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다스리기 위한 글모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13:30), 부산 목탁소리 토요법회(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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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화'를 다스리기 위한 글모음

목탁 소리 2014. 9. 17.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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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날 때는
억누르지도 말고
상대방을 향해 폭발하지도 말라.

항상 해 왔던 그
두 가지 고정된 패턴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화가 날 때
억누르면 내가 다치고,
폭발하면 상대가 다친다.

억누르지 말고
화가 났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주라.
화를 피해 달아나려 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화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충분히 느껴보라.

화를 내도 좋다.
아니 오히려 그 화를 똑바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화가 나는대로 화를 내라.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다만 그 화에는
책임감이 뒤따라야한다.
책임감을 가지고 화를 낸다는 것은
상대도 나도 다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화를 인식하면서,
화를 관찰하고 느끼면서 화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보자.

화가 날 때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대신
하늘을 향해 실컷 소리질러보라.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는
장농을 열어 이불 사이로 쨉을 날려라.

다만 화나는 현재의 마음을
최대한 또렷이 인식하며 지켜보라.
화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며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죄도 없다.

또한 이 방법은
화는 내지만 화를 받는 대상이 없기에
책임 질 일이 없다.
화는 냈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처럼 화를 느끼고 관찰하며 화를 낼 때
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흩어지고 만다.
순간 화가 치유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해 콧방귀를 뀌겠지만
이 방법을 직접 실천해 본다면
당장에 이 놀라운 방법에 쾌재를 부를 것이다.

이제 당신은
화를 참고 억누르지도 않고
폭발시켜 싸우지도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적적인 방법 하나를 얻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임감 있게 화 내기'다.

이제 화를 꾹꾹 눌러 억지로 참지도 말고,
멱살을 붙잡고 싸우지도 말라.

아무런 죄의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음껏 화를 내라.
화가 날 때 화를 낼 수 있는 자유와 후련함을
자신에게 선물해 주라.

다만 방법을 잊지 말라.
"책임감 있게 화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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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수십번씩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인연따라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인연이 다하고 나면 화가 사라지기도 하며,
또 상황 따라 어떤 때는 불같은 욕심이 치솟기도 하고
질투심, 고민, 집착, 증오, 사랑 등 수많은 감정이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하기야 우리의 인생이란 것이 이런 감정적 기복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마음은 혼자서 독자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절대 저홀로 일어나는 법은 없다.
그럴만한 인연, 상황이 생겨야 그런 마음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평소 가깝던 친구가 별일 아닌 것으로 갑자기 욕을 한다면
그런 상황에 따라 마음에서는 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같이 욕도 하고, 때로는 주먹질까지 하게도 된다.
그렇게 같이 붙잡고 화를 내고 싸우고 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부터 그 친구와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괴롭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친구가 그 때는 좋지 않은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사과를 요청하게 되면 또 다시 마음은 금새 풀어진다.

이처럼 인연따라 우리 마음은 일어났다 사라진다.
때로는 이렇게 작은 화가 일어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도저히 억누르기 어려울 만큼 큰 화가 생기기도 하고,
삶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계로 끝간데 없이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상황이, 이런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경계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 삶도 끊임없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 경계에 휘둘려 마음이 괴로움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명상이라는 것, 수행이라는 것도
이처럼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어떻게 잘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과연 그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친구가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생각해 보자.
혹은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 하며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다고 생각해 보자.
조금 예민하게 그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화를 살펴보자.

친구가 욕을 하는 순간, 직장 상사가 '그것도 못해'하며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는 순간,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지켜보자.
그 순간 욕을 얻어 먹는 순간은 어떤가.
그 순간에 내가 있는가?
그 순간에 욕을 얻어 먹는 내가 있는가?

조금 깊이 지켜보라.
욕을 얻어 먹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없다.
오직 그 순간에는 '화'만 존재한다.
아주 맹목적이고, 본능적으로 당장에 생각할 것도 없이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인연법이라는 이치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인연이 생기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을 하는데도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성숙하고, 젊잖으며, 수행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대뜸 욕을 얻어먹고도 당장에 화가 올라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몽둥이로 한 대 얻어 맞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 부분이 아픈 것하고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프다.
마찬가지로 욕을 얻어 먹으면 자연스럽게 화가 올라온다.

