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지금 나눠드리는 종이들을 받아보시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부분을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밑에 세개는 안하셔도 되구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를 한 번 적어보는 겁니다.
첫 번째는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나 또는 내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나

또는 불안한 부분이나 두렵거나, 고민하는 것들이 있다. 혹은 이걸 좀 해결했으면 좋겠다.
'아, 내가 좀 이것만 해결되면 내 생에 참 행복할 것 같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는 바로 이 문제다.' 하는 것들을 첫 번째 네모난 박스에 간단하게 적어 보는 겁니다.

 

나를 괴롭히는 문제는 한두 가지, 세 가지다 하면, 세 가지 칸이 있으니까 세 가지를 다 적어도 좋습니다.
만약에 그런 문제점이나, 괴로움이나, 불안 이런 게 없다면 혹은 그것보다 더 크게

나를 지금 짓누르는 것들 보다도, 문제가 있거나 그런 것 보다도,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그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게 내가 힘들다. 난 이걸 너무 얻고 싶고 가지고 싶고 무엇 무엇이 되고 싶다.

이런 게 있다면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바라고 싶고, 무엇을 얻고 싶은 지를

한 번 적어보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것을 한 번 적어보세요.
저한테 보여줄 수 있는 분이 계시면 앞으로 제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는데요. 몇 가지를 한 번 보면서 이야기를 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충 읽어보니까 우선 서너 가지 있는 것 중에 하나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자신이 괴롭다고 생각하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런 게 있습니다. 이것이 좀 많네요.
건강에 대한 두려움, 건강 염려증 같은 몸이 아파오고 이런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생길 때 '야 내가 이러다가 죽으면 안되는데. 우리 가족들 내가 잘못되면 어떻게 될까?'

이런 것들이 있고 하여간 다양한 고민들을 적어 주셨어요.

 

우리가 문제가 있을 때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우리는 보통 여기느냐하면 예를 들어 건강이 염려가 된다.
내가 항상 불안하고 좀 몸이 아파질 거 같고, 나빠질 거 같고  몸에 병이 오면 어쩌지 이런 불안한 마음들.
우리는 아마 병 뿐만이 아닐 겁니다. 뭔가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거나

온갖 불안감 이런 것들이 계속 있기가 쉬운데요. 이런 게 나에게 있다면 보통 우리는

이것을 없애기 위해서 이 괴로움이 생길 때 주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건강이 염려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일어나면 우선 그것을 모든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죠.

 

러다 보니까 여기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하거나

아니면 극복하려고 하거나, 도망 치려고 하거나,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그러니까 건강하려고 하는 반응으로써, 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가려 먹는다거나 건강 관련된 책자들을 사본다거나 매일같이 운동을 한다거나

몸에 좋다라고 하면 다 찾아서 한다거나 그러다보니까 때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못하면 더 신경이 예민해 질 수도 있고 안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욕망때문에 먹고 나면

막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너 또 스스로 정한 이 룰을 지키지도 못했구나.' 하면서

스스로를 막 혼내면서 이러기도 할 겁니다.

 

이렇게 극복하려는 어떤 방법을 취하는 거. 혹은 아예 도망치려고, 뭐 생각하지 않으려고

밀쳐내보고 한다거나 이러겠죠.
이것들은 주로 극복하는 방법을 쓰려고 하겠죠. 그런데 뭔가 건강이 걱정되는 마음이 올라왔다.

그러면 아주 중요한 것이, 모든 게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써준 모든 것들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방법을 쓰냐하면 그 고(苦)가 이거다라고 딱 정해졌으면

그 고에 대해서 우리가 쓰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쓰던 방식이 있어요.

 

그것은 언제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이것을 극복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즉 이것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좋은 쪽으로 바꾸기 위해서 집착하고 욕망합니다.

혹은 이것이 더 나빠지면 안되는데 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경계는 좋아서 끌어당기거나 싫어서 내치거나 둘 중에 하나의 방식으로

우리는 언제나 마음을 쓰고 있고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공통점은 뭐냐하면 그 문제를 수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에요.  우리가 알아야 될 우리 부처님 가르침에서,

삶의 공부에서 가장 알아야 될 핵심이, 제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또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의 핵심이 뭐냐하면 불교는 고, 집, 멸, 도 잖아요.

고라는 것을 밝혀 냈으면 고의 원인이 뭔지를 알고 그것을 소멸하는 겁니다.

그럼 핵심은 뭔가하면 고가 있을 때 이것을 고라고 생각해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것을 붙잡으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이 두 가지 극단으로 우리 마음이 옮아 가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좋아해서 너무 집착하려 하거나 싫어해서 밀쳐내려 하거나 거부하려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그냥 그 문제가 있었을 때 문제라고 낙인 찍지 않고

그냥 처음에 나왔던 그 일 자체를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리고 문제가 왔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바로 해소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뭐냐하면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엄청난 수행을 통해서,

아니면 어떤 병원 치료를 통해서, 아니면 심리치료를 수 회를 거쳐 가면서 해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고 여깁니다.


