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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늘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그런 삶은 언뜻 보기에는 안정되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자는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으며 틀에 박혀 있고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확실한 삶에 틀어박히고 구속된 채 자유를 잃고 해맬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얼마나 희뿌옇고 재미가 없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 머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처럼 따분하고 기계적인 밍숭맹숭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기계의 움직임일 뿐. 그것이 아무리 부유한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구속이요 속박이다. 돈과 재물로 가득 찬 부유한 노후라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삶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삶에 지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고, 노후를 준비하려 들지 말라. 내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노후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삶으로써 시공(時空)의 법계에 무량한 공덕을 저축하는 일이다. 삶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경이롭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삶에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혼란과 위험을 거부하지 말라. 괴로움, 아픔, 상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이런 것들로 아파하지 말라. 삶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삶도 없다. 좋은 일만 일어나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처럼 따분하고 심심하며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에는 생기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자유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극단적인 좌절과 고통이 도리어 저 반대편의 극적인 기쁨 혹은 삶의 대 전환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인생의 최저의 나락에 빠져 있는 이들일수록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단번에 그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가깝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다른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만 살짝 바꾸어 놓는 순간 그 삶은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최악의 괴로운 삶은 곧 최고의 행복과 가깝다. 그 둘은 극단의 먼발치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길벗이다. 살짝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눈빛을 나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인생이 자꾸만 꼬이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인생에서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고? 괴로운 일들이 몇 가지고 겹쳐서 나를 미치게 한다고? 잘 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곧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깊게 삶을 지켜보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고민만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마음을 지켜보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관조(觀照)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만 그것을 하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다만 매 순간순간 주어진 삶을 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고, 깨달음도 그렇고,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바람이 불듯 그렇게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깊은 관찰로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막 내동댕이쳐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과 위험과 역경은 모두 우리를 더욱 더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深淵)에 이르게 해 주는 영적인 동반자요 도반 같은 것이다. 역경(逆境)이 없고 순경(順境)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편안과 불안,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또한 여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삶의 속성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고, 집착과 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바라기 위해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가 없다.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이라는 것 또한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 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중립적인 무분별의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인 것이다.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문제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이 세상의 근본 이치는 언제나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와 고정된 것,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따른다. 또한 그러므로 삶이란 언제나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며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 원칙이며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초를 거스르려 애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하며 불변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는 꿈이고 환영이며 억지일 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찾아 나서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삶의 복잡성과 혼란과 어느 때고 쉴 사이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위험과 근심과 역경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처럼,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그저 한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만끽하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 모든 삶에 감사하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을, 위험을,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눈부시게 지켜보라.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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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센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寂寥),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존재를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바로 그 상황이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가 된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 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찰나 찰나로 순간만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로 이 현실, 지금 여기의 이 삶만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다른 시간을 다른 공간을 살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지금 여기라는 생생하고 직접적인 삶을 놔두고 다른 과거나 미래의 다른 공간의 삶을 피상적으로 뒤척이고 있는가. 물론 때로는 과거를 뒤척이는 것이 위안을 줄 때도 있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할 때도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삶을 더욱 열심히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거나 미래에 속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꿈이 가져다주는 속임수. 간밤에 단꿈을 꾸었다면 우리는 그 꿈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지 않은가. 왜 우리가 직접적이고 생생한 깨어있는 현실을 놔두고 꿈에 얽매이고, 꿈의 달콤함에 젖어 현실의 삶을 덜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를 살아갈 시간에 현재라는 순간을 더 깊이 있게 진하게 사는 것이 모든 명상과 수행의 핵심이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진리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 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 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명상,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지혜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전념(專念)하면 된다. 전념은 원초적 지혜이며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우리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고요함의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주의집중을 통해서 나온다. 전념이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살게 될 때 그저 현실만을 살아가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온갖 지식들과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번거롭고 정신없게 만들 뿐이다.
다만 내 앞에 있는 그것만을 하라. 내일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 이미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어 생각하지 말라. 물론 꼭 생각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멍하니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원칙이 통한다. 마땅히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에 머물거나 집착함이 없이 생각을 일으키란 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생각으로 살지 말고 온 존재로써 살라. 온 존재가 그대로 직접 삶과 부딪치라. 내 앞의 현실만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게 될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단순함과 명료함의 지혜는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한없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서 또렷해진다. 삶을 사는 것 그 자체가 그대로 지혜의 움직임이 된다.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삶을 다만 살기만 하라.
또한 톨레는 불교의 연기법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도로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緣起)요, 상의 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 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佛性), 법신(法身), 영성(靈性),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示現)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 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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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를 늦추라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8/11 13:34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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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여여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고 올라올 때,
나태한 마음이나 급한 마음이 올라올 때,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한 치의 움직임이라도 있을 때라면
그 때가 바로
업식의 불길이 치솟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가면서
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리게 되고
빨간 신호등에 조바심과 성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이미
우리 마음은 업식의 불길에 크게 휩싸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면서
떨리고 두근 두근 거린다거나,
부담을 느낀다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
혹은 너무 보고픈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업의 불길이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나가면서
급한 마음이 앞선다거나,
꼭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거나,
가슴에서 뜨거운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다거나,
목표를 성취한 이후의 행복감에 빠져 있다거나
이런 것들 또한
내 안의 업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급한 마음, 서두르는 마음은
가장 경계해야 할 수행의 재료라 생각하세요.

