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메이트, 내 안에 누군가가 산다!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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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바디메이트, 내 안에 누군가가 산다!

목탁 소리 2009. 8. 29.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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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순례하다가
우연히 한 불교성지의 사원에서
30대 쯤 되어 보이는 한 한국남자분을 만나
며칠 동안 동행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나 또한 한국인을 거의 만난적이 없던 터라
워낙 반가워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하루 이틀이 계속되면서 이 사람에 대한 단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말이 많다는 점인데,
말이 그냥 적당히 많은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옆에서 한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다.
특별히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별 의미 없는 말들을 끊임없이 늘어 놓는 것이다.

인도 성지를 돌아보며 감상을 할라치면
어김없이 곁에서 나도 뻔히 보고 있는 눈앞의 모습을
곁에서 생중계를 하듯이 하나 하나 중계방송을 해 주는게 아닌가.
그것도 자신의 생각을 개입시켜서는
저것이 옳으니 그르니, 맞으니 틀리니 하면서,
인도는 저래서 안 된다느니
자신 같으면 저렇게 살지 않겠다느니 하면서
한 숨도 쉬지 않고 입과 생각이 분주하게 들썩거리곤 했다.

아마도 이런 경우를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좀처럼 느끼기 어려우리라.
그나마 며칠 다니다가 나의 희말라야 순례 일정 때문에
일정이 달라 헤어졌으니 망정이지
그 사람과 그 오랜 순례의 일정을 만약 함께 했었더라면
정말 그 여행이 어떠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떤가. 이런 친구.
이런 벗과 24시간을 함께 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아니 이런 친구와 평생을 함께 살면서
그 끝도 없는 소리의 홍수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면 또 어떨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참다 참다 못해 폭발해 버리던가,
한바탕 그 친구와 싸움과 전쟁도 불사할지 모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자.
여기 당신이 우려하던 바로 그 상황이 놓여있다.

끊임없이 떠들고, 재잘대고, 수다를 떨며
단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흡사 정신병자 같은
그런 친구와 우리는 사실 함께 살고 있다.
그것도 일평생을, 매 순간 순간을 그와 함께 살고 있다.

한 방을 함께 쓰는 룸메이트 정도가 아니라,
나와 일평생 동안 한 몸을 함께 쓰고 있는 바디메이트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친구가 누굴까?
그 친구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이다.
우리 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목소리다.

이 생각은
도무지 조용히 하려 하지 않는다.
단 한 순간도 고요히 있지 못하고 떠들어댄다.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를 계속해서 불쑥 불쑥 내던진다.
심지어 참선을 하려고, 생각을 중지하려고
가부좌를 틀고 선방이나 명상센터에 앉아 있는
바로 그 고도의 집중된 순간에조차
어김없이 우리의 고요함의 의지를 무참히 짓밟고 올라올 정도다.

이처럼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모든 세상을 끊임없이 설명한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모든 대상과 상황과 일들을
하나 하나 매 순간 해설하고 설명하며 분별하고 판단한다.

흡사 야구 중계나 축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 듯
우리 내면에는 이 세상의 현실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세세히 설명해주는 현실 캐스터, 중계 해설가가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운동경기 중계방송을 보면 어떤가.
캐스터와 해설가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경기 내내 말한다.
아니 마치 한 순간도 빈 공간의 침묵이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우리가 보는 경기의 모든 장면을 해설해주고 중계해 준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마치 중요한 운동경기의 한 장면이라도 되는 듯,
우리 내면의 생각이라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매 순간의 현실들을 하나하나 해설해 주곤 한다.

