면
그는 실로 가난한 것이다.

삶의 모습에 있어 가난이란
말하자면 청빈 같은 것인데,
마음에는 바라는 것이 없이 자족할 수 있어야 가난이고,
행동에 있어 절약하고 절제하며
최소한의 소비로 살아갈 수 있어야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많이 소유해도 소박하게 살 수 있다.
배고플 때 인연따라 내게 온 공양을 먹으면 되는데
욕심이 시키는 대로 밥이 있는대로 불구하고
더 맛있고, 더 많고, 더 비싼,
더 좋은 음식, 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것은 소박하게 사는 것도, 가난하게 사는 것도 아니다.

칫솔질을 할 때라도
한 컵으로 할 수 있는데
수돗물을 콸콸 쏟아 붓는다면
이 사람은 가난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

추우면 있는 옷 챙겨 입으면 되는데
더 비싸고, 더 좋고, 더 예쁜 옷을
그것도 몇 벌씩,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올 때마다
새로 사 입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 어릴적 아버님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슨 기업의 회장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잔을 마시고는
남은 소주를 호주머니에 넣고 가더라는 말씀.

이런 사람이 요즘에는 있는가 싶은 마음이 들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부유하면서도 가난한 사람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끼고 절약할 줄 아는 마음 그리고 실천,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
욕심과 욕망 보다는
정말 필요한 작은 소유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베풀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맑은 가난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수백억을 가지고 있더라도
가난에서 오는 참된 지혜와 미덕을
그대로 안으로 움트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물질들은
그 사람 것이 아니라
법계의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가난을 꿈꾼다.
내가 늘 부유하게 살지만, 그래서 항상 부끄럽지만
내 안에서는 늘 맑은 가난을 꿈꾸고 있다.

우리들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맑은 가난을 꿈꾸며 실천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곳이 극락이고 천상이 아니겠나.

그랬을 때
이 세상은 항상 충만한 곳이고,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가난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부지기수다.

‘최소한의 필요’의 영역을 정하고
그 이외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다 베풀어 주는 것도 가난의 실천이며,
무엇보다 삶이 절약과 절제되어 있어야 가난이고,
마음에 바라는 것 없이 만족할 때 참된 가난이라 할 수 있다.

꼭 필요한 곳이라면
전 제산이라도 다 베풀어 줄 수 있어야 하겠고,
꼭 필요하지 않은 곳이라면
물 한방울 낭비하는 것에도 부끄러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 가을...
가난에 대해 생각해 보고
내 안의 가난에 대해 돌이켜 본다.

또 우리 모두가
가난에 대해
내 삶의 가난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비추어볼 수 있었음 하고 바란다.










Posted by 법상




[선암사에서...
원광스님과 수녀님...]

요즈음 들어
가난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거추장스러움도 많이 느끼게 되고,
소유에 오히려 걸리는 일들 또한 가만히 바라보게 됩니다.

과연 내게는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충분하게 갖추어져 있는가
스스로 비추어 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내가 충분히 지혜롭고
또 그 지혜로움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가
그것이 요즈음 화두처럼 제 삶 속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선택한 가난은
무한한 지혜로움의 원천이며,
영혼의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게 산다는 건
소박하게 살고, 청빈하게 산다는 건,
우리 안의 창조적이고 자주적인 본연의 능력을
삶 속에서 마음껏 발휘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지혜로움을 충분하게 실현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부유하게 살고
그래서 편리하게 살게 되면
우리는 본래의 능력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그만큼 축소되면서
몸과 마음의 능력도 함께 퇴화되고 맙니다.

그렇게 부유함에 길들여져 무능력해 지고 나면
그 때부터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게 되고,
반드시 물질적인 편리함이 뒷받침되어야지만 살 수 있는,
경제력이라는 경계에,
'소유'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요즘같은 사회에서야
경제력이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지을 수 있는 잣대인 듯
세상에서 그렇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너도 나도 돈 돈 하며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내면적인 모습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부유할수록 자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퇴화되고
모든 것을 기계가 대신해주며, 돈이 대신해주어야만 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사람으로 변해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뭅니다.

