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수행법 강의] 2강 - 귀의(歸依)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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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기도수행법 강의] 2강 - 귀의(歸依)

목탁 소리 2014. 3. 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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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단계의 수행 - 귀의, 참회, 발원

   

먼저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모든 수행의 바탕이 되는 준비 단계의 기초 수행이 있으니 귀의와 참회 그리고 발원이다. 귀의는 내가 가야 할 수행의 길에서 어느 곳에 의지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참회는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되기 전에 과거에 지어 온 죄업을 참회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을 정화함으로써 수행의 토대를 갖추기 위한 수행이며, 발원은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원력과 서원을 가지고 수행을 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방향설정이자 목표를 분명하게 해 준다.

 

(1) 귀의

 

 

불자의 첫걸음, 삼귀의

 

불교 최초로 재가 신도가 된 야사의 아버지가 부처님께 법을 듣고 모든 번뇌가 다하고 법의 눈이 밝아져 부처님께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씀드린다.

이제부터 저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겠사오니, 바라옵건대 우바새가 되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사분율

또한 부처님께서는 먼 고장으로 전법의 여행을 떠나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에게 가는 고장마다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줄 것을 허락한다. 출가하여 구족계를 줄 때는 먼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위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비구의 발 밑에 절한 다음 꿇어 앉아 합장한 뒤 이렇게 말하게 하여라.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다시한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또 다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율장 대품1

이와 같이 출재가자를 막론하고 부처님께서는 처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믿고 따르고자 마음을 낸 이들에게 가장 먼저 삼귀의를 다짐하도록 이끌어 주셨다. 귀의야말로 불자가 되는 첫걸음인 것이다.

 

삼귀의의 의미

 

삼귀의는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이다. 삼보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이겠지만, 특히 육조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자성(自性)의 삼보에 귀의하나니, 불이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름이며, 승이란 청정함이라고 하였고, 또한 경에 오직 자신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였고[只卽言自歸依佛:화엄경 정행품]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하지 않았으니, 자성에 귀의하지 않는다면 돌아갈 곳이 없다고 설함으로써, 삼보란 곧 자기 내면의 완전성인 본래 깨달음, 본래 바른 법, 본래의 청정함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대승기신론에서는 귀의를 목숨 바쳐 삼보에 귀의 한다고 하여 귀명(歸命)이라고 말하고 있는 바, 이를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귀명은 근원으로 돌아감을 뜻한다고 하였고, 이는 곧 목숨을 다해 근원의 자리인 일심(一心)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 모든 중생들은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살고는 있지만, 사실 우리의 근본은 무명에 가린 어리석은 중생의 모습이 아니라 거룩한 삼보가 거하는 본래 부처로써 바른 법이 이미 갖추어져 있고 본래부터 청정한 자성 삼보의 존재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본질은 완전성을 갖춘 자성삼보의 존재다. 본 바탕은 본래부터 부처요 근원의 한마음 즉 일심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생 일대의 과제는 본래 나왔던 자성삼보요 일심인 그 본래자리로 되돌아가는데 있다. ‘목숨을 다해 근원 자리인 일심으로 다시 돌아가야하는 것이다. 이 길은 돌아감이라는 표현이 말해주듯이 새롭게 길을 내어 없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가 나왔던 근원의 자리, 다시말해 생명의 고향이요 본향인 자성삼보로 되돌아 가는 것일 뿐이다.

 

본향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방향설정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이미 깨달아 있다. 다만 무명에 가려 잠시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 무명이라는 착각을 걷어내기만 하면 본래 부처가 드러난다. 귀의와 귀명은 바로 이러한 본래부처로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야 할 삶의 방향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성삼보에서 본다면 우리는 단 한 순간도 부처가 아닌 적이 없다. 부처와 하나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진리에서 멀어진 적도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단지 본래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완전하게 있음을 알아차리고 인식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그저 본래 있던 대로 되돌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되돌아가는 귀의야말로 삶의 행로다.

우리는 애써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거나 없는 열반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부처를 드러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귀의는 나 자신이 본래 무능하고 어리석은 중생이 아니라 본래부처라는 무한권능의 마음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을 구하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마음가짐이다.

그렇기에 귀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의 방향성, 수행의 목표를 설정해 준다. 내가 나온 자리가 바로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인 본래부처요 일심에서 나왔기에 본래 나왔던 그 자리, 그 본향으로 되돌아 가겠다는 삶의 방향설정과 목표를 뚜렷이 해 주는 것이다. 목표가 분명해야 바른 길로 바르게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수행자에게 있어 귀의는 수행의 첫 걸음이며, 본격적인 수행으로 가는 근원 바탕의 마음자세라 할 수 있다.

 

귀의는 불자들만의 전유물? NO!

 

이러한 귀의는 불교 신자들만의 전유물일까? 그렇지 않다. 용어를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라고 하다보니, 자칫 불자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이 말에는 일체 모든 인류와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지혜가 담겨 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본다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완전한 지혜와 자비가 담겨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 용어로 본다면, 자기 내면에 신성, 영성이 충만하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 내 바깥에 어떤 신과 완전성과 지혜와 힘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을 돌이켜, 내가 그렇게 원하고 구하고 꿈꿔왔던 그 모든 진리와 지혜와 완전성과 불성과 신성, 신이라고 알려진 그 모든 근원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돌이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나의 내면에 완전성이 불보(佛寶)가 있고, 그 모든 삶의 지혜와 지침이 내 안에 이미 들어 있으며(법보(法寶)), 나라는 존재는 바로 그 완전한 지혜와 사랑과 완전한 행복과 평화로 가고자 하는, 바로 그 근원적 완전한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승보(僧寶)의 의미다.