공짜는 없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천 배를 백일 동안 하던가 염불이나 독경이나 수행을

치열하게 하던가 그것을 통해서만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라고 생각해요.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왜냐하면 우리 자체가 어떤 하나의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니까. 이게 모든 문제의 시작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뭐냐하면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그것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용해야 할 대상입니다. 왜 수용해야 할 대상이냐하면 그것 자체가 진리로써 온 것이기 때문에,
제법실상으르써, 그것 자체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문제의 해결로써 온 것이기 때문에.
문제로써 온 것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로써 온 겁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 자체가 이미 해결 그 자체이다.
문제 자체가 이미 답입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문제가 일어난 목적은, 그 일어난 그 자체를

온전히 일어난 것으로써 수용하고 받아들여서 그것과 함께 할 때, 이것이 답이구나,

진리구나라고 여기고 이것이아말로 나를 깨어나게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구나.

나에게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진리구나 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 문제가 해결된다.

 

그러니까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실상으로써, 진리로써 온 겁니다.

우리가 번뇌 즉 보리라는 이야기를 경전에서 많이 하는데요. 번뇌가 나타났다.

그것은 번뇌이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번뇌 즉 보리다.
번뇌가 즉 깨달음이다. 번뇌 그 자체가 답으로써 온 것이다 이 소리입니다.
번뇌로써 온 것이 아니고 망상으로써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죽이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 번뇌 자체가 진리다. 그 말은 무엇이겠어요?

 

번뇌 그 자체를 거부할 때 번뇌는 게속됩니다. 여러분 모든 문제를 생각해보세요.

그 문제를 거부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싸워 이기려고 할 때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길게 지속 될 뿐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뭘 받아들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를 몰라서 그렇지

내가 받아들이겠다고 마음을 탁 돌이키면 그 자리에서 그때부터 문제 해결은 시작됩니다.

우리 생각은 엄청난 노력을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모든 문제는 인식의 전화입니다. 마음만 바꾸면 그자리에서 해결이 되는 문제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마음만 바꾸면 해결이 돼버려요.

내가 어떤 욕심과 욕망이 있었는데 그 욕심과 욕망을 붙잡고 있는  순간은

그 문제는 해결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것을 탁 내려놓음과 동시에 

거기에 대한 문제의 해결이 바로 그 자리에서 되지 않습니까?

그것과 똑같다. 마음만 바꾸면, 마음만 탁 돌이키면, 바꾸어 먹으면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는 풀려버립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바꿀 때 우주 법계가 그 마음에 함께 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 마음만 풀리면 우주 법계의 상황 자체가 바뀌어 버립니다.

건강 염려증이 왔다. 건강 염려증이란 건 뭐냐하면 건강은 좋아해서 붙잡고 싶고,

건강은 욕망한다 말이에요. 건강에 대해서 집착하고 욕망한다는 말입니다.

병에 대해서는 싫어서 더 거부하려고 하고 밀쳐내려고 하고.
그러니까 건강 염려증이 문제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건강은 집착해서 붙잡고 싶고

병은 밀쳐내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겁니다. 건강은 집착해서 붙잡고 싶은 마음.

병은 밀쳐내고 싶은 마음 이것이 문제이지. 병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병이라는 것은 여러분을 괴롭히기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돕기 위해 찾아왔다.

병이라는 것은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 찾아왔고 나를 돕기 위해 찾아왔고

나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하다못해 병이 없으면 우리 몸에 쌓이고 쌓인 온갖 스트레스며 탁한 기운들이 병이 있기 때문에

병으로 인해서 풀려 나갈 수 있거든요.

 

한 번 앓고 일어나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개운해지지 않습니까?

리고 우리 안에 업이 있든 뭔가 병으로 나온다라는 것은 아주 고마운 일이고

그 병으로써 치유되기 위해서 나온 거니까.

즉, 병이 오는 목적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병 자체로

우리를 치유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병을 거부하려고 하는 겁니다.


병 그 자체는 진리이고 우리를 돕기 위한 저 넘어에서, 부처님 나라에서, 진리의 세계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무한한 자비심으로써 우리에게 보내준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 말은 뭐냐하면 그 병을 받아들이는 마음만 내면 그 병에서 벗어나기가 빨라집니다.

병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병을 거부하려고 하면서 온갖 생각을 일으키는 마음, 그것이 문제예요.


병이 낫을 때 병이 낫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병이 난 그 자체는 괴로운 게 아니에요 사실은.
병이 낫다라는 생각은 무얼 의미하냐면 내가 병인지 모르고 살던 사람이

내가 어떤 암 초기나 2기쯤 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 암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큰 문제 없이 그냥 잘 살고 있어요.

