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나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혹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의 근원적인 이유,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 부분을 오늘은 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향해 가는 종교다, 그리고 ‘나의 해탈과 열반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종교다.’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금강경의 물음을 다시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가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의 답변에 대해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께서 수행법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답을 할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 구류 중생이라고 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하여 완전히 멸도에 들게 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답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이 질문에 ‘일체 중생을 완전한 행복인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내야 한다 라고 답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불교의 목적이자, 우리들 모든 존재의 삶의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아 부처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겠어요. 깨달음을 얻어서 그것으로써 내가 돈 좀 벌어볼까, 명예를 높여 볼까, 내가 좀 큰 스님으로 대접받아 볼까, 유명세를 타 볼까, 깨달은 자로서의 어떤 대접을 받아볼까 라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나 홀로 깨달음을 얻어서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 스님들께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 중생들을 구제하기가 쉬워진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들을,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평화로움으로 이끌고 자비로 이끄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교는 그냥 깨달음을 얻으면 끝나는 종교구나, 깨달음만 얻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된다면 설사 지혜가 조금 증장된다 할지라도 자비를 소홀히 여기기 쉽게 됩니다. 물론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로 만나는데, 너무 깨달음과 수행에 집착하고 매진해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조금 소홀히 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얼마만큼 공부가 되었는가를 보는 잣대

그런데 어찌되었든 간에 불교에서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다니는 근본적인 목적은,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겠다, 불교를 통해서 내 마음 좀 편안해 보겠다, 어떻게든 내 삶이 좀 아름다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목적으로만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목적은 불교를 공부함으로써 나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나아가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내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각,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지혜이고, 이러한 동체대비의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곧 자비이고, 깨달음이 곧 사랑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면, 사실 내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마음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또 절에 다니면서,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숙되었느냐, 나의 삶에 어떤 진보가 있었느냐, 내가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 졌느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 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고 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수행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된다는 겁니다.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직업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해 집니다. 똑같이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이 사회봉사단체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또 똑같이 절에 와서 절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의도로 하느냐, 이것이 내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것이거나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과 평화로움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마음의 의도로써 그 행동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들이 했을 때는 그것을 우리가 무자비하다 라고 생각지 않거든요.

저의 은사 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시단 말 이예요. 너무 엄하셔서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입니다. 그냥 뺨을 때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로는 거친 욕설도 하시고, 저 때만 하더라도 때때로 맞았는데, 저의 윗대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들, 그 스님들 또한 은사 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거의 하루도 안 맞은 적이 없다고 그래요. 옛날에 군 생활 하다 보면,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잘 때 오히려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야말로 그것처럼 하루라도 은사 스님께 안 맞은 날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랬다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요,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무서웠었고, 매서웠던 것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있다거나, 아주 미운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원망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를 내고, 때로는 매를 들고 하시는 그 의도,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진리로 깨우침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느냐 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똑같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이냐, 그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을 분명하게 명확하게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 복이 안 붙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볼 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너무나도 평범해 집니다.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지극한 평상심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휙휙 날라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거나 뭐 아는 소리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 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평범함 가운데의 그 비범함을 모르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청소하고 똑같이 사니까 말 이예요.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 속에 이 우주를 먹여 살릴 만한 큰 대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 똑같은 행위 속에 겉으로 봤을 때는 자비의 행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가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자비심 그것 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할 때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동체대비심, 완전한 자비심, 일체 모든 중생을 향한 완전한 자비심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 자비심, 이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어떤 한계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이 아니고, 선택적인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고, 저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눠놓고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고, 어떤 멋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사랑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보통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좀 뭐랄까요.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면에는 사실 증오와 믿음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깊이 사랑하면 깊이 사랑할수록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는 깊은 증오도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고 얘길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정말 사랑했다. 라고 생각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그냥 떠나가더라도 별 느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 이면에 사실은 증오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은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이게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그래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기고, 내 것 네 것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을 때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전쟁을 하게 되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은 그 어떤 다툼도 없다는 거죠.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우리는 보통 ‘신은 우리를 심판하신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했는지 그른 일을 했는지를 신께서 심판하신다. 그래서 저 위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는 신으로 알고 섬기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심판 받기를 바라면서, 또 나쁜 심판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신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뭐에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나누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죄다 이것은 선이다 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은, 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인 것이고 완전히 절대적인 것이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미워하고 이러는 분이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하는 신으로 알다 보니까 어때요? 신 앞에 서면 떨게 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요.