그러니 어찌 삼보귀의가 불자들만의 전유물이겠는가. 이는 일체 행복과 평화와 지혜를 찾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이 가야 할 삶의 방향이다.

 

우주로부터 보호받는 길, 귀의

 

귀의는 나마스(namas)에서 유래한 말로, 한역에서는 나무(南無)’라고 음역하는데, 이는 곧 의지처혹은 피난처의 의미를 지닌다.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칠 때 안전한 피난처를 구하듯, 고통 바다를 헤매는 중생들에게 불법승 삼보는 안전한 피난처가 될 뿐 아니라, 든든한 의지처가 된다.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게 되면 그 어떤 역경이나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마음 안에 본래 완전하고 안전한 삼보라는 의지처요 근원적인 공간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그 어떤 외부적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서게 되는 것이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는 불법승 삼보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몸을 맡길 진정한 귀의처이며 그래서 세 가지 보물이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죽음 이후에 수많은 혼란과 혼돈 속에서도 삼보에 귀의한 자는 신비한 능력을 갖고 있는 불보살님들의 도움으로 고통 속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귀의는 단순히 불자가 되겠다는 맹세를 넘어서서, 내 안에 불법승 삼보라는 또한 불보살과 둘이 아닌 한마음, 우주법계와 둘이 아닌 일심이라는 근원 자리에 내 생명을 바쳐 귀의하는 마음으로써 모든 수행자를 근원에 뿌리내리게 해 준다. 또한 자신의 근원 뿌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해 주며, 이 우주법계로 나의 근원성품이 본래 부처임을 선포함으로써 귀의한 자를 우주법계로부터 보호받게 해 준다.

실제 마음속에 삼보를 품고 있고, 삼보라는 불법승의 완전성과 지혜와 청정성이 갖추어진 존재임을 스스로 자각하며 규정하고 굳게 믿어 귀의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어떤 풍랑과도 같은 삶의 파도 속에서도 든든한 자기중심을 세울 수 있고,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우주법계라는 법신불의 가피와 보호를 받게 된다. 이 보호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수록 더욱 빛을 발하는 놀라운 도움이고 호념이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자비로써 100% 완전히 돕고 있지만 우리가 내 스스로 부처인 줄 모르고 중생이라 여기며, 스스로 부족하고 소외된 존재라 여김으로써 가슴을 활짝 열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무한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귀의는 바로 그러한 중생이라는 생각, 어리석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자신의 근원이 무량공덕의 바다인 삼보임을 자각하고 굳게 믿음으로써 나 자신을 부처님께로 활짝 여는 의식이다. 귀의를 통해 가슴을 활짝 열게 되면 비로소 법신 부처님의 무한한 도움과 호념과 자비로운 가피를 온전히 100% 놓치지 않게 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로운 도움을 스스로 제한하던 삶에서, 온전히 받아들이고 수용할 뿐 아니라, 내가 바로 불법승 삼보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삶으로 전환하는 인생 일대의 대전환이 바로 귀의인 것이다.

 

귀의의 공덕

 

부처님께서 밧지국 중각 강당에 계실 때, 많은 상인들이 타국으로 떠날 준비를 마치고 부처님께 떠나기 전에 곳곳에 있을지 모를 위험과 두려움을 안고 부처님께 법을 청하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너희들은 넓은 벌판을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놀라고 털이 곤두설 때 부처님을 생각하라. 여래십호를 떠올리며 귀의하는 자는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라. 부처님의 바른 법과 율은 번뇌를 떠나게 하며 지혜에 통달하게 하며 법을 가까이 한 인연으로 깨달음을 얻는다. 또한 승가를 생각하라. 세존의 제자는 착하고 바르게 나아가며 세상의 복받이시다라고 생각하면 두려움은 곧 없어질 것이다... 이처럼 상인들이여, 너희들이 넓은 벌판으로 가다가 두려움이 생기거든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라잡아함경 권35 염삼보경

또한 증일아함경 권12에서는 세 가지 귀의의 덕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덕이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덕이란... 일체 중생들 가운데 부처님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일체 중생이 받들어 섬기나니 이 덕을 갖추면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법에 귀의하는 덕이란... 모든 법 가운데서 열반법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미칠 것이 없으니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거룩한 승가에 귀의하는 덕이란... 여러 무리와 여러 종류의 삶들 가운데 여래의 승가 대중이 가장 높고 제일이어서 미칠 것이 없으니 천상이나 인간의 복을 받는다... 첫째로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면 세상에서 가장 높게 되고, 부처님의 법을 섬기면 탐욕과 집착이 사라지며, 거룩한 승가를 받들면 가장 좋은 복밭이 된다. 불법승에 귀의하는 이는 세상에서 으뜸가는 지혜가 생기고, 그 누구보다 좋은 복을 먼저 받으며, 만약 그가 천상이나 인간에 살면 중생들의 올바른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제법집요경에서는 삼보에 귀의하는 이들은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달음의 과보를 얻게 된다고 하였으며, 출요경에서는 청정한 신심을 가진 이가 있어 여래에게 법을 듣고 착한 뜻을 일으켜 삼보에 귀의하면 부처님의 청정한 계법을 받고, 다함이 없는 큰 공덕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십이인연경에서는 괴로움에서 구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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