때때로 몸이 좀 아플 뿐이지.
평소에는 잘 살고 있었는데 그 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우연히 진단을 했는데 암 2기다. 이제 3기로 넘어가고 있다. 이러다가 곧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딱 밝혀졌습니다.  그때부터 이제 죽을 것 같이 괴롭습니다. 생각이 나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너 이러다가 죽으면 어쩔래. 자식은 어떡할래. 자식 놔두고 넌 그냥 죽는거야.'

온갖 생각들이 이제 말기가 되고 그러다가 더 큰 병으로 내가 정말 죽는 건 아닐까?

병원에 가서 그냥 치료하면서 꼼짝도 못하면서 이런 상상만 하고 이제는 다 필요없구나.

다 무상하고 다 필요없는 것이구나 하면서 온갖 생각들 때문에 괴롭단 말이죠.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 생각들이 괴롭히는 것이지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순간 병이 있는 줄 모른다면, 병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하고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병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순간. 분별하지 않으면 병이 있더라도

나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이 사실은 없습니다. 실제 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몸에 병을

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그래요. 죽은 사람들을 해부해보면 암 정도는 벌써 이삼십 년 전부터

달고 살았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암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암은 그냥 함께 갈 수도 있는 거에요. 더 커지지만 않으면.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쓰느냐에 따라서 더 커지지 않고 그대로 놔둔 상태로

이십 년, 삼십 년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생활 습관을 가지냐에 따라서

러니까 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이 문제인 것이죠. 더 크게 만드는, 더 키우는 마음.
없는 암도 끌어 들이는 마음. 또 나에게 병이 있다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 해결로써 온 것이지.


해결 과정으로 온 게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해결입니다.

그 자체가 답이다. 번뇌가 곧 보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아마 여러분들은 뭐랄까. 뭔가 구체적인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아무래도 당황하실 겁니다 . 왜냐하면 우리들의 의식은 어떠냐하면 뭔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매진합니다. 방법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고 이것을 이렇게 하는 방법을 쓰면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안심을 해요. '아 내가 그대로만 열심히 하면 되는구나.' 왜냐하면 이게 바로

행위의 사고방식에 놓여있는 겁니다. 뭔가 해야지만 된다라는 생각.

열심히 해야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

그런데 극복하면 그것을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고방식에서는 극복 할 필요가 없지요.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애쓰던 게 문제지.


즉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문제고, 문제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문제지 그냥 내버려두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래서 이 공부는 그런 쪽으로,

뭐냐하면 문제라고 낙인 찍어놨던 것들을 내려 놓고 그 짓을 하지 않는 거지 내려놓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라고 낙인 찍는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문제라고 낙인 찍어 놓고 나서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쓰는 마음도 내려 놓는다. 그 말은 뭐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문제와

직면해서 맞닥뜨리는 겁니다.


회피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싸워 이기려 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인정하는 거에요.

즉 건강 염려증이 있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건강이 염려되는 마음이 일어나면

우리 마음은 어떠했냐하면 막 불안에 떨거나 도망치려 하거나 싸우려 하잖아요.

그러지 않고 '그래 괜찮아, 괜찮아. 건강 염려해도 괜찮아.' 그냥 염려스럽고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면,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면 그 두려운 마음이 일어나도록 허용해 줘야 합니다.

 

그 두렵고 불안한 마음과 함께 있는 거죠.

도망치지 않고 함께 있어주는 겁니다. 건강이 염려되는 그 삶을 사는 겁니다.

그 삶을 충분히 경험해 주는 겁니다.
그 불안감과 함께 살아보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되게 쉬운 이야기 같지만

우리는 여태까지 이렇게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건강이 염려되는 마음이 일어날 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이걸로 인해서 도망치려고 마음을 먹거나 어떻게든 싸워 이기려고

병원을 찾아가든 약을 먹든 뭔짓을 했거나 하는 이런 사고방식에 놓여 있어 봤지만

우리는 단 한번도 '그래 염려되는 이 마음과 함께 있어보자. 괜찮아, 괜찮아' 하고.

 

이것 또한 답이다. 이것 자체가 진리다라고 생각한 채 이것 자체가 진리면

그 진리와 함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진리를 밀쳐내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이것을 밀쳐내려고 애쓰기만 했단 말이죠. 마음속으로.

 

우리 마음은 이 문제를 없애려는 것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단 말이죠. 그것을 바꿔보는 겁니다.
그것과 함께 있어보는 것, 함께 있기를 선택하는 것, 이게 받아들임이고 수용입니다.  
이것은 여기 첫 번째 화살은 두 번째 화살이라고 써 놨었는데 즉,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이냐하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겁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을 수 밖에 없어요.

건강 염려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그 첫 번째 화살이 일어난 것은 어쩌겠습니까?

그것과 함께 하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화살은 그냥 함께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화살만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건강 염려되는 이 마음 가지고 온갖 생각을 일으켜서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

이러다가 남들이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닐까? 내가 병원에 누워 있으면 자식들 조차

나를 간병하기 싫어서 도망 가지 않을까? 내가 벌어 놓은 돈도 없는데

이러다가 그냥 비참하게 죽어가는 거 아닐까? 이 병든 사람을 누가 나를 돌보겠나?

