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모든 것을 맡기라

- 열반적정의 생활실천(2)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비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채움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렇기에 우리 삶은 더욱 채워짐으로써 조금씩 윤택하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많은 채움을 얻고자 끊임없이 전 속력을 향해 질주하는 삶이 되고 있다. 그 질주는 멈추지 않는다. 빨리 달려야 더 빨리 완전한 채움에 이를 수 있고, 남보다 더 많이 채워 부자가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말한다. 그 무서운 질주를 멈추고 삶을 바라보라고.

 

이처럼 우리의 삶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 비움의 길 혹은 채움의 길. 비움의 길은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의 길이요, 채움의 길은 중생의 길이며 무지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끊임없이 비움에 이르는 길을 우리의 내면에서 설법하고 계신다. 반면에 중생의 마음은 언제나 쌓고 채워나가는 길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이 두 가지 길이 언제나 우리 삶에 놓여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판단에 달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일 것인가, 아니면 아상과 욕망에 기초한 내 생각과 판단에 귀 기울일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성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음을 비웠을 때 찾아오는 열반과 적정의 소식은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

 

그것은 일종의 직관(直觀)과도 같고, 어떤 영감(靈感)과도 같다. 우리는 직관적인 판단 보다는 생각과 기억과 지식을 조합해서 이끌어내는 판단이 더 정확하며, 더 과학적이고, 더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관이나 영감은 도무지 믿을 바가 되지 못하며, 합리적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깊은 내면의 불성은 직관이나 영감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삶의 지침을 매 순간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더욱 신뢰하고 있는 생각이나 판단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따져보자. 생각이나 판단, 지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과거에서 온다. 과거에 배워왔거나, 들어왔거나, 익혀왔던 것들을 조합하고 비교 분석함으로써 결론을 낸다. 그 비교 분석의 결론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온갖 정보와 지식들을 찾고 공부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더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을 조합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 가 묻고 배움으로써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에 더 효과적이고 과학적인 답변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에 삶을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하고, 지식을 늘려 가야 한다. 시간이 없다. 더 앞서가려면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꾸겨 넣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른 것일까? 만약 정보와 지식을 조합해서 내린 결론이 항상 올바르다면 많이 배운 교수나 높은 자리에 있는 경험 많은 경영자나 정치가의 결론이야말로 가장 뛰어나고 올바른 결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가. 같은 문제를 가지고 정치인들은 여당 야당을 나누어 매 순간 다툰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면서. 서로 더 많은 정보와 전문가를 통한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더 올바른 판단일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모인 정치판에서 야당과 여당의 의견은 언제나 엇갈린다. 그것은 대학 교수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그 분야의 전문가라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의견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문제는 그것 자체의 옳고 그른 것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틀릴 수도 있으며, 나에게는 이 길이 최선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저 길이 최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직장을 취직하려는 사람이 공무원에게 조언을 구하면 공무원의 길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해 줄 것이고, 자영업자에게 조언을 구하면 자영업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지를 말해 줄 것이며, 선생님께 조언을 구하면 선생님의 매력적인 장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그 사람들의 삶의 몫이며, 삶의 길이지 그것이 바로 나에게도 옳은 길인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자기다운’ 삶의 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으며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러한 자기다운 나 자신의 삶의 몫은 내 안의 깊은 내면의 선택만이 나의 길을 열어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나의 길을 다른 사람이 판단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어떤 길을 가려고 해도, 어떤 사람은 긍정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반대할 것이다. 어떤 직장을 선택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긍정하고 어떤 사람은 반대한다. 모든 사람이 긍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식으로, 정보의 조합으로, 기억이나 생각으로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불성만이, 내 안의 근원적인 자아만이 자기답게 피어난 자신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

 