그러나 사실 신은 무한한 사랑이고, 완전한 자비이며, 무분별 그리고 무차별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어머니가 자식을 품어 안듯 그렇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미워하고, 잘 한 자식만 선택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듯이, 신도 그 이상입니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싫어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주고 착한 일 한 사람은 선물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품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 앞에 서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바로 그게 신의 진실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신에 대한 용어는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도 같은 용어입니다. 온 우주의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심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차별이 있게 되면 너와 내가 생기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신의 사랑이 유대인들만 사랑하는 것이고 유대인들만이 신의 자식이라고 한정짓는 선민사상, 이것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어떻게 신의 사랑이 어느 한 종족에게만 한정될 수 있겠어요. 또 신의 사랑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 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신의 사랑이 있다, 이것처럼 신을 무시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절에 다니니까 저의 어릴 적 아주 절친했던 친구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우리 신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갈 텐데,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봐줄 수가 없다. 제발 좀 개종해라” 이렇게 하는 분이 있었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지요. 아니 신을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분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신이라는 분이 네 종교, 내 종교 나눠서 이 종교에 있는 사람만 올바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 안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참된 하느님께서는 불자들도 사랑하고, 참된 부처님께서는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도 똑같이 자비로써 대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많은 목사님 신부님 또 성직자 분들을 만나 뵈면, 지금 말했던 이러한 신을 섬기지, 어떤 한계 지어진 조건 지어진 신을 섬기지 않더란 말입니다. 신은 그 어떤 모든,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서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네가 이 종교 믿으면 사랑할거야”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이죠. 모든 존재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자비라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랬어요.