마음이 급하고, 서두르게 되는 이유는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이고,
바라는 바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크기 때문이며,
‘꼭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미래로 먼저 가 있기 때문이며,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이 나는 순간,
업의 불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휩쓸어 버립니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면
그 일은 자연스럽고 여여한 흐름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법한 일과가 되지를 못하고,
업의 불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이 앞서게 되면
빨리 빨리 성취하려는 섯부른 욕심 때문에
그 사이 삿된 마장이 끼기 쉽고,
그로인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삿된 쪽으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바 욕망이 없다면
아무런 서두를 일도 마음 급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한가로이 노닐 뿐입니다.
마음은 늘 휴식 중이며,
한낮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평화로이 즐기고 있음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한가로이 온전히 일을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게 살면
느림,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느려지면 저절로 나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되고,
일을 하는 순간 업의 불길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운전을 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가 있지만,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 날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
그리 바쁜 일이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차를 빨리 몰고 갑니다.

빨리 가려는 그 마음은
업의 불길입니다.

본래 자리 텅 빈 우리 마음은
바쁠 것도 없고, 성급할 것도 없습니다.
바쁘게 갈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속도를 조금 줄여 보세요.
그리고 가고 있음을 온전히 느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챙겨 보시란 말이지요.

속도를 늘이나 줄이나
삶의 속도는 늘고 주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의 속도는 빠르고 느리고가 없습니다.

마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내 안에 어지러운 마음, 번잡한 마음,
그리고 바라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만
자꾸 늘어갈 뿐입니다.

차 속도를 줄이듯
삶의 속도도 조금씩 줄여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수행의 속도도 조금 줄여 놓으세요.

오고 갈 곳이 없는 이 텅 빈 법계 속을
아무리 속도를 낸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감각에만 속도가 있는 것이지
내면의 본래 뜨락에는 속도가 있지 않습니다.

조금 느리게 여유로운 마음을 내면,
우리의 속 뜰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여여해 질 수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일을 하면
업의 불길에 휩쓸리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쉽지만,
조금 바쁘더라도
느긋한 여유로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런 법계의 흐름을 타고
순리대로 일을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여유로우세요.
마음을 턱 놓고 살면
지금 이 순간 그리 바쁠 것이 없습니다.

바쁘고 급하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욕심과 집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그만큼 놓고 비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놓고 가는데
바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자성불 여여한 존재입니다.

자꾸 어디를 가려하고,
자꾸 무엇을 찾으려고 하시는지요.
그리 급하게 어디를 가고 계신가요?