생각이나 기억이나 지식은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사실은 본질적이지 않다. 보다 근원적인 선택은 언제나 지식이나 생각이나 정보의 조합에 있지 않고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다른 그 누구도 그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절에 가서 스님들께 인생 문제를 상담해 보라. 사업을 확장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혹은 이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 저 직장을 선택해야 할지를 물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지식에 비춰 어느 한 길이 더 좋다고 조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방법은 그렇지 않다. 불교의 방법은 지식과 경험과 기억을 모두 놓아버리도록 이끈다. 지식과 정보를 아무리 조합해도 전적으로 옳은 결론을 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님들은 문제를 상담해 올 때 어떤 특정한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내면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 줄 뿐이다. 답은 스님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이 답을 내릴 수 있다. 스님들은 단지 그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그 모든 지식과 기억과 경험을 놓아버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자기만의 답변을 들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언젠가 한 사람이 찾아와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두 곳에서 오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저히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하고 따져보고, 사람들 의견도 들어보고, 온갖 정보를 취합해 보았지만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느 곳을 갔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당연히 결론을 나지 않는다. 그 비슷한 두 직장 가운데 어느 직장이 좋은지는 보는 견해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에 따라 얼마나 다를 수밖에 없는가. 이 직장은 이것이 장점이지만 또 다른 점이 부족하고, 다른 직장 역시 하나는 좋지만 다른 하나는 부족하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주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교 분석해 왔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면 이제 그 모든 지식과 판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려라. 어차피 그것들은 근원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식으로 경험으로 정보로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내면에서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분별과 지식들을 놓아버려라. 욕심도 비우고 바람도 비우고 좋고 나쁜 모든 판단과 분별도 비워버리고, 오직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차라리 또 다른 정보를 얻는데 쓸 시간을 비움을 위한 기도와 수행에 힘쓰라. 그리고는 모든 것을 부처님께 맡겨라.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모든 판단을 비우도록 하라. 그리고 결국 둘 중 하나를 판단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그 때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대로 저질러 발걸음을 옮기라.”

 

이 얼마나 비과학적인 방법인가. 아니 우리의 기존의 관념으로 보았을 때 이 말은 완전히 엉뚱하게 들린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많은 생각과 지식들이 완전한가? 조금 더 깊이 삶을 유영해 보라. 조금 더 깊이 내면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보라. 우리는 언제나 내 안에 불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왜 내 안의 붓다와 직접적으로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가? 우리는 분명 내 안에 깃든 다르마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진리이며, 어떤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필요한 조언이고 판단인지를 다른 그 어떤 사람에게서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바로 내 안의 붓다에게 법문처럼 들을 수 있다.

 

마음을 비웠을 때 비로소 내 안의 진리의 가르침이 피어난다. 텅 빈 공의 마음에서 직관과 영감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직관은 마음의 표면에 드러난 지식이나 정보나 기억이나 생각이 아니라 더 깊은 불성의 선택이다. 우리는 어떻게 더 많은 지식을 쌓고, 더 많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따지느냐에 노력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직관과 영감을 일깨우기 위해, 부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 마음의 표면에 거추장스럽고 복잡하게 흩어져 있는 모든 기억, 생각, 지식, 욕망, 번뇌, 집착들을 놓아버릴 것인가를 위해 힘써야 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지식과 기억과 생각에 휩쓸리며 이러저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삶의 방향키를 놓치고 산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것인가. 당장에 본질로 뛰어들어야 한다. 당장에 어리석은 중생의 삶이 아닌 깨어있는 수행자의 삶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다. 생각과 지식과 욕망과 아상을 놓아버리고, 다만 단순하게 고요하게 느긋하게 여유롭게 삶을 관조하며 살면 된다. 악착같이 성공하려는 생각을 놓아버리고, 어떻게 되든 부처님께서 나를 이끌고 가라는 마음으로 내 안의 근본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살라.

 

열반적정이란 그런 것이다. 열반적정이 있다면, 그리고 그 열반적정의 삶이 내 안에도 있다면 마땅히 그러한 삶을 살아야지, 어리석은 괴로움의 삶, 일체개고의 삶을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열반의 삶, 적정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라. 무상의 가르침에 따라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라. 무아의 가르침에 따라 아상과 아집을 모두 비우라. 연기의 가르침에 따라 인연 따라 모든 것을 맡기며 살라. 열반적정의 가르침에 따라 열반의 삶에 나를 완전히 내맡기고 가라.

 

이처럼 깨달음이나 열반은 어떤 높은 곳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바로 우리 삶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할 현실의 생생한 모습이다. 마음을 비우면 열반이 드러나고, 마음을 채우면 괴로움이 드러난다. 마음을 비우고 열반의 성품, 깨달음의 성품, 부처의 성품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자유롭게 주어진 삶을 살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안의 불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라. 생각과 지식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직관과 영감이라는 더 깊은 곳의 소리가 내 삶에 피어오를 수 있도록 하라.

 

[붓다수업(법상, 민족사)] 중에서

 

 


붓다 수업

저자
법상 스님 지음
출판사
민족사 | 2013-12-13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지금은 붓다 시대, 웰빙, 힐링, 뉴에이지, 영성, 치유,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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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