그것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때려서 아픈 것이나,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나는 것이나
그것은 이 세상의 이치, 인연법의 이치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가지고 '나는 왜 이렇게 화를 잘 내지?'하고 괴로워 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연이 서로 화합하여 접촉하는 순간에는
'나'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아니 '나'라는 관념이 생길 것도 없이
저절로 '화'라는 것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지금 여기까지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오히려 욕을 얻어 먹고도 화가 안 일어나거나,
때리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이지,
욕을 얻어 먹고 화가 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그것은 자연의 변화라는 흐름에 따라
구름이 생겼다가 소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인연따라 수증기가 구름이 되었닥가 다시 비가 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숲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수확을 하며 열매를 맺었다가 단풍으로 떨어지고,
겨울이 되면 앙상한 가지가 남게 되는
이 자연스러운 자연의 변화와 무엇이 다른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도 자연의 변화와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지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다음의 순간부터 생기기 시작한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화가 났다면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인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할 것이 무엇인가.
전혀 거기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결과에 시비를 건다.
즉, 그 순간에 아상을 개입시킨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화'만 있었지 거기에 '나'는 없었다.
그저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화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한다.
그저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화'를 자기화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즉, '나는 화가 났다' '나는 너 때문에 화가났다'
'너가 나를 화나게해?' '너가 나에게 욕을 해'하고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 '화'는 객관적이고 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연이어 그 '화'에
'내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한다.

'감히 너가 나에게 욕을 해?'
'화 내는 것은 나쁜 것이니 화를 참아야 해'
'저 사람이 내게 화를 내니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친구가 나를 우습게 생각하고 무시하고 있구나'

온갖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 생각들은 아주 미세하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생각일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생각들의 이면에는 분명 '나'라는 아상이 개입되어 있다.

이제 그 '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 '화'는 '내 화'가 되어버렸다.
'욕을 얻어 먹은 나',
'화를 내면 안 되는 나',
'무시당하는 나'
그렇게 수많은 '나'가 생겨나게 된다.

이제 조금 전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되어버렸다.
조금 전 상황,
즉 '나'가 개입되기 이전,
오직 '화'라는 것만이 있던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가 개입되면서 그것은 '괴로운'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 화로 인해 괴롭고 답답하다.

만약 처음 '화'가 일어날 때
그 때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내버려 두고 다만 바라보기만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화는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났기 때문에
가만히 내버려 두면 스스로 타오를 만큼 타올랐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마치 인연따라 자연스럽게 구름이 일어났다가
저절로 구름이 짙어져 먹구름으로 변했다가
인연이 다하면 저절로 비로 내려 대지를 적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다.
우리 몸 또한 자연이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따른다.
그저 내버려두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면
꽃이 피었다가 사라지듯이 스스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화'를 '내 것'으로 붙잡지 말라.
거기에 '나'를 개입시키는 순간,
온갖 '내 생각' '내 분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들 것이다.
연이어 불같은 감정이 생겨나고,
불같은 말을 내뱉으며, 몸 또한 불같은 행동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욕을 얻어 먹으므로써 자연스럽게 화가 일어났다면
다만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라.
마치 내 일이 아닌 것 처럼,
그저 영화나 드라마를 보듯 그냥 순수하게 지켜보기만 하라.

거기에 해석이나 판단, 분석, 생각, 아상을 개입시키지 말라.
상대방의 행동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갖다 붙이지 말고,
내 화에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이나, 분별, 구분을 가져오지 말라.

'나'와 '화'를 구분하지 말라.
관찰자와 관찰되어지는 대상을 나누지 말라.
다만 바라보는 것, 그것이 되라.
'화'가 났다면 그저 '화' 그것이 되는 것이다.
'나'와 '화'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순간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 그 화는 생명력을 얻게 될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무아, 즉 '나는 없다'는 것이다.
단지 인연따라 '화'가 났을 뿐이지 거기에 '나'는 없다.
그저 '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에 화난 나는 없다.

내 스스로 '내가 화났다'라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 없는 나를 실체적인 있는 나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다.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커지고 만다.

화는 중립이다.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실은 '화나는 상황'이 있을 뿐이지 '화'는 없다.