우리가 바라는 일은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며,
찾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급하게 가고 있는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지금 여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가고 오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으며,
성취되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여여하고 텅 비어 있거늘
바쁜 걸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빨리 걸어도 ‘그 자리’이며,
천천히 걷는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이고,
그냥 가만 있어도 언제나 ‘그 자리’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
자성불 본래 자리
이 자리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자리이며,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자리이고,
급하게 뛰어 다다르려 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발걸음을 멈추세요.
조금 천천히 가도 늦지 않습니다.

우린 언제나
도착지에 여유로이 머물러 있거든요.
그런데 분별을 지어
또 다른 도착지를 자꾸 찾으려 하니 답답한거지요.

그만 가세요.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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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곧 하나의 여행이다. 어머님 뱃속을 뚫고 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순간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나그네요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펼쳐지는 매 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순유중이다. 단 한 순간도 정체하거나 머물지 않고 매 순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여행은 누구에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숭고한 귀의(歸依)의 과정. 존재의 근원이라는 본래 나온 그 텅 빈 곳으로 누구나 되돌아가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은 언제나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삶은 곧 하나의 여행이기에 한 순간도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불가에서는 길을 떠나는 것을 만행, 순례라고 하여 수행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매 순간 머물지 않고 흐르는 이러한 무집착의 여행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요,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길이 된다.

 

특히 홀로 고요한 숲 길을 걷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수행의 방식이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거나, 천천히 걸으며 자신을 관조하는 경행(經行), 이 두 가지야말로 인류의 오랜 수행법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지면서 삶에 대한 통찰과 사유가 싹튼다.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자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티벳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이제 곧 여름이고, 휴가 시즌이다. 어떤가. 이번 휴가는 홀로 숲 길을 걷는 만행의 길을 떠나 보는 것이. 지리산도 좋고, 올래길도 좋고, 산사의 숲길도 좋으며, 히말라야도 좋다. 한 사람의 순례자가 되어 홀로 고요한 숲 길을 걷는 그 텅 빈 구도의 길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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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곧 하나의 여행이다. 어머님 뱃속을 뚫고 이 세상으로 내던져진 순간 우리는 모두 한 사람의 나그네요 순례자가 된다. 그리고 펼쳐지는 매 순간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순유중이다. 단 한 순간도 정체하거나 머물지 않고 매 순간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그리고 그 여행은 누구에게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숭고한 귀의(歸依)의 과정. 존재의 근원이라는 본래 나온 그 텅 빈 곳으로 누구나 되돌아가고 있다. 삶이라는 여행길은 언제나 완전한 깨달음을 지향하고 있다.

 

이처럼 삶은 곧 하나의 여행이기에 한 순간도 머물지 말고 흘러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이 끝없는 우주를 여행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의 목적은 끊임없는 여행에 있지 어느 한 곳에 정착하는데 있지 않다. 불가에서는 길을 떠나는 것을 만행, 순례라고 하여 수행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매 순간 머물지 않고 흐르는 이러한 무집착의 여행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영적인 성장의 과정이요, 깨달음을 향한 정진의 길이 된다.

 

특히 홀로 고요한 숲 길을 걷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수행의 방식이다. 가부좌가 그렇듯 걷는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써 생각을 비우고 무심(無心)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대지를 맨발로 걸으면 우리의 정신은 우주로 연결된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말처럼 걷는 그 행위 속에 정신적인 각성과 우주적인 교감이 함께 한다.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좌선하거나, 천천히 걸으며 자신을 관조하는 경행(經行), 이 두 가지야말로 인류의 오랜 수행법이 아니었던가.

 

오랫동안 걷다 보면 우리는 저절로 생각이 멎는 것을 경험한다. 생각이 단순 명쾌해지고 저절로 욕심과 집착과 내면의 화가 사라지면서 삶에 대한 통찰과 사유가 싹튼다.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삶에 대해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열린 자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다운 독자적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되곤 한다.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아상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가 비로소 여행을 떠나며 두 발에 의지해 걷고 걷는 과정 속에서 삶의 해답을 찾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삶이란 본래 완전한 것이었으며 질문도 답도 모두 내 안에 구족되어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여행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누구에게나 구도(求道)의 한 과정이다. 우린 여행자가 되는 동시에 순례자가 되고 구도자가 된다. 누구나 여행을 통해 자신이 삶에서 깨달아야 할 귀중한 선물을 얻게 된다. 특히 홀로 걷는 여행은 또랑또랑한 지혜로써 삶을 빛나게 한다.