사랑 없음을 탓하지 말라. 다만 차별하지만 말라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뭐냐 면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하는 실천적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얘기하는데, 또 교회나 성당을 가도 사랑을 얘기하는데, ‘나는 너무도 자비심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우리 스님들, 성직자나 수행자들은 그것이 좀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 내가 진정한 수행자라면 끓어오르는 자비심을 주체할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단 말이죠.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가, 한없는 자비심이 왜 없는 것이지?’ 하고 실망감과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나는 왜 이리 사랑이 없지, 난 왜 이렇게 자비롭지 못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이 없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는 판단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걱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판단과 분별과 시비와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아니, 스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차별하지 않는 게 어찌 사랑입니까? 정말 아껴주는 게 사랑이죠”라고 말씀들 하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차별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 이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들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우리가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본단 말이죠. 우리나라와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애국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래요. 우리나라가 이기면 한 없이 기쁘고 신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것도 없고 진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죠. 우리가 이겼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기쁜 거죠. 4천만이 기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와 너의 틀, 내 나라 너의 나라 이런 분별이 없이 완전히 툭 터진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에 지면 어떻습니까? 지면 13억 인구가 기쁜 겁니다. 4천만 인구가 조금 기분이 나쁠지언정, 저 13억 인구가 기쁜 거예요. 그것은 지구 전체의 에너지를 놓고 본다면 훨씬 플러스(+) 에너지가 많아지는 겁니다. 4천만 인구가 기뻐하고 13억 인구가 괴로워하느니, 13억 인구가 기뻐하고 4천만이 조금 서운해 한들 우주 전체로 놓고 본다면 그게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 생각은 늘 ‘나’의 관념에 빠져 있고, ‘내 나라’의 관점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합니다. 그 모든 분리, 분별을 넘어서는 더 큰 생각을 못 한단 말 이예요. 이 말은 그렇다고 애국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응원을 하되 이기면 우리가 이겨서 좋고, 지면 중국이 이겨서 그것도 또 좋아해 줄 수 있는 드넓은 가슴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체대비의 관점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는 이처럼 툭 터진 너른 가슴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동체적인 관점에서는 생각을 못 하지요.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식만을 아끼고 사랑해요. 애국이라는 것 또한 내 나라라는 틀이 있는 겁니다. 내 나라 너의 나라라는 틀이 있는 거예요. 내 종교 네 종교, 인간과 자연, 이런 일체의 모든 틀로부터 벗어나서 분별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즉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 때 맹목적으로 내 자식의 편을 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이 조금 잘못이 있으면 잘못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인거죠. 맹목적으로 편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에게 화가 나잖아요. 자식이 막 속을 썩입니다. 그럼 자식에게 욱 하고 버럭 화를 낸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사랑의 행동이 아니죠.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그 상황, 내가 지금 화가 올라오는 상황, 자식이 화를 돋우는 상황,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겁니다. 분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보는 거예요. 지켜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지켜보게 되면 욱 하고 화를 내지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화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화에 휘둘리지 않으면 자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대신, 그 화를 지켜보게 되고 저절로 지혜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화를 내지르지 않게 되요.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지켜보게 된다면 화를 다스리게 되는데 그 화에 휩쓸리면 욱 하고 화를 낸단 말이죠. 한 템포 늦추고, 잠시 멈춰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우리 내면의 더 큰 나, 참나의 자리, 근원의 자리에서 그 화를 저절로 사라지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화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를 알아서 이끌어 주게 됩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직접 해 보지 않고는 이 말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요, 얼마 전에 은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님이 어린 딸 하고 같이 은행에 왔다가 업무를 보는데 딸이 하도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끄럽게 하니까 “야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해!” 하고 화를 내면서 꼼짝 못 하게 옆에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은행 창구에 서서 업무를 보는데, 딸이 옆에 서 있다가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찾더니 이내 엄마 뒤에 가서 있는 힘껏 똥침을 놓았어요. 이건 실제 제가 본겁니다.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엄마를 찌르는데 이게 너무 제대로 들어갔나 봐요. 아, 이 어머님께서 그 순간 너무 화가 났는지, 고개를 확 돌리더니 갑자기 딸을 보자마자 한 대 퍽 때리면서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딸이 그 전까지만 해도 막 즐겁게 떠들고 놀고 그러다가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 사람들 많은데서 크게 한 대 얻어맞았단 말이에요. 그 뒤에 딸은 갑자기 기가 확 죽어가지고, 풀이 죽어 앉아있단 말이죠.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냐, 그런 방식으로 욱 하고 내지르는 것이 그게 사랑이 아니지요. 진정한 사랑은, 전체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겁니다. 즉 내가 올라오는 화, 그것을 잠시만 지켜보고 있었어도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요. 모든 상황에서, 이 상황에 어떻게 내가 대응해야 하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사랑으로써 대응하는 것이냐 이게 기준입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우주 전체에 보다 많은 자비와 사랑을 품어주는 뿜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예요.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내가 이 사업을 확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고민으로 삼느냐. ‘내가 사업을 확장하면 돈을 많이 벌겠지? 그러면 좋은 집도 사겠지?’ 이런 이기적인 마음, 내 욕심이 개입이 된 것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이것이 확장돼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이득을 줄 수 있는 것이냐는 그 기준에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결정이 안 나면 어떨까요? 이게 이기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마음을 관해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분별심 없이 차별심 없이 관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심 차별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의미 하거든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항상 내 이기적인 마음, 아상에 길들여진 생각입니다.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생각이 잦아들면서 생각 그 이면에 있는 무심(無心),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적인, 더 깊은 차원의 불성과 불성에서 우려 나오는 어떤 본연의 직관적인 지혜를 만나게 된단 말이죠. 그렇게 관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으로써 이것에 해답을 놓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사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좋아하는 것, 편들어 주는 것, 그게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분별없이 지켜봐 주는 것, 차별하지 않고, 네 편 내편 나누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이라고 하는 것, 참선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관 수행,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했을 때, 사랑이 커지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태양처럼 빛난다