그런데 더 당황스러운 것 한 가지는
이런 내면의 목소리가 해 주는 중계해설이
그다지 믿을만 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온갖 생각, 판단, 가치관, 과거 등에 걸러서
자기 식대로 판단함으로써 색안경에 걸러진 것만을 말하는 습성이 있다.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해설해 주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완전히 오판해서 해석하며,
자기 틀에 갇혀서 판단하고,
때때로 전혀 다른 해설로 사람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도 다반사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거의 모든 생각들이 뜬금없고, 논리도 없으며, 체계적이지도 않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불쑥 튀어나올 뿐이다.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이러한 세상에 대한 ‘해석자’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그들은 그 해석자가 뇌의 왼쪽 대뇌반구에 있는 것으로
그 이야기는 진실을 왜곡하며 신뢰하기 힘든 특성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온갖 이야기를 제멋대로 지어내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최근 주목받는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왼쪽 대뇌반구는
진실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내는 경향이 있다.”
또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왼쪽 뇌는 자기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음을
자기 자신과 당신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해석자는 개인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자기에게 거짓말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은
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꾸며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지극히 합리적이며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조차
사실은 자기만의 생각을 지어내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심지어 프리브램 같은 신경생리학자는
원숭이가 받아들이는 시각정보가 시각피질로 바로 보내지는게 아니라
두뇌의 다른 영역을 거쳐 일단 여과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이는 인간도 마찬가지임이 증명되었고,
심지어 어떤 연구에서는 우리가 보는 내용의
50% 이상은 실제로 눈으로 들어온 정보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바람과 기대로부터 짜깁기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현실을 눈으로 분명히 보았다고 할지라도
사실 50% 이상은,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말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조차
사실은 반 이상이 왜곡된 정보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생각이나 기대가 분명히 눈으로 본 것조차
왜곡시키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히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똑똑히 본 그 정보 조차 반 이상 왜곡되어 입력될진데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라는 내면의 소리는
얼마나 그 과장과 거짓이 심할지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이처럼 우리 내면에서 우리가 접하는 세계를 설명해주는
그 생각이라는 목소리는
우리가 경험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는게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던 모든 생각, 관념, 과거, 편견 등과 뒤섞인 채
한없이 왜곡된 설명만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그 말에는 무슨 근거도 없고,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으며
그냥 마구마구 짓거려 댄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정도다.
아무런 일관성도 없이 이랬다 저랬다를 반복한다.
그야말로 정신불열증 환자와도 같이 무엇이든 내뱉는다.

책을 읽으려고 앉아 있으면 내면의 생각은 말한다.
‘그 책 말고 다른 책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아니다. 그 책이 더 낫겠다.
아니야 그래도 지난번 누가 추천해 준 책 있잖아, 그걸 읽어보는게 어때?
아니다 아니다 지금 그 책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무언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참, 그런데 너 지금 이렇게 한가히 책이나 읽고 있을 때야?
해야 할 일이 하나 둘이 아니잖아. 빨래는 했어? 설거지는?
청소나 다 하고 나서 책 보는게 어때?
아니야 그러다가는 책도 못 보겠다. 몇 쪽이라도 읽고 해.
아니야 그러면 남편 퇴근하면 한 소리 할꺼야. 아니야 책 봐.
아이 어쩌지.’

도대체 끝도 없이 해결나지 않는 생각들이
이랬다 저랬다 왔다갔다 강박적으로 반복하며 끊임없이 올라온다.
말 그대로 그런 생각들에는 결론도 없고 진실도 없다.
그저 끊임없는 지껄임만 있을 뿐.

하루 남편이 밤 늦도록 안들어오고 전화도 안 받으면
내면의 목소리는 말한다.
‘남편이 왜 이리 늦지? 사고라도 난 거 아니야?
혹시 교통사고로 죽은 건 아니겠지? 아닐꺼야.
전화 밧데리가 나갔겠지. 아니야 그러면 빌려서라도 전화할텐데.
술 잔뜩 먹고 취해서 오다가 길에서 쓰러져 자나?
그렇다면 쓰러져 있는 남편이 차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쩌지?
아니면, 예전에 빨래 하다가 나온 루즈자국이 있었잖아?
혹시 이놈이 다른 여자하고 바람 피고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럴 위인도 못돼! 그러면 왜 이리 늦는거지?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아, 몰라몰라 복잡해...’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남편이 그저 늦게 오는 것일 뿐이다.
분명한 진실은 그저 단순하게 늦고 있다는 사실 하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의 생각은 끊임없이 속삭이며
남편을 살리고 죽이기를 반복하고,
교통사고에 바람 피는 사람으로까지 몰고 가며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 심장은 두근두근 발작을 일으키곤 한다.

우리는 이처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 안에 있던 과거와 경험과 편견 등을 덮씌운 채
내 식대로 왜곡하고 해석해서 괴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짜 현실’이 아니라
‘내 식대로 해석하고 왜곡한 자기만의 가짜 현실’인 셈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내 식대로 창조해 놓은 가짜의 현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을
내 방식대로 재창조 해서
그렇게 내가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내가 그런 왜곡된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냈고,
그런 왜곡된 세상, 거짓된 세상,
항상 문제가 끊이지 않는 세상 속에 스스로 갇힌 채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
내 스스로 그 문제 속에 빠진 채
그 문제를 뚫고 나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처에게 신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저만치 밀쳐버린 채
내 안에 진실과는 전혀 다른 거짓 세상을 창조해 놓고,
그 왜곡된 모조품 같은 세상에 갇혀 사는 꼴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인 것이다.