심지어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또한 나를 버리지 않을까? 

이런 온갖 생각과 망상들이 우리를 괴롭힐 뿐이지.

그 생각과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세 번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건강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은 예를 들어 그 원인을 죽거나 또는 내 아이에 대한 걱정.

혹은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그 원인인 것 같다. 혹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그 원인인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여러분이 원인이 뭔가라고 탁 질문을 던져보면

대충 이것이 원인이겠지 라고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에게 한 번 더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원인이 백퍼센트 진실인가? 백퍼센트 정말 이것이 원인인가?


이것이 백퍼센트 옳은 말인가라고 질문을 던져보세요. 내가 죽으면, 내가 아프면 자식이 어떻게 크나.

자식은 못 크겠지. 이것이 백퍼센트 진실입니까? 여러분이 없으면 자식이 못 클까요?

물론 여러분이 없으면 여러분이 있을 때 보다는 불편할 수 도 있겠죠.

런데 여러분이 없으면 자식이 절대적으로 못 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식은 여러분이 없을 때 더 잘 클수도 있어요. 

 

이를테면 맨날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으니까 더 좋을 수도 있고.

만약에 그것이 진실이라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전부 다 잘못 커야 될 겁니다.

그런데 다 그렇지 않거든요. 엄마 아빠 중에 엄마가 없는

자식, 아빠가 없는 자식은 아주 잘못 비뚜러지게 커야 될 겁니다. 그런데 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인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적인 줄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죠. 나는 어디에 놓이는 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 자식은 내가 있는 게 또 도움이 될지

없는게 도움이 될지 내가 압니까? 내가 모릅니다. 어쩌면 없는 게 더 도움이 될 수도 있죠.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내 생각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이 백퍼센트 진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안감. 죽음이 진짜 두려운 것인지. 불안한 것인지 죽어봤습니까?

 

죽음이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안하고 괴로운 것인지 그리고 또 실제 이 병때문에

내가 죽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생각으로 불안해하고 생각으로 두려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그건 두 번째 화살일 뿐이지 그 자체의 진실은 아닙니다. 이 모든 원인들은 사실은

내가 생각으로 그렇다라고 만들어 놓은 두 번째 화살의 망상일 뿐이지 실제 진실은 아닙니다.

생각 속에서 진실이라고 여겨왔던 것이지.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 화살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뿐이지 두 번째 화살을 맞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냥 아퍼주겠다. 두려움이 오면 두려워주겠다.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쓰셨어요.

누군가 때문에, 미운 사람 때문에 죽겠다. 화가 나고 답답하고 직장상사가 밉다.

아니면 누군가가 밉다. 그 사람 얼굴만 봐도 화가 나고 열이 나고  뜨거워지고 미칠 것 같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을 피해 자꾸 그 사람만 있으면 내가 도망치려 하거나

회피하려 하거나 그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거나. 아니면 욱하고 맞붙어 싸우거나.

회사도 가기 싫어지거나. 회사에서 화가 나니까 집에서도 예민해지고,

가족들 한테도 화를 내고, 일도 더 잘 안되고 계속해서 스트레스도 쌇이고

걸 풀려고 수행도 해보고, 명상도 해보고, 온갖 방식을 동원해보고, 운동도 해보고,

회사도 때려쳐야겠다 하고 회사를 그만두려고 마음도 내본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취하지 않습니까? 그 원인은 그 사람만 보면 화가 난다. 왜 화가  나는가?

그 원인은 그 사람은 성격이 나쁜 놈이고, 그 사람은 말도 안되는 것을 시키고, 너무 과도하게 일을 시키고,

그 사람은 옳지 못한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을 자꾸 시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백퍼센트 진실인가?

그 사람은 백퍼센트 진실이 아닌 것만 시킵니까? 옳지 않은 것만 시킵니까? 절대적으로나쁜 것만 시킬까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나에게 스트레스를 가하는 그 사람이

절대적으로 나쁜 놈일까요? 나에게 무조건 백퍼센트 나쁜 영향만 미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힘으로써  사실은 이것이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직장생활도 그렇고 하나의 파동이 일어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선업만 있는 사람이면

이런 사람을 만날 수가 없어요. 내 마음안에 있는 그 업이 그걸 끌어당기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내 안에 그러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예요. 업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난 이유는 뭐냐하면 이 업을 소멸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그 사람이 나타난 거에요.

그 사람을 만나야 내 안에 있는 이것이 소멸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나를 괴롭히기 위한 문제로 나타난 게 아니라 내 업을 녹여주기 위해서

고맙고 감사한 선물로써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안만나면 내 안에 문제가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게 당연한 거에요.