마치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과도 같습니다. 태양빛은 어때요? 온 우주에 골고루 비친단 말이죠. 어디에만 선택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비칩니다. 태양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비치고, 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비쳐요. 심지어 태양빛을 비추지 말라고 증오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비칩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분별이 없어요. 좋은 사람에게도 비추고 나쁜 사람에게도 비추고, 죄인에게도 비추고 성자에게도 비추고, 동일한 태양의 빛이 모든 존재에게 인간과 짐승 할 것 없이 자연만물 모든 것에 평등하게 비출 뿐입니다. 하다못해 동굴 속에 10년 20년 갇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에만 벗어난다면 언제든 그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나는 빛이 싫어. 빛을 믿지 않아. 빛은 없어. 즉 진리는 없어. 신은 없어. 부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빛은 그 사람에게 비칩니다. 태양은 언제나 있지요. 태양이 비추는 것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적인 빛, 이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물결치고 있고, 부처님의 자비와 신의 사랑이 언제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는 있느냐면, 우리가 그것을 ‘안 보겠다. 난 믿지 않겠다. 태양을 보지 않겠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는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안 보겠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태양이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조차 고개를 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고개를 드는 순간 태양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도망간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 모두에게 부처님은 한없는 자비로써, 법계는 언제나 완전한 자비로써 우리를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일, 우리를 미워하는 일 이런 일을 전혀 안 한다는 말이죠. 항상 사랑하는 일 밖에 안 합니다. 그야말로 ‘사랑밖엔 난 몰라’예요.

그러면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뭡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 낸 거죠. 내가 만들어 낸 겁니다. 부처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만들겠다고 해서 작정하고 만드는 사람에게 이 태양빛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는 태양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물결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체 모든 사람을 내가 자비로 대하고 있느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바탕 된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 이것을 봐야 됩니다.


최악으로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군에 몇 년 전부터 비젼캠프라고 해서 군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 하는 특별한 장병들을 열 댓 명씩 모아서 4박 5일 일종의 치유의 수련회 내지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에 계시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이 같이 진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처음에 몇 번을 하면서 뭐랄까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너무 힘든 경우가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니까 막 힘이 드는 거예요. 너무 에너지가 소진되고 그 친구들과 하루 지내고 나서 저녁에 잘 때가 되면, 힘이 쭉 빠질 정도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너무 힘들다.’ 이런 느낌이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던 어느 날, 문든 한 생각 일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함과 복된 것으로 다가오데요. 정말 삶이 힘든 사람들은 힘이 들수록 빛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행복한 삶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너무 고통 받을수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르게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좀 힘들지언정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수행의 장이고 자비를 닦아갈 수 있는 장인데, 내 스스로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혔었구나 그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한 다음부터 오히려 그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고 하는 것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만나면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나한테 번번이 하소연만 하고, 힘들다고만 얘기하고 답답하다고만 얘기하니까 조금은 짜증스런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한두 번 들어주는 것이 세 번 네 번 계속 얘기하면 짜증스럽고, “야 좀 그만 좀 와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우리의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순간입니다.

평범하거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사랑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들고 고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즉 정말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에게 있어서 최상의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받는 그만큼 고스란히 사실은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바꿔 불러라

우리가 한 번 두 번 자비심을 연습하고 마음에 사랑을 연습하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의 행위가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된 행동을 했을 때, 우주는 나를 위해서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적 에너지가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법계는 사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오직 자비 밖에 없고 사랑 밖에 없다.’ 우리가 부처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는 사실, 자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사실, 신이라는 용어보다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 밖에는 없단 말이에요.