 

티벳의 위대한 성자 밀라레빠(Milarepa, 1052~1135)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깨달음의 반은 성취한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에게 히말라야는 우주의 중심이자 수미산이었다. 히말라야로의 순례는 그에게 깨달음의 원천이었으며, 이 우주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도는 윤회라는 여행의 종지부와도 같았다. 그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히말라야로 떠나라’고 외친다.

 

이제 곧 여름이고, 휴가 시즌이다. 어떤가. 이번 휴가는 홀로 숲 길을 걷는 만행의 길을 떠나 보는 것이. 지리산도 좋고, 올래길도 좋고, 산사의 숲길도 좋으며, 히말라야도 좋다. 한 사람의 순례자가 되어 홀로 고요한 숲 길을 걷는 그 텅 빈 구도의 길을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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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연결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연결속에서 깊고도 따뜻한 자비로써 서로 서로를 돕고 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 자비라는 단어는 그저 단순히 교리적인 이론으로 끝나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 그 자체다. 온 우주의 뒤에서 배경처럼 허공처럼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모든 존재가 더 깊은 차원의 내면에 다다랐을 때 결국 만나게 되는 정점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그러한 우주의 자비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그간 우리는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도움에 감사하며 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연기법과 연결성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법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사실 이러한 감사함은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만 선택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으로 이유 없는 무한한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더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삶의 풍요를 이루는 오랜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저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모든 기도의 핵심도 기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있다. 빌고 바랄 때 사실은 그것이 없다는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는 것이지만, 감사해 할 때 풍요와 만족을 연습하는 것이다. 부족을 연습하면 부족이 들어오고, 감사와 풍요를 연습하면 감사할 일과 풍요로움이 들어온다.

그리고 더없이 감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보통 우리는 매 순간에 만족과 감사하기보다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조차 곧 다른 미래의 목표를 향해 치닫곤 한다. 그러한 끊임없는 목표와 미래를 향한 질주는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기 보다는 더 많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현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감사하는 순간, 우리는 곧장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적인 자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게 된다. 감사한다는 말은 완전히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고 대 긍정의 만족을 넘어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감사는 선택의 문제이지, 외적인 상황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든 우리는 감사할 수도 있고, 감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선택의 결정권이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설사 고통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 감사할 일이다. 단지 우리는 더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다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우주법계는 언제나 동체적 자비로써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거기에 감사함으로써 우주법계와 하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다. 언제나 ‘감사’를 선택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그저 ‘감사하다’고 말하라. 매일 매 순간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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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곧 휴가다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20 19:32 Posted by 법상

[세심청심] 일상이 곧 휴가다
기사등록일 [2010년 02월 18일 16:01 목요일]

 

 

오후의 산책,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름은 너무도 높고,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은 신비롭고, 바다색은 짙고, 고개 들어 산을 바라보면 희끗희끗 눈덮인 산맥이 성스럽고, 그 청명한 하늘 위로 자유로이 갈매기 떼들이 떼지어 날고 있다. 아, 이 곳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여행이며 만행이고, 모든 걸음 걸음이 히말라야이며, 매 순간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이다.

휴가나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쉼, 설렘, 떠남, 평안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휴가나 여행은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매일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잠시의 ‘멈춤’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다.

길을 걷고 길 위의 모든 존재에 눈빛을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보내며 묵연히 걷기만 할 때 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경험한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눈덮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나는 지금 어느덧 히말라야 깊은 산 위를 걷게 된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고 시린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 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는 어느덧 2500년 전 붓다의 영산회상 한 켠에 앉아있는 그 성스러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된다.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이거나 생존경쟁의 장이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인도의 시골마을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된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길 가에 앙상하게 피어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책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잠시 보고 읽는 것을 멈추고 호흡의 들고 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행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잠깐 TV를 끄고 그저 텅빈 빈 벽을 주시하며 내면의 아주 작고 여린 움직임을 관찰해 볼 수도 있다.