부유하고 돈이 많을수록
우리 손과 발은 할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에 머릿속에 집어 넣어야 하는 것들이 늘어나고,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하고 따지고 비교 분석하는 등의
온갖 번뇌와 혼란스러운 삶이 가까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더욱 편리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더욱 손과 발을 놀리길 원하게 되며,
그러기 위해 더욱 더 부유해 지길 원하곤 합니다.
그 마음은 곧 욕심과 집착을 부추기고
욕심과 집착은 곧 모든 괴로움의 씨앗이 됩니다.

발로 걸을 것 차가 다 알아서 태워 주고,
농사 지어 먹거리 만들 것을 돈이 알아서 다 만들어 주며,
스스로 밥하고 반찬 할 것을 가정부가 다 해 주고,
스스로 집도 고치고, 시장도 보고, 밭도 갈고
그래야 할 일들을 돈이 알아서 다 해주게 되니까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자꾸만 줄어드는 것입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만 그런다는 게 아니예요.
요즘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분야만 잘 하면 먹고 살 수 있게 변했습니다.

컴퓨터만 치면 되는 사람,
운전수만 하면 되는 사람,
기계 돌리는 사람,
그것도 기계의 어느 한 부분만, 똑같은 공정을
하루 종일, 아니 일년 365일을 똑같은 일만 해 먹고 사는 사람도 있어요.

이렇게 사람의 일이 분업화 되다 보니까
사람이 할 일이 없어졌어요.
그냥 한 가지 일만 잘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요즘이야 그런 분업이 좋은 것이라고 야단인데다
한 분야만 깊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실습하면 전문가로 인정받는 세상이다 보니
당연하게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는 있습니다만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번쯤 깊이 있는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한 가지 일만 하면 되다 보니까
다른 일에 대해서는 그냥 깜깜무소식이고 어둔 밤입니다.
요즘 회사 다니는 사람들이 형광등 하나 갈지 못하고
변기 하나 제대로 고치지 못한다고 하잖아요.

물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주 단순해졌고
우리의 손과 발이, 우리 몸이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의 길이
딱 막혀 버린 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난했을 때
모든 것을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밭도 갈고, 농사도 짓고, 밥도 짓고,
두 발로 걷고, 두 손으로 일하고,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돈이 많아져 버리면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일들이 없어져요.
어쩌면 소소한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는,
그러나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근간이 되고 근본이 되는
그런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일들이
그냥 돈의 몫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자꾸만 놀게 되고
돈으로 만들어진 온갖 가공되고 영양가 없는 것들이
판을 쳐서 우리 몸을 공격하고 맙니다.
몸으로 일하지 않으니까 우리 몸도 병약해 지는 겁니다.

이건 얼마나 불행인 건 지 몰라요.
몸이 해야 할 것을 돈이 다 알아서 해 주니까
몸의 많은 기능이 그냥 놀게 되고
퇴화되어 버리고
그러면서 온갖 병이 몸을 공격하는 겁니다.

사람이 두 발로 흙 위를 걸을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가장 기본적인 몸과 마음의 근본이 서게 되는데
걸을 일이 없다보니
몸이 병약해 지고, 생명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무인도에서라도,
숲 속에서라도 자신의 창조적인 본연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또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면서
비로소 대자연과 내 몸이, 내 마음이 하나될 수 있는데,
이제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우리 몸은 자꾸 움직여 줘야 합니다.
내 발로 대지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고,
내 몸으로써 대자연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다른 것이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손과 발이 있는 이유는
손과 발로써 움직이고 일을 하며
살면서 필요한 모든 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손발의 본래 목적을 방치하면서
그 일을 돈이 대신하고, 기계가 대신하도록 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손발 본연의 창의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퇴화되며, 온갖 병이 만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없으면
당장에 농사를 지어야 하고,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온몸으로 흙속에 뛰어들어야 하고,
스스로 농사를 짓고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흙과 가까워질 수 있고,
대자연과 바람과 구름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으로써, 손발로써 늘 일을 하고 씨앗을 뿌리며 거둠으로써
몸도 건강해 지고 마음 또한 함께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거두어 먹으니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은 이내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더 많이 거두어 봐야 저장할 곳도 없고 상하기만 할 것이니
많은 것을 쌓아두려고 애쓸 일도 없어집니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것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쓸 수 있습니다.
남는 것은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모자란 것은 모자란대로 부족한 듯 아껴 쓸 수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대자연의 조화에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그 흐름과 하나되어 삶으로써
나 또한 대자연의 일원으로 건강하고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옛 선지식이나 현자들은
가난이야말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는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해야
몸도 마음도 건강해 질 수 있고,
온갖 번뇌며 욕심에서 벗어나 호젓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가난했을 때
우리가 그동안 욕심과 집착 소유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되고,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며,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듯
아주 자연스럽고 고요하게
걸림없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되길 빌어서는 안됩니다.
부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부유하더라도
그 부유함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이 많더라도
그 소유의 달콤함에서 벗어나고
소유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가난하게 살며
아끼고 살며
나누고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된 가난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두가 입을 모으고
부자를 칭송하는 때이지만,
눈밝은 지혜로운 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서도
가난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에 쫒아갈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그 길로 간다고 나도 그리로 따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이,
모든 경제인, 정치가, 위인들...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 길로 가더라도
지혜로운 이는 외롭지만 홀로 가는 밝은 길을 택할 것입니다.

