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의 단풍을 기다리며
지난 한 달 동안 세 번을 올랐지만
지난 주 순례 때 까지는
완연한 오색의 가을 단풍을 보기 힘들었다.

오늘은 공룡능선의 봉우리들 아래로
단풍옷이 곱게 물들어 있을 것을 기대하며
새벽 5시 40분 오색 출발.

손전등을 들고 한 30여 분 오르다보니
날이 밝아온다.
아직은 산 아래라 눈부신 단풍까지는 아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가는
나무들에 마음이 설레여 온다.


평일의 이른 새벽이지만
간간이 발길을 재촉하는 등산객들이 보인다.

날이 점차 밝아오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어느덧 달과 별님은 보이지 않고
밝아진 하늘을 배경으로 단풍나무가 조금씩 조금씩
물들어 가고 있는 선연한 풍경이 발걸음을 더욱 재촉한다.

오색 구간은 수해복구 공사가 많이 진척되어
눈에 띄게 나무와 돌계단이 늘었다.

철 계단이 늘어날 때의 풍경이
자연과 조화를 깨는 듯 다소 차가왔다면
그래도 나무와 나무 사이에 흙이나 돌을 끼워 맞춰 만들어 놓은 계단은
나름대로의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다양한 모양의 나무돌계단이
언뜻 보기에도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깔끔한 모습으로 오르는 내내 계속된다.

대청봉 바로 아래까지 오르니
아니나 다를까 이 이른 아침부터 나무와 돌을 깨고 맞춰가며
계단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다.

9시 즈음 드디어 대청봉 도착.

대청봉은 안개가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다.
속초나 동해바다는 커녕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가
새벽 일출때부터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이는 사진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계속된다.

중청산장에 내려 와 간단히 준비한 아침을 먹고
발걸음을 떼려는데 저기 희운각 산장 쪽 아래부분이
순간 구름이 걷히면서 잔잔히 보이기 시작한다.
공룡능선이나 다른 부분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아주 좋은 소식이다.

 
오늘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는데,
어제 밤 늦게 기상청 예보를 유심히 보았더니
오전 한 때 비가 오다가 오후부터는 갤 것이라고 하여 올랐더니
그래도 예감이 적중한 것일까.

하늘이 열릴 듯 말듯, 구름이 거칠 듯 말듯
길을 걷는 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중청봉 아래 봉정암이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가니
와~~ 하는 탄성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풍경...

 
잠깐 사이에 백담계곡과 봉정암 적멸보궁 사리탑,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특 트인 시야에 들어온다.

 

 
한동안 멍 하니 생기로운 마음으로 주저앉아 바라보는데
이제는 따스한 아침햇살까지 내 머리 위로 다가와 앉는다.

 
산과 구름의 향연.
산과 구름이 서로 밀고 당기며
이 설악의 당찬 풍광을 열어재끼고 있다.

 
봉정암 쪽인지, 소청산장 쪽인지
연신 헬기가 무언가를 백담사 쪽으로 실어나르고 있다.

 

 
옷맵시로 보아서는 젊은 사람 같은 멋쟁이 할아버님께서
사진기로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계시고,
방금 전 희운각 쪽에서 올라온 한 무리의 등산객들도
탄성을 지르며 연신 카메라를 터트리고 있다.

 
나도 이렇게 높은 산까지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처음에는 별 관심 없던 카메라가
이제는 여행의 길동무가 되고 있다.
오히려 때때로 사진이 감상보다 우선일 때가 있으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 작은 장비에 산에 오르는 목적이
전도되지는 않을까 싶은 우려아닌 우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핑계를 대자면,
어차피 글을 쓰고, 글로써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
글을 조금 더 생생하고 살아있게 해 주고,
글보다도 사진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분들도 계실 정도니
이것도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요 방편이겠다 싶기도 하다.

풍경이 아름답다고 언제까지고 바라보기만 할 수 없어
희운각 산장쪽 가파른 길로 발길을 옮긴다.

 

 

 
비로소 천불동 계곡 쪽과 공룡능선이 구름옷을 모두 벗고
그 거대한 풍광을 열어보이고 있다.

 
희운각 산장에 들러
잔치국수를 시켜 먹고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오늘은 하루 일정이라 버너, 코펠 등을 준비해 오지 못한 관계로
산장에서 군것질이나 하고 가자 싶었다가,
마침 잔치국수가 있다는 뜻하지 않았던 메뉴에
이 먼 산에서 해 주는 국수가 맛있기야 하겠냐 싶었는데,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꿀맛이다.

산 위에서 먹는 잔치국수.
국수를 말아 내어주시는 아주머님의 푸근함이
고스란히 국수에 전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룡능선으로 향한다.
설악산을 많이 와 보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공룡능선은 한 번도 가 보지를 못했다.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누군가가 공룡능선은 너무 험해 혼자서는 가면 안 된다고 했던
오래 전 말들이 오래도록 귓전에 맴 돈 탓이 크다.

 
그래도 오랫동안 벼르고 벼른 터라
설마 못 내려오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에
이번 만큼은 꼭 공룡능선을 타야겠다고 다짐하고 온 터다.

희운각 산장을 출발해 조금 걷다 보면
왼쪽으로는 마등령, 오른쪽으로는 소공원이란 표지판이 보이는데
왼쪽의 마등령 구간이 곧 설악의 꽃이라는 공룡능선이다.

 
첫 오르막 길을 암벽등산 하듯
새로 만들어 놓은 줄을 타고 오르며
한 2~30분 정도 오르니,
장쾌하게 펼쳐지는 대한민국 최고의 풍경이
나를 완전하게 압도한다.

 
아! 나는 여지껏 한국 땅에서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의 산하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이 가까운 곳에서 이 두 눈으로 확인한 것 같은
뜨거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른다.