하루 중에, 하루 일과 중에, 익숙하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 잠깐 단 10초라도 좋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아주 낯선 시선으로 전혀 텅 빈 시선으로 속 뜰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로 그 ‘멈춤’의 순간 위대한 붓다의 사랑과 축복, 깨어있음이 깃들게 된다. 수행이라는 것이 꼭 선방에서만 피어나는 것은 아니며, 근기가 높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아주 잠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참선을, 명상을 배울 수 있다. 아니 이것을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애써 이름 짓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그저 텅 빈 순수 그 자체이고, 깨어남이며, 모든 성자와 현자들의 방법이었으며, 붓다의 방식이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일상에서 자주 자주 잠시 멈추고 바라보라.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이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야말로 완전하고도 충만하고 꽉 찬 더 이상 얻어야 할 또 다른 힘을 필요치 않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목탁소리 지도법사/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법보신문 1036호 [2010년 02월 18일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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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사랑의 호흡명상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20 00:12 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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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fleuriste st laurent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이 참 아름답군여, 명상이 잘 되겠어여

    2010/07/20 01:14
    • BlogIcon 법상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위에 있는 두 절은 설악산 백담사이고, 세 번째 절은 서울 북한산에 있는 어떤 절인데, 생각이 안 나네요.

      2010/07/20 12:05

DSC_6897 

[洗心淸心]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하라
 
기사등록일 [2010년 03월 30일 13:20 화요일]

 

 

삶에서 두려워 할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무한한 자비요 사랑일 뿐이니.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이나 염라대왕도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외부의 그 어떤 존재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 

부처는 무한한 자비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해 지옥을 만들어 낸 분이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행위들을 선악 등의 그 어떤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는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는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멋대로 지어낸 환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한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들었다. 내가 만들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엔 창조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오직 내면의 나툼일 뿐이다. 

지옥도, 죄도, 두려움도 모두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이처럼 우리 스스로 지옥이며, 죄와 두려움을 만들어 내고는 있지만, 그 이면의 바탕에는 오직 무한한 자비와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선행을 하면 천상으로, 악행을 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본질에서는 선악이 없고, 천상과 지옥이 없다. 그것은 둘이 아니다. 본래부터 나누어 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분별하고, 나누었을 뿐이다. 본질에는 선악을 넘어선 동체적인 자비만이 있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지악수선(止惡修善)을 말하면서도, 천수경에서는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罪無自性從心起 心若滅是罪亦亡)이라고 했다. 방편법에서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지어야 하지만, 근본법에서는 선악이랄 것도 없고, 죄 또한 없는 것이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가는 곳은 지옥이 아니라 무한한 자비의 바다다. 영겁의 삶이란 그 자체로써 본질적인 자비로의 돌아감이다. 우린 누구나 근원의 자비로 돌아간다. 그것이 바로 불교의 목적인 귀의(歸依)이다. 삼귀의란 불보인 자비와, 법보인 자비로 가는 가르침, 승보인 자비를 실천하는 수행자에게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속에 무한한 동체대비의 사랑을 품으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대양에서 춤을 추며 만날 것이다.

 

운학사 주지/목탁소리 지도법사 법상 스님

법보신문 1042호 [2010년 03월 30일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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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미투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12 04:38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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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320sec | F/7.1 | 0.00 EV | 12.0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200sec | F/7.1 | 0.00 EV | 18.0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250sec | F/5.0 | 0.00 EV | 24.0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400sec | F/10.0 | 0.00 EV | 90.0mm | ISO-160 | Flash did not fire.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160sec | F/5.6 | 0.00 EV | 90.0mm | ISO-200 | Flash did not fire.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250sec | F/5.6 | 0.00 EV | 12.0mm | ISO-200 | Flash did not fire.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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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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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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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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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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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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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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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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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500sec | F/5.6 | 0.00 EV | 40.0mm | ISO-200 | Flash did not fire.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320sec | F/5.6 | 0.00 EV | 12.0mm | ISO-200 | Flash did not fire.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NIKON CORPORATION | NIKON D80 | Aperture priority | Pattern | 1/250sec | F/7.1 | 0.00 EV | 31.0mm | ISO-250 | Flash did not fire.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법상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도솔, 중에서... (예스24, 50%할인 특가중, 4,7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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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미투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06 04:39 Posted by 법상