내가 우주법계의 본질과 주파수를 맞췄을 때, 자비를 실천하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의 마음을 실천했을 때 즉 우주법계와 주파수가 맞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자비심을 연습하면 보다 빨리 깊은 명상에 들기 쉽다.’ 자비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수행의 성취가 빠르다는 말이죠. 그러나 자비심을 연습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흐트러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했을 때 사랑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비로 대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어떤 일을 하든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직장 생활을 하든지, 자비와 사랑이 근원에 깔려 있느냐 이것을 항상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비심, 사무량심을 닦으라

불교 경전에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무량심이란 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말하는데, 무량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량한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해탈의 마음,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일으켜야 될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그리고 이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켰을 때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무량심인데, 그게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첫째, 자심(慈心),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서, 행복과 평화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 마음 쓰는 것, 이게 바로 자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하고 마음 쓰는 것이 자심이에요.

둘째, 비심(悲心)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통을 없애 줄까, 고통을 덜어 줄까,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감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연민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입니다. 힘들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냥 고개를 확 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없애줄 수 있을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을 바로 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과 비심을 합쳐서 자비심(慈悲心)이라고 하죠.

그리고 세 번째 마음이 희심, 희무량심(喜無量心)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희심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가 아주 잘 못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희심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걸 우리는 잘 못해요. 오히려 남들이 잘 되면 배 아프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좋은 일이 생기고 대박이 나고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프단 말이에요. 괜히 꼴 보기 싫고 칭찬해 주기 싫고, 칭찬에 굉장히 인색하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준다, 이것을 수희동참한다고 하거든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수희동참해줄 때, 함께 기뻐해 주면서 함께 동참해 주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연습 되는 것은 그 장점 그 좋은 점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남는 겁니다. 내가 함께 동참해 준다는 것은 곧 내가 함께 한 것과 다름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요, 물질적인 것을 보시했을 때만 보시의 공덕이 있는 게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을 찬탄하고 수희하면서 함께 기뻐해 줬을 때 동일한 보시의 공덕이 지어지는 겁니다.

물질세계란 내가 직접 그 물질을 얻어야지만 물질세계가 아니라, 마음만 내어도 그 물질세계가 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해야 근력이 강화되지만, 마음속으로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는 상상을 하잖아요. 그렇게 상상을 하고 나면, 동일한 시간을 상상했을 뿐인데 근력이 마찬가지로 강화됩니다. 상상밖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우리 마음 작용의 본질이 그래요. 그렇게 마음을 내기만 했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희동참하는 마음, 누가 보시를 했을 때, ‘그래, 너 잘났다. 돈이 많으니 그렇게 보시하지. 난 하기 싫어서 안하냐.’ 이렇게 빈정거리기 보다는,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은 동일하게 함께 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희공덕, 수희의 수행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수희동참,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남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보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것, 그랬을 때 수희공덕이 생깁니다. 직접 한 사람만 공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희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공덕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보원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면, 보원행원에 다섯 번째가 수희공덕이란 게 있습니다. ‘내가 평생 수희공덕 짓기를 발원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는 공덕을 짓기를 발원합니다.’ 하는 것이 다섯 번째의 발원 일 만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고 찬탄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희찬탄이라고 해요.

길거리에서 향을 파는 사람이 향을 하나 피워 놓으면, 향을 파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죠? 향을 사려고 보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것처럼 향을 직접 사지도 않았고 팔지도 않았지만 향냄새를 누구나 맡는 것처럼 수희를 하게 되면, 내가 직접 피운 향은 아닐지라도 향냄새를 맡는다 이 말입니다. 수희공덕, 수희찬탄, 모든 것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 찬탄심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다 하는 이야깁니다. 진정한 자비심이 있어야 그것이 찬탄이 되고, 수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수희가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을 것을 보고 함께 수희동참을 했을 때 그것이 곧 나에게 벌어집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남들 아파트 값이 올라서 두 세배 올랐다 그러면 배 아파 죽잖아요. ‘에이 난 그 옆에 있는 아파트를 샀는데 안 오르고, 왜 저사람 아파트 값만 오르는 거야’ 하지 말고, ‘와, 저 사람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얼마나 많으면 저렇게 됐을까.’ ‘참 잘 되었다’ 하고 수희찬탄해 주면, 나에게도 그 공덕이 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함께 공덕이 쌓여요. 그래서 수희찬탄을 많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로 사심(捨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무차별심, 무분별심, 모든 평등심을 의미합니다. 사심은 좋고 나쁜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완전한 평등심을 얘기 하거든요. 그래서 최고봉에 사심이 있다고 그럽니다. 자심과 비심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희심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심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희심과 사심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를 완전한 평등한 마음으로 보고, 네 편 내 편을 나누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 나누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수희동참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 좋은 것을 보든 나쁜 것을 보든 분별하지 않고 관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게 바로 사심이고 최고의 자비심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희사를 연습하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 무량한 자비심이 생기고 무량한 공덕이 생기고 무량심이 생겨난다 이 소립니다. 그게 바로 사무량심의 의미입니다.