 

그래서 다 때려치고 싶을 만큼 막 괴롭고 화나고 이러다 보니까, 너무 화가 나니까,

이것이 해결 되지를 않으니까 너무 화나서 죽을 거 같으니까, 절에도 가보고 명상도 해보고

마음공부도 해보고 그러다가 불교 공부가 탁 인연 된 사람이 많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 사람은 그 계기를 통해서 좋은, 아주 귀한 인연을 만나기 위해서 그 계기가 찾아온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을 가지고 백퍼센트 나쁘다고 얘기할 수가 있나?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정말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찾아왔다라는 보장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 사람이 진짜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인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인지를 우리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화가 날때, 그 사람이 미운 마음이 들 때, 그 사람을 피해서

도망치려고도 하지 말고 싸워 이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화속에 있어 보는 겁니다.
피하지말고 오늘은 정면 돌파하는 거에요. 그 사람 앞에 딱 나서는 겁니다.

그 사람이 욕할 때 욕을 한 번 들어보는 거에요.

화와 함께 있어주는 겁니다. 화를 경험해 보는 거에요.

이것을 여러분은 '뭐 그거 별거 아니네요.' 하고 얘기 할 수 있지만 어쩌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방식일 수 있습니다.

 

마음은 습관적으로 나를 욕하는 사람, 나한테 화내는 사람, 나한테 뭐라하는 사람을 피해

달아나려 하거나 싸워서 이기려고 화를 내는 두 가지만 습관적으로 써봤어요.

우리가 여태까지 써본 대응방식은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제 3의 방식은 써보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 화와 함께 있어보자.

그 사람이 나한테 욕을 할 때 그 욕을 한 번 충분히 얻어먹어보자. 욕을 경험해 보자, 욕을 한 번 살아보자.

이것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거라니까요.해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해 보겠다고 온전히 가슴을 열고 충분히 욕을 얻어먹어 주는 겁니다. 내 앞에서 욕을 해라.

욕하는 것을 허용해 주는 거에요. 나는 그 욕과 함께 있겠다.
왜, 그 욕이 바로 진리니까. 그 욕이 바로 부처니까. 나한테 욕해주는 그 사람이 바로 부처니까.

그 사람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 찾아오는 상황이 아니고 그 상황은, 그 사람은 나를

깨닫게 하는 바로 깨달음이니까.

 

번뇌 즉 보리니까. 그것과 함께 하는, 가슴을 온전히 열고  함께 해주는, 그랬을 때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여러분 불안장애 같은 거 있는 분이 계셨어요. 또는 대인기피증이 있는 분이 계셨어요.

정신적인 이런 모든 문제들은 생각에서 만들어 낸 문제들입니다. 자기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 문제에요.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이 생각이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들입니다.

 

불안장애가 있는 분이 있었는데 항상 불안하고 왜 불안한지도 모르고 항상 초조하니까

도망다니려고 하고, 절에서 명상을 하라고 하니까 염불을 하려고 하고, 불안할 때마다 가서 절을 하고

그래도 막 안되는 거에요. 벗어나려고 산행도 해보고, 노래도 들어보고,

혼자 골방에 들어가서 있어도 보고, 기분전환 하려고 여행도 가보고, 영화도 가보고,

뭔가 불안장애가 일어나기만 하면 거기서 도망치려고 모든 짓이든 다 해본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불안장애를 없애려고 도망치려고 당신이 했던 모든 다른 방어기제들.

도망치려 했던 모든 방식들을 내려놔 봐라. 내려놔 보고 그냥 불안해 봐라.

그 불안 장애가 있다라는 것을 인정해 보고 그것과 그냥 하나가 되어봐라.

그것을 그냥 겪와 봐라. 경험해 봐라.

도망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불안함을 살아보는 겁니다. 불안해 보는 거에요.

그 자리에 서서 어디 가려고 하지말고 도피하려고 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겁니다.

 

외로울 때 외로움을 정면으로 마주 하는 겁니다. 두려울 때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 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살아보는 것이고  불안함을 살아보는 거에요.

어제 그런 분이 또 찾아오셨었거든요.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나를 괴롭힌다는 겁니다.

머리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일어나서 문제가 있을 것 같고  자꾸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감.

일이 잘 못 될 것 같은 걱정, 근심 그것이 정신병처럼 너무 찾아오니까

자식도 괴롭히고 있고 남편도 괴롭히고 있고 미치겠다.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고,

도망치려고 끊임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분이었습니다.

 

그 도망치려고 했던 모든 일들을 내려놔 보는 게 필요합니다.

그 도망치려고 했던 그것을 문제라고 여겨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충분히 한 번 불안해 보는 겁니다. 정면으로 마주해 보는 거에요. 

그 첫 번째 화살, 불안하다라는, 두렵다라는 온갖 생각들에, 나를 공격하고 있는 그것 자체를,

그러한 삶 자체를 겪어 주는 겁니다. 왜, 그것이 진리니까.

그것이 답으로써 찾아온 거니까. 문제로써 찾아온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나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고

그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자체는 그 자체를 통해서 깨닫는다는 겁니다. 도망치지 않는 다는 겁니다.

