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와 지혜의 명상언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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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지혜의 명상언어, 감사

목탁 소리 2010. 7. 2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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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연결되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연결속에서 깊고도 따뜻한 자비로써 서로 서로를 돕고 있고 사랑을 나누고 있다. 자비라는 단어는 그저 단순히 교리적인 이론으로 끝나는 죽은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이고 ‘진리’ 그 자체다. 온 우주의 뒤에서 배경처럼 허공처럼 그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모든 존재가 더 깊은 차원의 내면에 다다랐을 때 결국 만나게 되는 정점이 바로 ‘사랑’이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그러한 우주의 자비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그간 우리는 그 무한한 자비와 사랑의 도움에 감사하며 살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이러한 연기법과 연결성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법계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사실 이러한 감사함은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만 선택적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으로 이유 없는 무한한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더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삶의 풍요를 이루는 오랜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저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모든 기도의 핵심도 기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에 있다. 빌고 바랄 때 사실은 그것이 없다는 부족과 결핍을 연습하는 것이지만, 감사해 할 때 풍요와 만족을 연습하는 것이다. 부족을 연습하면 부족이 들어오고, 감사와 풍요를 연습하면 감사할 일과 풍요로움이 들어온다.

그리고 더없이 감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보통 우리는 매 순간에 만족과 감사하기보다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조차 곧 다른 미래의 목표를 향해 치닫곤 한다. 그러한 끊임없는 목표와 미래를 향한 질주는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서 존재하기 보다는 더 많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현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감사하는 순간, 우리는 곧장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적인 자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게 된다. 감사한다는 말은 완전히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인다는 말이고 대 긍정의 만족을 넘어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감사는 선택의 문제이지, 외적인 상황의 문제가 아니다. 언제든 우리는 감사할 수도 있고, 감사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에게 선택의 결정권이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설사 고통일지라도 그것은 더 깊은 차원에서 감사할 일이다. 단지 우리는 더 깊은 의미를 다 알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다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우주법계는 언제나 동체적 자비로써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고, 우리는 거기에 감사함으로써 우주법계와 하나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단순하다. 언제나 ‘감사’를 선택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그저 ‘감사하다’고 말하라. 매일 매 순간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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