이 글은 법상님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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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속초 화암사]

 

 

하루에,

매 순간순간에,

끊임없이 올라오는

무의미한 생각들을

가만히 지켜보라.

 

그 생각들에

붙잡혀

우리 마음은

즐거웠다 괴로웠다,

우울했다 들떴다가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 생각들은

전혀 실체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마주잡이로 뿜어올라오는 것들일 뿐이다.

 

마음을 지켜보라.

생각을 지켜보라.

그리고 감정을 지켜보라.

 

하루 중

우리 감정은

끊임없이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들떴다가 가라앉았다가...

 

그러나 그 감정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건 생각에 에너지를 실어 주고,

공연히 밥을 주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에,

그 생각이

공연한 감정의 진동을 가져온 것일 뿐이다.

 

생각을 하지 말라.

생각을 놓아버리라.

생각에 에너지를 보테지 말라.

생각에 밥을 주지 말라.

 

그러나 생각이 올라온다.

생각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없애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끊어버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생각은

더 계속해서 지속된다.

 

그러니 생각을

끊어 없애려 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어떤 생각이 올라오고 있는지,

그래서 나를 어떤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내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내가 그 생각에 얼마나 휘둘리고 살아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잘 지켜보기만 하라.

 

내가 얼마나

생각에 휘둘리며,

이리로 저리로 줏대없이 끄달리고 살아왔는지를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전 생애를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삶을

그러면서 허우적대며 살아왔다.

억울하게도...

 

하루 중

내 마음에, 내 감정에, 내 느낌에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면,

바로 그 때가

내 안에 어떤 생각들이 일어났으며,

어떤 생각들에 힘을 보테줌으로써

그 생각이 활개를 치도록 만들었는가를 지켜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순간이 된다.

 

평상심,

고요한 파장이

급격히 진동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지켜보라.

 

평범했다가,

바로 그 평상심이 무너지고,

감정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바로 그 순간을 지켜보라.

 

내 삶은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다.

외부에, 생각에

이리 저리 휘둘려

노예처럼 이끌리는 삶을 청산할 수 있다.

 

그 힘이 내 안에 있다.

지켜봄 안에 있다.

 

수행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지 말라.

다만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보라.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생각이 놓여진다.

무심,

무심의 순간이 깃든다.

 

무심이 되면,

미래도 없고 과거도 사라진다.

들뜨는 것도 가라앉는 것도 놓여진다.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도 놓여진다.

 

다만 오직 지금 이 순간,

평범하고도 평이하고, 평화로운

그냥 지금 이 순간을 가볍게 살아가게 된다.

 

전혀 무겁지 않게,

전혀 심각하지 않게,

전혀 앞일을 걱정하지 않고서도,

그냥 그냥

아주 평화롭게

바로 지금 이 순간을

그냥 저냥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

 

비로소

여여한

여법한

삶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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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미투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04 04:38 Posted by 법상

이 글은 법상님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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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미투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02 04:39 Posted by 법상
  • <문화소식> 법상스님 히말라야 트레킹 책(연합뉴스) #
  • [아트폴리] kei 작가님께 프로필용 초상화를 신청합니다(아트폴리 me2photo) #

    me2photo

  • 첫 번째 여행기를 출간하였습니다.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법상, 불광출판사). 히말라야를 온몸으로 느끼고 감동하며, 하루 하루 매 순간마다 꾹꾹 눌러가며 현장에서 쓴 여행기입니다.(me2book) #

이 글은 법상님의 미투데이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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