 

우리 생도 여러분들은 예를 들어, 내가 성적을 좀 잘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많이 써놨는데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좋겠고, 동기들이나 선후배들 사이에 인정 받았으면 좋겠고, 또

 동기들 중에 훌륭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고, 또 실수를 안해서 남들에게 욕먹지 않았으면 좋겠고.

피곤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누가 날 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고,

힘든 일이 좀 없었으면 좋겠고, 빨리 졸업하고 싶고, 빨리 여자친구가 생기고 싶고,

훈련이 좀 편했으면 좋겠고, 선배들이 좀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고

지금 이순간에 나에게 벌어지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없애려고 하는 모든 노력들.

 

이런 일이 생길 때 뭐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벗어나려고 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고,

빨리 여자친구를 만나야지 해결될 것 같은. 사실은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다하는 마음은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아닙니다. 마음이 공허하다는 거에요.

이 공허함을 채울 뭔가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술을 매일 습관적으로 먹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습관적으로 TV를 켜거나 스마트폰을 켜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이 다 공허하다는 겁니다.

공허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외부에서 찾는 거에요. 술을 마시면 잠시 잊을 수 있겠지.

여행을 가면 잊을 수 있겠지. 여자친구를 만나면 잊을 수 있겠지. 이것이 대체기재를 자꾸 찾아 나서는 겁니다.

 

직면하려고 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그 삶을 살아보려고 하지 않고 실수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마땅히 실수 해보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돼요.

실수하는 게 왜 문제입니까. 실수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생에서 실수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실수없이 계속 승승장구만 한 사람들 대부분은

너무 교만해서 나중에 외면당합니다. 모든 사람들한테. 적절히 인생에서 실수가 있었던 사람,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겸허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남들에게도 정말 '야, 저 사람 참 겸손나구나.' 하고 이렇게 더 훌륭한 사람으로 받들어지지요.
 
문제는 실수하는 마음이 문제가 아니고 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하는, 실수를 문제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이 문제이지 실수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십대 초반에 한창 실수할 때이지. 완벽하게 잘 해야될 때입니까?

사실 오십대 육십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지요. 인생이라는 것이 실수를 통해서 깨달아가는 과정이지 

 완벽해지면 끝난  거죠. 부처기 되어버렸으면 끝난 거지요.

그러니까 삶이란 끊임없이 배움의 과정입니다. 삶은 완성되기 위해서 노력하

는 게 아니고 끊임없이 배우겠다 하는 것. 그냥 배워나가는 것.

 

그런데 중요한 건 우리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 깨닫게 하기 위해서 등장합니다.
빨리 졸업하고 싶다. 졸업하고 싶은 이 생각. 이 망상에 끄달려 갈 필요가 없다.

졸업하고 싶다면 지금 이자리에 있기 싫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이렇게 하고 있는 이걸 빨리 끝내고 싶다는 거 아닙니까?  빨리 끝내려고 하는

이 두 번째 화살을 자꾸 망상으로 만들어내지 말고 지금 하기 싫은 이 마음.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 싫은 이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겁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 가장 훌륭항 사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처해있는,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여러분의 삶이 왜 제각기 다른 줄 압니까? 왜 다 다르냐하면, 저마다 자기다운 방식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방식을 기웃거려서는 깨달을 수가 없어요.

자기 방식으로 깨달을 수 있을 뿐이지.


남들이 이렇게 하는 게 좋다니까 그것을 쫓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뭐에요.

여러분다운 방식을 가는 길은 뭡니까? 나에게 처한 이 문제를 통해서 깨닫는 거에요. 이

상황을 통해 깨닫는 거에요. 내가 거부하고 싶은 이 문제를 통해 깨닫는 겁니다.

이 문제야 말로 길입니다. 답입니다. 수행을 찾아나설 필요가 없어요.

지금 답이 이 앞에 있는데, 눈 앞에 있는데, 또 다른 답을 찾아나서면 되겠습니까?

답은 요기 앞에 이미 있는데.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고, 허용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남편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맘에 안든다. 아내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맘에 안든다.

자식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맘에 안든다. 우리 분대장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맘에 안든다.

우리 동기, 내 방을 같이 쓰는 친구의 이러이러한 부분이 맘에 안든다.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방식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를 허용해 주어야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이기를 허용해주지 않고 내 방식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바뀌기를 바라니까,

그렇게 망상을 피우니까, 그것이 괴로운 일이지요.

 

남편이다, 아내다, 자식이 완벽하기를 바라지만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나 남편이 완벽하려면 여러분이 완전히 끝난 사람이 되어야 해요.

부처가 되어야 해요. 부처같은 사람은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으니까 공부할 게 없는 자식이 오겠죠.

더 이상 공부할 것이 없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올 필요가 없죠. 그렇다면 그냥 텅빈 공이지.

그게 뭐하러 오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깨닫는 거니까. 배우는 거니까.

여러분을 배우게 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자식이 나에게 옵니다.

가장 적절한 아내가 나에게 옵니다. 가장 적절한 상황이 여러분 인생에 처합니다.

