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무법가득분
얻을 법이 없다


無法可得分 第二十二
須菩提 白佛言 世尊 佛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爲無所得耶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我於阿뇩多羅三먁三菩提 乃至無有少法可得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은 곧 얻으신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에서는 본래 얻을 법이 없음을 밝혔다. 금강경에서는 끊임없이 무아(無我)의 이치를 밝히고 있다.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 아님’의 이치,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바로 모든 수행자가 실천해 나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렇듯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바로 법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또 다시 그 법에 집착을 하게 된다. 법을 깨닫기 위해 애쓰게 되고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법을 깨달아 얻겠다는 그 생각까지도 모두 놓아버릴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얻을 법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은 곧 얻으신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것은 곧 앞서 말한대로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는 말이다.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얻으신 정각의 깨달음에 대해 그 또한 얻으신 바가 없는 것이 아닌가를 묻고 있다.

그동안 앞선 금강경의 가르침에서 본다면 복덕도 얻을 것이 본래 없고, 마음도 없고, 나도 없으며, 어떤 한 법도 없고, 부처님의 형상 또한 실체가 아닌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가 없이 다만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일 뿐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듯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바로 수보리 앞에 있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부처님께서 얻으신 정각의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얻은 바가 없다는 말인가?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은 우리들 범부 중생과는 다른 그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떤 ‘법’을 얻지 않고서야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우리들 생각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깨닫고 보니 구제해야 할 중생이 없다고 하셨다. 즉 이미 모든 존재는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보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부처요, 깨달음의 법신 그 자체인 것이다. 더 이상 깨닫기 위해 애쓰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완전한 생명을 부여받았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누구도 완전한 평화, 완전한 고요, 완전한 행복을 부여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수행을 해서 깨닫고 난 다음 얘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린 누구나 완전한 부처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 또다른 무슨 ‘법’을 얻고자 하겠는가. 이미 우리의 존재 자체가 법의 몸, 법신이요, 진리 그 자체일진데 또다시 법을 얻고자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 법도 얻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바로 그 한 법도 얻은 바가 없는 그 이치를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우린 이미 완전한 부처요, 완전히 텅 빈 대자유인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괴로움과 아픔, 질투와 외로움, 슬픔과 번뇌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미 부처라면 왜 우리는 이런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가. 그것은 모두 꿈과 같은 것이다. 꿈 속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배신당하고 슬퍼할 지라도 꿈을 깨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우리의 현실 또한 그대로 꿈인 것이다. 우리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픔의 실체이거나, 전적인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다만 꿈인 것이다. 꿈을 꾸고 있더라도 괴로울 땐 괴롭고 슬플 땐 슬프지 않는가. 그러나 그건 다만 꿈일 뿐, 실제로 아픈 것이 아니고 슬픔도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연극의 주인공과도 같다. 연극은 그야말로 연극일 뿐이 아닌가. 연극의 주인공이 슬프고 아픈 연기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 실제로 아픈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우리 또한 삶에서 나에게 주어진 연극을 잘 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린 저마다의 연극의 주인공이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중인공에 있는 것이다. 나를 깨달으면 곧 온 우주 법계를 깨닫는 것이니 어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찌 나라는 존재가 객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모두 주인공이요, 이 법계의 중심에 있다. 중심에 있으면서 변두리에 있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법계 그 자체요, 부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연히 스스로 집착하고 욕심을 일으켜 아파하고 괴로워하면서 왜 이렇게 인생은 괴로운 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스스로 욕심을 만들고 집착을 만드니 그로인해 괴로운 것인데, 스스로 그렇게 만들어 놓고 부처님께 행복하게 해 달라고 빈다고 그것이 행복해 질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행복했었다는 그 사실만 깨닫고, 욕심과 집착은 내가 허상이 실체인 줄 착각하여 만들어 낸 것인 줄 올바로 깨달으면 그 뿐이다.