자비심의 실천력, 사섭법

사섭법(四攝事)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사무량심보다 구체적으로 자비심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가를 의미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해요.

첫째, 보시섭은 이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보시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나눌 수 있어야 된다, 자비를 입으로만 보시, 보시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소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가르침을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애어(愛語)인데요, 애어가 뭐냐 하면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나누는 데서 중요한 것이 말 한마디를 나누는 것이란 말이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말 한마디 해주는 것, 그것이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는 소립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 가지고도 천 냥 빚을 값 듯이, 말 한마디 갖고서도 그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지만 말을 제대로 표현 못함으로써, 애어를 못함으로써 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면서요. 경상도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고, 마음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말을 안 하니까 아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막 툴툴거리잖아요. 사랑스러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특별한 파동, 파장의 에너지가 있어서 이 말의 파장이 이 우주 법계 끝까지 퍼져나갑니다. 그 말의 에너지가 하나의 창조 에너지가 되어 우주 끝까지 전달되고,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든 만 번이고 십만 번이고 반복해 말하면 무조건 그게 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진언(眞言)이 된다는 소립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행(利行)입니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이로운 행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으로써 이타적인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애어는 구업을 말하고, 이행은 신업을 말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생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보시를 해야 하는데, 애어와 이행으로, 즉 말과 행동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신업입니다. 행동이에요.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행동을 바꾸면 생각도 뒤따라옵니다. 생각을 바꾸긴 쉽지 않지만 행동을 바꾸기는 쉬워요. 그래서 먼저 행동으로 저지르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질러 물질로써, 몸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얼마를 보시해야지가 아니고, 직접 저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동사섭(同事)입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그 일을 함께 하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면서 잘 하라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일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불살생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이 어떻게 군대에 가십니까?” 이런 게 바로 하나의 동사섭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군대가 누구 죽이는 단체에요? 살리는 단체죠. 살리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군대이지, 죽이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의 아들들이 군에 있단 말입니다. 이들을 행복으로 안내하고, 고통에서 구제하고, 이들에게 뭔가 진리를 알려주려면, 나는 아주 초월해서 그냥 저기 신선처럼 있으면서 “중생들아, 좀 잘 살아봐” “너희들 군 생활 힘내서 잘 해라” 이렇게 얘기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함께 훈련도 하고, 함께 뛰고 하면서 동사(同事)하면서 함께 그곳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중생 속에 함께 뛰어들어서 그 일을 함께 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동사섭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뭔 일을 할 때, 설령 안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들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동사(同事)로서 구제해 주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한 자비 실천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자비심을 자꾸 계발할 수 있어야 되고, 삶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느냐,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느냐, 나의 모든 행위의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자비심의 발로이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이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처럼 잘 실천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무조건 저질러 실천하고 봐야 합니다. 처음에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을 어렵게 한 번 저질러 실천하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연습한 것이 그야말로 습(習)이 되어서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악행을 연습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면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다음에 똑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기가 더 쉬워지거든요. 이걸 습(習)이라고 그래요. 업이 습이 되는 겁니다. 업습(業習)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선한 업을 짓는 것이, 의도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것이 처음에는 어려워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갈수록 더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업의 습의 물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근원적인 힘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게 됩니다. 우주의 그 어떤 힘보다도 자비의 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쌍둥이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한 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간호사 한 분이 그 아이가 죽은 지 미처 모르고서 죽은 아이 옆에 살아 있는 쌍둥이 아이를 같이 두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있다 살아있는 쌍둥이 아이가 죽어 있는 아이를 그냥 끌어안았단 말이에요. 그 사진 찍어 놓은 것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던데 보셨나 모르겠어요.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어요.