괴로움도 중립이다.
사실은 괴로움이라는 것도 이름붙인 것에 불과하지
그것도 괴로운 상황일 뿐이다.
다만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 '괴로움'은 없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상황'이 있을 뿐이지
'괴로운 나'는 없다.

괴로움이라는 것도, 괴로운 나라는 것도,
화라는 것도, 화를 내는 나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실체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해석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니 '나'를 개입시키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觀) 수행이라는 것이
무아(無我)에 이르는 근본불교의 수행이며,
아상(我相)을 타파하는 금강반야경의 수행이고,
연기 법칙을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다만 '화'가 일어난
그 연기적 인과성, 즉 연기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그 어떤 판단이나 해석을 가하지 않는 것,
그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랬을 때 그 '화'에 '나'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나'와 '화'를 나누지 않으며,
자아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고,
'나'라는 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연따라 일어나는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명상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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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저에게는 올해 스무살 된 아들 녀석이 있습니다. 태어났을 때 태열이 심하여 얼굴에 구멍이 군데군데 있어 레이져 치료를 받았는데 치료가 잘못되어 흉터가 덧나고 거기에다 여드름까지 너무 심해 여드름으로 인한 흉터와 합해지면서 아이는 얼굴에 난 상처 때문인지 깊은 열등감과 대인기피증으로 너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치료를 받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도 마음속의 그 어떤 분노 때문인지 대수롭지 않은 말 한마디에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는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도 하게 됩니다. 아이는 여전이 마음이 아픈 상태고 그렇다고 다 큰 아이의 분노를 항상 너그러이 받아주기에는 옳은 행동도 아닌 것 같습니다. 스님, 아들 녀석에게 어떤 마음과 행동으로 다가가야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으면서 이 아이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요?


마음이 많이 답답하실 것 같습니다. 내 문제라면 어떻게든 이겨낼 수 있겠지만, 아들의 문제다 보니 보살님 입장에서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물론 아드님께 이런 저런 조언도 해 주고,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어머니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준들 별다른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이 문제가, 단순한 아들의 문제가 아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또한 내 문제구나 라고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 문제'로 나와 동일시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로 인해 내가 괴로워하는 것은 '내 책임'의 문제란 말입니다. 즉 그로인해 내가 괴로워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내 '선택'의 문제란 말이지요.


먼저 아드님의 상황에 대해 그것을 '내 것'이라고 동일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를 빨리 풀어주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아들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고통 속에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잠시 그 아픔과 그 고통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충분히 함께하면서 아파하고 났을 때,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났을 때 비로소 거기에서 아드님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살님 마음속에서 아들의 문제가 빨리 없어져야 하는데 하고 그것을 문제로 삼은 뒤에 그것을 없애려고 싸우고 투쟁하고 그 문제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그 피부 문제에 대해 보살님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빨리 없애주려는 조바심 나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그저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세요. 그래야지만, 아드님이 그것과 함께 있는 것에 대해서 '문제상황'이라는 보살님 마음속의 찌꺼기, 해석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보살님 마음속에서 그것을 문제시하면서, 없애려고 애쓰면서, 안 없어지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고, 그 문제를 거부하게 되면 그 문제는 더욱 길게 계속되고, 아들 마음속에서의 치유도 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살님 먼저 받아들여 주고 나면, 아들을 바라보는 마음도 한결 평안해 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아들을 받아들여 줄 수 있게 되요.


어떻게 받아들여 주느냐? '있는 그대로' 그 마음을 받아주는 여유와 지혜가 생기는 것이지요. 아들은 지금 피부에 나 있는 상처 때문에도 괴롭지만, 두 번째 화살 때문에 사실은 더 괴로워요. 즉 그 피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과 해석으로 '내 피부는 흉칙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등의 생각으로 인해 더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 주세요. 누군가 한 명이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자신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게 되면 아드님의 마음은 훨씬 빨리 치유될 수 있습니다. 사실 아드님은 피부 때문에 아픈게 아니라, 그로인한 마음이 더 아픈겁니다. 그런 마음을 받아줘야 합니다. 진심으로 '얼마나 힘드니' '그래, 남들이 의식되지 않을 수 없겠구나' '그 마음 이해된다' 하고 그 마음을 받아주는 겁니다.