가난한 삶이 주는
그 참된 지혜와 복덕을
가슴 깊이 사유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충분히 지혜롭다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내게 충분히 용기가 있다면
스스로 지혜로운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법상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도솔, 중에서... (예스24, 50%할인 특가중, 4,750원)






Posted by 법상





평범한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억지로
잘 하려고 하지 말라.

[임제록]의 말씀입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
그냥 그냥 사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억지로 억지로
마음을 일으켜
평온을 해치지는 마세요.

평범한 사람이
위대합니 다.

우리와 다른
이 세상과 다른
훌쩍 초월해 버린
그 어떤 이상향에
크게 마음 두지는 마세 요.

그건 그냥
잠시 신비롭고
잠시 육근을 흥분시킬 뿐입니다.

밥 잘 먹고,
똥 잘 누고,
일 잘 하고,
잠 잘 자고,
잘 놀고
그러면 되는 거지요.

그냥 우리들 모습입니다.

우리와 는 다른
그 어떤 초월인이거나
도인이거나
큰스님을
따로 만들어 두지는 마세요.

부처님도
그냥
평범하게 잘 사셨다고 그래요.

그냥
평범하게
먹고 자고 살아가는
그런 수행자면 그만입니다.

지금
우리들 처럼 말입니다.





어릴적 아련한 기억들을
가만히 떠올려 봅니다.

100원 짜리 동 전 하나 가지고
하루 종일 만지작 만지작 거리다가
저녁 집에 돌아올 때
핫도그 하나 사 먹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말입 니다.

한 달에 한 번
월급날이 다가오면
얼마나 가슴을 졸였던지요.

월급날엔 언제나 시장 통닭집에서
3000원 하는 통닭 한 마리 튀겨
통닭 파티를 열곤 하였거든요.

그러다가 언제인가
갑자기 페리카나라는 양 념통닭이 나왔을 때
딱 한 번 큰 맘 먹고
그 놈 반 마리를 사 먹으면서
이런 건 부잣집 사람들이나 먹는 거고
우리 는 그냥 맛이나 보는거다
하시던 아버님 말씀에
맛 볼 수 있다는 것만도
난 참 부자이고 행복한 사람이구나 했지요.

대학 다닐 때
한 달에 5만원 가지고 생활을 했을 때,
학교 식당에서 600원짜리 밥을 먹거나
아침 겸 저녁으로 1300 원짜리 정식을 먹으며
'많이 주세요' 연실 외쳐대기도 했습니다.

어쩌다가 몸보신 한 번 하자 싶으면
마음 맡는 도 반 둘이서 돈을 모아
학교 앞 2000원 하는 삽겹살 2인분에
밥 두 공기를 시켜 먹곤 하였지요.

주인 아주머님께 서
2인분은 안된다고 3인분 이상 시키라는 걸
애써 한 번 봐 달라며 시켜 놓고는
김치, 상추, 반찬들
몇 번 이고 더 시켜서 싹싹 비워 먹었던
그런 기억들 말입니다.

그런 기억들이 있습니다.