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 근원에 사랑이라는 아주 본질적인 흐름이 누구에게나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 어린 아이도 저절로 사랑을 향해 행동하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근원은 사랑으로 물결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사랑은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라는 책을 보니까 말이죠. 그 지리산의 스님 세 분이 독초를 먹고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약이 없다고 그러고, 그런데 세 분 모두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스님 세 분이 자기 몸을 걱정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스님들의 몸을 걱정해 주고, 약이 한 사람 먹을 양 밖에 없었는데, 서로 내가 안 먹겠다, 다른 스님보고 먹으라고 하고, 모든 스님들에게 ‘나’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한 스님이, 당신도 아파 죽겠지만 다른 스님들의 그 마음 씀씀이의 사랑을 보고, 안 죽는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 우리는 죽지 않겠구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죠. 병원도 안 갔는데 그 날 밤에 수행을 하고 앉아서 참선도 하고, 밤을 꼬박 새었는데 죽지 않고 다들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살린 것이지,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면 나 먼저 살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것이다 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그 어떤 모든 덕목에도 제일 우선가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최우선시 돼야 하는 것이고, 사랑과 자비가 있었을 때 우리 삶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 칩시다. 암에 걸렸어요. 어떤 분들은 보니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하도록 시키기도 하던데요, 그렇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싸워가지고 전쟁으로써 적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보겠다는 마음이거든요. 암세포라는 것을 왜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암세포는 적이 아니에요. 그 세포 또한 중생입니다. 우리가 구제해야 할 중생 이예요. 암세포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 암세포가 바로 나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듯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암세포를 죽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암세포가 문제가 아니지요.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정적인 부분, 탁한 에너지, 어떤 악업 같은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암세포로 물질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원인은 나에게 있어요. 즉 내 안의 어떤 사랑이 아닌 부분, 자비가 아닌 부분, 지혜가 아닌 부분, 바로 그 부분이 세포를 기형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것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죽여 없애는 방법을 쓴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암세포, 종양 제거 수술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도 삶의 방식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본질적으로 그 병의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암이 재발하거나, 다른 부위로 재발하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의학의 기본개념이 어디가 아프면 그곳을 딱 잘라 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써는 온전한 치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암세포를 사랑하고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써 관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살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적으로 알아서는 안 돼요. 내 몸에 어디 안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로써 풀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면 그 어떤 문제도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이 발로가 되었다면 그 일은 망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나는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삶을 살아 나아가고 있는가, 사랑으로써 이웃을 대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지켜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비심으로 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모기 한 마리를 죽여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화난 마음으로 짜증스럽게 죽일 수도 있고, ‘네가 미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스레 살고 있구나,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여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고 염불하고 기도해 주고 어쩔 수 없이 죽인다면 그건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임입니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죽여선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거예요. 겉에 드러난 행위 이면의 의도가 ‘자비’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어요. 깨달은 자는 살생을 해도 그 중생을 살리는 살생을 할 수가 있지만 중생은 중생을 살리면서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행위 이면에 자비의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이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단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 그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자비심, 사랑의 마음, 그것을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근원에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춤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우주법계의 근원에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와 파장이 언제나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탁한 에너지 같은 것은 없어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아상으로, 아집으로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면,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연습하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우주법계의 근원과 연결이 됩니다. 그 순간 우주법계가 함께 기뻐하고, 우리를 돕게 됩니다. 그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를 두 손 모아 발원하고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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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