어떤 한 이성에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라. 본래부터 내 여자, 내 남자가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본래부터 절대적인 내 여자, 내 남자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인연따라 이번 생에는 내 남편도, 내 아내도, 내 애인도 되는 것이고, 또 다음 생이나 전생에는 또다른 사람의 아내요 남편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던 사람이 이번 생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윤회를 하게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보통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이 다인 줄 알고, 그 사람만이 나의 인연인 것 같고, 그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고 못 살 것 같이 느끼지 않는가. 그러나 그 사람과의 사랑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서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또 어떤가. 옛 사랑은 잊혀지고 또 다른 사랑이 시작되지 않는가. 물론 여전히 전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여전히 괴로울 것이지만. 그 애착과 집착만 끊어버리면 또 다른 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고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의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에 대한 집착이고 애착이다. 즉 사랑하는 사람을 ‘내 것’, ‘내 여자’ ‘내 남자’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다. 그건 누가 만들었는가. 본래부터 고정되게 나에게 있어왔는가. 그렇지 않다. 내 스스로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랑하는 감정, 애착의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놓고는 헤어지게 되었다고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으니 그 원인도 나에게 있고 그 해답 또한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붙잡아 내 것으로 하고자 애착을 내었으니 붙잡은 그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도 나인 것이다. 그걸 어찌 부처님께서 대신해 줄 수 있겠는가. 그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 마음 내 스스로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방하착, 그 집착을 놓을 수 있어야 내 마음의 괴로움도 녹아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으면 나만 괴롭다. 때로는 그 괴로운 마음, 질투의 마음이 생각지 못한 무서운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지 않은가. 못 이룬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떠나갔다는 이유로 해치려 하지를 않나, 그 모두가 스스로 한 사람을 택해 집착을 하면서 그 사람을 ‘내 사랑’으로 붙잡아두려는 마음에서 시작된 불행이다. 그러니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사람도 나 자신일 뿐이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그렇게 해서 마음에 집착과 애착을 놓아서 다시 편안해 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괴로움을 없앤 것인가. 물론 없앤 것이기는 하지만, 본래부터 없던 괴로움을 제 스스로 만들었다가 그 괴로움에 스스로 아파하다가 다시 그 괴로움을 놓아버린 것이 집착이 본래부터 없던 사람이 보기에는 참 공연한 일을 벌인 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공연히 제 스스로 집착하고 그로인해 아파하고 다시 그것을 놓아버린 것이니 아무 일 없는 사람에게는, 집착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이 얼마나 번거롭고 복잡한 일을 꾸민 것이 되겠는가.

그래서 이 세상의 본래 모습은, ‘아무 일 없다’는 것이다. 본래 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다. 다만 이 세상에 이처럼 수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은 공연히 스스로 붙잡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일조차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다 놓아버려야 할 것들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본래 고요하다. 아무 일도 없다. 괴로움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괴로움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신기루처럼, 환상처럼, 제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내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내 것이 안 되니 괴로워하고, 혹은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 잠시 기뻐하다가, 언젠가 다시금 그 집착의 대상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 낸 집착의 대상은 어떤 것도 예외없이 모두 언젠가는 소멸되고 만다.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고 마는 것들이다. 항상하지 않아 제행무상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어 제법무아이며, 그렇게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으므로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모두 괴로움인 것이다. 즉 일체개고인 것이다. 그러나 항상하지 않아 실체가 없는 줄 올바로 알아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가 텅 빈 고요함이요 열반적정의 순간인 것이다. 즉,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기 때문에 무집착하고 이미 집착한 것은 방하착하면 그것이 바로 열반적정의 깨달음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께서 깨달은 어떤 법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집착을 만들어 내지 않으셨다. 스스로 ‘나다’하는 아상을 만들지 않았으며, ‘내 것’이라는 소유의 아집을 일으키지 않으셨다. 스스로 집착과 애착, 욕심과 번뇌를 만들지 않았는데 다시 놓을 것이 무엇인가. 다시 놓을 것도 없고, 집착을 버릴 것도 없으며, 아상을 버릴 것도 없고, 다시 내 어리석음을 없앨 것도 없다. 이미 처음부터 텅 비었고, 고요했으며, 열반적정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법을 별도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같이 사실은, 본질에 있어서는 우리들 또한 이미 깨달아 있다. 이미 텅 비어있고, 고요하며, 열반적정에 머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낸 꿈같고 공연한 집착만 놓아버리면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의 본래 생명자리인 불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귀의(歸依)다. 돌아가 의지함이다. 불법승 삼보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이 의미다.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며, 청정한 수행자에게 귀의한다는 것은 내 안의 자성부처님께 돌아가고, 내 안의 이미 구족되있고 충만한 가르침에 돌아가 의지하며, 내 안의 자성청정한 수행자의 성품으로 돌아가 의지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사실은 돌아갈 것도 없다. 온 곳이 없으니 갈 곳도 없다는 말이다. 다시 갈 곳도 없고, 다시 깨달을 것도 없이 다만 알면 된다. 내가 공연히 집착하여 잡고 있었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만 자각하면 된다. 공연한 집착과 착각, 이것을 무명, 즉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무명만을 없애면 본래 밝은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듯 깨달음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는 것이다.



Posted by 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