주머니에 가진 돈은 없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참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동전 몇 푼에
행복해 할 수 있었고,
핫도그 하나에
하루 종일 설레임으로 기다릴 수 있었고,
통 닭 한 마리를 위해
마땅히 한 달을 기다릴 수 있었답니다.

그런 날들을 떠올려 보면
불쌍하다거나 가난했다거나
그런 생각들 보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들이 스칩니 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은 그런 살뜰한 행복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더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행복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됩니다.

많이 가졌으니
그만큼 누려야 한다 는 것도 좋겠지만,
많이 가져 부자이더라도
스스로 선택하여 가난을 택하는 것은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어릴 적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을
수많은 이들을 느 껴보면서 말입니다.

있어도 낭비하지 않고
아껴 쓸 수 있어야 가난한 삶이지요.
많아도 필요한 만큼만 쓰고
베풀 수 있어야 맑은 가난입니다.

가난한 수행자를 보면
내 마음이 부자가 됩니다.

나부터
가난해 져야 겠습니다.




자꾸 바깥에서
얻고자 하면 안됩니다.

수행을 할 때에도
내 마음을 닦을 때 조차도
우린
바깥에 의지하는데 익숙합니다.

책을 자주 보는 것도 그렇고,
설법만 들으러 다니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목탁소리에만 들어와서
글만 읽으면서
수행 다 한 것 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균형도 중요합니다.
바깥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나쁘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자꾸 안으로 돌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글 읽고, 설법 듣고
도반들 이야기도 듣 고 하다보면
참 행복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느낌에만 빠지게 되곤 합니다.

그것은 머릿속에서
알 고 있는 지식일 뿐이지
내 힘이 되지는 못합니다.

문사수...
무엇을 들었으면
사유하고 실천해야 힘이 됩니 다.

자꾸 이리저리
남이 수행 해 놓은 것
도둑질만 하려 하지 말고
내 스스로
내 안에 있는 보물을 얻으려 하세요.

실천을 해야 힘이 됩니다.

매일 매일
염불을 하고
독경을 하고
좌선을 하고
복을 짓고
그렇게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수행과 보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수행자라 고 말해야
내 스스로에게 당당한 법이니까요.




사람 사는 모습을 보면
참 복잡한 일이 많기도 합니다.

정신없고
분주하고
들떠있고
그러다가 또 축 쳐지고
나른하 고
공허하고...

혼침 아니면 도거,
그 양 극단으로 마음이 많이 쏠리는 듯 합니 다.

혼침이란,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혼미하게 하며
축 쳐져있는 의욕이 사라진 마음상태입니다.

도거란,
마음이 들뜨고
소란스러워
흥분되어있는 그런 마음상 태를 이릅니다.

수행자는
이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을 잘 조복시킬 수 있어야 합니 다.

늘 들떠 있으면,
마음을 관할 수 없게 되며,
나를 놓치고 살 기 쉽고,
또한 가벼워 지기에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늘 쳐져 있으면
허무주의에 빠져
세상 모든 것이 우울해지거 나,
마음이 너무 무거워 또한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혼침과 도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린 참으로 이 두 가지에 많이 빠져 지냅니 다.

이를테면
선술집 같은데서 마음이 떠 놀다가
이내
집이나, 자 취방으로 돌아오면
괜히 마음이 외로워지고
공허해 지는 것 처럼 말입니 다.

들뜨기
아니면 가라앉기
그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왔다갔 다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는
그 양극단 어디에도 마음을 빼았기는 일이 없습니다.

어느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는 마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잠시 그럴법한 인연이 모여
들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는 것임 을,
신기루와 같고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은 현상임을 잘 알고 현명하고 밝게 대처 해 나갑니다.

하루 생활 가운데
얼마만큼 들뜨기와 가라앉기로
마음을 내몰고 있는가를 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도...
여여하고 여일한 마음,
순일한 마음
부 처님 마음을 연습하시길 빕니다.

들뜨는 마음도 불안하고
가라앉는 마음도 불안합니다.
오직
여 여한 마음
그 마음이 우리의 내면을 바로 깨어있게 해 줍니다.

수행자는
그냥 그냥
그저 그저
그렁 저렁 삽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