"얼굴 때문에 친구들 만나기도 싫어!" 하고 소리치면서 짜증을 내면,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거야?" "네 마음만 바꾸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해" "피부가 뭐가 문제야, 내가 보면 그렇게 문제될 것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받아치면 아이 마음 속에 응어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굴 때문에 친구들 만나기 싫어" 할 때는 "그렇구나. 친구들 만나기 싫구나. 그럴 수 있겠다. 친구들 만나러 가기가 어렵겠다." 하고 그 마음을 받아들여 주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여 주면 아이도 조금씩 받아들여 진다는 사실에 안심하게 되고, 아이 마음이 안심이 되면 아이 또한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여지기 쉬워지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 얼굴 피부에 문제가 생긴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온 것입니다.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당장에는 힘들겠지만, 그 이유는 크게 보았을 때 아이와 보살님을 돕기 위한, 업장을 소멸시켜 주기 위한, 깨닫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더라도, 어쨌든 그 진실을 인정하세요. 거부하지 말고. 그래서 충분히 그 아픔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아들에게 허용해 주세요. 어머니가 옆에서 그렇게 받아들여 주고 허용해 주고, 문제 삼지 않게 되면, 아이도 바뀔 수 있습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라는 어머님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 생각들이 모여 이 문제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이는 아주 정상적이고, 또 아주 정상적인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거에요. 아직 마음을 못 바꾸고 아직도 괴로워하는 것 또한 아주 정상적인 거에요. 그걸 못 깨닫는다고 문제삼는 어머니의 마음을 바꾸고, 그러한 고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주게 되면 빨리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좋아지겠지 하는 성급한 마음도 버리세요.


이 상황을 통해 어머니는 자신의 수행을 하면 됩니다. 아이에게 언제까지 그걸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 말고, 이 상황이야말로 내가 마음공부하고,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공부의 기회라고 생각하세요. 아이가 얼굴 때문에 또 힘들어 하거나 짜증내면, 보살님은 보살님의 마음을 바라보고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얻게 되는 겁니다. 아시겠지요? 아들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이것은 공부를 시켜주려고 찾아 온 고마운 경계인 것입니다. 그걸 괴로운 경계라고 해석함으로써, 괴로운 실체로 확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괴로운 현실이 지속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힘 내십시오.

 

저는 별일 아닌 것에 자꾸만 화가 올라오고 핏대를 세우곤 합니다. 오늘도 별것 아닌 것으로 혼자 욱하고 화를 내고 삐쳐 있으면서 '왜 이럴까?' 걱정은 혼자 다 합니다. 전에는 없던 억지스런 화! 왜 이런 것일까요? 야단 좀 쳐 주세요.

화는 자연스럽게 올라옵니다. 인연따라 화가 날 상황이 되면 자연스럽게 화가 나는 것이지요.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화가 올라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가 올라오는 것에 대해 문제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다.

올라오는 화를 대상으로 문제를 삼지 마세요. 그 화를 문제라고 여기고 그 화로부터 도망치려고 한다면, 우리는 결코 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도망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오히려 그 화는 더욱 지속됩니다. 또한 화를 대상으로 싸워 이기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화가 올라오는 것 자체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화가 올라오고 있는 그 전체 과정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화를 내거나, '왜 나는 이렇게 화를 많이 내는거지?' 라고 문제삼는 순간 그 화가 우리를 집어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올라오는 화를 아무런 분별 없이, 아무런 시비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올라오는 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상이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그 화를 대상으로, '내 화'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서 화가 생겨났다고 생각하고, 그 올라온 '화'가 '내 화'라고 나와 동일시를 합니다. 나에게서 나온 '내 화'니까 그 밉고 싫고 거부하고 싶은 화가 나에게 오는게 싫어서 그것을 밀쳐내려 하고, 싸워이기려 하고, 문제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짝 비켜서세요. 화가 올라올 때 그것과 정면으로 붙어서 싸우지 말고 그저 살짝 비켜서고, 한 발짝 떨어지세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야단 좀 쳐주세요' 하고 말씀하셨는데, 화가 나는 상황은 전혀 야단 칠 상황이 아닙니다. 화가 나는 상황에 대고 야단 쳐 달라고 여기는 그 마음만 놓으시면 됩니다.