 

그러니까 아내의 이 부분이 맘에 안든다고 생각될 때는 그게 사실은 아내의 그 부분이

마음에 안드는게 아니라 그 부분을 마음에 안든다고 여기는 그 마음이, 내 안에서 해결 되야 할 숙제인 것입니다. 해결되야 할 공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남편이 문제도 아니고, 아내의 문제도 아니고,

자식의 문제도 아니고, 상황의 문제도 아니고 나를 욕하는 그 사람의 문제도 아니고,

그냥 언제나 내 문제인데 그것은 문제도 아니고 언제나 그것 자체가 답니다. 그것과 함께 하면 된다.

 

이것이 최상의 수행입니다. 이것을 뭐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까지 망상피우면서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만들어 내면서 끊임없이 생각으로

망상을 피우고 있던 것을 돌이켜서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거에요.

문제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문제를 만들던 방식으로 살았는데 그 만들어냈던 조작하던 방식을

그냥 내버려두는 겁니다. 그것이 무슨 수행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건데.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면 되는 건데.

 

그러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러할 뿐입니다. 몸이 아프다. 그럼 아플 뿐이에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냥 아플 뿐인 거에요. 문제됐다고 여기면 아픈 것은 문제다라고 생각하는

내 생각이 문제이지, 아프면 그냥 아프면 됩니다.
누가 나한테 욕한다. 그냥 욕 할 뿐입니다. 욕한 것 때문에 내가 가슴이 아프다?

이것은 두 번째 화살이에요. 욕하니까 저 사람이 나를 무시했다? 이것은 세 번째 화살일 뿐입니다.

 

남들 앞에서 나를 욕했으니까 내가 무시당했다? 내가 만들어낸 망상일 뿐입니다.

그냥 그 사람은 뭔가 말을 했을 뿐이에요. 그 욕했다라는 것도 내 판단이죠.

그냥 뭐라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 소리가 들려올 뿐인 거에요.
그러니까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거에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화가 난다. 그 화가 날 뿐입니다. 화가 나는 나 자신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미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화나면 내면 돼요. 다만 내 앞에 사람에게 화를 내면 업이 되니까,

또 내가 눌러 참으면 나한테 화가 되니까 표현하되 아무도 없는 데서 표현을 하던가 아니면

그 화나는 마음을 그대로 인정해 주면 괜찮아요. 화를 내도 돼요.

화내고 나서 뭐라고 생각하냐하면 화도 내고 이렇게 못난 놈. 이렇게 부족한 놈.

너는 화밖에 낼 줄 모르는 놈. 이렇게 수준 낮은 놈. 이렇게 나 자신을 얽어맬 필요가 없단 말이에요.

 

그것이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입니다. 그냥 화나면 화날 뿐입니다. 화 속에 잠시 있어 주는 거에요.

화를 막 욕할 필요가 있습니까? 화와 함께 우리는 있어 줄 수 있어요.

화가 나는 마음과 함께 있어 줄 수 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했을 때 오롯하게 화를 통해서 깨달음에 이릅니다.

화 자체가 진리다하는 걸 깨닫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 써주신 모든 괴로움의 문제들을 지금 제가 말씀 드리는 것과

똑같이 한 번 해보세요. 이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이 진짜 백퍼센트 옳은 원인인가? 그것이 아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만들어냈던,

끊임없던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이 뭔가? 보시고 망상만 피우지 말고

두 번째에서 세 번째 화살만 맞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는가?

수용해 줄 수 있는가? 허용해 줄 수 있는가? 그 허용속에 한 번 머물러 보는 겁니다.

 

이것을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도망치려고 애쓰지 말고, 싸워 이기려고 애쓰지 말고,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제가 아까 바라는 점, 얻고 싶은 점, 되고 싶은 것을 쓰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뭐가 되고 싶은가? 더 부자가 되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건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것이 다 망상입니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거에요.

지금 이대로가 진리인 겁니다.


너무 늙었다. 젊어지고 싶다. 다 망상이지요. 지금 이대로가 가장 아름다운 진리로써 나타난 거니까.

그러니까 무언가가 되고나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대로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거지요. 무언가 얻지 못해서 우리는 궁핍한게 아니에요.

지금 이대로인 것을 충분이 누리지 못하니까 궁핍한 것이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지금 이것 뿐, 이것이 가장 아름다운 겁니다.

 

우리 모든 문제는 다른 게 되려고 하고, 다른 걸 찾으려고 하고 문제를 없애려고 하고,

문제라고 낙인 찍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이것이 문제인 겁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냥 이 자리에 있으면 되는데.

이 속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허용해 주고 일어난 모든 것을 허용해 주면

놀라운 깨달음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이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을 '스님 설법 잘하시네.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러고 지나가 버리면 아무 도움이 안돼요.

진짜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그 관념에서 받아들이면 좋지. 받아들여 보지 뭐.