그렇게 저마다 자기 안에 자기 세상을 새롭게 건립한다.
그런데 왜 그런 모순적인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지 아는가?

앞에서 언급했던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 교수인
신경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의 말을 다시한번 짚어 보자.
“왼쪽 뇌는 자기가 완전히 통제하고 있음을
자기 자신과 당신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해석자는 개인의 이야기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자기에게 거짓말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그렇게 거짓된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그 세계에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온갖 거짓된 노력을 계속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내 밖에 있는 이 현실세계를 내 맘대로 통제할 수 없다.
세상의 일들은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내 마음은 통제가 쉽다.
즉 내 마음 속에 만들어 놓은 내 세상은 훨씬 통제하기 쉬운 것이다.
그럼으로써 무언가 ‘나’라는 존재감의 확장을 경험하게 되고,
아상을 충족시키게 되며
이 세상에서 나의 힘을 드러낼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작해야 내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내 세상을,
즉 신기루같은 세상의 가짜 모조품을 통제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실은 내가 만든 세상 조차
내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다.
바깥 세상보다 조금 더 쉽다고 느끼는 것일 뿐이지.

이처럼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세상에 살고 있고,
저마다 세상을 보는 필터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은 하나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수준, 전혀 다른 근기와
또한 전혀 다른 영적 차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조품을 근사하게 만들수는 있어도
그것 또한 내 안에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저 내 프리즘에 맺힌 상일 뿐인 것이요,
내 눈에만 보이는 신기루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에게 생겨나는 모든 문제는
사실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내 생각이 만들어낸 거짓된 구조물이요,
마음의 헛된 소란일 뿐이다.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가만히 있는 세상을 대상으로
내 안에서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문제를 양산해 내고
그래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아파하며
이 한 생을 허망하게 보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내면의 생각이라는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허망한 조작과 소란스런 창조 작업을 중지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그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면 된다.
신경 쓰지 말고, 마음 쓰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 내면의 목소리가
‘나’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면의 목소리가 ‘나’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저 거기에서 무슨 소리가 끊임없이 지껄이고 있을 뿐이다.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다 보면
때때로 매우 이기적이거나,
심지어 ‘어떻게 내가 이런 나쁜 생각을 할 수 있지!’
하며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생각들이 올라오기도 한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나쁜 놈이었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내가 이런 형편없는 사람이었나!’
하며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은 내가 아니다.
분명히 알라. 그 생각은 내가 아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그 생각이 나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바로 ‘그 생각을 지켜보는 자’다.

그 생각을 지켜보는 자가 나라면
그 생각을 지켜보는 자, 즉 나는 누구인가?
그것을 찾는 것이 바로 ‘이뭣고’ 화두다.
그것을 찾는 것이 바로 우리의 수행이다.

그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까?
내면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요히 앉아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면
그 소리는 힘을 잃는다.
점차 말을 잃고 침묵한다.

지켜보지 못할 때,
깨어있지 못할 때,
욕심과 집착과 화와 번뇌가 많을 때
그 생각은 엄청난 힘을 얻어 끊임없이 날뛴다.

아상이 확장될 때
그 생각은 더욱 더 많아진다.
그러면서 생각이 나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한다.
올라오는 생각 하나하나에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지켜볼 때,
주의력 있게 관찰할 때,
그 생각은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한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온갖 생각들을,
온갖 내면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하라.

왜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이 몸을 함께 쓰고 사는
이 생각이라는 바디메이트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이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그 녀석의 꿍꿍이에 속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껏 그 생각이라는 녀석이
온갖 목소리를 지어내며 나를 조종하고
내 안에 거짓된 세상을 창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렇게 함으로써 나를 휘두르고 주인 행세를 해 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저 힘없이 휘둘려 오기만 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할 때다.
분명히 알았다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 내면의 목소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명히 알려면 두 눈 멀쩡히 뜨고 그가 하는 짓을
똑똑하게 지켜봐야 한다.

조금만 게으르게 방일하거나, 졸게 되면
어김없이 이 생각은 그 잠깐의 틈도 놓치지 않고
치고 올라온다.

그래서 매 순간 깨어있으라,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지켜보라고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할 필요는 없다.
올라오는 생각을 올라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고,
올라오는 생각을 대상으로 싸워 이기려 할 것도 없고,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다만 분별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이다.

지켜봄으로써
생각과 생각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나고,
그 공간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내면은 점차 고요함과 사랑과
번뜩이는 지혜로 물결치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사랑과 지혜야말로
이 우주의 본질이고,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며,
세상의 모든 성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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