 

회사를 다니며 평소 야간 대학 출신이라는 것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지내왔었는데요, 얼마전 타회사 직원들과의 자리에서 야간대학 출신이라는 것으로 인해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매사에 자심감도 없고 열등감에도 사로잡히네요.

우선 여기에서 그 야간대학 출신이라는 열등감으로 인해 괴로운, 그 마음의 구조를 한번 살펴보지요. 그 전에 먼저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현실이야 어차피 현실인 것이고, 야간대학인 것을 불쾌해 한 사람이야 어차피 그 사람 문제인 거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는 또 다른 그런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간대학이라고 해서 다르게 보는 그런 시선 가진 세상의 모든 사람을 탓하거나, 바꿀 수는 없는 문제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예, 바로 나에서 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즉, 지금의 이 문제는 야간대학을 나온 것 자체의 문제가 아니고, 그것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즉 그 현실, 상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에 대한 나의 해석이 문제란 말이지요. 조금 다르게 살펴보면 이것이야말로 아상이 무너져 내리는데서 오는 괴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축소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지요.

사람들은 누구나 잘나 보이고 싶고, 남들보다 더 우월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아상입니다. 아상을 키우고 싶은 욕구이지요. 아상이 충족되면 기쁘고, 내가 작아지면 괴롭고 슬프고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입니다. 법우님은 바로 아상의 축소를 경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상축소가 왜 법우님에게 괴로움이 되고 있는가? 왜 그렇겠어요?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듯, 법우님 또한 아상 확장을 삶의 기쁨으로 알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상이 확대되는 즐거움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을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는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어때요? 아상 확장이야말로 가장 큰 위기이며, 문제입니다. 불교의 목적은 아상의 축소, 나아가 아상의 소멸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목적은 아상확장이지만, 불교 수행자의 목적은 아상소멸입니다. 그러니 어떻습니까?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고, 나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러한 지혜가 있다면, 법우님의 지금 상황은 정확히 아상이 축소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기에, 사실은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닙니다. 조금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수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때이고, 내 아상의 소멸을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아상타파의 대장부의 길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순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길을 싫어하지만, 수행자라면 이 길을 반깁니다. 이 길이 물론 다소 어렵고, 남들에게 손가락질도 당하는 것 같고, 뒤에서 욕하는 것도 같고, 내가 공연히 잘못한 것도 같고 그런 마음이 드시겠지만, 그런 마음도 다 놓아버리시고 그저 그 아상이 축소되는 느낌, 그 열등감의 느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매 순간 순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지켜보는 바로 그 순간, 아상타파라는 금강경의 대장부의 넓은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졸부들은 그 순간이 괴로워서 어쩔 수 없겠지만, 대장부라면 그 남들이 다 두려워하는 아상축소의 길을 저홀로 반기면서 당당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경계, 상황, 조건은 최악인 것 같아도 그것 자체가 최악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나의 해석이 최악일 수는 있어도 말이지요. 그 현실은 최악이 아니라, 어쩌면 최고의 순간일 수 있습니다. 수행하기 좋은 때를 만난 법우님께 깊은 저 깊은 곳에서 하나라는 동체적 사랑으로, 응원과 힘과 마음을 보냅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아름다운 가행정진의 때로 받아들이시고, 이 현실의 수행의 장을 거부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저어가시기 바랍니다.

 

스님 저는 화가 너무 많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욱 하고 화가 날 때면 정말 폭발할 것만 같고 또 실제로 곁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도 괴롭혔습니다. 화를 꾹 눌러 참자니 병이 나 죽을 것만 같고, 그렇다고 화를 내자니 상대방에게 죄스럽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무언가 좋은 방법 없을까요? 지혜롭게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보통 우리는 화가 날 때 두 가지 중 하나의 방식을 택합니다. 꾹꾹 참아 억눌러 놓거나, 아니면 폭발하여 있는 대로 화를 내는 것이지요. 그 두 가지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해 왔던 그 두 가지 고정된 패턴에서 벗어나는 제3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화가 올라올 때, 그 화를 지켜봄으로써, 관 수행을 통해 화를 다스릴 수 있지만, 명상 수행이 초보인 분들에게는 너무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지켜보다가 속 터져 죽을 것 같다고도 하시데요.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우선 그동안의 패턴을 살펴보지요. 화가 날 때 억누르면 내가 다치고, 폭발하면 상대가 다칩니다. 꾹꾹 참으면 그 내면의 화가 나를 집어삼켜 몸에 병이 나거나 스트레스를 받게 되어 나를 해치고, 상대방에게 화를 내면 상대방의 마음이 다치는 것이지요. 먼저 화를 억누르거나 폭발하지 말고 화가 났음을 정직하게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화를 피해 달아나려 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있는 화를 직시하고 받아들여 충분히 느껴보는 것입니다.