받아들여도 안바뀌던데?' 안바뀐다는 말 자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받아들인 다는 것은  바꾸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받아들였는데도 안바뀝니다.'

이것은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자꾸 조작하려고 하는 거지.

 

그러니까 진심으로 시작하면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까?

깨달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꾸려고 하는 건데 지금 이 자리에, 지금 이게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모르고

또 다른 것이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모든 깨달음을 얻을 필요가 뭐가 있고, 수행을 할 필요가 뭐가 있고 그렇겠습니까?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살면 되는데. 그래서 부처님은 언제나 그냥 할 뿐이고,

그냥 살 뿐이고, 그냥 그럴 뿐인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그럴 뿐이 아니고

그냥 살 뿐이 아니고 과장하려고 하고, 더 바꾸려고 하고, 이것이 되려고 하고,

저것이 되려고 하고 이럴 뿐이죠.

 

그러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얼마나 간다하고 얼마나 단순합니까. 얼마나 심플합니까?

이것을 가지고서 불교는 너무 어렵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너무 어렵다. 너무 어려운 게 아니죠. 너무 쉬우니까. 우리가 너무 어렵게만 살다보니까

어렵게 풀어헤치는 것만 쉽다고 보였단 말이죠. 

러니까 너무 쉽게 직바로 가르쳐 주니까 모르는 거지요.

 

이 사실을 하여간 정말 한 번 보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다는 게 무엇인가?

그것을 조금 더 한 번 마음속에서 가져보시다 보면 '아. 이것이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구나.'

그러니까 그러고 나면 어떤 반응이 오는지 아십니까? '그래 이것 뿐이야?' 너무 당황스러운 거죠.

'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답이 그냥 이것 뿐이구나.' 한편으론 너무 어이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탈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야, 이제는 그 무엇도 찾아 헤맬 필요가 없구나.

그냥 그냥 살면 되는 거구나.' 제 한 생각이 그거였습니다. '아, 그냥 살면 되는 거구나.

아,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거구나.' 그거 아니겠습니까?

 

그냥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이죠. 뭘 또 찾을 게 있겠습니까?

인도에 가서 무슨 구릉을 찾아다닐 필요가 뭐가 있고 깨달았다는 큰스님을 찾아갈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이런 얘기하면 뭐하지만 어떤 스님께서 자신은 깨달았다고 하는 도인은 다 찾아다녀 봤다는 거에요.

큰스님이라고 하는 사람들. 하여간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을 다 찾아다녀 봤는데 결론은 실망밖에 없고,

결론은 해결되지 않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죠.

그것이 다 바깥을 향해 찾아 나서는 거니까.

 

그래서 모든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은, 모든 깨달음을 얻은 자는 어떤 패턴대로 가는지 아십니까?

열심히 수행을 통해 깨달으려고 했다가 이 모든 게 허망한 것이구나 라는 것을 알고

탁 내려 놓는 순간 탁 그냥 이 자리에 이렇게 살면 되는 구나.

그냥 이것밖에 없구나 하고 아는 순간 그 모든 찾아다니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고

찾아다녔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순간 그 자리에서 탁 깨닫는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찾아다니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내려놓고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 언제나 우리는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그래서 깨달음은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 보다 더 쉽다.

너무 쉬워서 사람들은 어렵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속에서 물고기가 물을 찾아 헤매는 것과 똑같다.

집안에 들어 앉아 있는 사람이 내가 집이 어디냐고 막 집을 찾아 헤매는 사람과 똑같다.

언제나 집안에 있었으면서. 답 속에 있으면서 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죠.

 

이것이 물론 머리로는 조금 이해가 되겠지만 이것이 뭔가 모를 거에요.

거기에 대해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냥 모르는 대로 괜찮다, 괜찮다 하면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밝아진다. 이것을 이제 알고 나면 조금씩 밝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한게 아니겠어요. 법문을 설한 것을 듣고 나면 밝아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다가 명상을 하고 나면 점점 밝아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부처님 당시 제자들 두 부류가 있었어요. 법을 주로 공부하는 스님들이 있었고

또 선을 주로 행하는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 보면 법을 중심으로 하는 법사 스님과

선을 중심으로 하는 선사스님을 따르는 스님들끼리 부류가 막 싸우고 하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경이 필요한 이유가 굳이 법문을 들어야되는 필요가 이겁니다.

법문을 들어도 이것이 '아, 이렇구나.' 알고 나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선이라는 것은 뭐겠어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건 법이에요.

선은 뭐겠어요. 일상 생활속에서 내가 망상이 일어났다. 두 번째 화살이 딱 일어났다.

그러면 이것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아 또 망상을 피우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내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망상 피우고 있었구나. 또 다른 걸 원하고 있었구나.

이것을 또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도망치려고 했구나. 피해 달아나려고 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알아차리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알아차려서 분별하지 않고 그냥 보기만 하는 것.

그것이 명상이고 선입니다.
그러니까 선과 교가 일치지 다를 게 뭐가 있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