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 조화로운 삶 - 연기법의 생활실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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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 조화로운 삶 - 연기법의 생활실천(5)

목탁 소리 2009. 8. 2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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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개발과 발전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시대에서, 또 온갖 기상이변과 환경적 문제들이 전 세계적으로 재앙적인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때에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의 연기법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현재의 이러한 환경 문제의 바탕에는 유대 기독교적인 자연관과 근대 기계론적인 자연관이 그 배경이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는 사이언스에 게재한 그의 논문에서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즉, 자연과는 달리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유대 기독교의 교리가 인간은 자연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우월감을 낳았고, 나아가 인간은 신으로부터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야말로 가장 인간 중심적인 종교이며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소외와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프란시스 쉐퍼는 창세기 제1장 28절의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다스려라”에서 보이듯이, 기독교는 고대의 이교와 아시아의 종교들과는 달리 대조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고 역설했다.

또한 과학혁명을 주도한 17세기의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을 완전히 기계화된 대상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이,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에 의해서 체계화된 기계론적 자연관은 근대 이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철저히 이원론적으로 규정하고 근대 과학문명을 산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철학 제1원리로 삼았던 방법적 회의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유추해 보면 인간은 생각하고 사유하기 때문에 단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물질과 자연과는 분명하게 분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자연은 생명이 없는 기계이기 때문에 생명을 갖는 인간이 그 기계의 조합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일은 오히려 인간의 우월성을 표현해 주는 일이 되고, 자연을 파헤쳐 가공하는 데에 그 어떤 주저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베이컨은 과학의 목적은 인간의 이익 증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을 거친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과 기술과 과학은 오늘날 인간에게 봉사토록 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는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유대 기독교적 자연관과 기계론적 자연관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라는 윤리를 정당화시키는 배경의 사상이 되고 있다.

조금은 장황하게 살펴 보았는데, 현재의 온갖 환경문제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는 일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현대의 환경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현대의 환경문제와 기상이변 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따라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대 기독교적 자연관이나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와 가공과 훼손을 정당화 해 주는 사상적인 배경이 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전해 온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의 발달, 도시화 등은 이제 온갖 문제를 양산해 내고 있음이 분명해 졌다. 온갖 환경위기와 기상이변을 가져왔고, 우리의 몸을 이루고 지구를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四大)의 오염을 가져왔다. 지대(地大)와 관련하여 토양오염과 토지사막화를, 수대(水大)는 수질오염과 물부족 문제를, 화대(火大)에서는 에너지오염과 오존층 파괴, 지구온난화와 그로인한 각종의 기상이변을, 풍대(風大)는 대기오염과 황사 등의 문제를 가져왔다. 그로인해 전 지구가 앓고 있으며,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이 앓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해졌다.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작금의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없다. 현재의 재앙적인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은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요,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니며, 신과 인간, 붓다와 인간, 그리고 나와 너,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이 둘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보살펴주는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존중하는 동체대비의 존재로써 다르지 않다는 자각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과 자연, 또 이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이 재각기 떨어져 있는 이원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한 때다. 그러한 사상이 바로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적이고 상의상관적인 가르침 안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소외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없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곧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동체적이고 상의상관적인 지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연기법에 의하면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모든 것과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이 소멸된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바로 그 행위가 곧 인간이 인간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실천은 자연과의 공존이요 교감이고, 자연의 변화에 맞춰 함께 따라 흐르는 조화로운 삶이요 친환경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연이야말로 부처님 진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는 진리의 세계 곧 법계(法系)다.

‘자연(自然)’이라는 이 한마디 말 속에 온 우주의 진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연을 다른 말로 무위(無爲)라고 풀어 쓸 수 있다. 함이 없이 행하는 것, 머무는 바 없이 행하는 것, 집착 없이 행하는 것,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요 진리를 따르는 삶이다.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위로써 자연으로써 저마다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자연스럽게 온 우주의 다르마적 장엄한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말 속에는 생명 있고 없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다 포함되며 그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자연스럽게, 진리답게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꽃피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답게 피어남으로써 온 우주의 장엄한 오케스트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제각기 모든 존재들이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요, 서로 다른 모양이며, 서로 다른 삶의 모습으로써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부딪치거나, 다투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꽃피움으로써 우주적인 조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자연은 독자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며, 자신만의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주적인 조화와 공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자연의 일부분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참된 아름다움, 참된 지혜로움의 온전하고도 평화로운 깨끗한 땅, 정토(淨土)를 이루는 것이다.

예로부터 절들이 산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 자연과 대화하며, 우거진 숲에서 법신의 조화를 보고, 지저귀는 새소리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다는 것이 모두 자연과의 공존과 교감을 통한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노래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 수행을 실천하며, 마음을 비우고 번뇌와 욕망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되면 저절로 자연에 대한 찬탄과 경외의 탄성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온갖 때와 집착을 비우면 그 텅 빈 공간에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가 깃든다.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욕심과 명예는 더 이상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내 공부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는가를 보려면 산과 숲과 나무와 꽃들이 내 안에서도 아름답게 만개하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이 청명한 자연과 숲과 하늘과 바람이 내 존재 위를 보드랍게 스치우며 진리의 소식을 항시 전해주고 있다. 그 소식을 들으며 자연과의 조화와 교감과 공존과 공명을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벗이요 좋은 도반이다.

계절의 변화에 깊숙이 교감하라. 자연의 소리에 내면의 소리가 공명하는 것을 지켜보라.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계곡의 물소리와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가 내게 전해주는 진리의 소식에 흠뻑 젖어들라.

겨울 들녘을 뚫고 올라오는 봄꽃 한 송이에서, 봄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수액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수런 수런 녹빛의 여름 숲 속에서, 쏟아지는 가을 밤의 별빛 아래에서, 한 여름을 아름답게 수놓고 막바지 생명을 불태우는 가을 단풍나무 아래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텅 빔으로 돌아가는 겨울 숲 속에서 자연불(自然佛)이 내리는 준엄한 법문을 들으라.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말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함부로 꺾지 말라.

자연의 모든 생명과 공존하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를 때 내가 곧 자연이 되고, 내가 곧 연기(緣起)가 되며, 내가 곧 진리였음이 소리 없이 찾아 들 것이다.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님을 알며, 자연의 소리 없는 법문을 듣는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며 사는 수행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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