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이다. 그렇기에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문제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BBS 불교방송 라디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월~금, 07:50~08:00) 중에서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