 


 


빨리 가야 공룡능선을 타고 설악동까지
늦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거란
희운각 산장 아주머님의 말씀도 잊은 채,
한동안 나를 잊고, 길을 가는 것도 잊은 채,
그러고 한동안 이 소름끼치도록 경이로운 풍경 앞에서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 아름다운 능선을 이 두 발로, 이 온 몸으로 마주하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선택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인 것 처럼 느껴졌다.

아~ 나는 오늘 이렇게 설악의 또 다른 진면목을 보고,
이 대자연의 신비로움에 진한 연모를 느낀다.
이 능선 때문에라도 내 발길이
좀 더 자주 설악의 하늘 아래 서는 일이 많아질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지난 번 신문기사에서 오늘부터 이번 주말까지가
공룡능선까지 단풍이 내려오는 절정기라고 한 기사가 생각났다.
이번 주말 즈음이면 더욱 진하고 풍성한 단풍이 되겠지만
오히려 초록과 노오란 나뭇잎의 공존이 두 계절의 느낌을 일깨운다.

한참을 앉았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이 강렬한 봉우리 봉우리들을 이 두 발로 걸어
저 멀리 봉우리 너머로 보이는 마등령까지 간다는 사실에
설레임과 행복감이 밀려온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설악이 없고 공룡능선이 없었다면
자연이 만들어내는, 산이 만들어내는 솜씨가
이 정도일 수 있을거란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웅장하고 장대한 풍광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의 조화로운 솜씨를 그 어떤 예술가며 조각가가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걸으며 걸으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동스럽다.
생각은 언제나 감동을 헤아릴 수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

 
산이 좋아 산에 온 사람들이
이 봉우리 저 봉우리 위에서 행복을 만끽하듯 산을 만끽하고 있다.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만끽하는 것이듯,
산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느끼고 만끽하는 것이다.

햇살이 1275 봉우리와 나한봉을 지날 때 까지
어딘가에서 나타난 짙은 구름 뒤로 숨었다가
마등령 가까이 도착할 때 즈음 다시 나타났다.

 
봉우리 봉우리를 하나 하나 지날 때 마다
신선이 노니는 무릉도원 곳곳을
산책하듯 거니는 선인이 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마등령을 한 구간 남기고
짠한 햇살이 다시 내리쬐면서
하늘을 꽉 메우고 있던 구름이 흩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서로서로 각자의 길로 여행을 떠나려는가.

 
해는 이제 서쪽으로 기울고
부서지는 햇살이 더욱 부드럽고 찬란해졌다.

 
봉우리와 계곡들 사이로
산그림자가 어깨동무를 한다.

 
산빛도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부서지며
하늘도 지는 햇살을 아쉬워하듯 눈부시게 푸르다.

 

 
내려가는 길에 조금 어둠이 깔릴지라도
지는 해의 아쉬움이 이 산하에 뿌려내는
곱디고운 빛깔을 놓치기 싫어
이 마지막 봉우리에서 한없이 시간을 보내며 앉아 있다.

 
마음에 비친 산과의 대화,
지는 햇살과의 대화,
그리고 내 안의 나와의 대화가 시작되는 성스러운 시간.


아침 산 위에서 일출이 시작되면서부터 두세 시간,
그리고 이렇게 일몰 되기 직전 두세 시간,
사실 나는 이 소중한 시간을 진하게 느끼기 위해 산을 찾곤 한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하루에 완주해도 좋은 구간도
이틀, 삼일씩 산에서 밤을 보내는 계획으로 바꾸는 이유도
아마 그 연유 때문일 것이다.

이 시간들이야말로
내 안에 있는 광명의 태양을,
자연의 솜씨를, 야생의 경이로움을,
이 우주가 만들어내는 장엄한 연주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껴볼 수 있는 소중한 때다.

 
이 시간의 존재를 아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
이러한 시간의 기쁨을 함께 느낄 좋은 도반,
그 도반은 흡사 오래도록 선방 좌복 위에서 만난 도반의
그것과 뿌리를 같이 할 것이다.

해질 무렵,
하늘과 산과 햇살과 산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이 장엄한 연주를 들어보라.

이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무거운 침묵과 진한 외로움의 향기가
진리처럼 피어오른다.

 
흡사 부처님의 법신을, 하느님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교적인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나는 이 산 봉우리 위에 서서
내 안의 붓다를 내 안의 예수를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저 위 파아란 하늘이 더욱 푸른 물감을 풀어내고 있다.
파란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다.

 
저 멀리 봉우리 옆으로
속초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이제 내려갈 시간.
햇살이 비친 숲길을 걸어 아래로 아래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저녁 햇살을 머금은 단풍잎의 빛깔이 한층 생기롭다.

 

 
햇살을 받은 봉우리들도
이제 검은 옷을 갈아입고 잠이 들 준비를 하고 있다.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산 중턱에도 못 미쳤는데
어둠이 깔리고 있다.
마등령에서 아쉬움의 시간과
너무 오랜 데이트를 즐겼는가 보다.

 
그래도 행복하다.
이 어둠 속에서 내 안에 빛을 담고 간다.
설악의 가을이, 공룡능선의 인연이 선사 해 준
반짝 반짝 빛나는 잊혀지지 않을 추억의 빛을...




* 작년 정확히 이맘 때쯤
다녀온 공룡능선 산행기였습니다!!
이번 주말부터 시작하여, 다음주와 그 다음주 쯤,
공룡능선의 단풍은 완전한 절정에 달할 것입니다.
한 주 먼저 보시고, 올해는 더욱 아름답다고 하니,
꼭 다녀와 보시라고 조금 미리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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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군 서면 오색리 43-1 | 설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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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