화를 내도 좋습니다. 그 화를 똑바로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화가 나는 대로 화를 내도 좋습니다. 화가 날 때는 화를 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다만 그 화에는 책임감이 뒤따라야 합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화를 낸다는 것은 상대도 나도 다치지 않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 누구도 다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화를 인식하면서, 화를 관찰하고 느끼면서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화가 날 때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대신 하늘이나 허공을 향해 실컷 소리 질러 보는 것입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는 장농을 열어 이불 사이로 쨉을 날려도 좋습니다. 다만 화나는 현재의 마음을 최대한 또렷이 인식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화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며 화를 내는 것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또한 이 방법은 화는 내지만 화를 받는 대상이 없기에 책임 질 일이 없습니다. 화는 냈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처럼 화를 느끼고 관찰하며 화를 낼 때 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흩어집니다. 순간 화가 치유되는 것이지요. 너무 단순해 콧방귀를 뀌겠지만 이 방법을 직접 실천해 본다면 당장에 이 놀라운 방법에 깜짝 놀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화를 참고 억누르지도 않고 폭발시켜 싸우지 않으면서도, 나도 상대도 다치지 않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화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책임감 있게 화를 내는 방법이며, 업보를 받지 않고 화를 다루는 방법입니다. 이제 화를 꾹꾹 눌러 억지로 참지도 말고, 멱살을 붙잡고 싸우지도 마십시오. 아무런 죄의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음껏 화를 내어 보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화를 낼 수 있는 자유와 후련함을 자신에게 선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잊지 마십시오. 책임감이 뒤따르는 화를 내어야 합니다.

 

 

상담을 공부할 때 ‘감정 받아주기’를 배운 적이 있고, 요즘 읽는 책에서도 ‘감정코칭’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도 해답을 내려주기 보다는 감정을 먼저 받아주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과도 연관되는 것인가요?


상대방의 문제나 억압된 감정을 풀어주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상대가 자신의 문제며 억압된 감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해 주는데 있습니다. 그 문제로부터 도망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직면하고 관찰함으로써 거기에서 놓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나 상담 시 해결책을 제시해 주려 애쓰거나 억지로 위로해 주려 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고 억압된 감정을 인정해 줌으로써 그 문제와 직면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억눌린 마음이 책임감 있게 표현되게 함으로써 스스로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 받아주기는 곧 타인을 마음 알아차림의 관(觀) 수행으로 이끄는 불교의 수행법과 연결됩니다. 감정을 받아주는 것 자체가 바로 상대를 명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부장님은 도대체 날보고 뭘 어쩌라는거야?" "정말 짜증나, 미치겠네"

"잘 할 수 있을거야. 어쩌겠어." "잘 생각해 보면, 해결책이 있을꺼야."


이런 방식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받아줌으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직면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짜증이 많이 나겠구나. 정말 답답하겠다. 방법도 없고 답이 안 나오니 얼마나 막막하겠어."


큰 차이가 없어 보이겠지만, 전자는 해결책을 논하고 있고, 후자는 단순히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을 받아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직면하고 관찰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후자처럼 대답해 준다면, 금방 마음이 풀어질 것입니다.


"아니야. 내 일인데 어떻게든 해 봐야지. 내 마음을 알아줘서 고마워"


이처럼 마음과 감정을 받아주는 것은 곧 상대방을 명상과 관 수행으로 이끌어, 그 마음에서 스스로 놓여나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단순한 듯 해도, 이것이야말로 명상이 곧장 현실로 들어와 삶을 변화시키는 기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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