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SC_9758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늘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그런 삶은 언뜻 보기에는 안정되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자는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으며 틀에 박혀 있고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확실한 삶에 틀어박히고 구속된 채 자유를 잃고 해맬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얼마나 희뿌옇고 재미가 없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 머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처럼 따분하고 기계적인 밍숭맹숭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기계의 움직임일 뿐. 그것이 아무리 부유한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구속이요 속박이다. 돈과 재물로 가득 찬 부유한 노후라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삶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삶에 지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고, 노후를 준비하려 들지 말라. 내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노후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삶으로써 시공(時空)의 법계에 무량한 공덕을 저축하는 일이다. 삶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경이롭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삶에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혼란과 위험을 거부하지 말라. 괴로움, 아픔, 상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이런 것들로 아파하지 말라. 삶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삶도 없다. 좋은 일만 일어나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처럼 따분하고 심심하며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에는 생기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자유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극단적인 좌절과 고통이 도리어 저 반대편의 극적인 기쁨 혹은 삶의 대 전환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인생의 최저의 나락에 빠져 있는 이들일수록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단번에 그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가깝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다른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만 살짝 바꾸어 놓는 순간 그 삶은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최악의 괴로운 삶은 곧 최고의 행복과 가깝다. 그 둘은 극단의 먼발치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길벗이다. 살짝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눈빛을 나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인생이 자꾸만 꼬이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인생에서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고? 괴로운 일들이 몇 가지고 겹쳐서 나를 미치게 한다고? 잘 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곧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깊게 삶을 지켜보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고민만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마음을 지켜보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관조(觀照)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만 그것을 하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다만 매 순간순간 주어진 삶을 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고, 깨달음도 그렇고,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바람이 불듯 그렇게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깊은 관찰로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막 내동댕이쳐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과 위험과 역경은 모두 우리를 더욱 더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深淵)에 이르게 해 주는 영적인 동반자요 도반 같은 것이다. 역경(逆境)이 없고 순경(順境)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편안과 불안,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또한 여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삶의 속성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고, 집착과 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바라기 위해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가 없다.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이라는 것 또한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 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중립적인 무분별의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인 것이다.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문제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이 세상의 근본 이치는 언제나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와 고정된 것,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따른다. 또한 그러므로 삶이란 언제나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며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 원칙이며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초를 거스르려 애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하며 불변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는 꿈이고 환영이며 억지일 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찾아 나서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삶의 복잡성과 혼란과 어느 때고 쉴 사이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위험과 근심과 역경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처럼,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그저 한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만끽하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 모든 삶에 감사하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을, 위험을,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눈부시게 지켜보라.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